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참 사랑의 실천은 공의의 실천입니다.
강남의 부자와 강북의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떤 사람이 더 수긍하기가 쉬울까요?
(강남과 강북을 예를 든 것은 편가르기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예이기 때문입니다.)
강남 부자가 훨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가난한 사람과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수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느끼기에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에게 참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불의한 제도에 대한 개선과
그들을 억압하고 차별했던 차들을 정의롭게 심판하는 것이 그들의 피부에 와 닿는 복음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조되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간과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의 사랑이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통해 더 많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이 없을 때
한 쪽 바퀴를 잃어버린 반쪽 짜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공의와 정의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면인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사회 가운데 공의와 정의가 실천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 유명한 이사야 강해 설교를 하시죠.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이것이 주님이 선포한 복음의 중요한 맥락이다.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 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하시어
그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의로워져야 하고,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있는 사람들은 훨씬 예수님의 사랑을 수긍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좀 덜 가진 자들이 주님의 사랑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 땅의 정치가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말해야 하고, 때론 비판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이 사회의 부조리함과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는 하나님의 꾸짖음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아모스 5장 7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24)"
이 말을 깊이 되세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묵상2013. 9. 23. 2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