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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1.05 이민진 장편 소설, 파친코 1, 파친코 2를 읽고... 2
  2. 2020.01.23 존번연 "천로역정" 독후감

나는 2015년부터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중국, 미국 서부, 이제는 미국 중부에 거주하며 고향을 떠난 이민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경계선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중심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경계선에 서 있고 marginalized된 이들의 고충을 절대 모른다.나는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으로서 작가였던 서경식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글에는 경계선에 선 자로서 갖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있었고  우울하지만 애수에 찬 삶을 향한 동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마지널라이즈드 되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예술을 해석했고 작품들을 해석했다. 그의 글을 통해 나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갖게 되었고 경계선에 선 자로서의 시선을 장착할 수 있었다. 

이민진의  파친코는 이민자, 나그네, 순례자, 디아스포라와 같은 비슷한 단어들에 많은 노출을 한 내 삶을 끌어 당기기에 매력있는 소설이 분명했다. 왜냐면 일본 사회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한국 사회에서 조차 일본인으로 취급되는 자이니치 조센진들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경계선에 선 자들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 내고 독자들에게 전달해내는 지 그 방법과 분위기가 사뭇 궁금했다. 

소설을 읽기 전, 애플티비를 통해 드라마 "파친코"를 본 것은 실수였다. 소설부터 보았어야 했다. 왜냐면 드라마는 이민진 작가의 의도를 많이 왜곡했고 많은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지 않고 소설만 읽었어도 좋았을 뻔 했다. 드라마에는 없고 소설에는 있는 이야기 중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노아"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드라마에는 노아의 어린 시절이 나온 후 그의 삶이 통째로 삭제 되었다. 파친코 소설에 있어서 노아의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존재감이 없는 드라마는 주제면에서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작가는 노아를 통해 자이니치 조센진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을 건드리고 싶었다. 노아는 선자가 한수의 씨를 받아 생긴 아들이지만, 30년 넘게 자신의 아버지가 이삭으로 알고 자라온 인텔리 청년이다. 인텔리면 뭐하나? 그는 자신의 신분적인 배경 때문에 일본 사회의 주류에 낄 수 없는 한계를 어린 시절부터 직시한다. 그의 그러한 민족적인 정체성을 심화시키고 갈등을 증폭시킨 것은 그의 삶에 조용히 드리운 한수의 그림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마저 부정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나가노라는 제 3의 장소를 찾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로부터 뽑혀 살 수 없는 식물과도 같았다. 16년을 숨어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 선자가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신의 생을 통째로 도려 내버린다. 이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란 것, 인생의 으미라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결국 정체성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선자가 이삭의 묘지에 갔을 때 묘지 관리인으로부터 노아가 나가노에 있을 당시에도 이삭의 묘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결국 노아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본을 향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연약한 존재였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결국 정체성, 뿌리, 근본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에 이 정체성이란 것은 호흡과도 같은 소중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60-80년대에 이민와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주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만 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것은 너무나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자녀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켜 본 이들은 이 고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갔을 때 미국 주류 사회는 아무리 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도 그들을 끼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인과 미국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나그네들에게 정체성이란 호흡과 같다는 것을 새삼스레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이민자들의 삶의 현실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친코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업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야쿠자이거나 야쿠자와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파친코였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그런 시선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이면 어떤가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왜냐면 일본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돈으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돈은 신적 유사성을 가진 물건이다. 돈이 있으면 신이 가지고 있는 전능성을 발휘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돈을 소유하고 거부가 된다면 그들은 그 사회 속으로 편입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민감한 사회였다. 백이삭 목사의 아들 모자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정직하게(?) 파친코 사업을 해가며 부를 축적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유일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자기와는 다른 고상한 직업을 갖고 일본의 상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아들 솔로몬도 결국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사회의 높은 벽을 통감한 것이다. 모자수가 그렇게 존경하고 따랐던 그의 형 노아도 와세다 대학까지 나온 수제였지만 그 또한  파친코 사업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자 했고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구원이 되어주었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조선인들이 꿈꿔 왔던 야망과 열망 그리고 욕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파친코를 통해 일본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의 한인 이세 삼세들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경험한다고 익히 들어왔다. 유색인종으로서 이 사회 상류까지 진출하는 데 느끼는 한계가 많이 있다고 들었다. 이민진 작가는 본인 스스로가 7살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와서 살아온 경계인으로서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는 파친코를 통해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을 조명했지만 그 깊은 동기에서는 미국내에서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빗대어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파친코를 단숨에 읽으며 가장  충격이 됐던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노아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그의 아버지 이삭의 묘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부분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 이민 이세 이민 삼세들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아들들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배타적인 일본사회 그리고 일본인들이 더 싫어지는 것은 나의 잘못만은 아니겠지? 일본사회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열린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나의 헛된 기대이자 바람일까? 소설 파친코는 경계선에 서 있는 순례자로서의 나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다. 

Posted by speramus

<천로역정>

  1. 요약

    존 번연(John Bunyan)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단말인가?”라는 물음 앞에 놓인 ‘크리스챤’이라 불리는 한 사나이의 구원의 여정을 “천로역정 – The Pilgrim’s Progress”라는 책으로 그려냈다. 천로역정이란 구원의 문제에 발버둥 치고 죄의 짐에 눌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던 한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 도달하게 되는지 여러 비유들과 서사를 통해 그려낸 책이다. 크리스챤의 하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존 번연은 ‘Pilgrim-순례자’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 순례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며 참배하다”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다. 순례란 진리를 좇아 떠나는 목적과 함께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걷는 여행을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본서에서 크리스챤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자신이 살고 있던 ‘멸망의 도시’ 빠져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를 그 도시로부터 이끌었다. 도시를 빠져 나왔음에도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탄식은 충분히 해결되지 못한 그의 불안한 마음을 나타내며, 그의 순례의 길은 그렇게 무작정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순례의 여정에서 그를 천국으로 이끄는 여러 돕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도시를 탈출한 그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지자는 ‘전도자(Evangelist)’였다. 전도자의 길안내를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가야할 순례의 길을 명확하게 깨닫고 말씀과 예언자적인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그 순례를 마칠 수 있으리라 믿게 된다. 계속해서 뷰티플 저택에서 만나는 신중, 경건, 분별, 자선과 같은 자들도 있어고 해석자 목자들 같은 사람들이 그의 여정에 많은 통찰력과 위로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의 앞에 돕는 돕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넘어뜨리려서 어떻게 해서든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서고 돌이키게 하려는 방해 세력들이 넘쳐 났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악한 영들과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의 뀀에 넘어 간 사람들이거나 마귀의 세력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크리스챤의 천국을 향한 소망을 흐려 놓거나 방향을 상실하게 만들거나 현재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리는 데에 있었다. 크리스챤은 캄캄한 골짜기에서 아보루온이라하는 악의 화신과의 전투를 치뤄야 하기도 했고 마귀들과의 혈투를 벌여야 하기도 했다. 허망시장이라는 도시에서는 옥에 처해지기도 했고 데마라는 자는 은광을 통해 돈으로 그를 유혹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명확한 목적지와 지향점 그리고 말씀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절망 거인의 집에 갇힌 신세가 되기도 하지만 언약이라는 열쇠를 통해 빠져 나오기도 한다. 

크리스챤은 그의 여정에서 신실과 소망이라는 동반자를 통해 많은 위로와 힘을 얻는다. 신실과 소망은 함께 천국의 여정을 가는 믿음의 동지들이자 기대고 의지할 친구였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여정에 허락하신 믿음의 친구들을 통해 크리스챤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여 그의 구원의 여정을 마치게 된다. 신실과 소망으로 대표되는 크리스챤의 순례의 동반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의 또 다른 매개물이었다. 신실은 안타깝게 허망시장에서 먼저 순교를 당하여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였지만, 크리스챤의 믿음과 인내도 칭찬받기에 충분했다.

 

2. 독서비평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의 집에는 그림으로 된 천로역정이 비치돼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로역정은 늘 나의 가까이에 있던 책이다. 지금도 그림책 안의 크리스챤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를 위협했던 사자의 포효도 섬뜩하게 뇌리를 스쳐간다. 그가 짐을 지고 절벽을 넘는 그림과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 기뻐하며 주님을 맞는 환희에 찬 그림도 기억에 또렷이 박혀 있다. 천로역정은 나로하여금 늘 천국을 향한 소망을 새겨주는 책이었다. 믿음의 여정이 순탄하지만 않지만 견디고 이겨내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 반드시 있음을 마음 깊은 곳에 품게 만들었던 것이다. 작년 여름 개봉한 영화 “천로역정”을 본 후 읽은 책이어서 더욱 생생하게 읽혀졌다.

우리 구원의 여정에 있어 십자가를 통해 죄짐을 벗고 구원의 확신을 갇게 되지만 그 이후에 믿음의 여정은 계속된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 그 순례의 길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순례의 여정은 우리네 인생 전체를 묘사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됨을 볼 수 있다. 선과 악의 대결, 그리고 대항자들과 조력자들과의 만남을 통한 승리의 여정이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 악의 세력과의 조우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현대 사회는 ‘죄’라는 실체를 증상, 병리현상, 결핍, 결여 등의 단어로 약하게 희석시켜 놓는 경향이 있다. 죄의 실체를 깨닫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으려는 것이 현대 교회의 특징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대항자인 사단의 거대한 전략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죄의 실체를 알고 그 죄와 싸워야 하고 그 죄에 빠뜨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큰 과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대항세력으로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유기적이고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책의 신실과 소망과 같이 동행하며 격려하며 일으켜 주는 하나님의 지체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한 크리스챤이 중간중간 만난 예언자들처럼 우리가 어떻게 걸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목회자는 그런 의미에 있어 크리스챤과 같은 믿음의 순례길을 걷는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예언자요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천로역정은 한 평생 설교자요 목회자로 살아 온 존 번연의 목회서신이기도 하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목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 길을 제시하고 싶었다. 죄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또 다른 크리스챤을 생각하며 온 마음을 다해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자신의 신학을 이야기로 만들 줄 알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성도들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며 해석해 줄 수 있는 존 번연 같은 목자가 되길 간절히 꿈꿔 본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과연 구원의 여정이 우리의 현실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여정뿐일까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게 된다. 현실 속에 뿌리내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망과 그 안에서 이뤄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몸부림은 이제 우리 시대의 몫으로 남겨 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또 다른 존 번연이 나와 마지막 날에 이르게 될 예루살렘 성이 아닌 현 세계에서 만들어 나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서 천로역정 속편이 만들어 지길 기대해 본다. 아니 내가 맡게 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단락 한 단락 그것을 만들어 가리라.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