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3. 8. 22. 06:59
스가랴 4장 묵상

스가랴 4 장에는 스가랴의 다섯번째 환상이 등장합니다. 다섯 번째 환상은 금 촛대와 두 감람나무에 관한 내용입니다. 계속 타오르는 일곱 등잔을 가진 촛대는 양옆에 자라나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직접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금촛대는 성전이며, 두 감람나무는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를 나타냅니다. 이 환상으로 하나님은 성전재건을 비롯해 전반적인 삶의 어려움에 처한 당신의 백성을 격려하십니다.

6,7절말씀입니다.
6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 권력으로도 힘으로도 되지 않고 나의 영으로만 될 수 있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7큰 산아, 너는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따름이다. ′ 좋다, 좋다!′ 환호하는 가운데 그는 머릿돌을 빼내리라.' "

늘 우리 앞에 닥친 산적한 문제들은 큰 산처럼 다가옵니다.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산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겐 성전 재건이 그러했죠~ 하지만 하나님은 금촛대를 향해 흘러가는 올리브나무의 기름 환상을 보여 주시며 불가능이란 없다고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조건인 힘과 권력 그리고 재력으로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금촛대를 향해 흘러가는 올리브기름, 그것은 두 지도자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로 상징된 두 지도자 그들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으로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앞에 큰 산은 평지와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올리브나무로 부르십니다.
시편 52편 8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나님의 자애에 의지하네"
하나님의 자애(헤세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며, 그 앞에 큰 산은 평지에 불과하다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것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중, 이말씀을 대하며 큰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푸른 올리브나무로 큰 산 앞에서 독야청청하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신으로 큰 산을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에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인 나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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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3. 8. 15. 06:27

<기쁘지 아니한가? - 스바냐 3장 17절 >

"너의 하나님 야웨께서 너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는 능력자(유력자)이며, 그가 구원하신다.
그는 흐뭇함으로 너를 즐거워하신다.
그는 (너를 향한) 당신의 사랑 안에서 평온을 유지하신다.
그는 흥얼거리며 너를 기뻐하신다. (스바냐 3장 17절 히브리성경 사역私譯)"

1. 하나님은 나의 한가운데에 이미 와 계시며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능력자, 전능자이십니다. (mighty to save)
능력자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기뽀르'입니다.
룻과 나오미의 가문의 기업을 무를 능력이 있었던 '보아스'에게 사용됐던 호칭이죠(룻기 2:1)
나의 모든 빚을 탕감해줄 수 있는 능력자이시죠.
3.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즐거워하시며, 나 때문에 행복해 하십니다. "너때문이야, 너때문이야~ 기쁨은 너때문이야~(우루사 광고송에 맞춰^^)
4.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행복에 겨워 그것을 잠잠히, 고요히 음미하십니다. 마치 에스프레소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담은 채 그 향과 맛을 내내 음미하듯이요. 그러면서 그 사랑 안에서 쉼을 누리시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5. 그 분은 이제 그 사랑에겨워 흥얼거리기까지 하시며 기쁨을 표현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 하나님을 나도 기뻐하고, 그런 하나님때문에 나도 행복하여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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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3. 8. 13. 15:45

<창세기 2장을 통해 본 가정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과 상호보완성>


창세기 2장은 '가정'이라는 기관에 대한 대헌장(Magna Carta)와 같은 장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 가장 먼저 만드신 기관이 다름 아닌 '가정'이다.

너무나 중요한 기관임에 틀림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이성(異性)을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이성 동반자를 일컬어 '돕는 배필'이라 명명한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만들되 그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말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종속관계(subordinate relationship)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동등성(equality)과 보완성(supplementation)을 의미한다.

돕는 배필은 "맞은 편에 있는 짝"이라는 뜻이다. 

돕는 배필의 역할은 남자에 대한 일방적인 순종이 아니라 

‘맞은 편 관점’의 의견을 갖고 상대를 돕는(보완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의 다름에서 나오는 이질적인 사고가 가정을 풍성하게 

남자와 여자가 함께 감당해야했던 사역을 풍성하고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장 27-28절에서는 인류를 만드신 목적을 기술하신다.

이 목적을 이루고 발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서로 보충하고 도와주어 task를 완성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남자만의 부르심과 비전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남자와 여자)'에게 동시에 복을 주셨고, 

'그들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결코 남자가 우위에 있는 사명이나 부르심이 아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도 창세기 1장 27-28절의 목적 그것이다.

이를 위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도와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돕고 보완해 주어야 했다.

예를 들면 남자는 힘을 쓰는 일, 여자는 세밀하고 섬세한 일 이었으리라.


여기에서 나의 결혼생활과 우리 가정을 향한 부르심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나의 부르심'에 맞추라고 강요를 했었다.

그러나 어느 계기로 그것을 깨뜨렸다.

비전이란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전을 재 수정했고, 가정의 목적을 재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고수했던, 중국 선교를 내려 놓았다.

아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가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나의 부르심을 설정하며

비전을 재 수정해 갔다.

아내들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비전과 부르심을 완전히 없애라는 강요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특히 목회자의 사모는 이러이러해야해 라는 교회의 일반적인 통념이

목회자의 아내들에게 강요된다.

이것은 거의 폭력 수준이다. 폭력이다.

목회자의 아내도 그들 나름의 부르심이 있다. 존중되어야 한다.

 그 부르심을 제도화와 통념에 의해 도난당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도난당한 것과 같다.

물론 나의 아내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가고 있다.

자랑스럽다. 

늘 나를 살핀다. 나의 비전을 강요하여 내 아내의 그것을 훼손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하셨고,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기구이다.

그 통치를 남녀에게 각각 맡기셨고, 함께 도와가길 원하셨다.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우리 가정에서도 아직 맞춰가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남녀의 기능면에서의 업무분장이다.

통념상 남자는 돈을 벌고 힘쓰는 일을 하고, 여자는 가사업무를 한다.

현대의 문화에서도 이러한 기능적 업무분담이 호소력이 있고 유효한가?

여기서도 어느 정도의 가부장적인 폭력성이 존재한다.

당신은 여자이니까 무조건 아침밥을 차려라. 

당신은 남자이니까 운전하고 짐을 들고 이벤트를 해라~ 등이겠지?

이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원칙이 바로

남녀의 대등성과 상호보완성의 원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그림으로 가이드라인으로서 이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가이드 라인을 창세기 2장에서 '돕는 베필'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다고 믿는다.


이 글을 쓰고 남성들의 뭇매를 맞을지 (그래 니 혼자 잘났다?^^) 약간 겁이 나긴 하지만 성경이 말해주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긴 글을 적어본다.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의 원칙이 존중되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사회에 매개된다고 믿는다. 

가정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필요에 의해 결합한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통치를 대신할 중요한 목적기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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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작품들2013. 8. 7. 21:40
주변 3강에 끼인 한반도의 현실에서 바라본 대화록 공개

1. 일본
6.25 전쟁은 일본에게 2차대전 패배 복구의 호재였고,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전쟁 이후 남한의 군사국화는 일본을 상대적으로 경제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북한의 핵문제와 위협은 일본 우익정치인들의 인기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며, 평화헌법 폐지와 재무장 추진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2. 중국
6.25참전에 엄청난 사상자를 감수했기에 북한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북한은 완충역할을 해준다. 북한 문제는 중국의 외교적 협상력을 높여주고, 미국이 중국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최근 남북관계 경색으로 경제 협력이 약화되믄 상황에서 중국의 공세적 북한투장와 자원확보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자신들의 공산주의 개혁모델로 생존하기를 바란다.

3. 미국
북한핵문제는 미국에게 필요악이다. 해결을 원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위협으로 존재하기에 누리는 반사이익이 많다. 북한을 핑계로 아시아에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고, 일본과 남한에 무기를 팔아먹어 누리는 수익이 천문학적으로 쏠쏠하다.

결론적으로 주변 3강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 최대한 분단상황을 통해 잇속을 챙기려 한다. 남북간의 상호협력이 중요한 열쇠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남북간의 상호협력을 논의한 두 정상들(노무현, 김정일)의 회담 대화록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게임에서 자신의 전략과 패를 다 꺼내 보이는 것과 같은, 제 정신이라 보기 어려운 결정이다. 당파적 이익을 위해 국익을 팔아먹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복음과 상황 8월호, 이인엽의 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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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콘티2013. 8. 1. 10:33

<8월 2일 금밤기도회 찬양콘티>

주제 : 피난처 되신 주님의 이름을 찬양

1.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G)

2. 슬픈 마음 있는 사람(G)
3. 예수님 찬양 (G)
4. 주의 이름 송축하리(G)

5. 임재(A)
6.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니(A)
7. 마라나타(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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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찬양콘티입니다.
오늘은 바빠서 콘티 설명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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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3. 7. 27. 22:40
저는 목사가 되고 장례에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장례식을 직접 진행하기도 합니다. 숨을 거두시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화장(cremation, 火葬)을 하든지 아니면 묻든지(埋葬, burial)합니다. 화장을 하고 나면 사람은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매장을 하더라도 죽은 사람은 땅에 묻히게 되고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되죠. 장례식에 항상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여러분 우리 인생이 별것인 것처럼(특별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쓰인 히브리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땅이라고 쓰인 단어는 ‘아다마(אדם)’ 입니다. 사람이라고 쓰인 단어는 ‘아담(אדם)’입니다. 두 단어가 자음(子音,consonant)은 똑같습니다. 모음(母音, vowel)만 다릅니다. 아담(사람)은 아다마(땅)에서 나온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땅에 있는 먼지(尘土, dust)를 가지고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먼지라는 단어는 아파르(עפר)입니다. 사람 아담은 아다마에 있는 아파르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우리의 본질(本質 ,substance)은 먼지입니다. 먼지에 불과하던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생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먼지인 우리에게 들어오자 짠하고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생기이고, 사람의 본질은 먼지입니다. 먼지에 생기가 들어오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말에 ‘죽는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숨을 멈춘다. 숨을 거둔다”라는 말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지요. 호흡은 살아있는 존재의 특권입니다. 그 호흡은 바로 하나님의 생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호흡을 거둬가시면 우리는 다시 먼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다마로 돌아가는 아파르가 되는 것입니다. 아파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 ‘돌아가신다’입니다.

지금 제가 뭘 계속 얘기하고 있냐면요. 우리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지임이 깨달아지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다시 먼지가 되어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你本是尘土,仍要归于尘土,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여러분이 별 것(特別的 ,Something)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不是 特別的, nothing). 단지 먼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땅을 갈 사람도 없으므로” 하나님은 아담(사람)을 아다마(땅)을 갈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땅을 통해 생산되는 모든 혜택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일하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땅을 통해 생산되는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일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는 땅을 갈 때, 즉 일할 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외국인 노동자로 온 여러분들의 일을 축복합니다. 그 일을 통해 보람을 찾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 생각해볼 꺼리

1. 땅, 사람, 먼지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무엇인가요?
아다마, 아담, 아파르

2. 이 히브리 말들을 통해 우리 인간의 본질과 만들어진 목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범답안>
- 본질 : 땅으로부터 나온 먼지에 불과하다.
- 목적 : 땅으로부터 나온 존재로서 땅을 갈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일은 신성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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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콘티2013. 7. 25. 17:50

<7월 26일 금요기도회 찬양 콘티>


주제 : 주의 임재 안에서


1.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사랑이(A)


2. 생명 주께 있네 (G)

3. 이 날은 주가 지으신 날 (E)

4. 우리 함께 기뻐해(E)


5. 임재 (시와 그림 -A)

6. 주의 임재 안에서 (내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 -A)


7. 나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리 (A)

8.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후렴만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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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주제는 좋았는데 '정결, 보혈, 거룩'에 관한 찬양들만 포진했더니

너무 무겁고 가라 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시 콘티에는 반드시 어떤 곡이든 하나님의 이름과 행하심을 찬양하는 곡이 들어가야 함을 반추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의 찬양들을

전반부에 많이 넣어 보았습니다.

회개와 정결, 보혈 찬양을 하더라도 그 이후에 그 회개의 결단에 합당한

기쁨의 찬양이 뒤이어지는 콘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5, 6번 곡을 메인 곡으로 정하고 콘티를 진행합니다.

7,8 번 곡은 헌신의 결단과 간구의 곡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겁니다.

동북아로 선교를 나가는 청년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기에

그들의 헌신과 결단을 북돋는 찬양으로 두 곡을 넣었습니다.

약간 충분치 않지만 그래도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으로

삶을 드리기로 결단하는 차원에서 두 곡을 넣은 것입니다.

갈렙의 결단, 산지를 취하고, 산지의 힘든 삶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가겠다는 결단이 이 곡을 통해 잘 표현됐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7. 24. 10:28

<악의 기원 어떻게 볼 것인가?>

김회권 교수님의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강독의 일부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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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악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악은 피조물 본성의 타락이 아니라 의지의 우발적 타락, 

즉 선의 결핍을 주장한다. 

이것은 일원론적 선절대주의다. 

이렇게 말하면 악이 피조물에게서 기원했다고 인정하게 되고 

피조물을 신적존재로 인정하게 되어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선의 현저한 우위성을 강조하는 면은 칼 바르트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악은 분명히 실재하는 우주적 기원을 가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악의 갈등양상을 인정하는 준이원론적 신학인 유대교신학의 도움을 받게 된다. 

유대교 신학은 악의 우주적 기원을 인정하며 

악과 선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면서 선의 비대칭적 우위를 주장한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악을 1 대 0.999로 설정함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서 악을 제압하며 통제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사야45: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의하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비적극적으로 악을 만드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전능성 안에서 악을 통제하시며 

피조물의 악에 대해 스스로 무한 책임을 지셔서 악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부분에서 교수님은 한 예를 드신다.

"내 아들이 노트북을 망가뜨렸을 때, 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니가 이렇게 실수할 것까지 예상하고 너를 낳았단다'

아들이 노트북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내가 책임을 집니다.

아들 니가 고장냈으니 니가 고쳐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악과 타락에 대해 본인이 무한 책임지시기로 하신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무한 책임의 모습이다.

자신이 직접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다.


악에 대해서 스스로 무한 책임을 지면서 악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악에 대해서 싸우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유대교신학이고 본회퍼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악의 문제와 맞딱뜨린다.

악의 문제 때문에 절망하며 하나님을 의심할 때도 있고 원망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죽은 것 같고 패배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신다.

악을 종국에는 제압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다. 

악을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스스로 무한 책임지시고 처리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이것을 신본적 낙관주의라 한다.

하나님이 결국에 악을 제압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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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본성의 타락이 아닌 의지의 타락에 의한 악의 우발성의 교리보다,

유대교 신학과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학이 옳아 보인다.

악의 파괴성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악의 문제와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실 것이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일기2013. 7. 23. 09:52

물을 길어 나르고 있다. 장마시즌에 말이다.

예상치 않은 사고로 집에 물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 겨울 동파로 한 주 동안 물이 안나온 적 있지만

여름의 단수는 그 무게감이 몇 배는 되어 보인다.

이북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는 염리동에서

나도 옛날을 추억하며 교회에서 열심히 물을 길어 나른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입니다. 주여 기갈을 보소서^^


물을 뿜어대지 못하는 수돗꼭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유통을 멈춘 막힌 수도관이 꼭 내 꼴은 아닌지 돌아본다.

잠궈져 있는 벨브처럼 

하나님께 잇대어 있지 않고 내 뜻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수도관은 아닌가?

물을 가둘 수 없고 흘러 보낼 수 없는 관처럼

깨어지고 상한 마음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아닌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2장 13절 말씀)"


생수의 근원에 잇대는 몸부림이 필요하며,

스스로의 생각과 사고에 갖혀 주님의 큰 뜻을 품지 못하고

저장해 두지 못했던 깨진 마음을 치료해야 한다.


콸콸콸콸 흘러넘치는 생수 유통업자로 쓰임 받고 싶다.

생수의 근원으로 올라가자~ 그곳으로 ad fontes~

Posted by speramus
일기2013. 7. 22. 23:09

설교란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다. 

내가 설교에 "하나님"이라 말했는데

회중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가리운다면

나는 설교를 당장 그만 둬야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는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맑은 순종과 소통이다.

하나님을 향한 맑은 순종으로 증명되지 않는 설교는 모두 거짓이다.

설교자 그의 삶이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 설교는 거짓이며 설교를 당장 멈춰야 한다.

하나님과 소통을 통해 하나님은 내 설교 안에 현존하신다.

소통을 위해서 설교자는 무릎 꿇어야 한다.


설교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나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설교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실제로 나타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나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수업과 성경공부와는 구별된다.

그러기에 설교는 어려운 것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나타나야 하기에

설교자는 더욱 겸손해야하며, 설교자는 더욱 순종해야 하며,

설교자는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지 말해야 하며, 그 하나님이 실재로 드러나야 하기에

설교는 고귀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사역자의 짐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가?


-김회권 교수님과의 대화 중에 깨닫고 알게 된 바를 정리해 본다. -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