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없다면 우리 일상은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 보셨나요? 습관이 없다면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순간이 결단이라는 것에 봉착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칫솔질은 앞니부터 할지 어금니부터 할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할지 왼손으로 할지, 우유는 냉동실에 둘지 냉장실에 둘지,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행하고 결정하는 습관적인 행동들이 모두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면 우리 삶이 힘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습관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뇌는 우리가 행하는 수 없이 많은 행동들을 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면 뇌가 너무 피곤해 지는 것이죠. 그래서 뇌는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행동 기저핵이라는 뇌의 특정 부분에 저정을 해놓고, 그 상황이 벌어지면 생각하여 결정하는 대신에 저장해 두었던 행동양식을 꺼내서 반응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것이 뇌와 관련된 습관의 비밀이죠.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나 태도 또는 자세가 습관이 되려면 뇌가 생각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만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 것이죠. 테니스 같은 운동을 배우면 코치가 계속 공을 피딩해주면서 한 동작을 무한 반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일정한 동작들은 습관적으로 수행되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란 뜻을 가진 ‘habit’은 원래 유럽의 수도승들이 입었던 복장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라틴말 ‘habitus’에서 유래된 건데 ‘상태, 스타일, 연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수도승들은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통일된 복장을 입게 됩니다. 수도회마다 수도복의 색깔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유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수도복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죠. 베네딕토 수도회는 까만색 해빗을 입기에 ‘블랙 몽크’라 불리웁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갈색이나 잿빗 해빗을 입고 허리에 청빈, 순결, 순종을 의미하는 세 개의 띄를 묶어서 늘어뜨린다고 합니다. 해빗을 입은 수도사들에게 는 개인의 욕망이 드러날 틈이 없습니다. 해빗을 입음으로 그는 자동적으로 수도회의 가치에 헌신하고 하나님께 순명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이죠 이렇게 해빗(habit)은 단순함, 일상성, 익명성, 반복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말은 수도복이 그 수도회의 영성의 색깔을 나타낸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승처럼 해빗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의 습관들은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드러냅니다.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수 없이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빗을 덧입는 길 밖에 없습니다. 몸을 사용한 일상의 반복적인 결단과 실천 밖에 좋은 해빗을 덧입는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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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 필유린”

 공자가 말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論語)에 나온 글귀입니다. 논어는 인간관계를 위한 책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이 지녀야할 도리들을 설파한 공자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한 사회를 발전시키며 지탱시킬 힘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이자 덕목은 인()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랑’인 것이죠. 사랑과 덕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가 한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공자는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의 이런 기본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위의 글귀를 해석해 본다면, 덕()이야 말로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이해입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 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백범 선생은 이 글귀를 토대로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것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건강이 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 마음을 갈고 닦는 내적 수양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수 없이 많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서 우리가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이웃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묶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우리 삶에 숙제처럼 부여되는 것이죠.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거하시는 결과물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갈 5:22-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모두 성품과 인격에 관련된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덕()이라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후의 삶의 목적은 바로 덕을 수련하여 키워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촉진시키는 연결고리가 바로 덕이기 때문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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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사회성이 없다고 평가 받는 노인이 있다.  그는 사브만 타왔고 볼보나 독일차를 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는 흑백으로 이뤄진 남자다. 그의 아내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는 숫자를 좋아했고 수학만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학공장에서 일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그가 여덟 즘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나마 남아 있는 아버지의 단어들을 가져가 버렸는지 말이 더욱 없어졌다. 그가 고등학생일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흑백일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는 무뚝뚝했다. 어느날 기차를 기다리며 만난 그녀는 그의 삶에 위로였다. 남자는 40 동안 그의 삶을 채색했던 아내가 죽자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짓궂은 이웃들이 끼어들며 그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 간다. 전혀 계획이 없이 이웃들과 엮이면서 그의 삶은 다른 색깔로 채워진다. 무뚝뚝하고 인간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따뜻한 남자는 오베라는 남자이다. 

 

지난 주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감동과 눈물을 책은 오랜만입니다. 먼저 항상 외국 소설을 읽을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들도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미네소타의 이주민 중에 스웨덴 같은 북유럽인들이 많다보니 흥미를 갖고 봤는데 한국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웃에 사는 코카시안들도 내가 갖는 기쁨과 절망, 환희, 슬픔 등의 감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겠구나라는 이해가 훨씬 깊어진 듯합니다. 두번째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이웃로컬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고 이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환희와 기쁨을 선물해 있는지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 애써이웃 우리 사전에서 지우려하고골칫덩어리 고쳐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곁가지일 있지만 저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두리안입니다. 두리안은 겉에 딱딱한 갑옷이 쌓여 있는 과일입니다. 갑옷에다 가시까지 겉면을 싸고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겉모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겉면을 벗기면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하는 사차원의 향기는 과일을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과육을 사람은 과일의 진가를 압니다. 오베라는 남자가 두리안같은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이웃들에게 딱딱하고 가시 돋은 말을 하는 그였지만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와 어울리기를 기뻐합니다.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웃 사랑의 기쁨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봅니다. 두리안 처럼 부담스럽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이웃이지만, 그들은 무미건조한 우리 삶에 색과 맛을 줄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다른 오베가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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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2. 9. 25. 10:56

 

1.    레위기 개괄

 

    성경을 보실 때는 숲과 나무를 동시에 잘 봐야 합니다. 우리는 레위기라는 숲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 숲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숲이 무엇을 말하는 지를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숲을 거닐면서 숲 안에 어떤 나무와 생물들이 있는지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 17장의 말씀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요, 레위기 17장은 레위기 숲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부터 알아야겠죠?

 

레위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하나님의 몸부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위기를 딱딱한 율법, 읽으면 바로 잠들게 하는 수면제, 지금은 지키기도 힘든 넘사벽의 규율들 뭐 이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그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배기훈 목사님께서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이 바이크라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을 붙일 때 그 책의 맨 먼저 등장하는 단어를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레위기는 바이크라로 시작하기 때문에 바이크라라는 이름을 가졌죠. 무슨 뜻이냐면요. “그러나 부르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그러나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야웨께서 모세를 부르셨다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역접접속사라하여 앞 문장과 반대되는 문장이 뒤에 올 때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앞에 어떤 상황이 전제돼 있냐면요? 인간이 범죄하였으나,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혔으나, 인간이 범죄하여 모든 희망이 사라졌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바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삶에 다가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몸부림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 레위기라는 책입니다.

 

레위기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제사와 예물을 통해, 다른 말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둘째,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입니다. 예배와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거죠.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가까이가다, 접근하다라는 뜻을 가진 카라브라는 말입니다. 이 카라브라는 동사에서 제물을 뜻하는 고르반이 파생됐습니다. 제물인 고르반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거룩한 삶의 제물,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16장까지는 어떻게 제사하며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장부터는 27장까지는 어떻게 성결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장부터 27장을 일컬어 성결법전이라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조항들을 너희가 지킬 때 거룩해질 수 있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결법전이 말하는 것입니다.

 

2.    먹고 사는 것은 또 다른 예배이다.

 

이제 레위기의 숲에서 돋보기를 가지고 17장 나무들을 살펴볼까요? 17장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축을 잡을 때는 다른 곳에서 잡아서 회막에 가져오든지 아니면 회막에 와서 가져오든지 하라! 는 겁니다. 둘째는 피를 먹지 말라, 피는 육체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죠.

 

성결법전의 처음 조항이 가축을 잡고 먹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 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만하겠죠? 시간관계상 오늘은 특별히 회막에서 가축을 잡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우리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인사중에도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이 말이 진짜 잘 먹고 잘 사란 말인지는 모르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배고프면 살아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6.25를 겪으시고 격동의 50~60년대를 겪으신 어른들은 보릿고개를 아시고 배고픔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먹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어르신들이 얼마나 노력하셨습니까? 어르신들의 수고와 땀방울로 지금의 우리나라가 이렇게 먹고 살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의 성장도 먹고 사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성장했습니다.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으면 복받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기복신앙이 사람들에게 먹히면서 교회는 큰 성장을 이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먹고 배부른 삶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배불리우신 것을 경험하고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면 우리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없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엄청난 군중들이 따라 붙었었죠. 배부른 삶, 잘 먹고 잘 사는 삶은 우리 인간에게 핵심적인 문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성결법전의 가장 먼저 등장하는 율법조항이 바로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 하면 우리는 거창한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생각은 우리와 다른 듯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소소한 삶 가운데서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십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삶은 예배당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먹고 살아가는 곳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삶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회막 또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을 거룩하게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고, 회막 이외의 일상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잡은 고기를 회막에 가져와 화목제물을 드리거나, 회막에 와서 가축을 잡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가요?

 

예부터 고기를 먹는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어르신도 어려운 시절에 쌀밥 먹고 소고기 먹고 사는 삶을 동경하셨잖습니까? 저도 어릴 적 소고기 먹기가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소고기는 설에 떡국에 조금 들어 있는 그런 고기였죠.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가운데도 고기를 먹는 것은 큰 기쁨이었을 겁니다. 광야를 수 십년 이동해야 하는 공동체 가운데 가축을 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축을 아무데서나 잡아 먹는 것을 원천 봉쇄하신 듯합니다. 잡아 먹더라도 제사장의 입회하에 필요없는 부위는 제사로 드리고 화목제물로 서로 나눠먹으라는 겁니다. 혼자 몰래 얍쌉하게 먹지 말고 잡아서 함께 나눠먹으라는 하나님의 신적 자비가 녹아있는 법률 조항인 것이죠.

 

화목제는 자기 이웃들을 초청하여 제사를 드린 고기를 서로 나눠 먹는 제사방법입니다. 이웃들과 고기를 먹고 나눔으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목적이 첫째 목적입니다. 화목제의 다른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먹고 살기 힘든 이웃들이 화목제를 통해 고기맛을 보기를 원하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의도된 제사방법입니다.

 

아까 어릴적 소고기 먹는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소잡는 날을 추억해 보면요, 한동네에서 누구네 집 소잡는다더라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집에 모여듭니다. 거기서 직거래가 이뤄지죠. 개똥이네 천엽 한 근, 길동이네는 간, 순이네는 소꼬리, 영희네는 소가죽 이래 저래 필요한 만큼 소고기를 사갑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생고기로 육회파티가 벌어집니다. 기름장에 찍어서 먹는 맛은 일품이죠. 군침들 삼키시는 것 같은데 제가 잘 못봤나요? 소잡는 날은 동네 잔치고 축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누구네 집이 오늘 화목제 드린다더라 하면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3.    함께 나눔으로 거룩함을 나타내어라.

 

자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레위기의 전반부 16장까지가 어떻게 믿을까의 문제라면 17장부터 27장까지의 성결법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때 거룩해 질 수 있는지를 규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첫 규율이 가축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곳에서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한 예배를 통해 거룩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먹고 사는 영역 즉 우리의 일상의 영역 안에서도 거룩함이 이뤄지기를 원하십니다.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가축 한 마리를 잡더라도 함께 나눠먹고 이웃을 보살피라는 하나님의 신적 자비 정신이 이 율법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인 것이죠.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나눔을 실천할 때에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는 것이 오늘 이 법률조항의 핵심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여러분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는 쉽지만 일상을 하나님께 드리기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이제 내일 모레면 민족의 대명절 추석입니다. 추석에 나의 것을 나누고 베풀만한 이웃이 누구인지 살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냄으로 큰 기쁨 누리는 추석명절을 보내시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