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릴적 바로 옆집이 교회였기 때문이었죠. 제가 태어나기 몇 년 전 부모님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면소재지로 이사를 해 오셨는데 그곳이 하필 교회 옆집이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이야기가 딱 이런 경우죠. 묵을 가까이 하면 자연스레 검어지듯 교회 가까이 있으니 자연스레 신앙에 젖어들어 가게 되었나봐요. 평일에도 교회에 가면 목사님과 사모님은 늘 저희를 환영하며 환대해주셨죠. 당시 사모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시는 도너츠를 비롯한 온갖 신기한 간식꺼리들이 넘쳐나니 교회는 제게 마냥 기쁨의 공간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공과 공부시간에 대답 잘 한다고 칭찬 받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었죠.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인정욕구를 채움받으며 시작된 교회 생활이 청년시절에는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바꼈습니다. 예배가 좋았고 교회를 통해 행해지는 선교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교회는 저의 꿈과 비전을 실현하는 꿈의 공간으로 탈바꿈 했던 듯합니다. 그리고 선교지에서의 시련과 험난한 인생여정을 통과하며 하나님은 새로운 교회에 대한 꿈을 꾸게 하셨지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변화된 저의 교회관 속에서 다하나교회와 연결되게 됐죠. 지난 9주간 “다시 만나는 교회”라는 책을 통해 제가 꿈꾸고 바라는 교회에 대한 그림을 몇 몇 분들과 함께 나눴고, 이번 토요일에 아쉬운 마무리를 했습니다. 

  “나의 삶이 회복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다른 이들을 회복하는 삶으로 쓰임받게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그것이 God for us를 통과하고 God with us를 느끼면서 God through us의 삶으로 쓰임 받는 과정인 것 같아요.”, “쇼핑하듯 큰 교회 위주로 교회 생활을 해 왔었는데, 이제 교회 가족의 일부가 되고 섬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큰 기쁨이예요.”, “저는 저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돌봄과 환영 받기에만 익숙했던 이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고 섬김의 자리에 나아가면서 성장해 가는 것 같아요.” 모든 인용구절의 말씀들은 함께 공부했던 교우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착한 일(to do good things in the world)을 행하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 위에 이뤄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교회인 우리를 통해 이뤄집니다. 우리가 교회이고 매일의 삶이 교회인 그 거룩한 부르심에 우리 모두는 초대받았습니다. 교회인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흩어지며,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목적 때문에 교회를 찾아왔지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꿈에 접속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다시 만나는 교회’이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룻기 24-16

제목: 환대, 우리의 공기어야 합니다.

 

1.     누구집에 속한 사람인가?

  보리 추수를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 어린 시절 가장 싫어했던 추수 중에 하나가 보리 추수였습니다. 한국에서 보리 추수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합니다. 5월 말이 되면 한국은 더워지기 시작하죠. 보리 추수가 힘든 것이 더울 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리의 끝부분에 달린 까끄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까끄라기는 옷에 잘 달라붙고 살을 스치면 상처를 입히면서 매우 따갑게 만듭니다. 보리 추수가 무척 힘든 일이기 때문에 어떤 농부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면 하루 날 잡아서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이밭 저밭 흩어져서 보리 추수를 도왔답니다. 보리 추수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간식 시간이었어요. 학생들을 불러 온 집 주인은 반드시 학생들의 품삯 대신 맛있는 간식을 내 와야 했어요. 어떤 날은 잘 걸리면 보름달 빵에 아이스크림까지 먹게 되는데, 간식을 먹을 때만은 모든 친구들이 행복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보리 추수는 여러분 생각보다 훨씬 힘든 노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팔레스틴 땅에서 보리추수는 4월 초에 시작됩니다. 늦은 비가 그치고 건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4월 초입니다. 유월절 명절이 보리 추수 시기와 겹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룻은 우연히도 나오미의 친척인 보아스의 밭으로 들어가 보리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름의 뜻이 기억나시나요? “빠름, 쾌속이라는 뜻이라 했죠. 보아스도 우연히 룻이 이삭을 줍는 그 시간에 자신의 밭을 한 번 둘러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낯선 여인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조그만 마을에서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은 쉽게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반에 모르는 학생이 앉아 있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옆에 친구에게 저 아이는 누구인지 물어보겠죠? 보아스도 일꾼들을 감독하는 마름(manager)에게 물어봅니다. “저 젊은 여인이 누구집의 아낙인가?” 보아스는 룻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의 이름이나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룻이 누구 집에 속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딸이며 혹은 누구의 종인지 궁금해하면서 룻의 가족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봤는데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화면에 원숭이, 펜더, 바나나가 있습니다. 둘을 하나로 묶는다면 여러분은 셋 중에 어떤 것을 하나로 묶으시겠습니까? 한국을 비롯한 동양사람들의 대부분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이렇게 묶는 동양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대요. 왜냐면 서양사람들에게는 같은 종류, 그러니까 동물끼리 묶는 것이 상식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반면 동양사람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원숭이와 바나나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소개서를 쓰라고 해도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소개한데요. “저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23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관계로 자기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한국식의 자기소개서이죠. 보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보다 룻이 누구와 관계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죠. 누구의 집에 속해 있는 지가 그를 아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던 거죠.

 

2.      헤세드는 헤세드로

  8절부터 보아스와 룻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8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 머무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고 있습니다. 룻의 안전을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함께 있으라 (Keep close)” 라는 동사는 이미 114절에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동일하게 쓰인 적이 있습니다.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cling to).”에 쓰였어요.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어머니에게 더 달라붙은 룻이었죠. 그런데 이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보아스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기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 붙어 있으라고 권하고 있는 겁니다. 보아스는 룻의 안전을 염려 했고 이외에 한 가지 더 조치를 취합니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도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건드리지 말라는 말은 희롱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룻은 젊은 여자였고 게다가 이방에서 온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던 것을 보아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꾼들은 ~ 이 젊은 여자는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이 여자는 주인님의 보호아래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룻기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룻의 결단과 결정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 정말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우리가 행한 헤세드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 주신다는 거죠. 룻이 늙으신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동서가 떠나는 것과는 반대로 어머니에게 더 달라 붙었었죠. 이에 대해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룻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밭에 더 달라 붙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녀가 어머니를 위해 행한 보호 행위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녀를 보호해 주시는 것으로 갚아지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원래 시작은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들을 선하게 대해준 것부터 였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선대해주었기 때문에 며느리 룻이 나오미를 선대한 것이었죠. 그리고 룻이 시어머니에게 선대한 것이 입소문을 타고 베들레헴에 퍼졌고 보아스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룻의 착한 행동이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렇게 헤세드는 돌고 돌고 돌아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표정이 헤세드가 뭐예요?”라고 하고 있는데요. 헤세드란 언약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행해야 하는 신실한 태도예요. 언약적인 관계란 말이 어렵죠? 언약관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만 사랑할게요.”라는 약속을 맺은 관계를 말해요. 결혼을 할 때 서로 약속하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마음 주지 않고 이 사람만 사랑할게요.”라구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언약관계예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언약관계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고 약속하잖아요. 그렇게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예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겠다는 약속인 거죠.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라가겠다고 하면, 하나님도 가만히 있으시지 않아요. 하나님도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삶에 좋은 것들을 쏟아 주신답니다. 이것이 헤세드예요.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헤세드를 주었고, 룻은 그 헤세드를 시어머니에게 갚아주었어요. 그런데 룻이 행했던 헤세드가 이제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되갚아지고 있는 거예요.

 

3.     떠나고 떠나서 하나님 품으로

  11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과 대화를 나누면서 룻이 행한 가장 큰 미덕이 무엇인지 꼬집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봅니다.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보아스는 룻이 떠나고 떠난 행동을 높이 평가해 주고 있어요. 집 떠나면 뭐다? 고생이다. 떠나는 것은 고생을 사서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여행을 좋아합니까? 떠나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얻는 게 많아집니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것들을 포기하는 용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룻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집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임을 보아스는 알고 있어요. 태어난 땅을 떠났다고 칭찬해주고 있잖아요.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땅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보아스는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11절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성경의 인물이 떠오르지 않으신가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고향과 아버지 집과 친척들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땅으로 가잖아요. 성경은 우리 믿음의 본질이 떠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내가 편하게 여기고 나의 만족을 위한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자 본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치관의 변화죠.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변한다는 것이 가치관의 변화죠. 예배를 의미하는 worship이라는 것이 가치를 의미하는 worthcondition이나 character를 의미하는 -ship이 합해져 만든 말이잖아요. 워십이란 하나님이 가장 가치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나의 욕망에서 돌아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 살았던 인생이 이제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나아가 하나님과 연결되게 되는 것이지요. 보아스는 룻의 이런 돌아섬의 놀라운 용기와 결단을 칭찬해 주고 있는 겁니다.

 

4.     환대는 우리의 공기어야 합니다.

  보아스의 친절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가 꿍꿍이 속이 있어서 이렇게 과한 친절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룻도 보아스의 친절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던 것 같아요. 13절 말씀을 보면 어른께서 이토록 잘 보살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잖아요. 룻은 이런 대우를 받게 될 거란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지만 보아스의 친절은 전적으로 룻이 시어머니에게 보여준 헤세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런 친절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이제 당신은 우리 편이예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보아스는 룻에게 울타리를 쳐주면서 이제 우리 편에 들어온 한 팀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보아스가 맨 처음 물었던 질문에서 우리는 알 수 있었죠. “저 여인이 뉘 집의 아낙인가?”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못해 외롭게 살아가는 룻과 나오미를 자기 편에 끼워주는 보아스의 따뜻함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운동신경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구는 곧잘 했지만, 축구는 젬병이었습니다. 축구를 할 때면 잘 못하니 아이들은 저를 잘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도 목사되겠다는 분들이 축구대회 같은 데 나가면 절대 안 끼워주더라구요. 축구하면서 소속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지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축구는 국가대표 경기도 잘 안 봅니다. 룻이 느끼는 불안감과 불편함의 가장 큰 부분은 소속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환대로 말미암아 룻은 소속감을 처음 느껴보게 되었을 겁니다.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우리 나라 놀이문화에서 깍두기라는 것이 있잖아요. 둘씩 짝을 만들어 팀을 나눌 때 한 명이 남을 때가 있죠. 어떤 팀에도 끼지 못한 아이를  깍두기라고 부릅니다. 보통 깍두기는 어떤 놀이를 가장 못하는 아이예요. 그런데 깍두기를 놀이에 끼워주나요 안 끼워주나요? 깍두기도 놀이에 끼워줍니다. 깍두기라고 왕따시키지 않아요.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품고 가는 것이 우리 민족이 가진 좋은 문화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깍두기를 가진 팀이 이기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깍두기로 여기고 그녀를 우리편 먹자고 얘기하고 있어요.

식사 때가 되어서 그는 룻에게 함께 음식을 먹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색해 할까봐 빵조각을 초에 찍어서 먹으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꾼들이 이방 여인에게 눈치를 주기 전에 미리 차단하기 위해 보아스가 그렇게 얘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아스는 볶은 곡식까지 듬뿍 퍼담아 룻에게 건내 줍니다. 룻은 볶은 곡식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었다는 것 때문에 든든함을 느꼈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환대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 받는 이는 저 사람이 나를 환영해 주고 환대해주는구나 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죠. 룻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삶 자체가 환대와 포용이 몸에 배어 있는 듯 합니다. 환대와 포용이 보아스의 인격 안에 녹아 있는 거죠. “교회의 공기는 환대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실천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환대와 포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곳에 오는 어떤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린 아이더라도 이곳에 오면 대접받고 존중 받아야 합니다. 저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누군가가 우리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것 중에 하나입니다.

 

5.     맺는 말

오늘 몇 가지 포인트로 본문을 함께 나눴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헤세드에 대해 반드시 동일한 헤세드로 보상해 주신다는 겁니다. 헤세드는 또 다른 헤세드를 낳는 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테크니 금()테크니 하는 말들이 있잖아요. 참고로 저는 아들 셋이어서 자()테크를 하는 중입니다. 요즘은 몸의 근력을 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투자라면서 근()테크라는 신조어가 생겼대요. 그런데 저는 헤세드 테크만큼 남는 투자도 없다고 봅니다. 헤세드 테크, 헤테크(惠澤) 어떠신가요? 헤테크하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 멤버십 써비스인 다양한 혜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헤헤헤헤 웃음을 주고도 남는 헤테크에 여러분의 삶을 투자해 보십시오.

두번째로 믿는 것은 돌아서는 것과 떠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관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갈아 타는 것입니다. 이 결단은 쉽지 않지만, 떠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극진한 보호하심이 따라다니니 손해보는 것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세번째로 환대는 우리 교회의 공기어야 한다는 것을 나눴습니다. 교회에서 만큼은 어떤 깍두기도 놀이에서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환대를 실천하고 연습하셔야 합니다. 환대가 여러분의 기본 인격이 되도록 연습하십시오. 맛있는 식사대접보다 상대방에게 환영과 환대를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빵을 초에 찍어 드십시오. 그리고 볶은 곡식도 넉넉히 넣어 두세요.”라며 룻에게 주는 보아스의 환대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만의 환대의 이야기,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 보십시오. 적어도 내가 있는 이곳 만큼은 살맛나는 세상이고 아름다운 세상이구나 라는 것을 환대로 증명해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적대를 의미하는 hostility와 환대를 의미하는 hospitality는 한 글짜 차이입니다. 그러나 적대가 가득한 세상과 환대가 가득한 세상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환대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Text: Ruth 2:4-16

 

Title: Hospitality should be our air.

translated by MinJun Hur

 

1.    Who do you belong to?

 

  Have you ever been to a barley harvest? One of my least favorite harvests growing up was the barley harvest. In Korea, barley harvest starts in late May or early June. By end of May, it is hot outside. It's hard to harvest barley not only because of the weather, but also because of the awns on the end of the barley. Awns stick to your clothes, and when they graze your flesh, it hurts. Because it's so hard to harvest barley, some farmers ask elementary and middle schools for help. They set aside a day for the students to come, and all the students spread out across the fields to help harvest the barley. No matter how hard the harvest was, there was always a time to look forward to, and that was snack time. The owners would reward the students with a delicious snack. Some days, you get lucky and get to have full moon bread and even ice cream. I remember all of my friends being so happy when we had snacks. You should know that harvesting barley is much harder work than you might think.

 

In the Palestinian lands where the Israelites lived, the barley harvest begins in early April. Early April is when the rains stop and the dry season begins. The Passover coincides with the barley harvest.  As we said last week, Ruth happened to pick up barley in the field of Boaz, who happened to be a relative of Naomi's. If you remember the meaning of Boaz's name, it means "quick, swift." Boaz happened to be taking a look at his field at the same time Ruth was there, and he noticed a strange woman gleaning in his field. In a small town, it's easy to stand out when you're not well known. If someone you didn't know sat in your class, you would definitely ask your friend next to you who he or she was, right? So Boaz asked his manager, the man who oversees the laborers, “who does that young woman belong to?” Boaz doesn't ask Ruth directly, and he doesn't ask for Ruth's name or where she is from. Instead, he asks who she belongs to. Boaz is inquiring about Ruth's family relationship, wondering whose wife she is, whose daughter she is, or whose servant she is.

 

I once watched a TV show called "Happened to be Adult" and there was scene like this: there's a monkey, a panda, and a banana on the screen. If you were to put two of them together, which two would you put together? Most people in the East, including Koreans, would put the monkey and the banana together, and Westerners don't understand why people in the East do this, because to Westerners, it's common sense to put things together that are the same kind, for example in this case animals. In contrast, in the East, it's all about relationships, and monkeys and bananas have a very deep relationship, so they're grouped together. When Koreans are asked to write a cover letter, they don't talk about themselves, they talk about relationships. "I was born the youngest among two boys and three girls to a strict father and a loving mother," is a typical sentence in a Korean cover letter focused on relationships. Boaz is the same way. It's not so much about who Ruth is. It is about who she is related to, and the quickest way to get to know her was to know who she belonged to.

 

2.    Hesed makes another Hesed...

 

  The conversation between Boaz and Ruth begins in verse 8. In verse 8, Boaz is encouraging Ruth to stay in his field and not go to another field. He is asking her to keep a close eye on the women working in his field. This is a consideration for Ruth's safety. The same Hebrew verb, "keep close," has already been used in chapter 1 verse 14. "Ruth rather clung to her [her mother-in-law.]" Ruth clung to her mother-in-law to protect her and keep her safe from being alone. Now, in order to protect Ruth, Boaz is encouraging her to cling to those who belong to him and not go elsewhere. Boaz is concerned about Ruth's safety, and he takes one more step to ensure her safety: he orders the young male workers not to touch her. When he says don't touch, he means don't harass. Boaz knew that because Ruth was a young woman and a foreigner, she was an easy target for men. The workers might have thought, "Oh, we shouldn't touch this young woman, she's under the master's protection."

 

 

 

As we read through the book of Ruth, we see that God always rewards Ruth for her determination and decisions. I think that's one of the very important principles of faith, that for every Hesed (kindness) we do, God will reward us with Hesed. Ruth clung to her mother-in-law as opposed to her sister-in-law. In response, God uses Boaz and allows Ruth to cling more to his field. We see that the act of protection she did for her mother is now being repaid by God protecting her. But it all started with Naomi's good treatment of her daughters-in-law. And because Naomi was good to her daughters-in-law, her daughter-in-law Ruth was good to Naomi. And because Ruth was good to her mother-in-law, word of mouth spread to Bethlehem and reached the ears of Boaz. And because Ruth's good deed touched Boaz's heart, Hesed went around and around and around, making many people happy.

 

 

 

The children's faces are saying, "What's a hesed?" A hesed is an act of faithfulness between people who are in a covenantal relationship. A covenantal relationship is a relationship in which there is a promise, "I will love you and no one else." When you get married, you promise each other, "I will never give my heart to anyone else, but only to you." The relationship between a mother-in-law and a daughter-in-law is also a covenantal relationship. Also is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us. We promise to believe in God and to follow God, and when we make that promise, we promise not to love anything else more than God. We promise to love God the most. When we love and follow God like that, God doesn't stand still. God protects us and pours out good things into our lives. This is Hesed. Naomi gave her daughter-in-law Ruth hesed, and Ruth paid her mother-in-law back, and now the hesed that Ruth had done is being paid back to her through Boaz.

 

 

 

3.    Leaving and going to God

 

  In verse 11, we see Boaz talking to Ruth and pointing out what he believes to be her greatest virtue. "Didn't you leave your father and mother and the land where you were born, and come to a different people, a people you didn't know until just now?" Boaz is praising Ruth for her act of leaving and going away. What is leaving home? It's hardship. To leave is to actively seeking hardship. To travel is to seek hardship. But why do people like to travel? When you travel, you discover something new and you gain something. But it takes courage to leave behind what is stable and comfortable. Boaz knows that it takes a lot of courage and determination for Ruth to leave her parents’ house. He praises her for leaving the land of her birth. I think Boaz knows how hard it is to live in a land with a different culture and a different language. As you read the passage in chapter 11, what other Bible character comes to mind? Abraham. Abraham also left his home, his father's house, and his relatives to go to a land where God has sent him. The Bible tells us that the essence of our faith is leaving.

 

 

 

Turning away from a life of comfort and complacency is the beginning and essence of faith. In a word, it's a change in what you value. This is why the word worship comes from the word worth, which means value, and -ship, which means condition or character. Worship is a confession that God is most valuable. Trusting in God begins with turning away from my own desires that I used to value. A life lived for only myself is now connected to others and to God. Boaz is commending Ruth for her incredible courage and determination.

 

 

 

4.    Hospitality should be our air.

 

  Some of you may be thinking, "Isn't Boaz's kindness too much?" or "Isn’t he showing this much kindness because he has an ultimate motive?" I think Ruth felt awkward also. In verse 13, she confesses, " You have put me at ease by speaking kindly to your servant—though I do not have the standing of one of your servants." Ruth was not expecting to be treated like this at all. But as we have seen, Boaz's kindness was based entirely on the hesed that Ruth had shown her mother-in-law.

 

If we were to summarize Boaz's kindness in one word, it would be, "Now you are on our side." Boaz seems to be fencing Ruth in and telling her that she is now part of the team. We see this in Boaz's very first question, "Who does she belong to?" We can feel the warmth of Boaz, who embraces Ruth and Naomi, both lonely women who don't belong to anyone.

 

 

 

I was not very athletic as a kid. I was good at baseball, but I was terrible at soccer. I always finished last in track. When I played soccer, other kids did not include me because I was not very good. In seminary school, other pastor-to-bes never included me when we went to soccer tournaments. I learned how much it hurts to not belong to a team, and to this day, I don't even watch the national soccer team. A big part of Ruth's anxiety and worry must have come from not belonging to anyone. Boaz's hospitality may have been her first taste of the sense of belonging.

 

 

 

As I mentioned before, in Korean culture, there’s something called the "odd man out." When children are paired up and divided into teams, sometimes one child is left behind. That child is called the odd man out. Usually, the odd man out is the one who is the worst at a certain game, but do you include him in the game or not? We do include him in the game. We don't bully him. It's a good part of our culture to embrace the weak and the marginalized, and the team with the odd man out is usually more likely to win later. Boaz sees Ruth as the odd woman out and invites her to be on his side.

 

When it's time to eat, Boaz invites Ruth to join him. He doesn't want her to feel awkward, so he says, " Have some bread and dip it in the wine vinegar." Perhaps Boaz is trying to prevent workers from paying too much attention. Boaz doesn't stop there, he also scoops up a generous portion of roasted grain and hands it to Ruth. Ruth may have felt comforted, not by the roasted grain, but by the sense of belonging to a community. It's been said that the greatest hospitality in the world is good food. When you're served good food, you realize that this person is welcoming you and showing you hospitality. We can imagine how Ruth must have felt.

 

Boaz's very life seems to be one of hospitality and inclusion; it is woven into his character. It has been said that "hospitality should be the air of the church".  A church that follows and practices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should practice the hospitality and inclusion that Jesus Christ practiced. No one who comes here should be left out. Even if they are a child, they should be treated and respected when they come here. One of the most heartbreaking things for me is when someone is turned away from our community because they don't feel like they belong.

 

 

 

5. Closing remarks

 

There are a few points today. The first is that God always rewards us with the same hesed for the hesed we have done. Remember that hesed begets another hesed. Nowadays, we are interested in bank investments and gold investments, and we have a new phrase “muscle investment,” meaning the wisest investment you can make is to build your body's strength. There is investment that pays off more than any of these which is “hesed investment.” Various benefits in God's membership service are waiting for those who invest in hesed. Let's invest our lives in hesed, hehe will make you smile.

 

The second thing is that faith is is turning around and leaving. It's about changing from the values I used to hold dear to God's values. It's not easy, but those who leave will never lose because God's extreme protection will follow them.

 

The third thing we shared was that hospitality should be the air of our church; no one should be left out of the game. You need to practice and rehearse hospitality in your life. Practice it so that it becomes your default character. Remember the story of Boaz's hospitality to Ruth when he said, "Have some bread and dip it in the wine vinegar." And create your own story of hospitality, your own story of grace, your own story of love. Let us all prove ourselves that at least the place we live in is a good place, a beautiful place.

Posted by speramus

본문: 룻기 21-3

제목: 우연과 운명 사이

 

1.     기뽀르 하일(Gibbor Hail)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The Gleaners)”라는 그림은 아주 유명합니다. 세 명의 여인이 추수하는 밭에서 이삭을 줍는 그림이죠. 룻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이 그림이 연상이 되는 것 같아요. 농사를 지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삭줍기가 낭만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죠. 이삭을 줍는 것은 모든 수확이 다 끝나고 이루어집니다. 보리나 벼를 다 배고 수확을 마친 후 밭에 남아 있는 이삭을 줍는 것이죠. 이삭을 줍는 이들은 그 이삭이라도 주어서 배고픔을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림의 여인들은 매우 절박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삭이라도 주워서 살아갈 마음으로 열심히 이삭을 줍고 있는 것입니다. 룻도 마찬가지죠. 이국 땅에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살아가기가 막막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밭도 없고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죠.

  룻기 21절에서 나레이터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뭔가 중요한 정보 한 가지를 주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명 있었대요. 친족(kinship)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원래는 잘 아는 사람이란 뜻이예요. 나오미의 남편 이름이 뭐였죠? 엘리멜렉이었습니다. 엘리멜렉 쪽의 친척이 있었는데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거죠. 그의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의 뜻은 빠름, 쾌속이예요. 뭔가 이름에서부터 빨리 달려와 이 두 여인을 구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보아스를 설명하는 다른 표현이 있는데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입니다. 이는 기뽀르 하일(Gibbor Hail)’이라는 히브리 말을 번역해 놓은 건데,  권력 있는 사람, 덕망 있는 사람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혹시 잠언 31장 후반 절에 현숙한 여인 을 히브리 말로 뭐라 했었는지 기억나세요? “에쉐트 하일(Eshet Hail)”입니다. 에쉐트는 여자라는 뜻이고 하일은 능력있다, 힘쎄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잠언 다음에 바로 룻기가 이어진다고 했죠. 룻기는 집안을 먹여 살리고 일으키는 능력있는 여인의 실례로서 소개되고 있는 거라 말씀드렸었죠. 그런데 이 에쉐트 하일과 댓구를 이루는 것이 바로 기뽀르 하일이예요. ‘능력있는 남자라는 뜻이예요. 룻이 에쉐트 하일이라면 보아스는 기뽀르 하일이예요. 힘쎄고 능력있는 여자와 재산이 많고 능력있는 남자의 콤비네이션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나눔이 거룩함이다.

   2절은 어느 날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라고 한 번 더 룻이 외국사람이었다는 것을 리마인드 해주고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어떤 밭이든 나가서 그 밭주인이 허락해주면 그곳에서 이삭을 줍고 오겠다고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삭 줍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레위기 199-10절의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9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10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 율법에 의하면 추수할 때 흘린 곡식은 마을의 가난한 사람과 외국인 품꾼들이 주워갈 수 있도록 줍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밭의 모퉁이는 아예 추수도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래요.

십일조도 이 원리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지는 헌금입니다.  모든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것을 나누는 것이예요. 여러분은 용돈을 받고 수입이 생길 때 십분의 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떼어 놓으시나요? 우리 교회의 재정 사용은 어떤가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이삭을 우리는 남겨 두고 있나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레위기 19장 말씀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나누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거룩한 일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항상 관심이 많으세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처럼 어떤 사회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고 잘 먹고 사는 것에 하나님은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계시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 중에 하나는 이런 사람들을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셨어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교회에 다니기 싫어하는 지 물어보면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들 해요. 예수님 믿으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삶이 귀찮아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삶이 귀찮다는 거죠.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먼저 율법은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는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콜로라도의 덴버에 가면 로키산맥을 직접 차를 가지고 넘을 수 있어요. 그런데 가파른 절벽에 만들어진 도로인데도 가드레일이 없습니다. 정말 웬만큼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런 길에서 운전하기 힘들어요. 그런 곳에 떨어지지 못하게 돌이나 가드레일을 세워 놓은 다면 운전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겠죠. 율법은 그런 거랍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 삶이 더 안전해 지는 것이죠. 또한 율법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실천하는 베들레헴 사람들 때문에 룻과 나오미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이유가 생겼잖아요.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는 율법을 실천하면서 공동체도 아름다워지고 실천하는 그 사람의 삶도 아름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저의 어린 시절에 주일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서 쓰레기를 주어야 했어요. 매주 실천하면서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것이 몸에 익숙하게 되었죠.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형성시켜 주는 중요한 도구가 된답니다. 율법을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눔이 거룩함이라는 것을 레위기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눔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3.     우연과 운명사이

    율법의 역할과 함께 오늘 우리가 살펴볼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우연히라는 단어예요.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밭을 찾아 다녔겠죠. 그런데 룻이 이삭을 줍기 시작한 밭은 우연하게도 시어머니의 친척이었던 보아스의 밭이었어요. 그리고 나레이터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친척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룻은 친척의 밭을 찾게 되고 이삭을 줍게 된 걸까요? 룻기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일의 배후에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우연한 것처럼 일어난 일이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계획이자 섭리였던 거예요. 우리말 우연히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미크레(mikreh)”인데요 이 단어는 성경에서 여덟 번 쓰이는데 주로 전도서에서 쓰입니다. 전도서 3:19절 말씀에 이 미크레는 이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닥치는 운명이나 짐승에게 닥치는 운명이 같다. 같은 운명이 둘 다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가 죽듯이 다른 하나도 죽는다.” 죽음이란 것이 미크레라는 거죠. 죽는 것은 운명이라는 거예요. 반드시 일어날 일이 운명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룻이 보아스의 밭을 우연히 들어간 것 같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그 밭으로 인도해 주셨던 것이죠.

 

우리의 삶에 우연히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지금 부모님께 태어난 것은 우연인 것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그것은 운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게 만드신 거예요. 여러분이 로체스터라는 도시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것이 우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운명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하루 만나는 직장 동료와 이웃 사람들이 우연히 여러분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 속에서 이미 착한 일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인 거죠.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 그 자리에 보내신 겁니다.

 

룻에게도 우연이었겠지만 보아스라는 남자에게도 룻이 자기 밭을 찾아 온 것은 우연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그것은 운명이었습니다. 룻이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아스도 룻의 사랑 가운데 온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룻과 보아스에게 서로가 운명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분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은 여러분의 운명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운명을 바꿔 놓을 사람이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4.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의 몫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룻은 어쩌면 자신을 돌보는 하나님의 손길을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룻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밭에 나가 이삭을 줍기로 결정한 것이었죠. 하나님은 그런 룻의 삶을 기억하시고 그녀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신 것이었죠. 여기 청소년들도 있고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우연히 찾아 온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도 그렇구요.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그 가정에 태어난 것은 아니 잖아요? 친구들도 마찬가지구요. 또한 여러분들의 재능도 우연히 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우연이 여러분의 운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저는 어려서 네 가지 정도 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음악과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음악가와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배고픈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요리사가 되고 싶기도 했어요. 음악 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정하더라구요.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서 지금 여러분 앞에 서있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이 이렇게 이뤄진 것 같아요. 야구나 음악 그리고 요리는 취미생활로 즐기고 있구요.

저는 가족의 권유에 의해 법학과에 들어갔어요. 정말 법학이 하기 싫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법학과를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법학과 4년을 다니고 나니까 많은 것들에 있어 제게 훈련이 되었어요. 논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구요. 법조항을 구체적인 사건과 케이스에 적용하는 훈련들은 나중에 성경을 통해 삶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죠. 우연히 들어간 그 일 때문에 저의 운명이 바뀐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좋은 텔런트를 한 가지 이상은 주셨을 거예요. 어린이 여러분~ 방학이잖아요. 그냥 게임만 하고 놀면서 사는 것도 좋지만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잘 하는 것에 시간을 들여 노력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이종범이라는 한국의 유명한 야구 선수의 스토리를 유튜브를 통해 보았어요. 이종범 선수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대요. 그런데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자기 옆집에 김기태라는 형이 살고 있었는데 그 형이 야구부에 들어갔대요. 집이 바로 옆이니까 같이 집에 가려고 야구를 시켜 달라고 했대요. 우연하게 김기태 선수의 옆집에 살았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이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운명을 이종범은 스스로 개척해 갔어요. 이종범은 키가 작고 몸도 크지 않아서 스윙 스피드와 빠른 발을 이용해 좋은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대요. 하루에 300개씩 타이어 치기를 하는데 2 시간 정도 매일 연습을 했대요. 그래서 그는 도루왕이 되었고 타격왕이 되었죠.

룻은 홍시가 나무에서 떨어지를 바라며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직접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간 사람이었죠. 하나님은 그런 룻의 삶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녀에게 최고의 선물을 준비해 주고 계셨던 거예요.

 

오늘 우리는 짧은 구절에서 두 가지 포인트를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둘째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우연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매우 작은 일,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주 작은 우연한 일이 우리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님은 절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돌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좋은 공동체를 만나게 하셔서 우리 삶을 돌보시기도 하십니다. 가정이나 교회같은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도 하죠. 여러분 주변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십시오. 그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거룩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여러분의 운명을 힘껏 개척해 나갈 때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겁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들어가시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시죠. 여러분이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Text: Ruth 2:1-3

Title: Between Coincidence and Fate

translated by Wi Chungil

 

1. Gibbor Hail

Millet's painting "The Gleaners" is very famous. It is an illustration of three women gleaning grain in a harvest field. When I read the book of Ruth, I think I am naturally reminded of this picture. For those who have never farmed, gleaning may seem romantic. Gleaning occurs after all harvests are finished. After barley or rice is harvested and the harvest is finished, the ears of rice left in the field are picked up. The gleaners are the ones who have to give at least that glean to satisfy their hunger. The women in the picture are diligently picking up grains with a heart to live by picking up grains in the midst of a very desperate and difficult situation. Same goes for Ruth. Naomi and Ruth returned to their hometown of Bethlehem from a foreign country called Moab. They had no fields, and it was hard to find anyone to turn to for help.

   In Ruth 2:1, the narrator gives the reader something important information. There was a relative on Naomi's husband's side. It was translated as kinship, but it originally meant a person who knew well. What was Naomi's husband's name? It was Elimelech. She had a relative on Elimelech's side, but it was a close relative. His name is Boaz. The meaning of Boaz is “quick, rapid”. Doesn't it make you feel like something's going to come running fast and save these two women? However, there is another expression to describe Boaz, which is ‘he was a man of wealth.’ This is a translation of the Hebrew word ‘Gibbor Hail’, which means “a person of power, a person of virtue.” Do you remember what the Hebrew word for ‘a wise woman’ was in the latter part of Proverbs 31? This is “Eshet Hail.” Eshet means woman and Hail means powerful. In the Hebrew Bible, it is said that the book of Ruth follows immediately after Proverbs. I told you that the book of Ruth is presented as an example of a woman of power who feeds and raises her household. However, it is “Gipor Heil” that forms a counter phrase with this “Echette Heil”. It means 'a man of ability'. If Ruth is “Esheet Heil,” Boaz is “Gipor Heil.” You can see that these words are used to emphasize the combination of a strong and powerful woman and a wealthy and powerful man.

 

2. Sharing is holiness.

    Verse 2 reminds us once again that Ruth was a foreigner, “And Ruth the Moabite said to Naomi.” Ruth asks Naomi, her mother-in-law, for permission to go out to any field and glean there if the owner permits it. To understand gleaning, you must first know the law of Leviticus 19:9-10. “9 When you reap the harvest of your land, do not reap to the very edges of your field or gather the gleanings of your harvest. 10 Do not go over your vineyard a second time or pick up the grapes that have fallen. Leave them for the poor and the foreigner. I am the Lord your God.” According to this law, grain spilled during harvest must not be picked up so that the poor in the village and foreign workers can pick it up. Don't even harvest the corner of the field and save it for the poor.

But the really important thing is that Leviticus 19 says,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starts with the words. So, caring for the poor and sharing life with them is a very holy thing in the eyes of God.

 

There will always be poor people in this world. God is always interested in the poor and the marginalized. God is very interested in helping those who are marginalized in a society, such as the poor and foreign workers, live like human beings and eat well. One of the purposes of God establishing the church is to take good care of these people. God wanted us to practice this kind of love by giving us the law. If you ask people who don't go to church why they don't like to go to church, they often say it's because there are so many things not to do. If you believe in Jesus, don't do this, don't do that, it means that life becomes annoying. So, living by keeping the law is annoying. Why did God give the Israelites the Law? First of all, it is because the law becomes a guideline that protects our lives. If you go to Denver, Colorado, you can cross the Rocky Mountains with your own car. However, even though the road is built on a steep cliff, there are no guardrails. It's really hard to drive on those roads unless you have a strong heart. It would be much safer to drive if there were stones or guardrails to prevent falling in such places. The law is like that. By keeping God's laws, our lives become safer. Also, the law is what makes our lives beautiful. In other words, it plays a role in making us people of God. Poor people like Ruth and Naomi had a reason to live because of the people of Bethlehem who practiced the law given by God. As we practice the law to take care of those in need, the community becomes beautiful and the life of the person who practices it becomes beautiful. The law becomes an important tool for shaping us into people of God. Do not forget that by repeatedly practicing the law, we become people of God. God is telling us through the words of Leviticus that sharing is holiness. You too can change into a man of God by sharing the good things you have with those in need.

3. Between coincidence and fate

     Along with the role of the law, another important point we will look at today is the word “by chance.” Ruth must have been looking for fields to glean. The field where Ruth started to glean was coincidentally the field of Boaz, a relative of her mother-in-law. And the narrator emphasizes once again that Boaz was a relative of Naomi. Did Ruth really accidentally find her relative's field and glean? Throughout the book of Ruth, God is at work behind everything. It happened like a coincidence, but in hindsight, it was God's plan and providence.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accidentally” in Korean is “mikreh.” This word is used eight times in the Bible, mainly in Ecclesiastes. In Ecclesiastes 3:19, this mikre is used like this. “Surely the fate of human beings is like that of the animals; the same fate awaits them both: As one dies, so dies the other.” Death is mikreh. Death is fate. Isn't it fate that will surely happen? So, it seems that Ruth accidentally entered Boaz's field, but it was not a coincidence but fate. God had led Ruth to that field.

 

We must know that everything that happens by chance in our lives can be God's providence. Children, it feels like it was a coincidence that you were born to your parents now, right? But that's fate. God made you born to your parents. It may feel like a coincidence that you're moving and living in the city of Rochester, but it's fate. The co-workers and neighbors you meet on a day-to-day basis do not happen to be around you. God made that person and is already starting a good work in them. You are an errand boy sent by God for that person. God sent you to this place now to love your neighbor.

 

It may have been a coincidence for Ruth, but it seemed like a coincidence for a man named Boaz that Ruth came to visit his field. But it was fate. Ruth seems to be cared for and loved one-sidedly, but Boaz was also able to become whole in the midst of Ruth's love. Ruth and Boaz were each other's fate. Take a look at the people around you. You did not meet these people by chance. These people are your fate. Together with these people, we have been given the mission to build God's kingdom on this earth. Cherish the things that happen to you like coincidences. Cherish each and every person you meet. Because no one knows if they will be the ones who will change your destiny.

 

4. Destiny belongs to those who pioneer themselves.

God does not leave us as orphans. Ruth may have already felt God's hand taking care of her. Ruth decided to go out and glean in her field to shape her own destiny. God remembered Ruth's life and led her to Boaz's field. There are teenagers and children here. There are many things that come to your life by chance. So is the family. You didn't choose to be born into that family, did you? So are your friends. Also, your talents seem to have been given to you by chance. But that coincidence can shape your destiny. You need to carve out your own destiny.

 

When I was young, I had a dream that I wanted to do about four things. I love music and baseball so much I wanted to be a musician and a baseball player. I also wanted to become a chef because I lived in a time when I was hungry. I also wanted to become a teacher because I like a music teacher and English teacher. But what I like determines how I will live my life. I became a teacher and now I stand in front of you. I think my dream of becoming a teacher has come true. Baseball, music and cooking are my hobbies.

God must have given you at least one good talent. Kids, it's vacation. It's good to just play games and live while having fun, but I think it'd be nice to spend time doing what you like and are good at. I like baseball, so I watched the story of a famous Korean baseball player named Jong-beom Lee on YouTube. Jong-beom Lee started playing baseball in the 3rd grade of elementary school. But he said that the reason he started playing baseball was because he had an older brother named Ki-tae Kim who lived next door to him, and Ki-tae Kim joined the baseball club. Jong-beom Lee said he started playing baseball to go home with Ki-tae Kim since his house is right next door. He happened to live next door to Ki-tae Kim, and that became his fate. However, Jong-beom Lee pioneered that destiny himself. Jong-beom Lee was short and not very tall, so he worked hard to become a good baseball player using his swing speed and quick feet. He hits 300 tires a day, and he practiced every day for about 2 hours. So he became the stealing king and the hitting king.

Ruth was not the kind of person who sat with her mouth open under a persimmon tree, hoping that the persimmons would fall off the tree. He was a man who sought God's help and shaped his own destiny. God took pity on Ruth's life and was preparing her the best gift.

 

Today we learned two things in a short passage. First, we learned about how the law of God shapes us as people of God. Second, we learned that the coincidences that happen in our lives can become the fate that God has given us. This is why we must do our best for the very small things and the seemingly insignificant people. Because the smallest coincidence can change our destiny. Above all, don't forget that God takes care of all of our lives without leaving them alone. God also takes care of our lives by letting us meet good communities. We experience God's love through communities such as home and church. Sometimes God takes care of us through someone. Actively care for the marginalized and poor around you. It is because the practice of that love is a very holy act in the eyes of God. And God will surely help you as you shape your destiny with all your might within the circumstances given to you. God creates beautiful stories through beautiful people and creates a beautiful world. Bless you to be such beautiful people.

Posted by speramus

본문: 룻기 119-22

제목: ‘마라라 하지 마라

 

1.     이게 나오미라고??

 

나오미가 10년 만에 고향인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10년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저를 보더라도 10년 전에는 머리 숱이 지금보다 훨씬 풍성했는데 이제는 살아남은 머리털이 얼마 없습니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옛날의 10년은 지금의 10년과는 그 무게가 달랐을 겁니다. 10년만에 사람이 폭삭 늙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오미가 10년만에 고향에 돌아오자 베들레헴 전체가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여행객들이 멀리서 방문하는 것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10년만에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이웃이었던 나오미가 돌아온 것입니다. 분명 떠날 때는 4인 가족이었는데 돌아 올 때는 두 명 뿐입니다. 떠날 때는 나오미에게 든든한 남자 셋이 있었는데, 돌아올 때는 낯선 이방인 며느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gossip 꺼리를 찾아 남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것은 어느 민족을 가리지 않나 봅니다. 온 마을이 들썩였다는 것은 나오미의 귀향이 온 마을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오미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기도 했을 겁니다.

 

여인들에게 ‘antiaging’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관심이 많은 주제였나 봅니다.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며 나이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어떤 심한 고난이나 중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은 더 빨리 늙게 됩니다. 나오미를 보며 아낙내들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오미냐?”, “이게 나오미 맞아?” 이 질문의 숨겨진 뜻은 아마도 이러했을 겁니다. “나오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폭삭 늙어 버린거야? 처음 봤을 땐 나오미인지 정말 몰랐었다니까.” 지난 주에 저도 둘째 누나와 영상통화를 잠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누나가 거의 울먹이며 전화를 다시 했더라구요. 제가 너무 안 돼 보여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 걸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고국을 떠나 사는 동생이 안스러운 마음은 가시지 않나 봅니다. 고국을 떠나 사는 것은 우리를 알게 모르게 빨리 늙게 만들 수 있습니다.

 

Food mile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식품이 생산지에서 운송과 유통을 거쳐 소비자의 식탁에까지 오르는 거리를 Food miles라고 합니다. 제가 선교사 훈련을 받을 때 강사님이 이 개념을 선교사들에게 적용을 하시더라구요.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나면 몸과 마음이 상하게 되는데, 본국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멀 수록 선교사들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고 합니다. 여러 임상실험을 통해 나온 결론이라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일본에 있는 선교사보다 과테말라에 있는 선교사가 정서적으로 훨씬 힘들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따르면 중국에 사는 이주민보다 미국에 사는 이주민들이 훨씬 빨리 늙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기 힘들었던 이유는 그녀의 오랜 타향살이 때문이었습니다.

 

2.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니가 아무개라고??”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나오미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20절 말씀을 보면 나오미는 마을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씁쓸하게 응답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세요. 이제부터 나를 마라라고 불러주세요.” 나오미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Joyful, sweet, happy라 했죠. 마라는 나오미와 정반대의 뜻입니다. Bitter, suffering 이런 뜻입니다. 나오미가 지금 자기 이름으로 워드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거죠. 자신을 비통, 괴로움이라고 부르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죠. 자신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완전 망가져서 돌아왔다는 신세 한탄인 거죠.

 

21절은 하나님을 향해 비웃기라도 하듯 막말을 하는 나오미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가득 채워진 채로 떠났는데 텅 비어서 돌아왔다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전능자라 불리는 샷다이(Shaddai)’가 자신을 두들겨 팼고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샷다이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인데요 고대 사람들이 전능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부른 호칭이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나를 이렇게 무능하게 만들어 놓은 것 좀 보라는 거죠. 가시가 이 말 속에 숨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내 삶이 이렇게 씁쓸할 수 있냐는 거죠. 한마디로 하나님은 무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는 거죠.

 

그런데 나오미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솔직히 나오미는 금의환향할 꿈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을 잃은 채 돌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빈털털이 입니다. 텅 비었다고 고백하는 나오미의 고백은 그의 주머니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상태를 말하기도 했을 겁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 마음이 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시련이 길어지면 그 마음에 깊은 골이 생긴다고 하죠. 회복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말입니다. 성격이 좀 까칠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상처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3.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1장의 마지막 절은 이런 나오미의 불행을 요약하며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말씀 가운데는 여러 가지의 복선(foreshadow)들이 깔려 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말하면서 누구와 돌아왔다고 하나요? 모압 여인 며느리 룻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이가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돌아온 시기가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는 정보를 줍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그때는 보리를 추수할 시기였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펼쳐질 행운과 행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넌지시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어지기 시작하면 불행한 것들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나에게서 빼앗아 가버린 것만 보이지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자신의 삶을 보니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 거죠.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나오미에게 모압 여인 며느리 룻이 있었다구요.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시기에 베들레헴에는 보리 풍년이 들었다고 말해줍니다.

나오미에게는 돌아올 고향도 있었고, 그를 걱정해주는 고향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런 것들이 그녀를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비어 있어서 느끼기가 힘든 거죠.

 

여러분들도 오랜 시간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다 보면 여러 모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시점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일어날 지 모르지만 이민자로 살아갈 때 답답하고 억울한 일들은 불시에 우리를 찾아 옵니다. 말 잘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당하며 살다 보면 점점 피해의식이 쌓여 가게 되고 방어적으로 변합니다. 제가 4년 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LA지역에 오래 살아 온 사람들의 독특한 방어적이면서 공격적인 멘탈이 느껴졌습니다. 오래 살아 오신 분들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막 온 사람들이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민자들이 갖는 독특한 방어적 기질과 피해의식에 대한 이해를 갖는다면 나오미가 갖는 이런 심리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에 계속되는 시련과 고난이 겹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자신을 곱게 바라보는 눈을 잃어 버립니다. 나에게 주어졌고 남겨진 귀한 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4.     마라에게 빈 손 뿐인가?

 

나오미의 10년의 이민 생활 후 아무것도 남겨진게 없어보이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남겨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는데도 며느리가 그녀를 따라왔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막 돼먹은 사람이었다면 룻은 그렇게 단호하게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나오미와 룻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있는 겁니다. 호혜(mutual benefit)라고 말할 수 있죠. 나오미가 최선을 다해 며느리를 돌보게 되니,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그녀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를 맞아 주는 분위기도 또한 기본적으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온 마을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압 사람을 자신들의 부족 공동체에 맞아 들이면 안되었습니다. 당장에 룻을 쫓아 내야 하는데도 그들은 눈감아주고 용인했던 겁니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를 품어주었고 나오미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켈리포니아를 떠난 지 1년만에 그곳에 잠시 방문하여 느낀 것이 있습니다. ‘미국에 온지 3년 만에 정말 많은 친구 관계가 형성되어 왔었구나. 그래도 우리가 잘 살았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이는 자신의 집을 1주일 동안 내어주며 아침마다 맛난 식사를 매일 요리해서 섬겨주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미국 친구도 기꺼이 자신의 집에 우리를 머물게 해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크루즈에 우리 가족을 싣고 태평양 바다를 세일링 시켜주시도 했습니다. 저희가 머무는 2주 동안 계속 날씨가 썰렁했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가는 그 날만 햇빛이 하루 종일 비치고 온도가 90도 가까이 올라가더군요. 하나님이 이렇게도 우리를 생각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돌아오면서 많은 이들과의 좋은 관계가 나에게 큰 재산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에 올 때는 나오미처럼 정말 텅 빈 마음으로 왔었는데,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것을 채워주신 것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나오미에게는 무형의 보물들이 이미 많이 있었습니다. 가족과 이웃들과의 우정 관계가 무엇보다 큰 재산이라는 것을 나오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정 관계들은 그녀가 평소에 잘 살아 온 결과물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로체스터에서 반 년을 머물다 가시든, 1년을 머물다 가시든 이곳에서 쌓아 온 우정과 관계들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연결이 될지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 갑자기 홍수가 났다고 합니다. 모두가 큰 홍수에 쓸려가 죽게 되었는데 그 사람 혼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축구공 하나를 잡고 물에 뜰 수 있었고 그 축구공이 자신을 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축구공은 자신이 지난 밤에 잃어버렸던 축구공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놓쳐버린 작은 것 하나가 내 목숨을 구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절대 빈 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헤세드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힘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헤세드의 사람들이 갖는 파워가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5.     고향이 되어주는 삶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상태가 마라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나오미라 생각하시나요? 인생에 연속되는 씁쓸한 고난들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으신가요? 텅 빈 통장 잔고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신가요? 내 주변에는 나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사람 뿐이고, 나에게 모이는 사람보다 내 주변을 떠나가는 사람들 뿐이라고 원망하고 계시진 않나요? 그릇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으려면 그릇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무엇인가를 가져가시고 텅 비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히려 무엇인가를 채우시려고 비우고 계시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어떨가요?  손에 잡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많은 우정관계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들의 도움과 격려로 나는 일어설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계신 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곳에 여기에 예배하러 오신 이 분들은 여러분 편입니다. 든든하지 않으세요? ‘다른 누가 뭐래도 내가 당신을 응원해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누가 당신을 비난하고 헐뜯는데도 나는 당신을 지지할 거예요.’ 이런 마음으로 여러분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시는 형제 자매들이 있는 것이 감사하지 않으신가요?

 

하나님께서 왜 공동체를 주십니까?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 땅을 다스리는 원리는 divide and rule이라고 하죠.  뭉치면 강력해지고 하나되면 엄청난 파워가 생기는 것을 사단은 잘 압니다. 그래서 사단은 갈라 놓는 것이 전략입니다. 교회 안에서 파를 만들고 당을 짓고 갈라 놓는 것이 기본 전략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는 unity and rule이 되어야 겠죠. 이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은 누구라도 용납되어져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든 품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 마을 공동체는 나오미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밀며 까다롭게 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불쌍히 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기로 했고 모압 며느리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마을 공동체는 든든한 후원자이고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래도 나오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까요? 이래도 나오미의 삶이 마라라 할 수 있습니까? 이제 더이상 여러분 자신을 마라라 규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나를 지지해 주는 이도 없고, 나는 텅 비었다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있고 여러 우정의 관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합시다. 텅 빈 것 같은 현실 조차도 감사합시다. 지금은 실제로 텅 빈 상태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 텅 빈 상태는 곧 채워주실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들 하나 하나에 성실히 반응하며 헤세드를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곳에서 맺은 관계들로 인해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우리의 삶에 좋은 것들이 찾아 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웃사랑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든 그 누군가에게 그의 삶이 아름답고 가치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어떤 목사님은 고향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시더라구요. 고향은 언제든 나를 맞아 주는 곳이며 언제든 나를 환대하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이 고향이 되어주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고복수님이 부르신 타향살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 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꺽어 불던 그때가 옛날

타향살이의 회한이 이 노래에 구구절절 담겨 있습니다. 특히 이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나름의 고충을 안고 이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나그네들에게 고향과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 이곳에서 환대 받고 환영 받으며 고향을 느끼면 참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어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Scripture: Ruth 1:19-22

Title: Don’t call you ‘Mara’  

번역: 최혜리

 

1.     Can this be Naomi?

 

Naomi returns to her hometown Bethlehem after 10 years. A decade is not a short time. Look at me. I had so much hair 10 years ago, but now I only have a few strands left. 10 years ago, a decade meant something different as life expectancies were shorter. A person could have aged dramatically in 10 years. When Naomi returned to her hometown after 10 years, all of Bethlehem was in an uproar. At that time, it was not uncommon for travelers to visit from afar. However, Naomi returned home after no one heard from her for 10 years since she left. It was a family of four when she left, but only two had returned. When she left, Naomi had three reliable men, but when she returned, she brought her daughter-in-law, a stranger. It seems like even back then, people liked to gossip and talk about other people. It was clear that Naomi's homecoming shocked the whole village. The heat of the gossip showed people’s interest and love for Naomi.

 

For women, ‘antiaging’ seems to have been a topic of great interest both in the past and now. It is natural for people to grow older as the years go by. However, those who are subjected to some severe hardship or heavy labor age more quickly. People were whispering, “Can this be Naomi?”, “Is she Naomi?”. They probably thought to themselves, ‘What the heck happened to Naomi that made her look so old? I didn’t even recognize her”.  Last week, I was on facetime with my older sister. She called me again the next day almost in tears. She said that she called me again because she was worried that I might be sick because I looked so old when we facetimed the day before. I reassured her that it was the lighting that made me look so old and unwell. But I don’t think that made her worry less about me. Living away from home can make us age quickly, whether we know it or not.

 

There is a concept called Food Miles. Food miles are the distance food travels from the place of production, through transportation and distribution, to the table of consumers. When I was training to be a missionary, the instructor applied this concept to missionaries. When missionaries leave Korea, their mind and body weakens the more further away they are from Korea. This is proven in many clinical trials. For example, a missionary in Guatemala can be emotionally more burdened than a missionary in Japan. According to the studies, Korean migrants living in the United States may age much faster than migrants living in China due to distance. Perhaps, the reason why it was hard for the people in the neighborhood to recognize Naomi was because Naomi lived far away from home for too long.

 

2.     Don’t call me Naomi

 

Few people will be happy to hear “You are so-and-so”. I guess Naomi also wasn’t feeling the happiest when people were asking, “Can this be Naomi?”. According to scripture in verse 20, Naomi responds bitterly to such reaction from the townspeople. “Don't call me Naomi. Call me Mara from now on.” What did Naomi mean? The name Naomi means joyful, sweet, and happy. Mara means the exact opposite of Naomi. It means bitter and suffering. Naomi was expressing how bitter she was by telling people to call her a different name. Why did she call herself Bitter, Suffering? Her God made her that way. She was blaming God for all of her suffering and hardships she’s experienced.

 

In verse 21, we can see Naomi speaking harsh words as if she were laughing at God. She said she went away full but the Lord has brought her back empty. She claims that the reason is that 'Shaddai', called the Almighty, afflicted her and brought misfortune upon her. ‘Shaddai’ is one of the names of God, and it was a title that ancient people called God, meaning ‘Almighty’. She wanted people to see how the Almighty has made her so incompetent. A thorn seems to be hidden in these words. If God is omnipotent, how can my life be so bitter and full of suffering? In short, she was saying that God is incompetent. So she tells people not to call her Naomi but to call her Mara.

 

But I can understand how she must have felt. Frankly, Naomi would have left her hometown with dreams of her golden return. But she returned home with nothing in her hands. She has lost everything. Naomi's confession that she came back empty would have not only meant for her pockets but also the state of her mind. It is often said that when a person suffers incomprehensible hardships, his heart is broken. And when hardships and trials are prolonged, it is said that a deep hole is formed in the heart. That means it will be difficult to recover. Some people are impolite and rude maybe because of these scars from hardships and suffering. It's a natural reaction for people who have gone through hardships that have made them think they've been abandoned for a long time.

 

3.     Ruth, the daughter-in-law from Moab

 

The last verse of chapter 1 concludes by summarizing Naomi's misfortune. However, there is much foreshadowing even in this short statement. When the passage states that Naomi had returned, who did it state that she returned with? She returned with her daughter-in-law Ruth, a Moabite woman. Naomi is also saying she wasn't alone. There was someone with her. And it gives information that the time when the two returned was around the beginning of harvesting barley. I didn't just say "It was time to harvest the barley then." Naomi and Ruth are implicitly informing them in advance that luck and happiness await them.

 

When a person begins to believe that he is unhappy, he will only see unhappy things. I see only what was taken away from me, but I do not see what is left of me. As Naomi looked at her own life, it was empty. She seemed to have nothing left. But the bible says that Naomi had a Moabite daughter-in-law, Ruth. And when they returned, they said that Bethlehem had a good harvest of barley. Naomi had a hometown to return to, and people from her hometown who cared about her. Naomi doesn't feel at all that these things will serve as a protective fence for her. Her heart is so empty that she has a hard time seeing it.

 

If you live as an immigrant in American society for a long time, you will face unfair things in many ways. We do not know at what point and in what place it will happen, but when we live as immigrants, frustrating and unfair things come to us unexpectedly. As we live being victimized by well-spoken and powerful people, the sense of victimization builds up and we become defensive. When I first came to the United States four years ago, I felt the unique defensive and aggressive mentality of people who had lived in the LA area for a long time. Those who have lived a long time may not feel it. However, those who had just come from Korea or those from other regions could feel it. If you have an understanding of the unique defensive temperament and victim mentality of immigrants, you can fully understand Naomi's state of mind. Even if you are not an immigrant, you naturally lose the viewpoint that takes an optimistic view of yourself as you develop a viewpoint that instead focuses more on trying to foresee trials and tribulations that may come up in life. There are many times when I can't see the precious things that have been given to me.

 

4.     Is Mara empty-handed?

 

 

After 10 years of living as an immigrant, Naomi seems to be left with nothing, but in reality she had a lot of things. We suspect that her daughter-in-law would have followed her when her son died because Naomi was a good, genuine person. Ruth wouldn’t have said that she would follow her mother so adamantly if Naomi was a mean person. As I said last week, Naomi and Ruth are giving each other “Chesed.” You could say it's a mutual benefit. As Naomi does her best to take care of her daughter-in-law, her daughter-in-law follows her mother-in-law. The atmosphere in which the people of Bethlehem welcome Naomi also seems warm. Naomi seems to be remembered as a good person in Bethlehem, to the point where her whole town is interested. According to the law, she was not allowed to welcome Moabites into her tribal community. Even though they had to kick Ruth out right away, they turned a blind eye and tolerated it. It was because the people of her village embraced Naomi and understood her situation.

 

There is something I felt when I briefly visited California a year after I left California. ‘So many friendships have been formed in the three years since I came to the United States. Still, I think we lived well.’ A friend let my family stay at their place for a week and cooked delicious meals every morning for us. Another friend of mine also let us stay at his house and sail the Pacific Ocean on his sailing boat. During the two weeks we stayed, the weather continued to be chilly, but only on the day we went to the sea by boat, the sun shone all day and the temperature rose to nearly 90 degrees. I wondered if God thought of us like this. There, I deeply felt the value of friendship. As I came back after receiving so much love, I came to think that a good relationship with many people is a great asset to me. When I came to America after being expelled from China, I came with a really empty heart like Naomi, but I was able to look back and see that God filled so many things for me.

 

Naomi said she had nothing, but Naomi already had many intangible treasures. What Naomi didn't realize was that her friendships with her family and neighbors were her greatest asset. And those friendships were the result of her usual well-lived life. Whether you're staying in Rochester for half a year or a year, don't neglect the friendships and relationships you've built here. We do not know now where and how we will meet and what kind of connection we will have with each other. There was a sudden flood in a village where someone lived. Everyone was swept away by the great flood and died, but he alone was able to survive. He was able to grab a soccer ball and float on it, and he said that the soccer ball saved him. But the soccer ball he said was the soccer ball he lost last night. Who knew that one little thing I missed would save my life? The relationships we have are truly precious. As Naomi herself said, she was never empty-handed. She does not have much confidence in the potential power of the people of Chesed. The reason why the people of Chesed have great power is that it moves the heart of God.

 

 

5.     Living a life that makes people feel like they are home.

 

How is your life? Do you think you life is a life of Mara or Naomi? Is your heart broken by the series of bitter hardships in your life? Are you blaming God for the empty bank balance? Aren't you resentful that there are only people around you who hate and harass you, and that there are only people who leave you rather than people who gather for you? Emptying the bowl is the first step to filling it with something. There are times when God takes something out of our lives and makes it empty. At that time, what if I think that God is rather emptying me to fill something? ‘Nothing can be held in hand, but I still have many friendships and people who support me. I can stand up with their help and encouragement’.

You may have more than you think. At least these people here to worship together are on your side. Aren't you relieved? ‘No matter what anyone else says, I will support you. I trust you. No matter who criticizes or slanders you, I will support you.’ Aren’t you thankful that you have brothers and sisters who are your strong support with this kind of heart?

 

Why does God give us a community? Because we cannot live alone. The principle by which Satan governs the earth is called divide and rule. Satan knows very well that when we unite, we become strong, and when we unite, great power is generated. So, division is the strategy of Satan. His basic strategy is to make factions, build parties, and divide within the church. Our attitude against these divisional strategies should be unity and rule. Anyone who belongs to this community must be accepted and cared for. We should be able to embrace and go together with anyone.

 

The Bethlehem village community chose to be inclusive, rather than sticking to the standard of the law for Naomi. Rather, they decided to take pity on her. They shared her pain and accepted her Moabite daughter-in-law. For Naomi, the village community was her strong supporter and fence. Can Naomi still say she has nothing? Can Naomi still tell people to call her Mara?

Stop defining yourself as Mara. Don't say that I have nothing, I have no one to support me, and I am empty. We have an Almighty God. And we have a family that He allows us to be part of. There is a church community and there are many friendship relationships. Let's be grateful for what we've been given. Let's be thankful even when the reality seems empty. Maybe it is actually empty right now, but maybe the emptiness means that it will soon be filled by God’s grace. I hope that all of us will faithfully respond to each and every relationship given to us and practice Chesed now. We hope that our lives will be enriched and that good things will come to our lives through the relationships we have established here and now. Do not treat your neighbors, co-workers, and friends badly. They are given by God for us to love and serve.

 

I've said this a few times already. I express the love for our neighbors as this: making that person realize that his or her life is beautiful and valuable no matter who they are and where they are from. One pastor said that neighborly love is making them feel like they are in their home, in their home country. My hometown is a place that always welcomes me and cheers for me. I hope you will become the person who makes others feel like they are in their hometown.

There is a song called ‘Living away from home’ written by Boksoo Go. “How many years have you lived away from home? I picked up my hand and looked at my hair. Ten years since I left my hometown, only my youth grew old / The willow tree in front of my hometown will be green this spring too, but the time when I played the willow flute was long ago.”

The remorse of living in a foreign country is contained in every line of this song. We also experience bitterness and suffering here at one point or another as immigrants. My hope for our community is that we will become each others’ hometown and make them feel home. I hope that anyone who enters our church will feel genuinely welcomed and feel like they are in their hometown. I bless all of you who become the providers of a “home away from home” to others around you.

 

Posted by speramus

본문: 룻기 16-18

제목: 공감과 헤세드의 사람들

 

1.

지난 주, 교회 건너편 큰 밭에 한 농부가 트렉터를 몰고 밭을 한 바퀴 돌고 있더군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 보고 싶어졌습니다. 농부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귀리(oat)를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트렉터를 잠시 세우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귀리가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왜 잘라버리는 거냐 물었습니다. 농부는비가 내리지 않아 귀리를 잘라서 건초로 써야 해서 잘라낸다고 하더군요. 다른 날엔 교회 옆의 밭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켄이라는 은퇴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눴지요. 비가 오지 않아 켄의 걱정이 커져만 갑니다. 로체스터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아 농부들이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더군요. 저도 매일 아침 일어나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농사만큼 하늘의 뜻에 민감하게 따라야 하는 직업도 드뭅니다. 땅을 일구며 살아간다는 이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준비했더라도 하늘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열매를 거둬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바로 옆의 또 다른 밭에 심겨진 콩밭에 콩이 메말라 듬성듬성 흙만 보이는 곳이 많아지니 제 마음도 무거워 집니다. 주님이 어서 큰 비를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모압지방에 있던 나오미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인 고향 사람들에게 풍년을 주셨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룻기에서 야웨 하나님이 세 번 정도 언급이 되는데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언급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근을 주시기도 하시고 풍년을 주시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농사와 목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근이 들 수 밖에 없었죠. 반대로 제대로 된 시기에 비가 풍성하게 내리면 풍년이 들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은 기근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 10년이 지나고서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풍년으로 돌보고 계시다는 소문을 나오미가 들은 것이지요. 룻기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배고픔과 후세를 갖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대한 갈등의 해소가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갈등 요소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전에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공동체와 개인을 통해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룻기는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결단과 공동체의 노력이 있더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 수반되어야 함을 룻기는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6절 말씀이 딱 그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나오미는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죠. 풍년을 주셨다고 한글 성경은 표현하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레헴(lehem), 즉 빵을 주셨다고 나옵니다. 빵집이란 뜻의  베들레헴에 이제 빵이 있는 겁니다. 뭔가 모순이 정리되어가는 상황인 거죠.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이유였던 빵이 없는 배고픔의 문제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어떤 문제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농사가 그렇듯이 자식 농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자식 농사를 짓고 싶지만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아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죠. 직장을 옮기거나 결혼을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문제들은 어느 정도 나의 선호도나 선택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오랜 시간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개입이 절대적이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돌보심이 우리 교우들의 삶 가운데 가득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2.

룻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 중에 하나는 돌아가다.”라는 뜻의 히브리 말 슈브(Shub)”입니다. 6절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라는 번역은 모압지방으로부터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라는 뜻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7절에 나오미와 며느리들이 돌아갈 여행의 목적지가 유다 땅임을 나타내며, 여기서도 슈브라는 동사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후에 8, 10, 11, 12, 15, 16절에서 슈브라는 동사가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는 바로 돌아감또는 돌아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년의 세월을 자기 힘으로 배고픔과 후손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던 나오미의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현실이었죠. 그녀는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을 돌보지 않고 잊은 것만 같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10년만에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벌어진 세 여인의 대화입니다. 세 여인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땅에서 얻은 며느리 룻과 오르바입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유다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동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나오미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 먹은 것 같습니다. 걷다 보니 상황 파악이 된 것이죠. 자기가 지금 20대 초반의 며느리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나오미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오미가 이방 며느리를 들인 것을 숨길 목적으로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며느리들을 돌려 보내려고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들이 자기 이력을 망가뜨리고, 자기에게 오히려 짐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는 거죠.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며느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지 않았겠죠. 오히려 나오미는 길 위에서 며느리들의 미래의 삶에 깊은 공감이 되었고 그들의 삶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이 베들레헴에 돌아가 혼자 사는 수고를 하더라도 두 며느리에게 자신의 짐을 떠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나오미는 10년 동안 외국에서 외국인들 사이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녀가 다른 민족 속에서 나그네로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 며느리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간다면 겪게 될 어려움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나그네로 살아본 사람만이 나그네들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법입니다. 1년 정도 로체스터에서 안식년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절대 한국에 살아가는 외국인들을 이전과는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가시면 느끼실 겁니다.  고난은 사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현재의 고난은 나를 절망하게 하고 넘어뜨리게 할지 모르지만 이 고난을 잘 이겨 낼 때 같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고난을 현재 당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말리는 이유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자신이 이방인으로 살아보니 며느리들이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이 안 봐도 훤한 것이었겠죠.  

 

3.

며느리들이 자신의 권면을 거절하자 나오미는 더 살갑게 며느리들에게 부탁합니다. 11절을 보면 돌아가다오, 내 딸들아라는 표현을 통해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의 나오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신명기 255-10절에 나오는 형사취수혼 levirate(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결혼한다)이라는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들여 형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도와주는 제도가 형사취수혼(levinate) 제도입니다. 나오미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나오미의 아들의 아내인 룻과 오르바가 구제를 받으려면 나오미에게 아들이 더 있어서 그들이 룻과 오르바와 결혼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나오미는 나이로도 아들을 낳을 수도 없었겠지만, 이미 희망이 다 사라진 그녀의 마음은 상태로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진심으로 그의 며느리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공감하며 그들에게 가장 복된 선택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두 며느리가 그들의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 새 가정을 꾸리는 것 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힘겨워 했던 이국 땅에서 나그네 삶을 그 며느리들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의 공감 능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맏며느리 룻의 공감 능력은 나오미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듯합니다. 룻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면에서 그 어머니 나오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누구보다 어머니의 아픔을 알았고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그 어머니를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상호간에 언약적인 신실한 관계인 헤세드(Hesed)의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 헤세드라는 단어가 룻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게서도 너희에게 헤세드를 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헤세드를 가지고 나와 너희 남편을 대한 것처럼 주님께서도 헤세드로 너희를 선대해 주시기를 빈다는 나오미의 바람입니다.

헤세드는 아무에게나 거져 주는 단순한 은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헤세드라는 히브리 말은 자애로움(favor), 자비(mercy), 신실함(faithfulness), 충성됨(loyalty)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히브리말 헤세드가 룻기에서는 축복을 기원하는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첫째, 헤세드의 행위는 수혜자의 생존에 결부된 문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헤세드는 사소한 문제나 욕구를 채워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해결해 줄 때에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둘째, 헤세드의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만한 또 다른 사람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는 것도 하나님 밖에 헤세드를 그들에게 베풀 분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셋째, 헤세드의 행위는 관련된 사람들이 적극적인 관계가 확립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 헤세드는 느닷없이 아무 맥락 없이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를 새로 확립할 목적으로 행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헤세드는 보통 언약 관계를 기반으로 요구되어집니다. 아비가 자녀에게, 반대로 자녀가 아비에게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모두 헤세드로 이해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적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언약적인 관계이죠.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구요. 자녀가 부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국의 라는 개념이 바로 헤세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또한 헤세드이구요.  이 세 가지 헤세드의 기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언약적인 신실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4.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 권면하는 것은 공감과 헤세드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의 결단 또한 공감과 헤세드를 기반으로 한 것이구요. 10년 동안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한결같이 보여준 헤세드의 삶이 며느리들을 자극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헤세드를 어머니에게 되갚고 싶었던 것이죠.

 

공감과 헤세드가 한 가정을 살리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공감이 무엇입니까?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해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뜻하는 이마고 데이’(Imago Dei)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예수를 따라가는 교회를 통해 이세상에 회복하시길 원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마고데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이마고 데이는 공감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주변의 이웃들이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이마고 데이는 시작합니다. 그들도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emotionsaffections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존귀하듯 내 이웃도 존귀합니다. 내가 나그네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내 이웃도 동일하게 그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감의 반대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에서 끌어내려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죠. 유튜브에서 심리 상담이나 마음 치료 같은 콘텐츠들의 많은 부분은 바로 이런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합니다. 소시오 패스, 나르시스트로 표현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과는 손절하는 게 상책이라 합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오미나 룻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소시오 패스였다면 룻기의 이야기는 절대 이렇게 아름답게 전개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핵심적인 정서가 바로 공감이었습니다. 복음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는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것을 보시며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마음 아파하셨다고 성경은 말해 줍니다. 애간장이란 우리 뱃속의 장을 의미합니다. 장이 끊어질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죠. 이 공감능력이 우리가 키워가야 할 예수님의 제자도 중에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상황과 현실에 귀기울여 경청하고 안타까워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사회와 우리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룻기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5.

제가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입학할 때 필수 암송구절이 신구약 각각 70구절씩, 140구절 이었습니다. 룻기 116-17절 말씀은 구약 암송 구절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신학자이신 교수님들이 정말 성경에서 중요한 신학을 담고 있는 구절들만 암송구절로 뽑으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왜 룻기의 이 말씀을 신학교 준비생들에게 외우게 하셨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율법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도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뒤의 여섯 계명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이죠. 룻기 116-17절 말씀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룻이라는 이방 여인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치가 이 구절 안에 담겨 있는 것이죠.

 

제가 이번에 켈리포니아에서 참석한 졸업식 행사 중에 논문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논문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이웃 사랑이었고 그 실천으로 이웃 안에 거하기(dwelling in the neighbor)’라는 구체적인 실천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페널로 참여한 졸업생 중 한 분이 제 발표가 다 끝나자 이런 질문을 던지시더군요. “목사님~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라는 개념 안에 가족이 포함되는 것인가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가족은 이웃인가요 아닌가요? 저는 가족 또한 이웃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의 이웃 사랑 계명 안에도 부모가 표현되고 있잖습니까? 우리는 가족 안에서부터 공감의 능력을 키워가고 공감을 실천해 가야 합니다. 논문 발표 시간에 짓궂은 패널 한 분이 같이 참석하여 듣고 있는 제 아내에게 질문을 하더군요. “김경헌 목사님이 집에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내는 망설임 없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아내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사람인가? 제 아내는 그 진짜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공감과 헤세드는 가정 안에서 먼저 실천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공감과 경청이 습관이 되도록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이번에 켈리포니아에서 미네소타로 돌아오는 길에 덴버에서 잠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아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은 코칭 전문가이십니다. “코칭이 무엇입니까?” 라고 제가 물어 보니 이렇게 답하시더라구요. 상대방의 문제를 듣고 공감하여 그의 문제에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코칭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씨름하며 탈출구를 찾기 힘든 문제도 다른 이가 나에게 공감해줄 때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기게 됩니다. 남자분들은 천 번은 더 들으셨을 겁니다. 여자 분들이 문제를 이야기 하면 해결책을 찾아 주려고 하지 말라구요. 그냥 추임새만 잘 넣어주라구요. “그랬구나. 속상했겠다. 완전 나빴다 그 사람.” 등등의 추임새 하나로 여자들은 그 문제를 탈출할 능력을 갖는다고 하죠. “아 그거 이제 그만 말해”, “그건 이렇게 했어야지.”라며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제가 이걸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니 여자분들에게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더군요. 남자 아이들에게 속상했겠다.” 그러니까. “아빠 내 말 잘 듣고 있는거야?”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남자 아이들에게 공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저에게는 큰 숙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공감과 헤세드의 실천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고부간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려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당시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는 다르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를 대하는 공감의 태도 그리고 언약적인 신실함으로서의 헤세드의 실천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는 가치입니다.  AI와 챗GPT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공감과 헤세드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를 여기서 우리는 간파해 내야 합니다. 지식을 달달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은 앞으로 AI가 인간을 대체할 겁니다. 하지만 이웃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는 공감의 능력은 AI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공감 능력을 풍부하게 가진 아이로 키워가야 합니다. 공감을 받은 아이가 공감할 수 있는 아이로 클 수 있기에 부모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교육의 목표도 이런 공감하는 어린이들로 키워가는 것이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공감과 헤세드의 실천이 주님이 바라시는 더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룻과 나오미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감과 헤세드의 사람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삶을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룻기 11-5

제목: 상실을 통과하는 이들

 

1.

저는 풀러 신학교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마치고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California, Pa.  sadena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LA 지역은 6월에 구름 낀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6월을 Gloomy June이라 말합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때 이삼일 빼고 매일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 됐습니다. 오히려 로체스터에 오니 날씨가 맑고 따뜻해 좋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역시 보금자리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여러분들을 뵈니 주님을 뵌 듯 반갑습니다. 지난 2주 동안 두 분의 설교자가 다하나 교회에 오셔서 빌립보서 말씀을 여러분에게 나눠주셨는데 저에게도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짜고 하신 것이 아닌데도 두 분 다 빌립보 말씀을 전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두 분은 로마의 식민 도시인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나눠주셨습니다. 식민지처럼 둘러 싸고 있는 이 땅의 세속적인 가치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방식에 대해 나눠주셨습니다. 경쟁하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우리는 도전 받았습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더 깊게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룻기는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읽었던 책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불립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예루살렘교회 위에 충만히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부흥은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는 은총의 방식이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음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룻기는 우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언약적인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헤세드가 공동체를 살리며 인류 전체를 살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한 책입니다. 언약적인 신실함이란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 이 표현은 룻기를 나누며 수없이 반복되어 설명되어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 히브리 성경은 양피지에 쓰여져서 두루마리로 보관되었습니다. 룻기를 포함한 다섯 권의 책이 한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서 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권의 책의 한 두루마리를 Five Megillot이라 부르는데요, 메길롯은 scroll(두루마리) 이라는 뜻의 히브리 말입니다. 이 책들은 유대인들의 큰 명절에 각각 읽혀 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룻기는 보리와 밀 추수기와 연관된 칠칠절에 읽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기에 아가서를 읽습니다. 풀로 지은 초막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기에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습니다. 성전 파괴일에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것을 울며 노래한 예레미야 애가를 읽습니다. 부림절에는 부림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스더를 읽는 것이구요.

 

2.

우리 말 성경의 순서는 구약성경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70인경(Septuaginta, LXX)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70인경은 성경의 순서를 연대순으로 재배치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은 모세 오경인 토라(Torah), 예언서인 느비임(Nebiim), 성문서 또는 시가서라 불리는 케두빔(Ketubim)으로 나눠져 있었죠. 그런데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연대순으로 재비치하여 다 섞어 놔 버린 겁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케투빔, 즉 성문서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서 룻기는 역사서인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룻기의 배경이 바로 사사가 다스리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배치가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 31장 후반부는 현숙한 여인(woman of valor)’에 관한 주제로 잠언을 마무리 짖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히브리말 에쉐트 하일’(אֵשֶׁת־חַיִל)을 번역한 말입니다. ‘하일이란 말은 힘과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유능하다, 능력있다, 힘이 세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라는 뜻보다 가정을 건사할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여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31장과 잇대어 룻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에쉐트 하일의 대표적 사례로 룻을 말하고자 하는 성경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기 다음에 이어지는 아가서는 이방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의 이야기로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의 후속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룻기 11절은 사사 시대에 그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그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사사(Judge)라는 말은 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의 부족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사 시대라는 말 한 마디에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절인 사사기 2125절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인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열 두 지파의 공동체가 한 지파를 왕따시키고 전멸시키려는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룻기의 배경이 되는 베들레헴의 황폐한 현실을 사사기 17장에서 19장 말씀은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레위인이 먹고 살기 힘들어 베들레헴을 이탈하여 개인 제사장으로 전락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들레헴의 부족 공동체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그들의 지역 사회와 부족 공동체를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이 없고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부족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책임져야 했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룻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매우 암울한 영적인 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1절 말씀의 베들레헴에 찾아 든 기근은 이런 영적인 암울한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물인지도 모릅니다.

 

3.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모압 땅으로 임시적으로 이주하여 갑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가족들의 이름을 통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의 뜻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장인 엘리멜렉입니다. 엘리(Yeli)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구요, 멜렉(Melek)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라는 뜻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참 좋은 뜻입니다. 여러분이 딸을 낳으시면 나오미라는 이름을 지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의 이름을 왜 이런 식으로 지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먼저 말론이란 뜻은 닳아지다, 병들다, 슬퍼하다이란 뜻이구요, 기룐이란 뜻은 쇠퇴하다, 수척해지다, 병들다란 뜻입니다. 태어날 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름이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이름으로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큰아들 말론의 아내인 맏며느리 룻의 이름의 뜻은 아름다움, 친구라는 뜻으로 이 여인이 펼쳐갈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우정이 가득한 이야기가 될 것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반면 오르바라는 이름은  이마 갈기(full head of hair), 후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무슨 뜻입니까? 집이라는 뜻의 베트(Beit)’와 떡 또는 빵이라는 뜻의 레헴(lehem)이 합쳐진 말로 빵집,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베들레헴은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 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을 통해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빵집에 기근이 들어 빵이 없는 현실을 보십시오. 마치 자비의 집이란 뜻의 베데스다에 자비가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뜻이지만 정작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뭔가 결핍되고 상실이 가득한 현실을 이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족을 굶기지 말자는 일념하에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일으켰던 민족인 모압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이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어지간히 없으면 그랬겠느냐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압땅으로 간다는 것은 모압의 신인 그모스(Chemosh)가 다스리는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베들레헴을 벗어나 이방신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머물다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 베들레헴을 등지고 그렇게 이주를 결단한 것이었죠. 모압은 베들레헴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였습니다.  유대땅과 모압을 가르는 시내가 흘렀는데 얍복강이었습니다. 얍복강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복을 쟁취해 낸 곳이었죠. 엘리멜렉은 그의 조상인 야곱을 생각하며 복을 쟁취해 내기 위해 그렇게 얍복강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는지 모릅니다.

 

4.

룻기 11절에서 5절의 말씀만을 가지고도 소설 한 권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고된 타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지고 있습니다. 이주를 해 간지 10년도 안된 시점에 엘리멜렉은 그렇게 죽은 것이지요.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에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텐데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당시 남자의 결혼 적령기가 18살이라고 추정한다면 엘리멜렉은 30대 정도에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압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모압은 그야말로 적국이었습니다. 현재의 요르단 땅입니다. 성지답사를 가 보면 모압 땅이 그렇게 비옥해 보이지 않습니다. 척박한 이국 땅에서 땅을 일구며 가족을 건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사후에 얻은 이방인 며느리들과 시어머니 사이는 원만했을까요? 가끔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농촌 마을의 시어머니와 베트남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소재로한 방송프로그램을 재밌게 본 적 있습니다. 말과 문화가 다른 고부간에 만들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재밌게 그려지지만 당사자들은 정말 힘들어 보이더군요. 분명히 나오미와 룻 그리고 오르바 사이에 여러 문화적인 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들이 존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은 말룐과 기룐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눈물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의 생명력이 남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질기고 길었었나 봅니다. 엘리멜렉은 어린 아들들과 아내를 남기고 죽어가며 안타까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이국 땅에 묻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아버지의 날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장이신 아버지 여러분들은 이국 땅에 와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국 땅의 언어인 영어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미국 문화 속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한된 기회와 시간들로 인해 직장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럴 땐 막연하고 불투명한 미래와 마주해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가족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불안감을 홀로 껴안은 채 힘겹게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우리 모두 이방 땅에서 여기까지 살아낸 것만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고백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잘해 오셨어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아버지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박수 한 번 쳐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당신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사랑합니다. Hang in there, dear daddy.

 

5.

룻기 초반부의 이야기는 상실과 결핍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지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압니다. 여러분은 이미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주의 과정에서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분명히 거쳐 오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이주해 오지 않았더라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이주해 오면서 여러분이 겪어야 했을 불안감과 상실감도 적잖았을 겁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Inside Out”이라는 영화를 보면 미네소타에서 켈리포니아로 이사해 간 라일리라는 어린 소녀가 겪는 상실의 경험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심리학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이 이주나 이사를 경험하면 마음 속에 엄청난 상실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 상실을 적절하게 해결하고 보상해주지 않으면 그것은 내면에 큰 상처로 남기도 한다고 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의 이주, 그것은 자의였든 타의였든 그들 가정에 엄청난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가족의 죽음은 그보다 더 큰 상실을 남은 가족들에게 안겨줍니다. 남편의 죽음, 아들들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나오미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을 겁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빈 지갑이라고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도 있지요. 지갑이 두둑하면 넉넉함이 자연스레 생기는데, 지갑이 비어있으면 자연스레 옹색해집니다. 버짓이 타이트해지면 마음의 여유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근과 배고픔의 경험은 큰 상실감을 사람에게 안겨줍니다. 배고픔과 쪼들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연스레 원망의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나는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괜한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나중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더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런 상실이 가져다 준 씁쓸함 때문입니다.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은 모두 이런 쓴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이래도 되는가? 정말 이러셔야만 하는가? 라는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희 가정은 20192월 중국에서 한국으로 잠깐 비자를 갱신하러 출국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일 정오쯤에 여행사로부터 비자가 거절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거절 사유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중국대사관에서 여행사 직원에게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선교사 신분을 알고 저희를 중국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저희는 저희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장난감, , 사진들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상실감에 괴로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자거절 후 네 달만에 안식년으로 공부하러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했지만 저희에게는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한 밤중에 경기를 일으키며 몽유병 환자처럼 날뛰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겪은 불안감과 상실감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것을 치유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솔직히 요즘도 문득문득 그 앙금들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풀러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받은 상실의 잔재들을 깨끗이 청산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중국에서의 추방이 남긴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의 쳅터를 넘길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곳 다하나 교회에서 쓰여지게 될 기대감을 가지고 로체스터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하나 교회와 여러분은 그런 의미에서 저희 가정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보상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제 자의 든 타의 든 정들었던 로체스터를 떠나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떠나가는 여러분 모두는 나름대로의 상실감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엘리멜렉처럼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어떤 형태가 됐든 이곳을 떠나는 이들이 겪는 상실감과 박탈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버텨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상실과 결핍이 우리 이야기의 끝이라면 정말 암울할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앞으로 펼쳐갈 이야기들은 우리네 인생에 던지는 많은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친구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다하나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정의 이야기, 은총의 이야기는 상실과 결핍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상실과 결핍을 보상하고도 남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우정의 관계를 통해 치유하고 회복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보상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앞으로 펼쳐지게 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상실과 이별의 아픔을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상실을 경험하고 통과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질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두움 후에 반드시 빛이 있고, 비바람 뒤에 반드시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을 선하게 인도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사도행전 2 장 1-13 절 제목: 성령충만과 희년(禧年)

1.
여러분들은 새로운 시작을 즐기시는 성격이신가요, 아니면 익숙한 것을 더 편안하게 느끼시나요? 사람들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부담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새 출발이 좋아 보이긴 하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취약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이 5월 28일인데 공교롭게 1996년 딱 이 날 저는 군입대를 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새롭더군요. 저는 군대에서 그런 거친 대우나 거친 욕설은 살면서 처음 받아 봤습니다. 솔직히 군대는 제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만큼 군생활을 할 때만큼 제 신앙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성숙했던 시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군대에서 훈련 받으면서 읽으라고 선물해 주었던 포켓용 성경을 앞가슴 주머니에다 넣고 틈만 나면 읽었습니다. 이등병때는 책을 못 읽게 하니까 화장실에 가서 읽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신앙이 많이 성숙하고 깊어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환경은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 깊은 연대와 연결을 만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이번 여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보내는 입자에서는 너무 서운하고 아쉽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신다면 떠남과 새로운 환경의 삶은 여러분에게 오히려 선물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떠나는 이들은 반드시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운 환경은 항상 우리를 취약함 가운데 놓이게 만들죠. 그런데 그 취약함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어주는 훌륭한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취약함 가운데 내몰려 본 사람은 또한 그런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의 고충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이 많아니다. 아라함과 이그리고 야으로 시작되는 믿음의 상들의 삶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증명니다.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을 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오절이라고도 하고 성령강림주일이라고도 하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오절은 성경에 있어 전히 이고 새로운 전기를 니다. 그리Pentecoste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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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50 라는 을 가말입니다. 한자로 오은 오을 의합니다. 대인들은 월절로부50 되는 날을 펜테코스테, 절로 기습니다. 7 일이 일번 있으니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의 수을 마절이기에 맥추절이라고도 부니다. 오절, 칠칠절, 맥추절, 성령강림절 모같은 절기를 가리는 말들이지요. 대인들에게 오절은 시내에서 율법을 받은 사을 기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월절에 이집트출하여 50 일이 지이 시내에 머문 시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율법 가운데는 희년(Jubillee)이

50 년마다 행해는데 오절에 연결하여 생볼 율법 조에 하나입니다. 히리인들은 절기마다 읽는 정한 성경책들이 있었는데 오절에는 기를 읽었다고 합니다. 기의 경이 수시기가 되는 것이 그 유 중에 하나일 겁니다. 무보다 오절은 자신의 스승을 떠나보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전환다는 것이 우 인상입니다. 스승 없이 로 남겨진 제자들의 처하고 새로운 상가운데 성령님이 어게 활력을 어 넣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이 오
절이 수님 이의 시대로 어오면서 게 됩니다. 오절이 교회라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의 출발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교회는 이구약시대부터 예배공동체이자 약공동체인 이해 실되어 것이긴 하지만, 본격인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기 시작한 것은 오절 이후 탄생한 예루교회부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요한 출발과 시작에는 항상 성령님의 입이 있었습니다. 창조때로 거러 가보면 혼돈하고 공, 어이 깊음 에 있고, 하나님의 은 물 에 움직이고 계습니다(1:2). 창조시에 이 고 운행하시던 성령님은 수님을 마리아의 잉태때도 입하니다. 그리고 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공생를 시작하실 때도 수님 비둘기처내리시며 예수님을 감안으죠. 성령님은 수님을 야로 몰아가시그분을 시가운데 빠뜨리시기도 하시지만 수님의 사역 전반에 큰 위로를 주시던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수님이 행하신 설교로서 나사회당에서의 이사야 61 장 말을 읽으신 수님을 소개합니다. 그 본문의 말또한 성령님과 이었습니다.

2

수님은 3 년의 자신의 공생가 마무리 되어가고 자가의 음을 앞신 상에서 성령님을 부시면서 강조하시습니다. 수님은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익이라고 하시면서 다른 보사를 보내주시다고 약속하니다. 다른 보말은 수님이 이사로 오지만, 수님이 승천하신 다른 보사이신 성령님이 오실 거라는 얘깁니다. 보란 참고로 라말 ‘파클레토스(paracletos)인데 선생님, 러, 보자 등의 을 가말입니다. 수님은 부활 에도 제자들에게 자주 나예루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 말죠. 수님이 하늘로 라가신 후 십 일이 지나고 오절이 되는 날 아9 시에 마라운 일이 예루에서 어지게 됩니다. 이 일을 예루교회가 생하고 수님을 과 구속의 역사가 이제 그의 제자들을 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성령님은 성경 이야기의 모든 출발과 시작에 항상 함동력을 제공하신 분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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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님의 승천 후 절 당일 제자들이 모인 예루의 한 다락방에서 무일이 일어는지 사도행전 2 장은 우리에게 자소개합니다. 람과 불길이 제자들이 모인 하게 나타난 것을 사하고 있습니다. 람과 불길 하나님의 재를 상하는 도구습니다. 람은 히리 말로 ‘루(Ruach,
이고
라말로는 ‘프뉴마(pneuma, πνεῦμα)입니다. 람이란 뜻과 성령이란 뜻)רוּ ַח 다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대인들이 오절에 의었던 시내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은 로 그분의 재를 나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구공동체던 출애굽 공동체의 본격인 시작을 알렸던 시내에서의 율법 수여때와 연결하기 해 성령님은 람과 하고 계니다.

다른 절도 많은데 절에 성령님이 제자들 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절을 시내산 율법 수여과 연결하는 것과 함다른 가지 이때문이기도 합니다. 저 오절은 수가 나는 시기에 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절은 수의 이지와 상고 있습니다. 수님서는 리리 주대 주주로 사역을 하시다 으시고 부활하승천습니다. 이제 시내에서 하나님이 이엘 백성과 약을 으실 때 모든 민족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그 약속이 실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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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해 모든 민족수가 본격으로 행되는 것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보여니다. 5 절 말럼 예루에는 각국에서 몰려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에게 성령강림라운 충격을 안주었습니다.실제로 드로의 설교를 들은 3 천명처의 사람들이 회하는 라운 수가 예루에서 이날 일어습니다. 오절에 기를 읽는 이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은 이인으로서 모여인이었습니다. 신기 23 장의 율법에는 모암몬 사람들은 히리인의 공동체에 들어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도 이라는 이여인이 하나님의 구젝트에 편입되는 사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절에 실제로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구소식아오는 라운 일이 어지고 있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죠.

절에 성령님하신 사의 또 다른 의창세기 11 장의 바벨탑 과 연결됩니다. 바벨탑 범죄한 아담가 하나님보다 더 아지려고 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한 사입니다. 하나님이 바벨탑범죄한 인에게 내린 벌어지게 만든 것과 어의 혼잡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절 성령강림은 그 바벨탑에서 헝클의 문제를 상복구 시려는 하나님의 력을 보게 합니다. 일던 사람들이 한 에 모여 있는 것을 니다. 또한 어를 혼잡하게 했던 문제가 해결되고 있습니다. 분명 갈리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난 곳 말로 고 있는 신기한 일이 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느니다. 여러분들이 로체스터코스트코 같은 큰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자기 주에서 한말이 들려다고 생해 보시오. 그러면 한말이 반가서 자연스레 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오사시다 한에 오만에 들어가시면 인공항에 내려서 주온통 말만 들리면 처음에는 어리절합니다. 주사람들의 말을 내가 는다는 신기함 때문이죠. 그러면서 긴장하살이의 부담감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면서 깊은 안도감이 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모어가 주는 편안함입니다. 모어 또는 난 곳방언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경해 본 이들은 다 수 있습니다.

바벨탑에서 혼잡하게 되었던 어가 오절에 일시에 성령님의 입으로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벨탑 에 아라함이라는 선사람과 선된 민족빠진 를 구하기 한 하나님의 구원 프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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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이제 수님 이후 바벨탑의 문제를 상복구시키며 모든 민족을 구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프젝트가 새롭게 런해 가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4.
절 성령강림의 사에서 요한 것은 어상이 발생했는가에 있지 습니다. 람이 하고 방언을 말하고 이런 상은 정작 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 해 하나님이 교회를 생시시고, 그 교회를 해 어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를 살는 것이 요합니다. 성령강림 후 성령님은 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수님이 꿈꿔 던 구성해 가고 계니다. 성령님은 그 구젝트를 이파트너로 교회를 선니다. 성령강림의 결과는 예루교회를 생하게 했습니다. 3 천명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도에게로 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을 따라 교제하면서 교회를 생활을 시작합니다.
42 절 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에 몰, 서로 사는 일과 는 일과 기도에 힘다.이를 해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려주고 있습니다. 다는 것은 성을 가리수그리도의 을 따라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는 이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이어지는 구절에서 구체으로 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2:44-47).” 무상(有無相通)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모자람을 느끼는 이들이 없는 부와 자등한 나을 우리는 주목해 니다.

저는 가가 복음서인 가복음 4 장의 수님의 설교인 나사회당 설교와 이 부분이 연결이 있다고 니다. 가는 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교회의 시작에 의도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공생를 시작하는 출발에 자신의 고의 회당을 문하습니다. 나사회당에 놓인 여러 성경의 두루마리 이사야 두루마리를 내서 펼쳐 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에 장 절이 없고 한 의 성경은 한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수님이 읽으신 본문이 이사야 61 장의

5

본문이었으니까 무마리를 부분까지 치셔서 읽을 본문을 으신 겁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

19)" 수님이 읽으신 말은 성령의 강림,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를 말해니다. 수님이 앞으로 펼쳐 가실 사역의 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로 생한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대어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죠.

한 사람에게 기소식이 무습니까? 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포로사람들에게는 려나는 해이 기소식이구요. 사람에게는 보게 되는 것, 억눌사람들에게는 에서 어나는 것이 기소식죠. 이사야 61 장 본문은 이것을 은의 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희년(Jubilee)을 나내는 말입니다. 신기 15 장의 면제년’법에는 매 7 년마다 을 면제해 주라는 이 나니다. 편이 넉넉은 사람들이 을 지게 되죠. 미국에 정사신 분들 드회사에 을 안 져 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정하기 해서는 과의어 와서 가메꿔야만 합니다. 당시에도 사람을 면제해 주라는 말은 가으로 비참한 삶 가운데로 내 몰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을 해결할 방법으로 면제년 을 제정하고, 면제년 은 공동체의 자해 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목이 있습니다. 7년은 너무 자주 아오니까 이 지지 습니다. 그서 하나님은 한 발더 물러나고, 7년의 일번인 50년에 한 번 면제를 행하라는 희년을 만드신 겁니다. 희년은 은의 해이자 용(acceptance)의 해입니다. 희년에는 가한 자들이 을 면제 받고, 억눌자들이 해되고, 포로자들이 자되는 기과 은의 날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희년은 가사람들이 나을 실하지 으면 절대 이질 수 없는 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제 자들이 자와 사몸소 하지 으면 절대 가한 사람들이 희년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과 면제년 을 말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살이하던 때의 삶을 기하라고 하니다. 당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살이한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시오. 그러로 내가 오늘 이러한 것을 당신들에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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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신기 15:15 절).이러한 희년의 라운 면제의 기이 성령강림절에 예루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시오. 자신의 재아서 요한 사람들에게 나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니까 모든 사람에게 감을 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제가 안 믿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나이 일어나는 교회라면 에라도 한 번 아가 것 같습니다.

5.
성령충만은 다른 것이 아
니다. 방언을 말하고 몽롱한 상가 되어 이상한 환상을 보고 예언하고 이런 상들이 성령충만의 상이 아니다. 성령충만은 나의 이익과 익만을 해 사는 삶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나의 마음 속 깊은 에 있는 나의 욕이 나의 삶을 이어 가도습니다. 성령 충만은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 재를 전히 장하여 하나님의 하도합니다. 하나님의 욕이 우리 욕을 이기어 그분의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의 욕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자배불고 인게 사는 것입니다. 포로사람들이 그들의 고달픈 삶에서 놓여 인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설 을 제공해 주는 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인 것이죠. 성령충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리가 내 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나의 욕의 주수에 하나님을 맞추려 했을 때 들리지 던 성령의 음성이, 하나님의 주수에 나를 맞추니 들려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수님과 성령님이 꿈꾸시는 희년 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느수 있게 해주는 전이 되는 직장, , 사회 안전
등을 나자는 운동입니다. 수님과 성령님에 의해 교회를 행되어 이 희년 운동은 성령님자신을 내 어 재들, 성령충만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는 무한소유배타적소유한 내 욕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 내가 너무 많이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 행복의 전을 아가고 있지 은가 야 합니다. 으로 많이 소유하는 부를 하나님나라를 해서 하늘에 아야 합니다. 부를 하늘에 는다는 한 사람들의 주머니에 넣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나의 과 나의 재을 나는 것은 절대 정신으로 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에 취하지 고는 가능하지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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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과 의지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희년의 실은 성령충만 없이는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운동입니다. 그서 희년 운동은 성령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루한 성령의 충만함은 교회를 생시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모습은 수그리도가 지한 희년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은이 되어 다리는 나라, 사과 자이 되어 다리는 나라, 수님이 꿈꿨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에서 실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꿈꾸상은 사자와 어이 함사는 상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니다. 사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지 으면 절대 이런 상은 수 없습니다. 사자들은 정신으로 이렇게 못합니다. 성령님사로야만 가능합니다. 많이 배워서 사회리는 과 지성인들, 과 부를 소유한 사람들, 사자같이 용감 무들이 기로 결하지 으면 희년은 절대 일어나지 습니다. 그러한 결의 힘이 어서 나다구요? 성령님으로부그런 미스(능)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수님구했던 성령충만의 목과 결과에 대해 한 번 되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스승 예수의 정신이 어게 실되고 발되는지 예루교회를 인했습니다. 이제 우리 다하나교회에 그런 예루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으면 좋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모때 가능해 니다. 또한 그런 인들이 모인 인 나의 실수님과 성령님이 꿈꾸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을 기했으면 좋습니다. 다하나교회를 예루교회에 일어라운 성령충만의 역사가 행해지고 성취되기를 우리 주님은 절히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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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본문: 요한복음 146

제목: 예수 따름의 삶

 

1.

교회 옆의 큰 밭에 드디어 싹들이 움트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씨앗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사이 농부는 벌써 이 밭에 씨앗을 뿌려 놓았더군요. 그리고 삼 센치 정도 씨앗이 자랐는데 제가 판단하기로는 싹을 틔운 씨앗의 정체는 콩인 것 같아요. 작년에는 분명히 옥수수 밭이었는데 올해는 콩밭이 되려나 봅니다. 교회 길 건너 밭에도 싹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요 거기에는 아마도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류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 같아요. 제 말이 맞는지 틀린 지 가을에 한 번 지켜 보기로 하시지요. 어린 시절 이맘 때 초여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밭에서 깨를 심었던 것 같아요. 세 손가락으로 깨를 대여섯 알 정도 집어 들고 땅속에 손가락을 푹 집어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며칠이 안되어 깨의 싹이 돋아 납니다.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제때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절대 가을에 추수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하시기도 했죠. 여러분의 삶에 어떤 씨앗을 준비하셨고 어떤 씨앗을 심으시렵니까? 이왕이면 절망의 씨앗보다 소망의 씨앗을 심는 것이 좋고, 미움의 씨앗보다 사랑의 씨를 심는 것이 좋겠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준비해야 하고 파종해야 할 씨앗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으실 수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이런 말이 나오죠.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할 때 비기독교인들에게 들이미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란 어떤 변수에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이밀면 그 사람들이 오호 정말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군요. 이 예수를 내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던가요? 십중팔구는 그래서 뭐?”라는 반응을 보일 겁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 소위 말하는 복음전도라는 것을 캠퍼스에서 많이 해 봤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비그리스도인들의 저런 반응을 수 없이 많이 접했습니다. 그때는 저런 반응을 상대방에게 들으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것이 맞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맞는데 왜 인정을 않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여러분 왜 비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거나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고,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운 좋게도 예수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 자라오셨든지, 아니면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어떤 사람이나 그룹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믿으라는 분위기에서 일단 믿고 시작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믿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경험되어져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인정합니다. “저분이 너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야. 너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해 주어서 여러분을 부모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무조건적인 여러분의 사랑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로 인정합니다. 꾸준하게 엄마 아빠의 변함 없는 사랑을 경험한 아이라면 의심하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곳에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참여함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는 그 사람이 부모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적이고 참여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죠. 예수가 어떤 분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경험해보고 참여해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3.

로마서 1013-15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경험하게 해주고 예수의 은혜 안에 참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오해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이고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성경구절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읽어주기만 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구요. 물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진리가 진짜 진리로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 주장은 지극히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배타적이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딱 한가지 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배타적인 주장으로 만민이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인 주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통해 만민이 혜택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예수님의 이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만민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시지도 않으면서 이런 주장을 말로만 했다면 이 주장은 하나도 설득력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요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앗시리아의 수도로 선교를 보냅니다. 니느웨의 악이 넘쳐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야만 하는데 요나 니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 회개 좀 시키라고 하신 거죠.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니느웨의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 탑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을 보내십니다. 그때 요나는 배의 맨 아랫 칸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풍랑에 다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죠. 배의 짐을 던지고 자신의 신들께 기도를 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잠자던 요나를 발견했죠. 이 때 요나는 그들에게 배타적인 주장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신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 재난은 그런 거짓 신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재난은 나를 부르신 이스라엘의 신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배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거 맞죠? 그런데 그 주장이 용납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요나의 배타적인 주장이 기분 나쁠 지 모르지만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에 던져야만 이 재난이 그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긴가 민가 하는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집어 던지자 곧 바로 풍랑은 잔잔해 졌죠. 요나가 던져짐을 통해 선원들이 그의 배타적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언제 배타적 주장을 해야 하는지 요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기독교가 배타적 주장을 해서 세상의 광풍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주장이 용납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는 주장이 용납되려면 그 주장을 통해 세상의 광풍이 잠잠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배타적 주장 뒤에 이타적인 행동과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없이 그 진리는 결코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이타적인 삶을 먼저 보여주셨죠. 예수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런 주장이 있기 전에 지극히 이타적인 삶을 만민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 핵심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죠. 십자가는 죄인 중에도 가장 중범죄자들에게 내려진 로마의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거룩하고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왜 지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와 어둠의 권세를 이길 길은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는 이가 다른 이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의 이타적인 삶의 결정체였던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 지는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 볼래?”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항상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같은 삶에 너를 초대한다는 것이죠. 내가 가는 길로 너를 초대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 진리가 됨을 직접 보여주셨죠. 그리고 그 사랑이 씨앗이 되어 생명을 자라게 함을 부활을 통해 증명해 주신 것이구요. 그래서 예수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자신있게 말씀 하신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

 

왜 예배당의 중심에 항상 십자가가 위치해 있습니까? 십자가는 멋스런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 따름의 삶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이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의 사람으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겸손하게 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저는 가끔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열매의 씨앗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곤 하였습니다. 여기 복숭아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색깔입니까? 피치색입니다. 복숭아를 먹을 때 우리는 맛있는 과육만 먹고 씨앗은 내다버립니다. 씨앗은 맛도 없고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씨앗 안에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방법으로, 생명을 씨앗이라는 참으로 볼품 없고 부담스러운 것에 담습니다. 복숭아씨는 쭈글쭈글 주름살 투성이입니다. 망고씨는 오징어 뼈다귀 같아 보이구요.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들은 한결같이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면 너무나 맛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을 싹 틔우게 만드는 신앙의 결정체이자 씨앗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십자가에 다 녹아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는 삶을 살면 예수가 길과 진리요 생명입니다라는 주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삶을 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질문해 옵니다. “당신 안에 무엇이 있길래 당신의 삶은 우리와 다른 겁니까?”라구요.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은 반드시 다른 이의 삶에 임팩트를 줄 수 밖에 없고 열매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드디어 다섯 권짜리 소설 레 미제라블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소설이죠. 소설 1권에서 미리엘이라는 주교가 소개됩니다. 겉모양은 볼품 없는 사람입니다. 키도 작고 머리도 벗겨지고 매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사람은 매력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따뜻하고 인자하고 낭만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장발장은 29살에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투옥됩니다. 여러 번의 탈옥 시도로 그의 형량은 19년이나 늘어나게 됩니다. 미리엘 신부의 호의로 잠잘 곳이 없었던 출소자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지만 그의 은촛대를 훔치게 되죠. 경찰에 잡혀 주교 앞에 끌려 온 장발장에게 주교는 형제여 은쟁반까지 함께 가져가라고 했더니 가져가지 않은 겁니까?”라며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죠. 그 사건은 장발장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버립니다. 소설 후반부까지 줄기차게 장발장의 삶을 놓지 않고 좇아 온 것은 바로 주교의 사랑과 용납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장발장은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장발장은 소설의 5권에서 자베르라는 형사를 죽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자베르는 그가 출옥한 후에도 그를 다시 투옥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쫓아 다니며 괴롭혔던 사냥개와 같은 경찰였습니다. 자베르는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현장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가 시민들에게 잡혀 죽을 신세가 됩니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자신이 죽이겠다고 하며 그를 끌고 가죠. 그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그를 죽인 척하여 살려 보내줍니다. 자베르는 자신이 한 짓을 알기 때문에 장발장의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베르는 직선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장발장의 부드러운 곡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죠. 너무나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죠.

 

소설이 말하려는 핵심은 호의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임팩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이죠. 사랑은 말랑말랑하고 바보스럽고 손해 본 듯하고 느려보이지만 그 사랑이 결국 혁명보다 더 강력한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엘 주교의 호의와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장발장은 어느덧 자신도 미리엘 주교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용납을 직접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예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6.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분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분의 길의 방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삶에 다가가야만 합니다. 왜냐면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보다 더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씀이 끊임 없이 우리를 다그쳐서 우리를 겸손한 삶으로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예수 따름의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 볼품 없어 보이는 것일지 모르나 그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만민을 살리는 놀라운 비밀이 그 십자가의 길, 그러니까 예수 따름의 삶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곳입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서로 서로에게 선한 임팩트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다 같이 동참하는 가족의 삶과도 같습니다. 이곳에서 만큼은 빈부귀천을 묻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겉모양과 스펙에 상관 없이 존중 받고 사랑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생전 교회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천국의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다리가 되어 많은 이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23:1-20

제목: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1.

1945년에 미군 정보장교인 Carl Ferris Miller라는 군인이 한국으로 파견이 됩니다. 그는 한국전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는 1962년 우연히 충남 태안에 들렀다가 땅을 사달라는 어느 노인의 간곡한 부탁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해변의 절벽 땅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나무들과 식물들을 심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의 천리포 수목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밀러 박사는 1979년에 아예 한국인으로 귀하했고 그의 이름을 민병갈로 개명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끊임 없는 친환경적인 노력으로 천리포 수목원은 2000년에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인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얼마전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을 삽니다. 내가 하는 수목원은 이제 겨우 30년 됐지만, 적어도 300년은 내다보고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이곳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 년은 더 살 것입니다.”

이것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마음인가 봅니다. 당장 그 열매와 성과는 볼 수 없지만 후대를 위한 더 큰 그림 안에서 나무를 심는가 봅니다.

 

오늘은 어머니날입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성장은 나무처럼 참으로 더딥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가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정도는 한 부모 아래 잘 자라야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고, 그 때에야 부모를 떠나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지게 되죠. 부모라는 토양이 척박하고 메말라 있으면 자녀들의 삶도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이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우리 자녀들도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한 후손을 길러내는 것은 우리 일생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인 듯합니다. 왜냐면 그 후손들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광주에 있을 때 다녔던 모교회가 광주제일교회라는 교회였는데 유진벨(Eugene Bell)이라는 선교사님이 개척한 광주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후손인 Linton가문은 한국에 오랜 세월 정착하여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지금까지 힘써 오고 있습니다. 린튼가의 인요한 박사님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며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시더라구요. 린튼가를 보며 유진벨 선교사님의 믿음의 발걸음이 이제는 한국안에서 숲을 이뤄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민병갈 박사님도 그렇고 린튼가의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나그네로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바라기에 현재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실천해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삶도 평생 나그네이자 이방인으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본토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걸어온 인생이었죠. 그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도 지금 당장 이뤄질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뤄질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자기에게 맡겨준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과 이집트를 헤매는 과정 가운데서 가나안 땅 남단의 브엘세바 근처에 정착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이자 이방인이었습니다. 그와 평생을 함께 했던 인생의 동반자였던 사라가 나그네 땅에서 먼저 죽게 되자 아브라함의 슬픔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 중에 그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위해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땅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그것을 샀다는 이야기 가운데 기나긴 협상의 내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주인이었던 헷(Hittites) 민족의 리더인 에브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4).” 나그네라는 히브리 말은 게르(foreigner, stranger)”이구요, 떠돌이는 토샤브(resident alien, sojourner)”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하는 의도와 함께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막벨라 굴과 그 주변의 밭과 나무들을 사겠다는 아브라함의 제안에 그땅의 주인인 에브론은 매장지를 위한 땅을 돈을 받지 않고 제공하겠다고 제의합니다. 매장지를 돈을 안 받고 주겠다는 제의는 언뜻 보면 그들의 호의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에게 체류자의 신분으로 묶어 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굳이 매장지를 돈을 주고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제시한 은 400세겔에 대해 흥정하거나 깍지도 않고 제 값 그대로 주고 삽니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땅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땅의 가치를 치를 댓가로 돈을 충분하게 주겠다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밭을 샀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래 계약서가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브론의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아브라함 가족 소유 매장지로 확정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62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62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실제로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이 굳이 막벨라 굴을 가족 매장지로 구입한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제 서서히 마무리 되어갑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약속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겁니다. 사라도 죽고 그도 기력이 다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후손들을 위해 믿음의 근거로 삼을 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작은 밭에 딸린 매장지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실제로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상속함으로써 이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방황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을 겁니다. 이 땅에 뼈를 묻고 후손들에게 이 땅을 물려주겠다는 신앙적인 결단과 결의를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현실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foreigner)이자 거류민(resident alien)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는 현실 너머의 약속을 붙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몇 백 평에 불과한 땅 매입이지만 가나안 땅 전체를 미리 앞당겨 차지해 보는 믿음의 행위였던 겁니다. 성경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정반대의 행위를 결단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남유다가 멸망을 앞두고 예레미야가 보여준 땅 매입에 관한 이야기는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32장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11년을 즉위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10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해에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2).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체포되어 갇혀 있었죠. 그가 잡힌 이유는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왕인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감옥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던 거죠. 이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7)." 지금 유다가 오늘 내일 망할 상황에서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밭을 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매입이 어떤 의미인지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해 주십니다. 예레미야 3215절 말씀입니다.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약속이 주어지고 있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결과물로 땅을 매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 매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결단이자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된 것이죠.

 

히브리서 1113-14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예레미야의 땅매입 행위가 믿음의 결단이라 해석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간절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고향이라 번역된 헬라말은 파트리아(Patria)’로서 아버지의 땅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며 믿음으로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4.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약속을 붙드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 우리가 받아 든 약속과 전혀 다르더라도 약속을 붙들며 걸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어떤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언약 백성의 삶을 통해 온 세상을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약속 받은 땅을 한 뙤기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죽고 그의 후손을 통해 마침내 이 땅 위에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지금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이라도 사들여 그 약속을 이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매우 어둡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며 답답해 합니다. 이 땅 위에 세워지겠다던 하나님의 나라는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셨다고 들었는데 악의 세력은 더 강력해 진 것 같아 보이기만 합니다. 악은 일상화 되었고 보편화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게 세상의 풍조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아가라 부탁하십니다.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고 견지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에브론을 비롯한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사용권을 무상으로 주며 그를 그 사회에 편입시키려 들었습니다. 너는 우리와 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인 것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당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기백을 놓지 않았습니다. 400세겔의 거액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나그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시고 이 땅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자 모이는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잘 못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돌려드리기 위해 우리는 찬양하며 기도하며 우리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안정감과 유사전능성에 대항하고자 우리는 헌금을 하며 그 헌금을 통해 사랑을 흘러보내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이 세상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함께 모여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현실과 악이 평범화 된 현실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는다는 믿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내일 유다가 멸망하더라도 아나돗의 밭을 샀던 예레미야처럼, 고향(아버지집)을 찾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표현한 선진들처럼, 약속한 것을 지금은 받지 못할지라도 그 약속을 잊거나 저버리지 말길 바랍니다. 오히려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 행동들을 결단하시고 실행해 옮겨 보십시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교회에서는 너무나 신실해 보이는데, 교회 밖을 벗어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하게 만들게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라면 교회 밖 현실에서 우리 태도는 분명히 달라야만 합니다. 세상에 발 딛고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더 사랑하고, 더 친절하고, 더 긍정적이고, 더 소망으로 가득하고, 더 인내하고, 더 절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품위 있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5.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더라도 우리는 밭을 사고 땅을 경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도 오늘이라는 일상을 우리는 묵묵히 살아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지난 겨울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그렇게 외롭게 서 있던 겨울나무들도 이제는 푸르른 신록의 잔치에 하나같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이파리를 이르게 틔우기도 하고 어떤 나무들은 아직도 앙상한 채로 있지만 언젠가는 푸르른 잔치에 동참하겠죠. 우리의 신앙도 나무들에게서 배웁니다. 약속이 더디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버텨서서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묵묵히 뿌리를 내릴 마음으로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인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부인들과 요셉은 막벨라굴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요인이되어 400년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의 땅인 약속의 땅을 잊지 않고 돌아오죠. 그런 면에서 우리의 일상 안의 믿음의 실천들은 우리 삶에 귀한 열매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의 부모님은 경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인 연천 마을이라는 곳에서 유일한 광산 김씨로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제 생각으론 꾀나 녹녹치 않은 현실 속에서 조상 중 한 분이 이씨 집성촌으로 들어가셔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시골의 집성촌의 분위기를 아시는 분들은 그 텃세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이씨 마을의 나그네처럼 살아가던 아버지께서 큰 결정을 내리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면소재지로 이사를 결심하셨죠. 면사무소와 교회 사이에 낀 집을 사셨고 지금도 그곳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웃에 위치한 겁니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믿음이 없는 분들이셨지만 그 이사의 결정이 저희 집안의 운명을 좌우했던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보다 앞서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들이게 된 것이죠. 자녀들이 교회가니 어머니 아버지도 교회에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질 수 밖에 없는 격이죠. 교회 가까이 살다 보니 가족들의 신앙은 깊어지면서 따라온 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의 이사는 정말 귀한 선() 투자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지금 내려지는 신앙의 결단과 행동들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열매가 되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은 선물임과 동시에 돈으로 매입해야 하는 땅, 곧 믿음의 선() 투자를 요구하는 땅임을 기억하십시오. 가족의 달을 맞아 우리가 만들어갈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정체성에 대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 답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선() 투자하는 이들의 삶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믿음의 투자는 더디더라도 반드시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백 세겔을 투자하여 나중에 후손들이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했잖습니까?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는 길손으로 살아갈지 모르지만 우리는 참 고향(파트리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귀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때론 아브라함처럼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이 다가올 지 모르지만, 때론 예레미야처럼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대재앙이 임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인생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투자하는 삶은 어떤 투자보다 수익률이 높고 보장성이 높은 투자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이 아브라함의 가문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이뤄드리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태복음 2534-40

제목: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

(온가족 예배 설교)

 

1.

어린이 여러분 한국에서 55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55일은 어린이 날입니다. 그럼 58일은 무슨 날인가요? 5 8일은 어버이날이지요.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예요.미국에는 어머니날과 아버지 날이 따로 있지만 한국은 한 날에 같이 기념한답니다. 58일 내일 아침에 어머니 아버지에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꼭 말씀드리세요. 한국에는 어린이 날이 있지만 미국에는 어린이 날이 없는데 왜 그럴까요? 아마도 미국에서는 1 365일 전체가 어린이 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한국의 어린이들은 매일 학원 몇 개씩 다녀야 하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엄청 많은데 미국 어린이들은 덜 하잖아요. 한국 어린이들은 너무 힘들게 공부하니까 하루만이라도 푹 쉬라고 어린이 날을 만들어 준 거랍니다. 목사님이 어린이 날을 맞아서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예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8:3-5)."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아야 들어갈 수 있대요. 그러니까 어린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인 거예요. 여러분의 엄마 아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조금 고민해 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언제든 하나님 나라에서 대환영이랍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이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도 항상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셨어요. 예수님 당시에 어린이들은 가장 무시 당하는 존재였어요.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려고 하자 어른들을 애들은 가~”하면서 쫓아 내려고 했었죠. 그러자 예수님은 애 때리자 마!” 하시면서,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왜냐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기 때문이죠.

 

2.

어린이 날을 맞아서 목사님이 선물 하나 더 드리려고 해요. 그것은 공부를 잘하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공부 잘하고 싶죠?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 방법은 여러분의 부모님께 물어보세요. 여기 계신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한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요. 부모님에게 물어보기 싫다면 다음 방법을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공부를 잘 하려면 철이 들어야 해요. 철이 드는 것이 뭡니까? 철이 든다는 것은 나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아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철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철들었다고 하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이 대학생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 한 집사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어요. 그 분에게는 자녀가 세 명이 있었어요. 세 명의 자녀 모두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에 입학했죠. 그 집사님에게 비법 좀 알려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분이 제게 해 주신 말이예요. “철들면 다 알아서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시면서 자기들을 키우시는 것을 어려서부터 본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이 세 자녀 모두 철이 일찍 든 거예요. 공부 잘 해서 부모님 속 썩여드리면 안 되겠다라고 어려서부터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능력이 어릴 때부터 있었던 거예요. 이 집사님이 밤늦게 일을 마치고 밭에서 돌아오면 아이들 세 명이 모두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대요. 새벽 1시 넘어서까지 공부하느라 불이 꺼지지 않았대요. 부모님 힘드시니 속 썩여 드리게 하지 않으려고 알아서 잘 한 거예요. 여러분의 부모님도 한국에서 이민 오셔서 여러분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시잖아요. 그쵸? 그러면 부모님 속 상하게 해드리면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죠~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우리 어린이들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친구들이 공부도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철들기를 바라셔요. 철들어서 공부 잘 하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구요. 철들어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이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예요. 이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따라하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은 무척 기뻐하신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만 아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은 속상해 하세요. 하지만 내 옆에 있는 내 이웃들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잘 돌봐주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세요.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셨어요. 하지만 세상은 온통 망가져 있었고, 악한 세력들이 그런 예수님이 만드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했어요. 예수님은 악한 세력들에 의해 망가져버린 하나님의 세계를 구하기를 원하셨어요.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봐주고 다 같이 잘 사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기를 예수님은 바라셨어요.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철이 든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들을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내용이예요. 여섯 가지의 행동이 소개 되고 있죠. 목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벌거 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환영해 주고, 감옥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준 것 모두 어떤 동작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3.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뭘 원하시는 지 이 그림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거 쾨더 (sieger köder)라는 독일의 신부님이 그리신 그림이예요. 이 분은 그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이 그림의 제목은 “Werke der Bermherzigkeit (Work of compassion)” 입니다. 본문의 성경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먼저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있는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보이시나요? 그 여인의 오른 편에는 수녀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병들어 누어 있는 환자를 돌봐주고 있죠. 그리고 열린 문 바로 안쪽에 어떤 나그네가 서 있고 한 여인이 그를 안으로 들이며 환영해 주고 있죠. 바로 그 오른 쪽 옆에는 죄수복을 입은 한 죄수를 한 남자가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빵을 쪼개어 검정 피부의 손을 가진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검정 색 손을 가진 사람이 배고 픈 것이 분명합니다. 여섯 가지 동작 중에 한 가지 동작이 남아 있는데요. 뭐죠? 헐벗었을 때 옷을 준 것입니다. 그것은 왼쪽 맨 위에 포스터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독일말로 “Kleider für die dritte Welt (Clothes for the third world)”라고 되어 있는 포스터입니다. 제 삼세계란 가난한 이웃 나라를 말하구요, 그곳에 옷을 보내주자는 포스터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발견하셨나요? 그것은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와주는 사람이 예수님인 줄 모르고 도와주었을 뿐이었죠.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니가 도와준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있는 사람, 나그네는 바로 나였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그러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겁니다. 인생을 잘 살고 싶고, 의미 있게 살고 싶으신 분들은 잘 새겨 들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공부 잘 하고 못 하고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깨닫고, 나도 예수님처럼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길 주님은 원하십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옆의 사람의 어려움에 공감해주고 반응해 주는 그런 사람을 예수님은 기뻐하세요.

 

20세기에 프랑스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을 때 항상 아베 피에르 (Abbe Pierr)라는 신부님이 1등을 차지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파리 근교의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을 위해 1949년부터 엠마우스 운동이라는 구제활동을 시작하신 분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중에 예수님께 식사 대접을 하신 것에서 시작된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노숙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고 믿고 아베 피에르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일을 평생 하셨어요.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하셨어요. 본문의 양과 염소로 예수님이 나눈 것처럼 말이예요. 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홀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보고 등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공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그에게 나아가는 사람이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환영 받을까요? 어려움을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등돌리지 않고 나아가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아까 그림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손입니다. 손을 통해 사랑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이시나요? 그러고 보면 한글 성경을 보면 여섯 가지 동작의 뒤에는 모두 준다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붙어 있는데 손과 관련된 동작이죠. 나누는 삶입니다. 손을 통해 다른 사람을 터치해주기도 합니다. 손을 통해 다른 사람을 끌어 안아주기도 합니다. 손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전달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손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이야 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랍니다.

 

4.

메튜 폭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두 가지 삶의 모습이 있다고 말했어요.  하나는 사다리를 올라가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circle dance를 추는 삶이라고 했어요. 써클 댄스란 한국의 전통춤인 강강수월래 같은 춤이예요. 사다리를 올라가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에 먼저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삽니다. 나보다 앞에서 올라가는 사람들을 잡아 끌어 내려야 내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은 철저히 밟아서 못 올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경쟁 때문에 떨어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겠죠. 그런데 써클 댄스를 추는 것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써클 댄스는 모두가 같은 위치와 레벨에서 춤을 시작합니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손을 내밀어 내 옆의 이웃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을 잡고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렇게 우울해 하지 말고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춤을 춰요하며 그를 원 안으로 초청하겠죠. 그러면 원은 더 커지고 즐거움도 더 커지게 되겠죠. 써클 댄스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우리 다하나교회의 비전이기도 하구요.

 

우리 모두는 써클 댄스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옆 사람과 손을 잡고 나의 것들을 공유하며 함께 행복하고 모두가 즐거운 그런 세상을 향해 초대를 받은 겁니다. 저는 어린이 여러분이 공부는 잘하지만 공감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그런 사람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손을 내밀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앞에서 철이 들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인생 다 살고, 예수님이 너 인생 참 잘 살았구나. 하는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다른 사람들과 손잡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학교에서도 어떤 친구가 외로워하나? 어떤 친구가 힘들어 하나? 어떤 친구들을 도와주어야 할까?’ 항상 신경써서 지켜 보고 도와주는 우리 어린이들 되면 좋겠어요. 교회에서도 소외된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지 잘 보시고 다가가 함께 하는 다하나교회 교우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지극히 작은 이의 모습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언제든 이웃에게 따뜻한 손 내밀어 주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Scripture: Matthew 25:34-40

Title: “Jesus, coming in the form of the stranger” / Translated by Hyeri Choi

 

1.

Children, do you know what day May 5th is in Korea? May 5th is Children's Day. Then What about May 8th? May 8th is Parents' Day. Parents’ Day is a combination of Mother’s and Father’s Day. In the United States, Mother's Day and Father's Day are separate, but in Korea, they celebrate them together on the same day. Parents’ Day is a day to celebrate our moms and dads, and to tell them that we love and cherish them very much. There is Children's Day in Korea, but there is no Children's Day in the United States. Why is that? Maybe it's because every day is Children's Day in the United States! Many children in Korea go to several private extra-curricular academies after school every day. They are under a lot of stress and going through constant competitions, but children in the States are less stressed about studying. Because Korean children study so hard and are always stressed out about class rank, Children's Day was made so that they can rest and do not have to worry about their studies at least for a day. As a Pastor who loves Children’s Day, let me share some good news for you. This is what Jesus said. “Truly I tell you,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erefore, whoever takes the lowly position of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And whoever welcomes one such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Matthew 18:3-5).” Jesus said that people who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are like children. So, children like you can enter the kingdom of heaven. It might be more difficult for mom and dad to enter the kingdom of God, but you're always welcome. Isn't that amazing news?

 

In the kingdom of God, the lowliest is the greatest. Even when Jesus was alive on earth, He always went to the people the lowest position first. In the days of Jesus, no one gave any regard for the children; they were the weakest and the most neglected in society. No one thought children were worthy. When the children tried to come to Jesus, the adults tried to divert them away, saying, “Children, go away!” Then Jesus told them not to stop the children from coming. Because in the kingdom of heaven, the smallest person is the biggest person.

 

2.

For Children's Day, this pastor would like to give you another present: how to study effectively. Children, do you want to study effectively? The first and best way is to ask your parents. Your parents here were some of the most educated people in Korea. If you don't want to ask your parents, listen carefully. If you want to study effectively, you need to become mature. What is maturity? Maturity is something that happens when we start thinking about others around us. Those who are not yet mature are selfish people who only think about themselves. On the other hand, people who can understand and empathize with others are mature people.  

 

When I was in college, there was a deacon at my church, who was a farmer. He had three children. All three of his children got into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in Korea. Many people asked him about what his secret was on how he could send all three of his kids to the top university. This is what he said to me. He said, “Once they mature, studying comes naturally.” From an early age, his children saw their parents working hard to raise them. When these children began to give thought to how hard their parents were working to give them a better life, they realized that one of the best ways to bring joy to their parents was to study hard. In other words, they matured. As an example of this, this deacon came back late one night after working all day in the fields; however, to his surprise, he found that all three of his children were still hard at work at their desks. This was at 1 in the morning! I know that all of your parents are working just as hard here in the United States to give you all a better life – so I hope that you too will all become mature and start to understand your parents’ hearts.

 

In a similar way, Jesus calls us also to become mature. But this isn’t necessarily referring to the type of maturity that leads us to study hard. Rather, this maturity calls us to understand the heart of Jesus; and this heart calls us to love the Lord and love our neighbors as we love ourselves. When we start to understand Jesus’ heart and begin to follow after the example that He set for us, this brings great joy to Him, but when we forget about Jesus’ teachings and think only about ourselves, this grieves Him. Jesus calls us to love our neighbors as ourselves – understanding them, empathizing with them, and taking care of them. This was what Jesus came to this Earth to teach us. Jesus wants everyone to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to be loves, and to live their lives to the fullest. But the world that Jesus found when He came was broken, and filled with evil that wanted to disrupt God’s great plan for salvation. Jesus came so that we could see from His example how to love each other well. People who realize this and carry this out in their lives are mature. Today’s Scripture shows a few examples of people who did this very thing. There are six actions as examples of how we can carry out Jesus’ teachings to us. It is to give water to the thirsty, to give food to the hungry, to clothe the naked, to care for the sick, to welcome the wanderer, and to comfort those in chains. Jesus calls people who do these things righteous.

 

3.

Let’s look at a picture together to better understand today’s Scripture. This is a work by a German priest by the name of Sieger Köder, and he took special joy in meditating on God’s Word and expressing this through works of art. The title of this work is “Werke der Bermherzigkeit,” which means Work of Compassion. It is a painting that directly transcribes what was written about in today’ passage. First, we see a woman in red giving water to the thirsty. To her right, we see a nun taking care of the sick. There is also an open door where there is a woman welcoming a wanderer. To their right is a prisoner being comforted. Next, we cannot see the full context, but someone is sharing bread with another of a different race, who is clearly hungry. And there is one action, or example, left from today’s scripture that is left out – which is clothing the naked. This is shown by a small poster that we see on the top left corner, which says “Kleider für die dritte Welt(Clothes to the third world)”; it’s a poster that is leading a donation drive to gather clothes to send to the third world.

 

But there is something special about this picture; it is that everyone who is being helped has the same face. This is the face of Jesus. Those providing the help did not know that they were offering their aid to Jesus. But Jesus states this to them –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you did for me. Jesus comes to us in the image of the smallest, weakest, most insignificant amongst us. Those of us who would seek to live a meaningful life, a good life, should now listen carefully. To Jesus, whether you are smart or good at studying is not important in and of itself. Rather, Jesus calls us to realize the purpose for which He came to this Earth, and for us to share in His ministry of serving the least of these around us – to not be selfish people who only care for our only successes, but to be people who are sensitive and mindful of the needs of people around us. Jesus delights in people like this.

 

When the French were asked to pick their “most respected person” of the 20th century, a priest by the name of Abbe Pierre took first place. He was a priest who lead a movement called Emmaus which sought to address poverty and homelessness in Paris. Father Pierre started this movement in 1949, and was inspired by the example of Jesus’ disciples unknowingly having served their Lord a meal after their trip to Emmaus, as described in Luke chapter 24. Father Pierre believed that Jesus would come to us in the image of the poor, the homeless, and the needy. He also believed that you could separate people into two groups – the so-called sheep and goats, just as Jesus separated people into these two groups in the Scriptures. One group is happy to remain self-satisfied, and are more than capable of turning their backs on the needy around them. The other group are sensitive to the needs and pain of the others around them, and so approach them with compassion. Which type of person do you think would be most welcomed in the Kingdom of God? It is those who do not turn their backs on the suffering around them, and instead reach out with their own hands. 

 

Let us look back at the painting once again. Another thing that stands out are the hands. Can you see the flow of love and care through the moving of hands? When we look at the Korean text of today’s Scriptures, we see that there is the action of “giving,” or re-interpreted, “providing with hands,” that unites the six examples in Jesus’ teachings today. In short, it is to “share.” We reach out to others with our hands; we can provide to others with our hands; sometimes, we can embrace those grieving with our hands. In short, it is the correct use of our hands to help others that Jesus delights in.

 

4.

A theologian by the name of Matthew Fox describes a dichotomy (two types) of lives in this world. One is a life that climbs upward (Jacob’s ladder) whilst another is one which shares in a “circle dance” (Sarah’s Circle). This concept of Sarah’s circle is quite akin to the “Gang-Gang-Su-Wol-Rae” of Korean tradition. Let us think about ladder-climbing first; this is a life punctuated by effort to get ahead, to get higher; you have to pull down others ahead of you to move upward, and you must push down on those below you to keep your own position. In a society like this, competition results in much pain and suffering, almost by design. But Sarah’s Circle is a different paradigm entirely; a circle dance is one in which everyone starts at the same level, and you must reach out to those around you in order to participate in the dance. There is no start or end; and you must become equal with your neighbor. This circle welcomes even those who are grieving, who are in pain, who are saddened; their joining the circle makes the circle wider, and our joy is made greater in the sharing of it. This, I believe, is one way we can understand the Kingdom of God, and a vision of our church community as well.  

 

We have all been invited to this circle. We have been invited to share in collective joy with others around us. I hope that we would all become those of us who shun self-driven perspectives that ignore the others around us, but rather that we would seek to become more empathetic, more kind, more gentle. I pray that we would all become the type of mature believers that Jesus calls us towards, so that when He calls us home, we might be called good and faithful servants. Now let us think on the others around us, whether it be in our schools, workplaces, or neighborhoods. Let us work towards building the Kingdom of God in our own communities. Children – I pray that you would seek out those who have been left out, who have been othered, who are in need – and to provide whatever help and care you can. In the same way, I pray that we would become a community of faith that takes note of even the least of those among us. The Lord Jesus, even today, approaches us with the appearance of the “least among these.” Let us become believers who are always ready to offer a warm hand to whoever would welcome it.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