묵상2013. 10. 25. 08:25

고린도전서 7장은 엄밀히 말해서 바울 자신의 결혼관과 가정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울 자신의 관점이라는 거죠. 한마디로 얘기하면 결혼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미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전제는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의견이고 그에 따른 권면이라는 겁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라 하여 자신의 의견이라 선을 긋습니다.

즉,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단순한 권면이며 목회적 권고에 가깝다는 겁니다.

바울 자신이 미혼으로 살았기에 이런 권고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자로서 가족에게 봉사하며 생기는 수고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웠을 겁니다.

그의 표현대로 세상 일에 대한 염려가 훨씬 줄었고,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자식들을 섬겨야 하는 쓸데 없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에서 그런 생활방식(life style)이 매우 맘에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결혼한 제가 바울이었다면 또 다른 권면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결혼생활하면서 어떻게 성화되어 가며 어떻게 치열하게 주님과 가족을 위해 성숙되어 가는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권면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바울의 의견 중에 하나야~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목적을 담고 있었기에 성경의 한 부분으로 고린도전서 7장에 실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여기서 고민해 볼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미혼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미혼(未婚)이란 용어는 결혼(結婚)이라는 목적과 정상적이고 완성된 삶의 형태를 기준으로 결핍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혼이 정상이고 결혼하지 않는 것은 뭔가 모자라고 아직 목적에 다다르지 못한 상태라는, 결혼중심문화에서 나온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노총각에 찌질이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남자가 결혼을 못했으면 아니 안했어도 그는 무능력해서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한마디로 찌질이란 것이죠.

여성은 어떻습니까? 여성이 결혼안하는 것은 이기적이어서 그렇고, 까져서 그렇고, 책임감이 없어서 그렇다고 치부합니다.

이것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압박감이며 폭력이기까지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미혼이란 말은 너무 폭력적인 말이죠.

그들은 명절 때면 언제까지 "너 언제 결혼할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요즘 미혼이 아닌 "비혼(非婚)"이라는 용어로 바꾸자는 의견들이 학계에서 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찬성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의 상태가 결핍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고 아픔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나름의 목표가 있는 것일 수 있기에 존중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뭔가 결핍됐다는 느낌과 의미의 미혼보다 비혼이란 표현을 우리도 써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홀로서기를 결심했던 바울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이 시대에 그런 이유에 의해 혼자 살아가는 비혼자들이 존중받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히려 고결한 부르심에 순응하는 아름다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2. 가톨릭 사제가 아닌 목사로 살아가는 기쁨??!!

저는 바울이 결혼했다면 고린도전서 7장이 조금은 다른 흐름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가 아니라 '어떻게하면 결혼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내용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가톨릭 사제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부양할 가족도 없고, 그에 반해 기독교 목사보다 훨씬 높은 사례와 존경을 몸소 받으니까요.

그만큼 의무와 책임이 개신교의 목사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겠죠. 한마디로 그들은 자유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부러움은 극히 적은 것이고 결국 안타깝고 짠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됩니다.

그들의 비혼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선택이 강요된 것이라면 참 슬프고 짠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정을 이루면서 누리는 귀한 것들을 누릴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가족을 섬기면서 '성화'되어가는 필수 코스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저는 감히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결혼생활하면서 아내와의 공동생활과 아이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저의 밑바닥을 경험합니다.

제가 얼마나 모자라고 부족한 자인지를 가정이란 공동체 생활을 통해 깨닫고 변화시키려고 몸부림 칩니다.

이것은 가정을 꾸린자만이 누리는 성화의 유익이라 생각합니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섬겨가는 이중고를 감내하면서 이루는 사역의 열매와 인격의 변화는 싱글 사제의 그것보다 훨씬 값지고 귀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개신교 목사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

훨씬 하나님께 집중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더 고수라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을까요?

정말 영적인 고수가 되고 싶습니다. 가정을 잘 꾸리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리하면 결혼했든 결혼하지 않았든,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비혼이든 결혼이든 그 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닮아가며 하나님을 알리는 데 사용된다면 뭐든 좋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비혼자들에게 색안경을 끼고 다가가지 않길 바랍니다^^

굿모닝입니다.


김경헌 목사 올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0. 21. 06:10
<당신은 섬띵(something)입니까? 낫띵(nothing)입니까? -고전 3장 묵상>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주목받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을 전합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 세워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져가며 자라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이 주목 받게 하는 것과, 그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과 라인이 생기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듭니다.
첫째는 심는이와 자라게하는 이의 비유이며, 둘째는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 모두, 자라게하고 세워가게 하는 분이신 하나님이 중요하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목받고 사람이 높임 받는 것을 절대 경계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9절)"


이 성경구절을 오늘날의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염산교회식으로 고쳐서 쓴다면 이정도가 되겠죠.
오신주 목사님은 심었고, 김종익 목사님은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경헌 목사는 북돋기를 하였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이나 북돋는 자나 나름의 수고와 기능을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이죠.
그들은 일꾼에 불과하고 종에 불과합니다. 
이 일꾼들이 부각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 일꾼들은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하나님으로부터 샘하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 주목을 받아야 하고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21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며 종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오늘 저의 심령을 심하게 두드려 팹니다.
제 마음 깊은 곳 안에 내가 주목 받고 싶고 내가 부각되고 싶고 내 사역이 칭찬받고 싶어하는 철저히 나 중심의 사역과 사고가 존재하는 것을 보고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상 문자를 보내는 것이 내 이름을 내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잖느냐를 나타내기 위한 불순한 동기가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 내 안에 순수한 동기가 회복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쓰러진 성도가 세워지는 것 자체가 순수한 기쁨이고 사역의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인데 사람을 두고 자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 한심한 저를 보게 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마음이 저를 칩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낫띵(nothing)이라는 거죠.
그런데 저는 썸띵(something)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고 내가 부각되고 싶어합니다.
주님은 섬씽이고 나는 낫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 순수한 동기와 목적이 내 안에 다시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즉 김경헌은 무엇이며 천지은은 무엇이냐?
본인의 이름을 넣어 읊어 보시죠. "그런즉 OOO는 무엇이냐?"
무엇입니까? 썸띵입니까? 낫띵입니까? 오늘 그 답을 찾고 고백하는 시간 되십시오.
어제 설교 본문처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참으로 이런 겸손과 자기가림의 완덕이 내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침입니다.
굿모닝입니다. 좋은 한 주 되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0. 16. 21:39

<누가 당신을 시엄씨로 세웠습니까? -로마서 14장>

로마서 14장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음식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 비판하며 판단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모두가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가 다르고 먹고 입어온 문화가 다르기에 서로의 행동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어떤 공동체나 마찬가지죠. 

저는 남도에서 자라왔고, 남도의 음식문화에 길들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남도 음식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제 기준에 서울 김치가 젖갈도 적게 들어가고 매운 맛과 강렬한 맛이 떨어지더라도 서울 사람들이 느끼기엔 서울 김치가 너무 맛있는 거죠. 서울 분이신 장모님이 담궈 주신 김치를 한 때 입에 안 댄적도 있었죠. 하지만 아내는 그 김치를 너무 좋아 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김치가 이게 뭐야~ 어떻게 먹어?"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름(different)과 틀림(wrong, incorrect)이 확실이 구분돼야 하는 거죠. 다른 거지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인정할 때 공동체는 세워져 갑니다. 

"3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4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13장3-4절)"

심판하고 제단할 권리는 주인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고 심판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자빠져서 떡을 먹든 누워서 떡을 먹든 우리가 관여할 바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다른 이를 향해 시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 형제 자매의 시엄씨로 세운 겁니까? 누가요?
그가 누워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서 있게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공동체(교회든 가정이든 동아리든) 구성원이 모두 한 방향과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는지 그 양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다음 말씀이 그걸 나타내 줍니다.
"7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목적이 중요하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느냐는 주님이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 사랑방에서는, 우리 가정에서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누구의 종이냐?'를 따져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와 서로의 성장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두었으면 합니다. 제발 행동양식을 가지고 시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심판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주님을 위해 시어머니가 되는 걸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가정에서 저는 이것을 철저히
적용해 볼랍니다. 난 아내의 시엄씨가 아닙니다^^ 
19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20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음식 때문에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아멘~ 

참고로 시엄씨는 전라도 사투리로 '시어머니'라는 뜻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0. 13. 22:07

요즘 내가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들이다.


1. 깨달음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감사한 건, 늘 새로운 깨달음 하나씩을 얻는다.

매일 하나 이상 깨달음(覺)이 있으면 좋겠다.

"야~ 너 그거 욕심이야" 그래도 상관 없다. 

이런 욕심은 좀 있으면 좋겠다.

주여 아침마다 학자와 같이 알아 듣고, 학자처럼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세요.


2. 경건함(godliness)

경건은 힘써서 얻어 내는 것이다.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 하지 않았던가?

주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달려가기 보다

LA Dodgers 게임 결과가 더 궁금해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며

심각함을 감지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묵상 도중 결국 헛된 욕심이 나를 망가뜨려 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된 욕심이다. 쓸모가 없는 것에 집착하고 목숨거는 어리석음이다.

무익한 것들 붙들어 무엇하리...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붙드는 자가 지혜로운 자 아닌가?

그래도 감사한 건, 빨간 불 들어올 때, 감지하고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이다.


3. 도취

난 선천적으로 도취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다.

호기심이 산재해 있어 동시에 여러가지에 관심을 갖고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기에 뭔가에 몰두하거나 몰입하는 경우란 드물다.

요걸 고쳐보려고 많이 노력해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욕심이 난다.

말씀에 도취되어 그 말씀을 전하는 것에 도취되고 싶다.

공부하는 것에도 몰입하여 열정을 불태워 보고 싶고 그 도취되어 얻는 깨달음들로 가르쳐 보고도 싶다.

평생 끊임 없이 진리를 향해 목말라 하고 그 진리를 탐구하고 행하는 것에 함몰되어 허우적대보고 싶다.

아~ 진리를 향한 끝없는 목마름과 그 진리를 선포하는 끝없는 열정이 나를 사로잡았으면 좋겠다.


4. 사람이 답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담지자다.

쉬운 말로 그릇이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를 퍼 나르는 도구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 하나 잘 키워 놓면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이다.

너무 유치해서 비교를 안하려 했는데.... 당연한 것이 간과되는 것 같아 언급한다.

제대로 된 교회 건축물 하나 만들어 낸다고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건축물 하나로 하나님의 영이 활발히 운동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벽돌에는 수 백억 쏟아 붓는 사람들이 사람에게는 백만원 쏟아 붓는 것도 아까워 한다.

벽돌 굽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 시킨 것은 다름 아닌 모세라는 한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대안이다.

간디라는 한 사람 때문에 사람들이 인도에 매력을 갖고, 인도로 향하지 않는가?

사람이 답이다. 

제가 한 번 해볼게요~ 하나님 마음 아니까~ ㅎㅎ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0. 1. 21:13

<바람 불어도 좋아 - 행 27장>


2주전에 "바람 불어도 좋아"라는 책을 샀습니다. 

아내가 셋째를 난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병 수발을 하며 새로운 믿음의 삶을 경험하게 된 목사님의 수필집이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삶에 불어 닥친 예상치 못한 시험이었죠.

그런데 그 바람으로 오히려 하나님과 친밀해져 가며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도 믿음의 사람 바울은 큰 광풍인 '유로굴라'를 만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로마로 가는 여정 또한 하나님이 계획 하신 것이었는데, 왜 광풍이 불어 닥치는 것인가요?

이것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서도 동일하게 갖는 의문입니다.

난 신실하게 하나님 붙들며 나아가는데 광풍이 삶에 몰아치더라는 거죠.

왜 일까요? 광풍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한 번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한 바람과 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2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 자신에게 아이를 낳을 어떤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이 약속이 성취됩니다.

25절 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놀라운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믿음의 선포 뒤에도 풍랑은 여전히 십여일 동안 계속 되었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기나긴 풍랑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행위입니다.


2. 풍랑은 우리 삶을 단순하게 합니다.

풍랑을 통해 선원들은 배에 가지고 있던 곡식이며 항해 기구까지 모두 하나씩 버려갑니다.

결국 자신들의 몸뚱아리만 남게 되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것들을 거둬가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 어떤이는 재정, 어떤 이는 명예를 거둬가시기도 하죠.

풍랑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고 의지하던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하고 심플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것이 풍랑의 순기능이라 생각합니다.

풍랑을 통해 내 삶은 단순하게 하나님만을 붙들게 되고 내가 의지하던 헛된 것들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불어 오는 바람, 그 바람을 맞으며 불평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그 바람이 오히려 내 믿음의 삶을 더 견고하게 하는 매개물이 되고 있나요?

풍랑과 바람을 통해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삶으로 나아갑시다.

10월의 첫날입니다. 10월 한 달 우리에게 여전히 바람은 불지만, 바람 불어도 좋아^^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9. 24. 21:50

<행복한 왕자>

1주일에 한 번씩 선율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선생님이 오십니다.
매번 명작 동화 한 권씩 가져와서 읽어주시는데, 오늘 가져온 책이 "행복한 왕자"였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줄거리는 대충 아시죠?

한 도시에 왕자 동상이 서 있습니다. 왕자 동상의 칼에 루비가 박혔고
그 왕자의 눈엔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습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던 한 제비가 그 동상 밑에서 잠시 쉬다
왕자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왕자의 눈물은 그 도시의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향해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왕자는 남쪽 나라로 날아가려는 제비를 붙잡아 매일 자신이 가진 한 가지씩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가져가 나눠주도록 합니다. 
자신이 가진 루비를 나누고, 자신이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눈에 붙어 있는 사파이어까지 나눠주라고 합니다.
겨울이 이미 다가왔음에도 제비는 하루 하루 남쪽으로 가던 여정을 미루며 왕자의 따뜻한 마음을 가난한 이웃에게 전하고 또 전합니다.
눈에 박힌 사파이어까지 나눈 왕자는 볼 수 없게 되지만 최후에 자신을 덧칠하고 있던 금박까지 벗겨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금박을 나눠주고 온 후 제비는 왕자의 입에 마지막 키스를 합니다.
제비가 따뜻한 남쪽 나라가 아닌 죽음의 집을 향하는 마지막 키스였습니다.
왕자의 착한 마음에 감동한 제비는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곁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제비가 죽는 순간 왕자의 납으로 만든 심장이 반으로 두 동강이 나버립니다.
제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서였죠.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그 도시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천사들은 왕자의 심장과 죽어 있는 제비를 가져가지요.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다는 줄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동화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아침에 묵상한 구절이 오버랩되더군요. 
오늘 묵상 본문인 사도행전 20장의 3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는 마음이 받는 마음이 복되며, 주는 마음이 참 감동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감동이 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랑 때문입니다.예수님은 행복한 왕자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비가 되어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날개짓을 해야겠죠.
내가 내 이웃에게 나눠야할 루비는 무엇이고 사파이어는 무엇인가요?
나는 누구에게 삶을 나눠야할 한 마리의 제비인가요?
내 귀한 것을 나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나누는 사랑만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굿 이브닝입니다. 
(굿이브닝 목사 김경헌 올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9. 23. 23:55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참 사랑의 실천은 공의의 실천입니다.

강남의 부자와 강북의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떤 사람이 더 수긍하기가 쉬울까요?
(강남과 강북을 예를 든 것은 편가르기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예이기 때문입니다.)
강남 부자가 훨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가난한 사람과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수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느끼기에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에게 참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불의한 제도에 대한 개선과
그들을 억압하고 차별했던 차들을 정의롭게 심판하는 것이 그들의 피부에 와 닿는 복음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조되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간과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의 사랑이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통해 더 많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이 없을 때
한 쪽 바퀴를 잃어버린 반쪽 짜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공의와 정의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면인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사회 가운데 공의와 정의가 실천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 유명한 이사야 강해 설교를 하시죠.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이것이 주님이 선포한 복음의 중요한 맥락이다.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 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하시어
그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의로워져야 하고,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있는 사람들은 훨씬 예수님의 사랑을 수긍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좀 덜 가진 자들이 주님의 사랑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 땅의 정치가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말해야 하고, 때론 비판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이 사회의 부조리함과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는 하나님의 꾸짖음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아모스 5장 7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24)"
이 말을 깊이 되세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3. 9. 15. 22:35

이주 노동자 주일 오후 예배 설교문

룻기 4장 13-17절

제목 : 사람이 왔습니다. 


1.

오늘 주일 5부 예배는 이주노동자 선교예배로 특별히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 하면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새까만 피부가 연상되실 수도 있고, 명동 같은 곳을 몰려다니는 제 3세계 사람들을 떠올릴 수도 있구요. 3D 업종이 떠오르실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어렵고, 지저분한 일들을 대신 해 줄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그 3D 업종을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대신에 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꺼리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오히려 그런 고마운 그들을 꺼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주 노동자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자연스레 좋지 않은 것들을 연상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주노동자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을 떠올리셨던 분은 없으신가요? 이삭을 떠올리신 분은 없나요?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 또한 예수님의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을 생각해 보시진 않았나요? 바울은 어떤가요? 제가 방금 언급한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이주 노동자들이었고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핵심 인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떠나는 경험을 했고, 타지에서 노동을 하며 밥벌이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이주 노동자들 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이주해서 살아가신 이주 노동자가 아닐까요? 


2.

성경의 인물들을 이주 노동자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더 크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집단적인 이주 노동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들의 원래 근거지인 가나안 땅의 이역만리 이집트에서 집단 노동을 했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의 DNA 에는 이주노동자라는 DNA 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그들에게 율법 조항으로 너희는 이주 노동자였으니 이주 노동자들을 잘 대해 주라고 못을 박아 버리십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3장 9절은 비슷한 말씀인데 한 가지를 더 추가 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 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나그네 되어 봤으니 나그네의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는 거죠.

레위기 19장 33-34절입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당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굼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타향살이 해 봤잖아. 거류민 즉 이주민으로 학대를 당해 봤고 많은 설움을 당했었잖아. 그러니 너희 땅에 사는 거류민들과 나그네들에게도 잘 해줘야 하지 않겠니? 라고 하나님은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명령하고 계십니다.


경험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은 역사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이죠. 이주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타향살이 설움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 무슨 어려운 말 같지만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이죠. 역사를 잊을 때 역사 또한 너희들을 기억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주 노동의 설움은 없었나요?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그마치 500만명의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이주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갔던 지역도 다양했습니다. 만주 또는 간도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았죠. 많은 조선의 사람들이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특별히 러시아로 떠났던 이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했죠. 그들은 러시아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강제 이주를 또 한 번 겪으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까지 강제 이주 당하며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카작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후손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었죠. 간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현대사에서의 이주 노동은 없나요? 1963년 우리나라는 독일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노임을 담보로 외화벌이를 위해 반 평생을 나그네로 그 땅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탄광과 하인리히 탄광 등에 흩어져서 석탄을 캐 냈던 광부들은 노임을 담보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는 중동의 산업현장으로 떠난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우리 남편, 삼촌,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낸지 5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그 아픔의 역사를 잊은 듯 합니다. 또 다른 이방인들이 이 땅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50년 전의 우리들처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나라를 살려보고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임금을 담보로 너무나 힘들고 차별된 삶을 그들에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007년에 4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재독 광부 간호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 정부에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했다고 하죠. 그들이 독일에서 받았던 이주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생각할 때 한국 정부의 이주 정책이 많이 아쉬워 보였나 봅니다. 이제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http://youtu.be/7AarJrDjrPk


 “독일이 필요로 해 이곳에 온 우리는 ‘필요 없다’고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 라는 문구가 가슴팍을 찌르지 않습니까?  이러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독일시민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했고 결국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 제정을 만들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 소설가가 말했다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왔다.” 노동력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더라는 거죠. 상품인줄만 알았는데 사람이더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을 귀찮게 하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독일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독일 민족의 호의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민족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4.

오늘 우리는 룻기의 마지막 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룻기는 잘 아시듯이 유대사람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에서 온 며느리 룻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염리동의 한 한국 사람 시어머니와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의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 주인공들 또한 이주노동자들의 설움을 몸소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를 했었습니다. 이주해간 타향에서 아들 둘을 그 민족 여자랑 결혼을 시켰습니다. 국제결혼까지 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오미입니다. 불행하게 남편과 아들 둘은 이역만리 모압땅에서 요절하게 되지요. 맞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나 그들의 민족으로 돌아가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그 시모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비친 룻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신명기 23장 3절에 나와 있듯이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총회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혐오하는 민족이 모압민족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몇 년 만에 돌아와 데리고 온 며느리가 모압 여인이라고 합니다. 룻을 바라보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서리 내릴 정도였을 겁니다. 모두가 개 쳐다보듯 룻을 바라봤을 것이 뻔합니다. 룻이 그 차가운 시선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시모 나오미를 향한 인애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인애와 사랑으로 시모를 섬겼습니다. 외국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법도 한데 보아스의 침상에까지 찾아가 시모와 그의 가문을 구해달라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룻은 차가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그 마음에 가득한 시어머니를 향한 인애를 실천하지요.

그에 상응하는 보아스의 인애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침실에 찾아와 누워 있는 룻을 향해 건내는 보아스의 말입니다. “이것은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인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애로구나” 보아스는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파산한 가문을 세워 주기 위한 한 여인의 간절한 노력을 보았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그 자리에서 범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룻기 3장의 보아스의 타작마당의 침실 장면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격적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룻을 사랑했지만, 딸과 같은 룻의 젊은 나이 때문에 절제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러울 룻을 위로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인애이죠. 보아스는 룻을 노동력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가득한 사람으로 대하며, 인애가 넘치는 이방여인 룻을 자신 또한 인애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애는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친족을 위해 밭을 사주고 기업을 무르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인애의 행위였습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친족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죠.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베들레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야하는 문제기이도 했습니다. 보아스는 책임감과 희생을 통해 그의 인애를 룻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또한 이들의 아름다운 인애의 행위에 대해 인애로 답하십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평범하지 않은 인애의 가정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애는 사람으로 보답이 됩니다. 그 가문을 이을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을 아이였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며느리 한 명 잘 들어왔을 뿐인데, 가문이 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다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룻을 단순한 이방여인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권리와 아내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대했더니 사람 노릇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넝쿨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보아스의 인애는 룻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보았고 따뜻함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애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은 바로 룻과 보아스와 같은 인애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인애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땅에 찾아온 또 다른 이방인들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 할까요? 그들은 단순한 노동력인가요? 아니면 그들은 우리가 못하는 힘들고 고된 일들을 해주는 지저분하고 가난한 제 3세계 민족일 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이 가득 담긴 사람이며 우리의 믿음을 이을 형제 자매들인가요? 


2013년 현재 국내 등록 외국인은 약 140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비율로 봤을 때 중국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베트남  3위로 필리핀 사람들이 그 다음 인도네시아 미국 태국 순이라 합니다. 등록 외국인들이니 등록하지 않는 외국인들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이주민들이 우리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배타적인 마음과 차가운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더 이상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새 식구들이 들어왔는데도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주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들을 외국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을 우리 나라 사람, 우리 식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룻이라는 한 사람이 들어옴으로 보아스의 가정이 큰 은혜를 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피부가 다른 우리의 다른 식구들이 이제 우리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나갈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우리가 겪었던 이주 노동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독일인들이 보여주었던 우리 노동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포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룻과 보아스가 보여주었던 그 따뜻한 인애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주 노동자들의 보아스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주 노동자들의 나오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라고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특별법을 재정하여 대한민국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따뜻한 인애를 가지고 앞장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6.

우리 교회의 국젝교회인 YIC를 찾아온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보십니까? 이들은 우리 교회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의 한 식구이고 우리의 믿음의 가문을 함께 이어갈 친지이며 가족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큰 명절 절기에 레위인과 고아와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말씀합니다. 이번 주는 추석 주간입니다. 우리 이주 노동자들 나그네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기가 바로 명절 기간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배려 하나가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국제 교회 YIC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주십시오. 


이분들의 필요를 몇 가지 알리겠습니다. 먼저 이 분들 중에 좋은 사장님을 만나 일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장을 꾸리고 계신 성도님들 YIC 가족들 중에 가능한 형제 자매님들을 채용하셔서 일을 시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많은 임금보다 따뜻한 사랑과 안전입니다. 우리 국제교회 식구들을 고용하시어 써보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또한 YIC 예배는 매주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 장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통역자들이 한 두 사람이 붙어서 통역을 하며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각 나라 커뮤니티별로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렇기에 설교통역과 소그룹을 함께 진행할 통역자들의 수요가 항상 있습니다. 영어 베트남어 중국어 캄보디아어 통역자들을 수시로 구하니 관심 가져 주십시오. 

예배 후에는 식사를 직접 해서 나눠먹는데, 김치와 반찬거리들이 늘 필요합니다. 묵은 김치 남아 도시는 분들은 조금씩 갖다 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비빔국수 할 때 묵은 김치가 필요하거든요.


외국인 나그네들이 대한민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염리동으로 급격히 몰려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9. 4. 22:50
<두려움과 자유의 공존?! 말라기 4장 묵상>

스가랴서와 마찬 가지로 말라기도 여호와의 날, 그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심판주로 임하셔서 검불과 알곡을 나누는 날입니다(1절). 검불은 불살라지고 의로운 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길이 보전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짧으며 덧없이 지나갑니다.
그 무더웠던 여름의 기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낯설기까지 한 아침입니다.
우리 인생이 안개와같이 잠깐 있다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날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의 참 지혜는 무엇일까요?
말라기 4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라기 4: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됩니다. 오히려 참 치유와 해방을 맛보는 날이 되는 것이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 14:27)"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난 송아지를 상상해보십시오. 기뻐 날뛰지 않을 수 없겠죠.
어린 시절 외양간의 송아지가 온 집안을 해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었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눈빛과 자유의 만끽의 양면성을 그 어린 송아지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기쁨과 자유란 이런 것이 나닐까요?
한 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고 경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치유와 해방을 만끽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참 치유와 해방의 지름길이란 것을 아십시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고 있으니, 오늘 하루 송아지처럼 뛰어 놀 준비되셨습니까??^^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3. 8. 28. 10:06

프뢰벨테마 동화가 좋다는 건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새책 가격을 보니 5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몇년 째 사고 싶지만 비싸서 못사는 위시목록에 있는
TDOT, ABD, 등등의 사전류 가격과 맞먹는 거라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봄에 교회 집사님께서 초등학생 책 정리한다고
책 열 댓권을 주셨는데 그 안에 프뢰벨테마 동화 50권 중 두 권이 딸려 왔다.
"털끝 하나도 까딱하면 안되기" 와 "당나귀 실베스타와 요술조약돌"
이 두권을 읽으며 내가 큰 감동을 받았다.
신세계였다. 아이들 책에도 이런 감동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 이래서 프뢰벨 프뢰벨 하는구나 했다.
그 때부터 프뢰벨 테마동화 전질을 갖고자 하는 소망이 더해갔다.

드디어 엊그제 중고장터에서 싼 가격에 매입했다.
파시는 엄마가 너덜너덜한 것 다시 가져오면 권당 팔천원에 AS 까지 맡겨 주신단다.
그 마음이 참 감사하다. 
집에와서 확인해 보니 너덜너덜한 책이 적지 않다.
얼마나 많이 읽혔으면^^

이 동화전집의 장점은 테마별로 이야기가 정말 다양하다는 거다.
상상력을 키워주는 이야기, 자연과 친해지는 이야기, 가족사랑 이야기 등등
테마별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아이가 흥미진진해 한다.
선율이는 아빠가 읽어주면 대 여섯권은 기본으로 집중하여 본다.
이 녀석은 아빠의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훨씬 낫다.
아빠의 만족함을 위한 구매가 아니었음을 나는 굳이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 거다^^

프뢰벨 테마동화같은 책들이라면 내 위시목록을 포기하면서라도
사주고 싶다. 
그리고 많이 많이 읽혀줘야지~
무엇보다 내가 읽어주면서 동심으로 촉촉히 젹셔진다.
나도 이런 동화들으며 컸더라면 좋았겠다.
아이들 때문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지만, 벌어들이는 수확은 상상 이상이다.
그래서 아이 키워보지 않고 어른이라 하지 말라 했나보다.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동심어린 어른^^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