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13:1-3 / 삼상 30:17-25

제목 : 한 식구(食口) “one family”

 

1.

좋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는데 추석들 잘 보내셨나요? 저는 미국에 온지 3년 정도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추석이 되면 고향집도 생각나고, 송편도 먹고 싶고 가족들이 많이 보고싶더라구요. 같이 한 밥상에 둘러 먹고 슬픔과 기쁨을 나누었던 식구들이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더 보고싶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교회 공동체가 있어서 우리에게는 이역만리 타향살이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를 사교단체라 하지 않고 가족과 같은 공동체라합니다. 여러 모로 교회는 가족 공동체를 닮았기 때문이죠.

시편 133편은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 형제가 하나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공동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오늘은 133편의 타이틀인 “다윗의 시”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33편은 다윗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삶의 스토리와 경험 안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라고 고백했을까요? 사무엘상 30장의 스토리를 통해 시편 133편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언약 공동체로 세우셨죠. 언약 공동체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복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복을 모든 민족에게 흘러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으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델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 부르심을 너무나 잘 이해했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목동으로 들에 있을 때부터 그를 주목했고 왕으로 미리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는 사울을 대신해서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해야 할 지 꿈궜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소망과 정 반대로 사울에 의해 광야로 내 몰려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 때 부터 오히려 하나님은 도망자 다윗에게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끌어 보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들을 떠돌아다니며 공동체를 이끌면서 하나님이 주인 되는 나라를 실험합니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아둘람 동굴에 피신해 있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이 나옵니다. 

“1   다윗은 거기에서 떠나, 아둘람 굴 속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형들과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다.

2   그들뿐만이 아니라,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삼무엘상22:1-2)

 

자기 자신도 쫓겨 다니는 도망자인데 사백여 명의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다윗의 부담감은 엄청났을 겁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빚 때문에 파산을 당한 사람들, 억울한 재판을 받아서 원망이 가득한 사람들,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아 왕따가 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죠. 여러분 이런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적대적이고 공격적입니다. 남을 자꾸 찌릅니다. 이런 거친 사람들을 이끌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또한 400명의 식솔들의 배를 채우는 일도 만만찮았겠죠.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인 사무엘상 30장에는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병사들만 600명이 나오는 것 보니 그 사이에 다윗의 공동체는 몇 배로 사람이 늘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공동체가 매력적이었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데리고 사울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윗은 아예 성읍을 하나 잡아서 정착을 하기로 마음 먹죠.  

 

5   다윗이 아기스에게 간청하였다. "임금님이 나를 좋게 보신다면, 지방 성읍들 가운데서 하나를 나에게 주셔서, 내가 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이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함께,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

6   그러자 아기스는 그 날 당장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래서 시글락이 이 날까지 유다 왕들의 소유가 되었다. (사무엘상 27장 5-6절)

 

다윗은 블레셋 땅인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에게 성읍을 하나 달라고 부탁을 하죠. 블레셋이 어떤 민족입니까? 다윗에 의해 죽은 골리앗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에 찾아 들어간 다윗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스 왕은 다윗과 그의 수백명의 식솔들을 받아 줍니다. 이렇게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던 다윗 공동체는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하지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다윗의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블레셋을 도와 동족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지 블레셋의 장군들은 다윗이 원수인데 그를 데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아기스 왕을 압박합니다. 결국 다윗의 군대는 툇자를 맞고 시글락성으로 사흘길을 달려 돌아왔습니다.

 

3. 

오늘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윗과 600명의 군인들이 시글락 성에 돌아온 후부터 입니다. 블레셋과 다른 민족인 아말렉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약탈하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군인들이 북쪽에 참전해 있는 틈을 타서 시글락성을 공격합니다. 성을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까지 모두 포로로 잡아 끌고 가버렸습니다. 다윗이 돌아와서 불타 없어진 시글락 성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목놓아 함께 울었는데 더 이상 울 힘이 없이 지칠 때까지 울었다고 말해 줍니다. 삼상 30장 6절은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6절-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솔직히 다윗이 뭔 잘못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속죄양(scapegoat)을 찾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곤경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겨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하나님은 아말렉군대를 쫓아가라고 하십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은 철저히 그의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그들의 가족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셨기 때문이죠. 다윗은 이틀 동안 아말렉 군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족들과 전리품들을 가지고 시글락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말렉을 뒤쫓기 위해 600명의 군인들이 함께 갔었는데 그들은 이미 먼 길을 이동해 온 상태였고 또 이동하여 싸우려니 낙오자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200명의 군인들이 낙오해 버립니다. 도저히 못 가겠으니 당신들이 가서 우리 대신 싸우고 오라고 합니다. 다윗의 군대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죽더라도 함께 죽자라는 기세로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힘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200명은 브솔 시냇가에서 나머지 400명의 군인들이 싸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쉬고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족들을 구하여 돌아오는 것을 브솔시내의 낙오자들은 볼 수 있었죠. 그들은 너무나 기뻐하며 다윗과 동료 군인들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돌아온 400명들의 눈에 200명의 낙오자들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밉상이죠. 자기네들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틀 동안 싸우고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웃으면서 달려오는 그들이 꼴 보기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그들과 달리 지도자 다윗은 낙오자들에게 따뜻하게 문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전리품까지 그들과 동등하게 나누자고 합니다.

 

출전했던 400명의 군인들 중에 악하고 야비한 사람 몇이 다윗을 따로 부릅니다. “대장님 저 사람들 한 게 하나도 없는데 설마 저 인간들에게 전리품들을 나눠줄 생각이십니까?”,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신 거죠? 그냥 아내와 자식들만 데려가게 하고 저희들이 싸워서 얻어온 전리품은 저런 인간들에게 주시면 안됩니다. 아시겠어요?”라고 했겠죠. 이것보다 더 우락부락 달려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의 나라에서 세워질 놀라운 원칙을 세웁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나누며 누리자는 법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도 전리품도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선물로 준 것을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 되겠나? 전쟁에 나간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한다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여야 하는 거야.”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이것은 중요한 법률 규정이 되어 내려왔습니다. 다윗 왕국은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통치 아래 평등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꿈이었습니다. 

 

4.

다윗은 그가 다스릴 나라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길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가치들이 드러나는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나눔과 받아들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다윗이 말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뜬구름 잡는 허황된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받아들임과 나눔을 통해 언약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사회의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였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용납과 나눔은 하나되는 방법이자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사건만 보더라도 다윗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란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죠. 다윗은 전쟁의 승리도 전리품도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죠. 다윗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받아들임과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과 나눔을 통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다윗은 체험했고 즐거워했습니다. 

 

받아들임을 생각할 때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이신 김응교 시인께서 ‘깍두기’에 대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옛날 동네에서 편을 갈라 놀이를 하면 자기와 실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아이들이 홀수 숫자일 때 편을 가르고 나면 꼭 한 명이 남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아이는 그 중에 가장 실력이 떨어진 친구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도 매번 깍두기였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를 “깍두기”라고 해서 더 못하는 팀에서 데려갑니다. 김응교 시인께서 하시는 말이 이 깍두기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나누지만 패배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깍두기, 니가 못해서 우리가 졌다고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각박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깍두기를 “왕따”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릅니다. 세상에서 왕따로 살아가는 인생들이 교회에서라도 깍두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호의(favor)가 교회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본적인 공기는 받아들임과 나눔이어야 합니다. 

 

5.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를 ’식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족은 씨족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같은 성씨를 갖고 한 피 받아 살아가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식구는 조금 더 넓은 개념입니다. 식구를 한자로 쓰면 밥식(食)에 입구(口)자를 씁니다. 함께 밥상을 나누는 사이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말의 Community와 성찬 떡과 포도 뜻하는 Communion은 거의 비슷한 단어이죠. 성찬을 함께 떼는 사이,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눠 먹는 사이를 우리는 Community라 부릅니다. 한 밥상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 먹는 사이이기 때문에 한 형제이자 한 식구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드립니다. 주기도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가 아니죠. ‘우리’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 아래 자녀된 공동체입니다. 아버지가 같으니 자연스레 우리는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어릴 적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희 가족은 12식구가 상 두개에 나눠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고 있다보면 꼭 동네 어떤 어르신이 놀러 오십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식사하셨어요?”, “얼른 오셔서 밥 한 술 뜨세요”라고 말하며 어떤 이든 밥상으로 초대하곤 하셨습니다. 그를 손님이 아니라 식구로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둥그런 밥상에 앉아 있노라면 어떤 이도 식구가 되어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차려 주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찬을 나누는 밥상 공동체입니다. 여기 오는 누구든 환영 받아야 합니다. 여기 오는 누구든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 존중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지 한 달이 됐든 몇 년이 됐든 모두가 한 식구이긴 매 한가지 입니다. 다하나 교회에 새로 온 목사인 저는 여러분의 형제인가요? 이 교회에 나온지 한 두 달 또는 1년이 채 안된 새 가족들은 여러분의 형제이자 자매인가요? 

 

다윗의 광야 공동체처럼 우리 모두는 광야같은 세상 속 한 가운데서 공동체로 모입니다. 광야란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독한 곳을 말합니다. 광야란 끈 떨어진 연처럼 외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광야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한 식구로 모이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공동체를 광야에서부터 실험하고 실천하였듯이 우리도 먼 미래에 이뤄질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 위에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먼저 은혜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도록 나눔과 받아들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6.

여러분에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에서 만나는 형제 자매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의미입니까?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형제이고 성찬을 함께 나누는 한 식구인가? 그가 만약 나에게 형제와 자매이자 한 식구라면 그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닌가요? 왜 그렇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 너무 이상해서 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약해서 그럴까요?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뀐 후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시나요? 혹시 나에게 은혜가 부족해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숨쉬고 움직이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 자체도 은혜입니다. 저의 큰 아들은 기도하라고 하면 꼭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살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 모두 오래 오래 살게 해주세요.” 너무 웃기잖습니까? 이녀석 6살에 아빠가 암수술을 받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험을 하고 나서 이 아이에게 생명이란 매우 실존적인 문제가 되어버린겁니다. 그에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죽음 앞에 서본 사람은 이 살아 있음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옆에 있는 형제 때문에 내가 혼자가 아니란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있음으로 나는 하나님을 더듬어 알아가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있음으로 나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잖아요. 매주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한 가족으로, 한 식구로 이곳에 모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리터지를 반복할 겁니다. 매주 만남을 통해 한 식구가 되도록 시도해 보는 겁니다. 목장 모임도 그런 의미에서 반복적인 리터지가 되어야 합니다. 정기적인 목장 모임은 우리에게 한 식구로 형성되어 가도록 돕는 리터지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에서 우리로 살아가는 리터지 속으로 우리를 집어 넣는 거죠.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받아들임과 용납 그리고 나눔의 실천은 은혜 받은 자가 마땅히 취해야할 삶의 태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나눔과 용납이 교회의 공기가 되어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오면 숨통이 트이고 살아갈 맛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하나교회가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Scripture: Psalm 113:1-3 / 1 Samuel 30:17-25
Title: One Family

번역: 박지한 군

1.
May the grace and peace of our good Father God be with you all. Have you been at peace over
the past week? Did you have a good Chuseok? There is a saying, “No more, no less, just like
Chuseok.” It's only been about 3 years since I've been to the US, so on Chuseok, I think of my
hometown. I want to eat Korean rice cake, and I miss my family a lot. I miss seeing my family
members, eating around the same table and sharing sorrow and joy on holidays like Chuseok.

Still, there is a church community, so we receive great comfort from living abroad. The church is
not a social organization, but a family-like community. Because in many ways the church
resembles a family community.
As I said last week in Psalm 133, a community in which brothers and sisters are united is a
community that God is pleased with and wants. Today, we would like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re is a passage called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the title of the 133th volume.
Psalm 133 is the story of David's life. In what life story and experience did David confess, “How
good and beautiful it is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in unity”? Let's dive into the story of David.

2.
God wanted to establish the kingdom of God on this earth through a community, not just one
person. So, he made a covenant with the nation of Israel and established them as a covenant
community. Covenant community means a nation that has made a covenant with God. God
promised blessings to Israel, and Israel promised to send God's blessings to all nations in

exchange for receiving those blessings. As a covenant people, Israel had to show the world a
beautiful model of the community.

David was a leader who understood this calling all too well. He has loved God since he was a
shepherd tending sheep in the empty fields. God paid attention to David from the time he was
in the field as a shepherd and anointed him as king. He dreamed of how to rule Israel in God's
name when he ascended to the throne in Saul's place. However, contrary to his dreams and
hopes, he is driven into the wilderness by his son-in-law and is driven away as a fugitive.
God trains the fugitive David to lead the community in the wilderness. He wanders through the
wilderness of Israel, leading a community, experimenting with the kingdom of God. In 1 Samuel
22, there is a scene where people flock to David, who is taking refuge in the cave of Adullam.
“David left Gath and escaped to the cave of Adullam. When his brothers and his father’s
household heard about it, they went down to him there.

2 All those who were in distress or in
debt or discontented gathered around him, and he became their commander. About four
hundred men were with him.” (1 Samuel 22:1-2)

David himself was a fugitive, and the burden of taking care of four hundred people must have
been enormous. And the people who came to him were not all normal people. They were
people who had gone bankrupt because of debt, people who were full of resentment because
of unfair trials, and people who had been discriminated against and bullied by people flocked to
David. People who have such scars and pain are generally hostile and aggressive towards
others. They continually hurt others. It would not have been an easy task to lead these rough
people and create a community.

Also, it must have been difficult to fill the stomachs of 400 people. In 1 Samuel 30, a story a few
years later, there are 600 soldiers who can go out for battle, meaning that the number of
people in David’s community grew significantly. This wouldn’t have happened unless the
community seemed very appealing. It must not have been easy for David to take them and live
as a fugitive from Saul. So David decides to find a town and settle down.

5 Then David said to Achish,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let a place be assigned to me in
one of the country towns, that I may live there. Why should your servant live in the royal city
with you?”
6 So on that day Achish gave him Ziklag, and it has belonged to the kings of Judah ever since.

David flees to King Achish of Gath, the land of the Philistines. Then he asks King Achish to give
him a city. But who are the Philistines? Their warrior, Goliath, was killed by David. So we can
see how urgent David's situation was when he went to the Philistines, who were Israel’s
enemies.

But strangely, King Achish accepts David and his hundreds of people, so the Davidic community
settle down and live there. However, as a war breaks out between the Philistines and Israel,
David's position becomes complicated. David volunteers to help the Philistines in war against
their fellow Israelites in order to survive. It was only then that the Philistine generals came to
their senses and pressured King Achish, saying that David cannot go to war. In the end, David's
army returned after three days' journey, back to Ziklag.

3.
Today's main story begins after David and the 600 soldiers returned to Ziklag. The Amalekites,
another group of people, were looting and roaming the southern part of Israel. They attack the
city of Ziklag, taking advantage of David and his soldiers still returning from the north. They
broke into the castle and set fire to it, and captured women, children, and even the elderly.
How did David feel when he saw the burned down city of Ziklag? The Bible tells us that David
and his men wept together and wept until they had no more strength to weep. 1 Samuel 30:6
says that David's men rushed to kill him, blaming him for the deaths.

6 "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because the men were talking of stoning him; each one was
bitter in spirit because of his sons and daughters.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But did David really do anything wrong? Still, people tend to seek out a scapegoat. David
overcomes this predicament by relying on God. David asks God what to do, and God tells him to
follow the Amalekites. As a God-centered community, the Davidic community follows David
into battle, and they defeat the Amalekites in two days and return to Ziklag with all their family
and loot. Not a single person was hurt because God protected them, and they found out that
the more they depended on God, the more he provided and protected for their community.

But before this victory, there was an incident. 600 soldiers pursued the Amalek, but only 400
went into battle. 200 were left behind as they had already come a long way and were
exhausted. They said to the others to go and fight for us, as we can’t travel any more. Here we
see the level of David’s army. Even if they rushed in with a “if we die, we die together”
mentality, their odds of victory are slim. Leaving 200 soldiers behind weakens their chances

even more. Regardless, 200 men rested by the brook of Besor, waiting for the other 400
soldiers to return from the battle. After two days, David defeated all the Amalekites, rescued
his family, and returned to the resting soldiers at the brook of Besor, who were overjoyed and
welcome David and his soldiers.

But what did the 200 resting soldiers look like in the eyes of the 400 who returned from
fighting? They despised them. They had risked their lives to fight the last two days, coming back
exhausted only to see the resting soldiers running to them and laughing. However, unlike them,
their leader David warmly greeted those who have fallen behind, even declaring to share the
loot equally with them.

Of the 400 men who fought, some wicked and mean men called David aside. “Leader, these
people haven’t done anything, you aren’t possibly planning on sharing our loot with them? Just
let them take their wives and children, and don't give them the loot we got from our fights,”
the men probably said. David establishes here a marvelous principle that will be established in
his kingdom. It was a law for everyone to share and enjoy. David makes this confession. “The
victories and spoils of war are the gifts the Lord has given us. The share of those who went to
war and the share of those who remained and protected things; it should be the same.
Everyone must share it equally.” In Israel after David, this has been an important legal
regulation. The kingdom of David had a different calling from the rest of the world. It was a
dream for all to enjoy equality and live in peace under the Lord's rule.

4.
David hoped that the kingdom he would rule would be a kingdom governed by God's statutes
and ordinances. He knew that where God's disposition and values are revered, God's rule is
there. Where there is sharing and acceptance, God’s kingdom will come.

What kind of church can we imagine through David's story of community? David's "life in which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was not a dream that was floating around. He actually created a
covenant community through acceptance and sharing. He accepted those who were driven into
the corners of Jewish society as brothers, and practiced a life of sharing with them. Acceptance
and sharing were the way to become one and the way to love.

Looking at today's events, David was a man who knew what grace was. We know all too well
that grace is something that even those who don’t deserve, receive. David acknowledged that
both the victory and the spoils of war were God's free grace. Because he received it for free, he
did not hesitate to share. David practiced acceptance and sharing based on the grace of God
that he received. And through that acceptance and sharing, David experienced and rejoiced
how great the joy was of having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When I think of acceptance, the words of Poet Kim Eung-gyo,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at
Sookmyung Women's University, come to mind. When we were young, we split up sides to play
a game, with children with similar skills playing rock, paper, scissors. When there are an odd
number of children after splitting the sides, there is always one left. The last child left was the
least skilled of them all. When I was young, I was always the kkakdugi (the odd one out). The
“Kakdugi” would go on the worse team. Poet Kim Eung-kyo says that this kkakdugi shares the

joy of victory, but does not take responsibility for defeat. It means that even if we lost, you can
never blame the Kkadugi. However, the world we live in has become a harsh, and we’ve
changed the name of kkakdugi to “being bullied”. We need to create a warm community so
that people who live with bullying in the world can live as a kkakdugi at church. We should
strive to ensure that the grace and favor we have received flows to all who come to church.
The atmosphere of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be accepting and sharing.

5.
In that sense, I like to call the church a “family”. Kin is a word that emphasizes the meaning of
living with the same surname and blood. However, family is a slightly broader concept. If you
write “family (sik-ku)” in Chinese characters, it spells “meal (sik)” and “mouth (ku).” It means
sharing a meal together. The words “community” and “communion” are almost identical. The
time we partake in communion, sharing the body of Christ together, is called Community. We
are people brought together by one meal. All of us gathered in the church are brothers and
sisters. We pray the Lord’s Prayer. The first verse begins like this: “Our Father in heaven.” Not
my father, He is called ‘our father’. We are a community of children under one father. Since we
have the same father, we are naturally brothers and sisters.

It reminds me of when I was young, sitting around a round table and eating. As a family of 12,
we all shared a meal on two tables. While eating, an old man from the neighborhood always
stops by. Then my mother would say, “Have you eaten?” and “Come and eat,” inviting anyone
else that stopped by. She thought of them as a family member, not a guest. Anyone who sat at
the round table became a member of the family.

The church is a “table community” where we share communion, prepared by God. Anyone who
comes here should be welcome. Anyone who comes here should be respected as a brother or
sister. Whether it's been a month or a few years since joining the church, we are all a part of
the same family. As a new pastor to Dahana Church, am I your brother? Are the new members
of this church, whether it’s been less than a month or almost a year, your brothers and sisters?

Like David's community in the wilderness, we all gather as a community in the middle of a
wilderness world . The wilderness is a lonely place where no one can help. The wilderness is a
lonely life like a kite that has fallen off a string. We are gathering as one family in the middle of
such a wilderness world. Just as David experimented and practiced his community in the
wilderness before he ascended to the throne, we are also building the kingdom of God on this
earth through the church in anticipation of the kingdom of God to be established in the distant
future. First, as those who received grace, we are practicing sharing and accepting so that God's
love and grace can flow through us to others.

However, sharing and accepting is not so easy. For it is essential to deny oneself in order to
accept the other. It is not easy for strong people to accept others. The Chinese character for “I
(我)” is a combination of “hand (手)” and sword (戈). The character “I” looks like and represents
an image of a hand holding a sword, protecting oneself. A strong ego refers to the standard one

has, in other words, a person with strong self-righteousness. The Pharisees were so self-
righteous that it was difficult for them to accept others. On the contrary, Jesus accepted

everyone without imposing his standards on them. When people to Jesus, they felt accepted
and at ease.

If we are to accept others, we must not impose our standards on others. I owe 10,000 talents. I
have been forgiven of all that debt, and I am a person who has received grace. That is why I can
tolerate and accept a brother who owes me only 1 denarius.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be loved equally by all under grace. Any sinner or any kind of person who comes here
should be accepted and welcomed. Everyone is a brother and sister here, regardless of his
status, background, or merit. Jesus Christ embraced everyone, despite being mocked as a friend
of sinners and tax collectors. He was also nicknamed a drunkard and still tried to accept
everyone. Wherever Jesus was, a table community was formed. He created a miracle from 2
fish and 5 breads, feeding thousands of people on an empty field, and even after he died on the
cross, he went to Galilee to prepare breakfast for his disciples. Jesus accepted anyone as a
member of the family and wanted to share with everyone.

We hope that Dahana Church will become a friend to many lonely people in Rochester as a
family that shares the body of Jesus. We hope that we will be filled with the grace that God
pours out, and that grace will flow through us and flow to those who need love. Like David's
community, where many people came to enjoy a rest in the wilderness, I hope that Dahana
Church will become a community of love and sharing.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2. 9. 25. 10:56

 

1.    레위기 개괄

 

    성경을 보실 때는 숲과 나무를 동시에 잘 봐야 합니다. 우리는 레위기라는 숲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 숲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숲이 무엇을 말하는 지를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숲을 거닐면서 숲 안에 어떤 나무와 생물들이 있는지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 17장의 말씀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요, 레위기 17장은 레위기 숲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부터 알아야겠죠?

 

레위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하나님의 몸부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위기를 딱딱한 율법, 읽으면 바로 잠들게 하는 수면제, 지금은 지키기도 힘든 넘사벽의 규율들 뭐 이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그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배기훈 목사님께서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이 바이크라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을 붙일 때 그 책의 맨 먼저 등장하는 단어를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레위기는 바이크라로 시작하기 때문에 바이크라라는 이름을 가졌죠. 무슨 뜻이냐면요. “그러나 부르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그러나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야웨께서 모세를 부르셨다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역접접속사라하여 앞 문장과 반대되는 문장이 뒤에 올 때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앞에 어떤 상황이 전제돼 있냐면요? 인간이 범죄하였으나,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혔으나, 인간이 범죄하여 모든 희망이 사라졌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바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삶에 다가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몸부림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 레위기라는 책입니다.

 

레위기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제사와 예물을 통해, 다른 말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둘째,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입니다. 예배와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거죠.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가까이가다, 접근하다라는 뜻을 가진 카라브라는 말입니다. 이 카라브라는 동사에서 제물을 뜻하는 고르반이 파생됐습니다. 제물인 고르반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거룩한 삶의 제물,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16장까지는 어떻게 제사하며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장부터는 27장까지는 어떻게 성결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장부터 27장을 일컬어 성결법전이라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조항들을 너희가 지킬 때 거룩해질 수 있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결법전이 말하는 것입니다.

 

2.    먹고 사는 것은 또 다른 예배이다.

 

이제 레위기의 숲에서 돋보기를 가지고 17장 나무들을 살펴볼까요? 17장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축을 잡을 때는 다른 곳에서 잡아서 회막에 가져오든지 아니면 회막에 와서 가져오든지 하라! 는 겁니다. 둘째는 피를 먹지 말라, 피는 육체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죠.

 

성결법전의 처음 조항이 가축을 잡고 먹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 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만하겠죠? 시간관계상 오늘은 특별히 회막에서 가축을 잡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우리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인사중에도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이 말이 진짜 잘 먹고 잘 사란 말인지는 모르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배고프면 살아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6.25를 겪으시고 격동의 50~60년대를 겪으신 어른들은 보릿고개를 아시고 배고픔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먹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어르신들이 얼마나 노력하셨습니까? 어르신들의 수고와 땀방울로 지금의 우리나라가 이렇게 먹고 살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의 성장도 먹고 사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성장했습니다.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으면 복받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기복신앙이 사람들에게 먹히면서 교회는 큰 성장을 이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먹고 배부른 삶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배불리우신 것을 경험하고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면 우리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없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엄청난 군중들이 따라 붙었었죠. 배부른 삶, 잘 먹고 잘 사는 삶은 우리 인간에게 핵심적인 문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성결법전의 가장 먼저 등장하는 율법조항이 바로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 하면 우리는 거창한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생각은 우리와 다른 듯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소소한 삶 가운데서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십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삶은 예배당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먹고 살아가는 곳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삶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회막 또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을 거룩하게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고, 회막 이외의 일상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잡은 고기를 회막에 가져와 화목제물을 드리거나, 회막에 와서 가축을 잡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가요?

 

예부터 고기를 먹는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어르신도 어려운 시절에 쌀밥 먹고 소고기 먹고 사는 삶을 동경하셨잖습니까? 저도 어릴 적 소고기 먹기가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소고기는 설에 떡국에 조금 들어 있는 그런 고기였죠.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가운데도 고기를 먹는 것은 큰 기쁨이었을 겁니다. 광야를 수 십년 이동해야 하는 공동체 가운데 가축을 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축을 아무데서나 잡아 먹는 것을 원천 봉쇄하신 듯합니다. 잡아 먹더라도 제사장의 입회하에 필요없는 부위는 제사로 드리고 화목제물로 서로 나눠먹으라는 겁니다. 혼자 몰래 얍쌉하게 먹지 말고 잡아서 함께 나눠먹으라는 하나님의 신적 자비가 녹아있는 법률 조항인 것이죠.

 

화목제는 자기 이웃들을 초청하여 제사를 드린 고기를 서로 나눠 먹는 제사방법입니다. 이웃들과 고기를 먹고 나눔으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목적이 첫째 목적입니다. 화목제의 다른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먹고 살기 힘든 이웃들이 화목제를 통해 고기맛을 보기를 원하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의도된 제사방법입니다.

 

아까 어릴적 소고기 먹는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소잡는 날을 추억해 보면요, 한동네에서 누구네 집 소잡는다더라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집에 모여듭니다. 거기서 직거래가 이뤄지죠. 개똥이네 천엽 한 근, 길동이네는 간, 순이네는 소꼬리, 영희네는 소가죽 이래 저래 필요한 만큼 소고기를 사갑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생고기로 육회파티가 벌어집니다. 기름장에 찍어서 먹는 맛은 일품이죠. 군침들 삼키시는 것 같은데 제가 잘 못봤나요? 소잡는 날은 동네 잔치고 축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누구네 집이 오늘 화목제 드린다더라 하면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3.    함께 나눔으로 거룩함을 나타내어라.

 

자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레위기의 전반부 16장까지가 어떻게 믿을까의 문제라면 17장부터 27장까지의 성결법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때 거룩해 질 수 있는지를 규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첫 규율이 가축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곳에서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한 예배를 통해 거룩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먹고 사는 영역 즉 우리의 일상의 영역 안에서도 거룩함이 이뤄지기를 원하십니다.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가축 한 마리를 잡더라도 함께 나눠먹고 이웃을 보살피라는 하나님의 신적 자비 정신이 이 율법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인 것이죠.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나눔을 실천할 때에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는 것이 오늘 이 법률조항의 핵심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여러분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는 쉽지만 일상을 하나님께 드리기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이제 내일 모레면 민족의 대명절 추석입니다. 추석에 나의 것을 나누고 베풀만한 이웃이 누구인지 살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냄으로 큰 기쁨 누리는 추석명절을 보내시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4. 6. 15:25
오랜만에 글을 올린다.

4월 25일이면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요일이고 번동 평화 교회 오후 3시 ( 꼭 광고하는 느끼?? ㅎㅎ)

돌아보면 신대원에 들오온 이유는 명확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통해 신학적인 뼈대를 잡는 것이었다.

신대원 졸업후 구약학으로 대학원 졸업까지 앞두고 있으니 배울만큼은 배웠다.

그 당시 목사는 생각도 안했다.

그러나 이제 목사 안수를 20일 앞두고 목사 안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내가 왜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는가?

다른 친구들은 목사가 되기 위해 신대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니 그런 친구들이 많다.

나는 애당초 목사 안수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목사 안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한 번 생각해 본다.

솔직히 목사안수가 부담스럽다.

사회적으로 목사에게 부과되는 윤리적, 지적, 도덕적 중압감이 크기 때문이다.

타이틀만 목사이고 삶은 전혀 다르게 사는 건 딱 질색이다.

성직자라는 정체성이 쉬운 건 아니다.

스님, 신부님들을 생각해 봐도 구도자로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많은 대가 지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가 지불 없이 희생 없이 그 타이틀에 맞는 특권만 누리고 싶지는 않다.

진지하게 기도하며 목사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싶다.

목사 안수 후 내 삶을 향한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한다.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나는 이 문제로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아직은 이야기 하기 이른 단계이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 안에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쪼록 나의 선택이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결정이었음 좋겠다.

예수님 따라가는 길로....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