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노동자 주일 오후 예배 설교문
룻기 4장 13-17절
제목 : 사람이 왔습니다.
1.
오늘 주일 5부 예배는 이주노동자 선교예배로 특별히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 하면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새까만 피부가 연상되실 수도 있고, 명동 같은 곳을 몰려다니는 제 3세계 사람들을 떠올릴 수도 있구요. 3D 업종이 떠오르실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어렵고, 지저분한 일들을 대신 해 줄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그 3D 업종을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대신에 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꺼리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오히려 그런 고마운 그들을 꺼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주 노동자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자연스레 좋지 않은 것들을 연상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주노동자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을 떠올리셨던 분은 없으신가요? 이삭을 떠올리신 분은 없나요?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 또한 예수님의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을 생각해 보시진 않았나요? 바울은 어떤가요? 제가 방금 언급한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이주 노동자들이었고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핵심 인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떠나는 경험을 했고, 타지에서 노동을 하며 밥벌이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이주 노동자들 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이주해서 살아가신 이주 노동자가 아닐까요?
2.
성경의 인물들을 이주 노동자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더 크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집단적인 이주 노동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들의 원래 근거지인 가나안 땅의 이역만리 이집트에서 집단 노동을 했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의 DNA 에는 이주노동자라는 DNA 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그들에게 율법 조항으로 너희는 이주 노동자였으니 이주 노동자들을 잘 대해 주라고 못을 박아 버리십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3장 9절은 비슷한 말씀인데 한 가지를 더 추가 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 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나그네 되어 봤으니 나그네의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는 거죠.
레위기 19장 33-34절입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당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굼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타향살이 해 봤잖아. 거류민 즉 이주민으로 학대를 당해 봤고 많은 설움을 당했었잖아. 그러니 너희 땅에 사는 거류민들과 나그네들에게도 잘 해줘야 하지 않겠니? 라고 하나님은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명령하고 계십니다.
경험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은 역사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이죠. 이주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타향살이 설움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 무슨 어려운 말 같지만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이죠. 역사를 잊을 때 역사 또한 너희들을 기억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주 노동의 설움은 없었나요?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그마치 500만명의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이주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갔던 지역도 다양했습니다. 만주 또는 간도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았죠. 많은 조선의 사람들이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특별히 러시아로 떠났던 이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했죠. 그들은 러시아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강제 이주를 또 한 번 겪으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까지 강제 이주 당하며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카작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후손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었죠. 간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현대사에서의 이주 노동은 없나요? 1963년 우리나라는 독일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노임을 담보로 외화벌이를 위해 반 평생을 나그네로 그 땅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탄광과 하인리히 탄광 등에 흩어져서 석탄을 캐 냈던 광부들은 노임을 담보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는 중동의 산업현장으로 떠난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우리 남편, 삼촌,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낸지 5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그 아픔의 역사를 잊은 듯 합니다. 또 다른 이방인들이 이 땅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50년 전의 우리들처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나라를 살려보고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임금을 담보로 너무나 힘들고 차별된 삶을 그들에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007년에 4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재독 광부 간호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 정부에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했다고 하죠. 그들이 독일에서 받았던 이주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생각할 때 한국 정부의 이주 정책이 많이 아쉬워 보였나 봅니다. 이제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http://youtu.be/7AarJrDjrPk
“독일이 필요로 해 이곳에 온 우리는 ‘필요 없다’고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 라는 문구가 가슴팍을 찌르지 않습니까? 이러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독일시민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했고 결국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 제정을 만들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 소설가가 말했다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왔다.” 노동력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더라는 거죠. 상품인줄만 알았는데 사람이더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을 귀찮게 하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독일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독일 민족의 호의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민족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4.
오늘 우리는 룻기의 마지막 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룻기는 잘 아시듯이 유대사람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에서 온 며느리 룻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염리동의 한 한국 사람 시어머니와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의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 주인공들 또한 이주노동자들의 설움을 몸소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를 했었습니다. 이주해간 타향에서 아들 둘을 그 민족 여자랑 결혼을 시켰습니다. 국제결혼까지 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오미입니다. 불행하게 남편과 아들 둘은 이역만리 모압땅에서 요절하게 되지요. 맞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나 그들의 민족으로 돌아가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그 시모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비친 룻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신명기 23장 3절에 나와 있듯이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총회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혐오하는 민족이 모압민족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몇 년 만에 돌아와 데리고 온 며느리가 모압 여인이라고 합니다. 룻을 바라보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서리 내릴 정도였을 겁니다. 모두가 개 쳐다보듯 룻을 바라봤을 것이 뻔합니다. 룻이 그 차가운 시선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시모 나오미를 향한 인애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인애와 사랑으로 시모를 섬겼습니다. 외국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법도 한데 보아스의 침상에까지 찾아가 시모와 그의 가문을 구해달라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룻은 차가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그 마음에 가득한 시어머니를 향한 인애를 실천하지요.
그에 상응하는 보아스의 인애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침실에 찾아와 누워 있는 룻을 향해 건내는 보아스의 말입니다. “이것은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인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애로구나” 보아스는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파산한 가문을 세워 주기 위한 한 여인의 간절한 노력을 보았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그 자리에서 범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룻기 3장의 보아스의 타작마당의 침실 장면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격적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룻을 사랑했지만, 딸과 같은 룻의 젊은 나이 때문에 절제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러울 룻을 위로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인애이죠. 보아스는 룻을 노동력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가득한 사람으로 대하며, 인애가 넘치는 이방여인 룻을 자신 또한 인애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애는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친족을 위해 밭을 사주고 기업을 무르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인애의 행위였습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친족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죠.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베들레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야하는 문제기이도 했습니다. 보아스는 책임감과 희생을 통해 그의 인애를 룻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또한 이들의 아름다운 인애의 행위에 대해 인애로 답하십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평범하지 않은 인애의 가정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애는 사람으로 보답이 됩니다. 그 가문을 이을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을 아이였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며느리 한 명 잘 들어왔을 뿐인데, 가문이 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다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룻을 단순한 이방여인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권리와 아내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대했더니 사람 노릇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넝쿨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보아스의 인애는 룻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보았고 따뜻함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애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은 바로 룻과 보아스와 같은 인애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인애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땅에 찾아온 또 다른 이방인들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 할까요? 그들은 단순한 노동력인가요? 아니면 그들은 우리가 못하는 힘들고 고된 일들을 해주는 지저분하고 가난한 제 3세계 민족일 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이 가득 담긴 사람이며 우리의 믿음을 이을 형제 자매들인가요?
2013년 현재 국내 등록 외국인은 약 140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비율로 봤을 때 중국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베트남 3위로 필리핀 사람들이 그 다음 인도네시아 미국 태국 순이라 합니다. 등록 외국인들이니 등록하지 않는 외국인들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이주민들이 우리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배타적인 마음과 차가운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더 이상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새 식구들이 들어왔는데도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주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들을 외국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을 우리 나라 사람, 우리 식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룻이라는 한 사람이 들어옴으로 보아스의 가정이 큰 은혜를 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피부가 다른 우리의 다른 식구들이 이제 우리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나갈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우리가 겪었던 이주 노동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독일인들이 보여주었던 우리 노동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포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룻과 보아스가 보여주었던 그 따뜻한 인애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주 노동자들의 보아스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주 노동자들의 나오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라고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특별법을 재정하여 대한민국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따뜻한 인애를 가지고 앞장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6.
우리 교회의 국젝교회인 YIC를 찾아온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보십니까? 이들은 우리 교회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의 한 식구이고 우리의 믿음의 가문을 함께 이어갈 친지이며 가족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큰 명절 절기에 레위인과 고아와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말씀합니다. 이번 주는 추석 주간입니다. 우리 이주 노동자들 나그네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기가 바로 명절 기간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배려 하나가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국제 교회 YIC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주십시오.
이분들의 필요를 몇 가지 알리겠습니다. 먼저 이 분들 중에 좋은 사장님을 만나 일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장을 꾸리고 계신 성도님들 YIC 가족들 중에 가능한 형제 자매님들을 채용하셔서 일을 시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많은 임금보다 따뜻한 사랑과 안전입니다. 우리 국제교회 식구들을 고용하시어 써보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또한 YIC 예배는 매주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 장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통역자들이 한 두 사람이 붙어서 통역을 하며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각 나라 커뮤니티별로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렇기에 설교통역과 소그룹을 함께 진행할 통역자들의 수요가 항상 있습니다. 영어 베트남어 중국어 캄보디아어 통역자들을 수시로 구하니 관심 가져 주십시오.
예배 후에는 식사를 직접 해서 나눠먹는데, 김치와 반찬거리들이 늘 필요합니다. 묵은 김치 남아 도시는 분들은 조금씩 갖다 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비빔국수 할 때 묵은 김치가 필요하거든요.
외국인 나그네들이 대한민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염리동으로 급격히 몰려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