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없다면 우리 일상은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 보셨나요? 습관이 없다면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순간이 결단이라는 것에 봉착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칫솔질은 앞니부터 할지 어금니부터 할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할지 왼손으로 할지, 우유는 냉동실에 둘지 냉장실에 둘지,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행하고 결정하는 습관적인 행동들이 모두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면 우리 삶이 힘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습관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뇌는 우리가 행하는 수 없이 많은 행동들을 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면 뇌가 너무 피곤해 지는 것이죠. 그래서 뇌는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행동 기저핵이라는 뇌의 특정 부분에 저정을 해놓고, 그 상황이 벌어지면 생각하여 결정하는 대신에 저장해 두었던 행동양식을 꺼내서 반응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것이 뇌와 관련된 습관의 비밀이죠.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나 태도 또는 자세가 습관이 되려면 뇌가 생각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만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 것이죠. 테니스 같은 운동을 배우면 코치가 계속 공을 피딩해주면서 한 동작을 무한 반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일정한 동작들은 습관적으로 수행되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란 뜻을 가진 ‘habit’은 원래 유럽의 수도승들이 입었던 복장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라틴말 ‘habitus’에서 유래된 건데 ‘상태, 스타일, 연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수도승들은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통일된 복장을 입게 됩니다. 수도회마다 수도복의 색깔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유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수도복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죠. 베네딕토 수도회는 까만색 해빗을 입기에 ‘블랙 몽크’라 불리웁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갈색이나 잿빗 해빗을 입고 허리에 청빈, 순결, 순종을 의미하는 세 개의 띄를 묶어서 늘어뜨린다고 합니다. 해빗을 입은 수도사들에게 는 개인의 욕망이 드러날 틈이 없습니다. 해빗을 입음으로 그는 자동적으로 수도회의 가치에 헌신하고 하나님께 순명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이죠 이렇게 해빗(habit)은 단순함, 일상성, 익명성, 반복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말은 수도복이 그 수도회의 영성의 색깔을 나타낸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승처럼 해빗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의 습관들은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드러냅니다.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수 없이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빗을 덧입는 길 밖에 없습니다. 몸을 사용한 일상의 반복적인 결단과 실천 밖에 좋은 해빗을 덧입는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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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 필유린”

 공자가 말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論語)에 나온 글귀입니다. 논어는 인간관계를 위한 책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이 지녀야할 도리들을 설파한 공자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한 사회를 발전시키며 지탱시킬 힘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이자 덕목은 인()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랑’인 것이죠. 사랑과 덕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가 한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공자는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의 이런 기본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위의 글귀를 해석해 본다면, 덕()이야 말로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이해입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 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백범 선생은 이 글귀를 토대로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것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건강이 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 마음을 갈고 닦는 내적 수양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수 없이 많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서 우리가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이웃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묶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우리 삶에 숙제처럼 부여되는 것이죠.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거하시는 결과물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갈 5:22-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모두 성품과 인격에 관련된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덕()이라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후의 삶의 목적은 바로 덕을 수련하여 키워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촉진시키는 연결고리가 바로 덕이기 때문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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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노회참석차 시카고 오고가는 하늘 길에서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소설 1권과 2권을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편의점이 편의를 주지 못하고 불편을 주다니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소설은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염영숙은 동네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70 초반에 역사선생님으로 은퇴한 노파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영숙은 Always라는 편의점을 경영해 오고 있습니다. 적자로 운영난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편의점을 접지 못한 이유는 편의점 알바를 하며 재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였고, 애당초 그녀는 그런 목적으로 편의점을 시작했던 겁니다. 영숙은 부산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자신의 지갑이 파우치를 분실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통의 전화를 받는데 자신의 파우치를 서울역에서 습득한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그는 서울역을 근거로 힘겹게 살아가는 노숙자였고, 영숙은 그를 자신의 편의점까지 데리고가 편의점 도시락으로 그의 허기를 달래줍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숙과 독고라는 50 초반의 다른 주인공을 통해 소설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독고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알코올 중독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리고 오랜 노숙자 생활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그를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 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야간 알바를 하는 편의점 또한 불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서울 중심부이지만 개발되지 않은 청파동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편의점을 통해 독고라는 남자와 연결이 되고, 독고는 그의 외모와 딴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소설은 독고를 통해 갱생되고 제기하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결국 독고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영숙씨의 작은 호의와 신뢰가 어떻게 나비효과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지 소설에서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독고는 불편한 편의점에 기대어 추위를 피하고 폐기 상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보잘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는 영숙에게 받은 호의와 신뢰를 편의점에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그대로 흘러보내 줍니다. 편의점을 이용하는 청파동의 가난한 인생들은 독고의 친절과 조언을 통해 그들 또한 재기를 꿈꾸고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며 교회가 이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여러 모로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도 많지만, 교회는 기댈 없는 사람들이 와서 쉼을 누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친절과 호의를 통해 격려 받고 살아갈 용기를 얻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크신 은총과 자비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베푸는 호의와 자비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갈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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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사회성이 없다고 평가 받는 노인이 있다.  그는 사브만 타왔고 볼보나 독일차를 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는 흑백으로 이뤄진 남자다. 그의 아내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는 숫자를 좋아했고 수학만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학공장에서 일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그가 여덟 즘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나마 남아 있는 아버지의 단어들을 가져가 버렸는지 말이 더욱 없어졌다. 그가 고등학생일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흑백일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는 무뚝뚝했다. 어느날 기차를 기다리며 만난 그녀는 그의 삶에 위로였다. 남자는 40 동안 그의 삶을 채색했던 아내가 죽자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짓궂은 이웃들이 끼어들며 그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 간다. 전혀 계획이 없이 이웃들과 엮이면서 그의 삶은 다른 색깔로 채워진다. 무뚝뚝하고 인간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따뜻한 남자는 오베라는 남자이다. 

 

지난 주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감동과 눈물을 책은 오랜만입니다. 먼저 항상 외국 소설을 읽을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들도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미네소타의 이주민 중에 스웨덴 같은 북유럽인들이 많다보니 흥미를 갖고 봤는데 한국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웃에 사는 코카시안들도 내가 갖는 기쁨과 절망, 환희, 슬픔 등의 감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겠구나라는 이해가 훨씬 깊어진 듯합니다. 두번째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이웃로컬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고 이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환희와 기쁨을 선물해 있는지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 애써이웃 우리 사전에서 지우려하고골칫덩어리 고쳐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곁가지일 있지만 저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두리안입니다. 두리안은 겉에 딱딱한 갑옷이 쌓여 있는 과일입니다. 갑옷에다 가시까지 겉면을 싸고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겉모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겉면을 벗기면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하는 사차원의 향기는 과일을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과육을 사람은 과일의 진가를 압니다. 오베라는 남자가 두리안같은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이웃들에게 딱딱하고 가시 돋은 말을 하는 그였지만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와 어울리기를 기뻐합니다.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웃 사랑의 기쁨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봅니다. 두리안 처럼 부담스럽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이웃이지만, 그들은 무미건조한 우리 삶에 색과 맛을 줄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다른 오베가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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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816-19

제목: 의와 공도의 하나님 나라

 

1.

오늘은 교회 켈린더로는 산상변모주일(Transfiguration of Jesus)인데 사순절 직전에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산상 변모(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기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를 하러 산에 가셨을 때 변화된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의 얼굴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하얗게 빛이 났었죠(9:29). 베드로와 두 제자는 기도 안하고 졸고 있다가 깨어나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유난히 빛난 모습으로 구약의 유명한 인물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그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교회력에서 산상변모 주일이 사순절 바로 앞에 있는 이유는 변화산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이 수난 받으실 거라는 걸 말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까요? 모세와 엘리야는 당시에 구약 성경으로 이해되던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말씀 드렸던 모세오경인 토라(Torah), 그리고 예언서인 느비임(Neviim) 을 대표하는 사람 둘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 속에서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에 의해 그렇게 에코잉 되던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출애굽과 예언자들이 노력했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이 이제 예수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기 전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음성이 들려진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미 하늘에서 이와 동일한 음성이 들렸었죠. 이제 예수님이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구원의 사건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931절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31절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눈 대화의 주제가 나옵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개역성경에서는 떠나가심별세로 번역했고, 영어성경에서도departure 또는 decease’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Exodus’에 대해 말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완성해야 할 일이 exodus, 그러니까 출애굽이라는 말입니다. 모세 시절 출애굽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누구의 희생 덕이었습니까? 출애굽 당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고 저주가 넘어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이끌림을 받아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실 일이 십자가 희생인데 그것은 그의 언약백성들을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희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9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구요.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 빛의 자녀들을 세계 만민을 위한 제사장 역할을 위하여 이끌어 낼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많은 이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는 겁니다. 이 놀라운 진실을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2.

여러분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 세상에 등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마침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계속 echoing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도려 내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큰 산봉우리에서 아브라함이 소리를 지르니까 저 멀리 있는 모세에게서 똑같은 소리가 울렸습니다(Echoing). 그 모세의 소리가 이스라엘에게 울리고 세례 요한에게 울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에코를 합하여 그분의 소리를 내십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누적되어 왔던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이야기들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지니까요. 예를 들어, 소설 레 미제라블이총 다섯 권인데, 4권부터 읽는다 하면 장발장이란 인물이 원래 이렇게 착한 인물이었던 걸로 착각할 수 있겠죠? 은촛대와 은접시들을 훔친 장발장을 미리엘 주교가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안은 이야기를 빼 먹으면 안됩니다. 장발장이 어떻게 사랑의 힘으로 극적으로 회심했는지를 1권에서 읽어야만 나머지 책에서 펼쳐지는 그의 선행의 의미들이 이해 되어지는 겁니다.

 

3.

아브라함에게 울려 퍼졌던 구원의 메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이야기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앞으로 구약 성경에서 반복되어 에코잉될 하나님이 만들어 가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청사진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만들어 가실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본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 외침이 예수님에게서 동일하게 에코잉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어떤 세 명의 사람의 방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세 사람은 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소돔이라는 도시에서 들려지는 부르짖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실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합니다. 대접을 잘 받은 그들은 사라가 내년 이맘 때 남자 아이를 출산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해 줍니다. 24년 동안 약속을 받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터러 사라는 그 말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종으로부터 사내아이를 낳아 대를 잇고자 노력했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태로부터 후손이 나올 것을 거듭 확인해 주셨었죠.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번 약속을 확인 받았지만 그들에겐 세월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사라의 잉태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배웅합니다. 그들을 배웅하는 길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전달되는데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8절의 말씀은 창세기 121-3절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의 후손을 선택하신 이유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전제되는 복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순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 명령을 여호와의 도라고 표현하고 있구요. ‘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데레크derek’는 길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난 주 설교했던 인생의 두 가지 길 중에 의인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아브라함과 그들의 후손이 지켜야할 길을 두 가지 단어로 압축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의와 공도로 번역했죠. 새번역에서는 옳고 바른 일’, NIV에서는 ‘right and justice’ KJV에서는 ‘justice and judgement’라고 번역합니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 말로 쯔다카(צְדָקָה)’미쉬파트(מִשְׁפָּט)’입니다. 의로 번역된 쯔다카는 회복적 정의’를 일컫는 말로 자선 혹은 구제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어떤 사회든 사람들의 공동생활에서 발생한 잉여를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부유해지고 또 어떤 이는 가난해집니다. 성경은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함으로써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자들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옳은 삶이란 거죠.

공도나 정의로 번역된 미쉬파트는 사법적인(juridical) 정의입니다. 재판관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의는 힘이 있는 사람들을 편들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불법을 묵인하거나 두둔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하여 있는 죄를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벌을 주지도 않습니다. 사법적 정의가 바로 설 때 사람들은 공권력을 신뢰하게 되죠. 그러니까 사람의 신분이나 빈부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겁니다.

쯔다카와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 대한 존귀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개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동등하게 부를 나누고 소유하는 그런 자율 시민적인 가치가 바로 쯔다카와 미쉬파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두 가지 큰 기둥입니다.

 

시편 971-2절은 이 말씀을 에코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뛰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 정의와 공평이 그 왕좌의 기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왕좌에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정의와 공평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1819절에서 쓰인 쯔다카미쉬파트가 똑같이 쌍으로 쓰이고 있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정의와 공평으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죠.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의 핵심에는 이 두 가지 본질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앞으로 실험되고 실천될 나라는 쯔다카미쉬파트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정의와 공평이 실현되는 나라를 아브라함은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의 조카 롯이 추구한 도시 문화의 본질은 이와 정 반대로 나아가는 나라였습니다. 성 안에 머물며 안전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이웃을 물어 뜯는 야수들의 사회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나라와 소돔을 대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숨길 것이 뭐가 있겠어? 너의 나라는 저 소돔처럼 되면 안돼? 알지?”이런 뉘앙스인 겁니다. 소돔과는 대조되는 대안적인 나라를 만들어갈 숙제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4.

소돔은 미쉬파트와 쯔다카를 행하는 사람인 의인 10명이 없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다음 장인 19장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두 명의 메신저가 롯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도시의 남자들이 롯의 집으로 쳐들어 오려고 합니다. 남자 손님 둘을 겁탈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도시의 도덕적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해 줍니다.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죄악을 저지르는 겁니까? 왜냐면 상대방이 나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을 자기의 욕망을 위한 물건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체로 존중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필요대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죠. 구약 성경은 이런 의롭지 않기 때문에 죄라고 말합니다. 쯔다카와 미쉬파트가 결여된 상태입니다.  

 

중국에 살며 경헌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거리에서 누가 맞고 있어도 관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랑 상관 없는 사람이고 괜히 관여했다가 나만 골치아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중국에 아직도 문이 없는 화장실들이 많습니다. 그 합리적인 이유 중 하나가 사람이 하도 많아서 화장실에서 마주친 사람을 다시 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면 우리는 타인에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니 함부로 하기까지 하죠. 반대로 내 이웃이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을 받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 생각되면 그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가난하고 병들고 죄인 취급 당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거친 대우로 말미암아 일그러져 있는 그들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다가가신 겁니다. 쯔다카와 미쉬파트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내 이웃을 향한 존중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연결된 존재이고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눈이 열리게 되면 우리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의 이웃이요 나의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존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지구 저 반대편에서 일어난 튀르키에와 시리아의 지진이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지만 그들을 돕고 싶어지죠. 왜냐면 그들이 우리의 형제 자매요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주고자 우리의 지갑을 여는 것이 아깝지 않게 됩니다.

 

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꿈꾸셨던 나라는 의롭고 공정한 나라였습니다.  정의와 공평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인데 사랑에 뿌리를 둡니다. 로마서 13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들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결정하면 예수님은 그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자유케 합니다. 이제 그의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이 쥐고 다스리게 되죠. 그런데 성령의 법은 사랑을 따라 움직이고 다스리는 법입니다. 성령님에게 온전한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왜냐면 정의와 공평이 온전하게 행해짐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필요 없을 정도의 자율 통치가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민(文民)통치란 직업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에 의한 문민 통치가 이뤄집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가 자율적으로 사랑에 의해 움직이니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이죠. 그 성령의 문민통치를 맛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미리 맛보는(foretaste) 곳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 믿고 성령의 다스림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사랑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세금 거두는 사람이 없는데도 좋은 옷 입고 와서 자발적으로 세금을 냅니다. 그리고 그 재정으로 주변의 불우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자 합니다. 모든 교회가 자기가 속한 동네나 커뮤니티의 복지를 교회 스스로 책임진다면 국가는 필요 없어지게 될 겁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렇게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을 더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율적인 사람들이 많아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 더 힘있게 세워져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기 전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확인합니다. 구약의 길고 긴 역사와 서사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은 언약 백성을 만민에게 복을 주기 위해 새로운 출애굽을 만들어 가실 겁니다. 그 출애굽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열리게 되는 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참 길과 생명을 열어주실 겁니다. 예수님이 가실 길은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미 제시된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계속 반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코잉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만들어가실 나라는 정의와 공평이 기반이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치되어질 사랑의 나라인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 어디에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하나님은 이 땅 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는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바라십니다. 그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초가 바로 쯔다카와 미쉬파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두 기둥 위에 세워지는 것이죠. 이런 정의와 공평은 성령의 온전한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나의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를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라시는 삶이라는 것을 너무나 깊이 이해하기에 이웃을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땅에 사법적인 정의가 실천되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사법적인 정의가 무너져 있고 부의 공정한 분배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가득하면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어지게 됩니다(이사야11:9). 우리를 통해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기 소망합니다. 인간미 없는 소돔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책임지는 정의와 공평이로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위에서 미리 맛보기를 소망합니다.  

Text: Genesis 18:16-19

Title: A Kingdom built on the foundation of righteousness and justice

Translated by Wi Chung-Il

 

1.

Today is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on the Mountain by a church calendar, which is celebrated just before Lent. The 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 refers to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when he went to the mountain to pray with Peter, James, and John before he suffered. When Jesus prayed, the appearance of his face transformed, and his clothes shone dazzlingly white (Luke 9:29). Peter and the two disciples dozed off without praying and woke up to see an amazing scene. Jesu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were exceptionally shining. They also found Jesus talking with two famous Old Testament figures. Those two were Moses and Elijah. After talking with them, Jesus heard his Father's voice from heaven. The reason why the 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 Sunday is right before Lent in the church calendar is because Jesus began to say that He would suffer from the 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

 

Why did Moses and Elijah appear before Jesus? Moses and Elijah represent the Pentateuch and the Prophets, which were understood as the Old Testament at the time. These are the two people who represent the Torah, the Pentateuch of Moses, and the Neviim, the prophetic book, which I mentioned last week. In other words, the promise of God echoed in the Bible by people like Moses and Elijah is Jesus. It means that the Exodus led by Moses and the reenactment of the Exodus event that the prophets worked hard for will now be accomplished through Jesus. So now, before the Passion of Jesus began in earnest, a voice was heard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At the beginning of Jesus' public ministry, the same voice had already been heard from heaven. Now, right before Jesus begins the event of salvation prophesied by Moses and the prophets in Jerusalem, God is expressing his sincere thanks to Jesus.

 

In that sense, Luke 9:31 is very important. Verse 31 is the subject of a conversation Jesus had with Moses and Elijah. “(Two men, Moses and Elijah,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In the Revised Bible, ‘departure’ is translated as ‘death’, and in the English Bible, it is translated as ‘departure’ or ‘decease’. By the way, the Greek Bible says, “The Exodus of Jesus was spoken of in glory.” The work Jesus had to complete in Jerusalem was Exodus. Whose sacrifice was it that made the Exodus possible in the days of Moses? At the time of the Exodus, the blood of the lamb was applied to the doorposts, and the curse passed over, so the Israelites escaped the curse. And they were led from Egypt and were reborn as a new covenant people. What Jesus will complete in Jerusalem is the sacrifice of the cross, which will be a sacrifice to lead his covenant people to the new land of promise. So, in John 1:29, John saw Jesus and confessed like this.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esus is saying that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cross, he will lead the children of light to serve as priests for all peoples of the world. Jesus died in Jerusalem in order to bring many people out of Egypt. Moses and Elijah, the representative figures of the Old Testament, appear and prove this amazing truth.

 

2.

Jesus did not appear in this world out of the blue. In many stories of the Old Testament, God has been working on the history of salvation. And God's will to save, which has been repeatedly revealed, will finally be completed through Jesus Christ.

You can't understand the cross of Jesus with cutting out the story of God's salvation that keeps echoing in the Old Testament. When Abraham shouted at the great mountain peak, the same voice echoed from Moses far away (Echoing). The voice of Moses echoed through Israel and echoed through John the Baptist. And Jesus puts all those echoes together to make His voice. Simply put,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the salvation and gospel of Jesus Christ more deeply without understanding the will and stories of God's salvation that have been accumulated in the Old Testament. That's why you have to read the Old Testament. It is because the depth of understanding of the salvation of Jesus and the gospel is different. For example, if you read the novel “Les Misérables” in total of five volumes, starting with the fourth volume, you might mistakenly think that Jean Valjean was originally such a kind person, right? We must not miss the story of how Bishop Myriel embraced Jean Valjean, who stole the silver candlesticks and silver plates, with infinite forgiveness and love. Only when we read how Jean Valjean was dramatically converted by the power of love in volume 1 can we understand the meaning of his good deeds in the rest of the book.

 

3.

Let's take a look at today's text to find out what the echo of salvation resounded to Abraham. The text occupies a very important part of the story of Abraham. This is because the blueprint for the kingdom of God that God would create will be repeated and echoed in the Old Testament in the future. So, the reality and essence of the kingdom of God, which will be created through Abraham and his descendants, is being presented. This is important because this message will echo in the same way in Jesus. The main text begins with the visit of some three people. These three people were actually angels sent by God. They received God's command and came to investigate the reality of the cry being heard in the city of Sodom. Abraham and Sarah treat them with great hospitality. Well received, they bless Sarah that she will give birth to a baby boy this time next year. After receiving the promise and nothing happened for 24 years, Sarah laughed at the words. They had already tried to give birth to a male child from their servant to succeed the generation, but God repeatedly confirmed that descendants would come from Sarah's womb. They had been confirmed by God many times, but it seemed to them that time had more impact than God. Anyway, after hearing the good news of Sarah's pregnancy, Abraham sees the three of them off. On the way to see them off, God's voice was delivered to Abraham through them, and that is today's text.

 

” Verse 18 seems like a repetition of Genesis 12:1-3. The point is that the reason Abraham and his descendants were chosen was to bless all nations. However, this promise is a blessing premised on Abraham's obedience. What was the content of obedience given to Abraham? “For I have chosen him, so that he will direct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what is right and just, so that the Lord will bring about for Abraham what he has promised him.”

To put it simply, God gives certain commands to Abraham and his descendants. The command is expressed as ‘the way of the Lord’. The Hebrew word 'derek' means the way. Of the two paths of life that I preached last week, it must mean the path of the righteous. The path that Abraham and his descendants must keep is compressed into two words. It was translated as righteousness and justice in the Revised Version of the Bible. In the New Translation, it translates as ‘right and just thing’, ‘right and justice’ in NIV, and ‘justice and judgment’ in KJV.

 

These two words are 'Tsudaka (צְדָקָה)' and 'Mishpat (מִשְׁפָּט)' in Hebrew. Tsudaka, translated as righteousness, is a word that refers to 'restorative justice' and implies charity or relief. In any society, some become rich and others poor through the process of distributing the surplus of people's common lives. The Bible teaches that it is the obligation of the rich to care for those less fortunate so that they can enjoy a decent life. That is the right life.

Mishpat, translated as justice, is juridical justice. I think it would be better to translate it as righteousness. It refers to the fairness of judges in accordance with the law. Justice does not take sides with the powerful, and it does not condone lawlessness because of the poor. Just because a large number of people are involved doesn't mean they're not guilty. There is no punishment for making a crime that is not there. When judicial justice is right, people trust public authority. That is, it assumes that a person's status or wealth cannot affect the judgment.

Tsudaka and Mishpat are concepts that begin with the respect for human beings, who are made in the image of God. Tsudaka and Mishpat are autonomous civic values in which everyone is equal in the community and everyone equally shares and owns wealth. These are the two great pillars of the kingdom of God.

 

Psalm 97:1-2 echoes these words. “The Lord reigns, let the earth be glad; let the distant shores rejoice. Clouds and thick darkness surround him;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his throne.” It describes a country ruled by God. However, there are two big pillars on the throne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y are righteousness and justice. ‘Tsudaka’ and ‘Mishpat’ in Genesis 18:19 are used as a pair, but the Korean Bible translates them differently as ‘justice and fairness’.

 

What's important? The kingdom of God, that is, the core of God's reign contains these two essences. The country that will be experimented and practiced in the future through Abraham and his descendants is the country where ‘Tsudaka’ and ‘Mishpat’ are realized. Abraham must create a country where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realized. However, the essence of the city culture pursued by his nephew Lot was a country that went in the opposite direction. It seems safe to stay in the castle, but in reality it is like a society of beasts that bite their neighbors. So these angels are telling Abraham to contrast his country with Sodom. “What can I hide from you? Your country can’t become like that Sodom, you know?” This is the nuance. Abraham was given the task of creating an alternative country that contrasted with Sodom.

 

4.

Sodom was destroyed because there were no 10 righteous people who practiced Mishpat and Tsudaka. In chapter 19, the next chapter of the main text, two messengers sent by God entered Lot's house, and the men of the city tried to invade Lot's house. It was to rape two male guests. It tells how dire the moral situation of the city was. Why do people commit sins to the detriment of others? Because they think the other person has nothing to do with themselves. It's because they don't look at the other person in the image of God. It is because they treat people as objects for their own desires. Because they don't respect or acknowledge it as a person, they use the other person for my needs. The Old Testament says that these are sins and unrighteousness. Tsudaka and Mishpat are missing.

 

This is what I experience while living in China. The Chinese tend not to get involved when someone is being beaten on the street. It's because he's a person who has nothing to do with me, and I can only get into trouble if I get involved. It may be a different story, but there are still many doorless toilets in China. One of the rationale for this is that there are so many people that you are unlikely to see the person you bumped into in the bathroom again. We don't care about others if we think of them as people who have nothing to do with us. They even do it recklessly. On the contrary, if you think that your neighbor is a person who receives God's utmost attention and is a person made in God's image, you can show greater interest and love to him.

 

Why did Jesus reach out to those who were poor, sick, and treated as sinners? Because Jesus acknowledged them as person. He came to restore the image of God in people who have been distorted by their rough treatment. Tsudaka and Mishpat are based on the premise of respect for my neighbors who are created in the image of God. Our attitude changes when we open our eyes that everyone around us is connected to us and has meaning to us. If you think of the other person as your neighbor or your brother or sister, you will respect and value them.

 

Earthquakes in Turkey and Syria on the other side of the world don't seem to have anything to do with us, but we want to help them. Because we see them as our brothers and sisters and as our neighbors. It is not a waste to open our wallets to help them live a minimum human life by being created in the image of God.

 

5.

The country that God dreamed of through Abraham was a kingdom with right and justice. Righteousness and justice, God's way of ruling, are rooted in love. In Romans 13:10, it says “Love does no harm to a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When we accept Jesus Christ as Lord and choose to live according to His teachings, Jesus gives them the gift of the Holy Spirit. Then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s them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Now, the Holy Spirit takes the initiative in their lives and rules them. However, the law of the Holy Spirit is the law that moves and governs according to love. When there are many people who are fully ruled by the Holy Spirit, there is no need for a centralized state. This is because righteousness and justice can be fully exercised so that self-government can be achieved to the extent that the state is not needed.

Republic refers to a country governed by ordinary citizens, not professional soldiers. However, the kingdom of God is governed by the people by the Holy Spirit. People who have been moved by the Holy Spirit are all autonomous and move by love, so it becomes a beautiful world. The church is the place where you can taste the reign of the people by the Holy Spirit. The church is said to be a foretaste of heaven. The church is a community where people who believe in Jesus and come under the rule of the Holy Spirit autonomously share love. Even though no one collects taxes, they come dressed in nice clothes and pay their taxes voluntarily. And with that finance, we want to help the underprivileged and marginalized around us. If every church took responsibility for the welfare of its neighborhood or community, the state would become unnecessary. What we dream of is a world where more people are ruled by the Holy Spirit. It is because when there are many autonomous people who are ruled by the Holy Spirit, the kingdom of God can be established more powerfully on this earth.

 

6.

Shall we summarize the message? Before Jesus suffers, he confirms the path he is walking through Moses and Elijah. Jesus came to this earth to practice God's will of salvation, which was to be realized in the long history and narrative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sacrifice of Jesus will make a new exodus to bless the covenant people to all peoples. The Exodus will be opened by the sacrifice of the lamb, and Jesus himself will become the Lamb of God and open the true way and life to many people. The way Jesus would go was also the way already presented through many stories in the Old Testament. It has been echoed by the Israelites over and over again since the time of Abraham. The country that God will create through the people of Israel is a country based on righteousness and justice. It is a nation of love that will be autonomously governed by God's covenant people.

 

The kingdom of God is not that far off in Andromeda. God wants to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on this earth. God wants the will of God to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Tsudaka and Mishpat are the most necessary foundations to build that country. The kingdom of God is built upon these two pillars. This kind of justice and fairness is naturally given to those who obey the whole reign of the Holy Spirit. It is because those who are ruled by the Holy Spirit open their eyes to see their neighbors as noble being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They are people who care for their neighbors because they understand so deeply that a life that does not harm them and loves them is what God wants them to be. Such a person feels sad to see that judicial justice is not practiced on this land. We live in a world where judicial justice is still broken and there are still many people who do not want a fair distribution of wealth. In the midst of such a world, we must create a nation that God desires. When the knowledge of the Lord fills the eart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there will be no harm or damage (Isaiah 11:9). We hope that such a beautiful world will be created through us. It is not a world like Sodom without humanity, but I hope to taste the kingdom of God built on righteousness and justice in which we love each other and take responsibility for each other in advance on this world.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태복음 13:33 

제목: 세상 속의 작은 누룩

 

1.

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은 가고 2023년이 백지처럼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새로운 해를 우리는 어떻게 채워가야 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사는 삶일까요? 한국에서 새해 인사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소유를 갖고 부족함 없이 사는 삶이 사는 삶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라도 살고 부자도 되어가는데 한국 사회는 병들어 갔습니다. 자살하거나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가 되어버렸어요.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진거죠.  가진 것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죠. 어떻게 사는 삶이 사는 삶일까요? 우리 어린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살아야 살았다고 칭찬을 들을 있을까요?

제가 자주 이야기 하지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사는 삶입니다. 사람은 언제 보람이 생기고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죠? 맞아요. 다른 이와 연결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면서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죠. 2023년을 살고 12월이 되었을 우리 모두가 정말 살았다.”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보람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누룩(a little yeast)처럼 살아라 말씀하셨어요.

 

오늘 말씀은 지난 달에 말씀 드렸던 겨자씨 비유와 통으로 읽을 있는 비유입니다. 겨자씨 비유에도 말씀 드렸지만 비유는 적은 양으로 시작해서 엄청나게 열매를 맺는 것을 핵심적으로 나타낸다고 말씀 드렸었죠.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그렇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성장의 속도도 빠르고 결과도 엄청나게 큽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마태복음 13:33)."

누룩이라고 하니까 조금 우리에게 다가 오죠? 이스트를 있으신가요? 이스트가 누룩인데요 누룩은 다른 말로 효모(ferment, enzyme) 가리킵니다. 많은 밀가루에 이런 이스트나 효모를 넣으면 빵이 부풀어 지고 쫄깃쫄깃 해집니다. 누룩이란 것은 쉽게 얘기해서 곰팡이(fungus) 입니다. 곰팡이는 고온 다습한(high temperature and humidity) 환경을 무척 좋아합니다. 물기가 있는 , 온도가 높은 곳에서 급속도로 번식합니다. 한국에 그런 경험 있으시죠? 겨울에 외풍이(draft) 너무 심해서 창문에 비닐을 쳐서 바람을 막잖아요. 그런데 환기를 안시키면  벽에 곰팡이가 새까맣게 끼잖아요. 인류의 3 난치병(an intractable disease)으로 알려진 무좀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곰팡이 균이 얼마나 강력한 압니다. 누룩도 곰팡이라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곰팡이 중에 좋은 곰팡이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누룩이죠. 누룩은 당과 결합하여 발효를 일으킵니다. 발효되면서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을 만든다고 합니다. 바로 발효되면서 생기는 이산화탄소 땜에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거래요. 발효되면서 생기는 에탄올에서 술냄새가 나는 겁니다. 이스트가 얼마나 빵을 감칠맛 나게 해주는지 빵만들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가루에 누룩을 넣었다고 했는데 분명 여자는 빵을 만들기 위해 가루에 누룩을 넣었던 거겠죠? 말은(three big batch of flour)  60파운드, 36리터 정도의 양입니다. 말의 밀가루로는 예수님 당시 100명의 사람들이 먹을 빵을 만들 있는 양이었습니다. 일반 가정집에서 만들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밀가루입니다. 예수님은 말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요? 그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적은 양의 누룩이지만 엄청 많은 양의 가루에 붙어 가루 전체를 발효시키고 부풀리게 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적은 양으로 시작하지만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2.

여러분 기독교는 아니 다른 말로 복음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 하에 기독교는 곰팡이 취급을 당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곰팡이 취급을 당했지만 복음은 로마 안에서 강력하게 퍼져 갔어요. 복음은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달라 붙어서 세상을 아름답고 살맛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복음이예요. 마치 누룩이 밀가루에 붙어 발효하여 새로운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을 만들 듯이, 복음은 세상에 달라붙어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있습니다. 복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다하나교회는 비록 적은 숫자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변화되길 바라십니다. 세상이 비록 가루 말처럼 엄청 클지라도 발효된 적은 누룩만 있으면 가루 전체를 바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얘기해 주고 있어요. 적은 누룩을 가루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만들 이상한 이스트를 넣어서 빵이 부풀지 않은 경험 있으신가요? 저희 집에서도 Trader Joe’s 노란 가루로 yeast라고 적힌 것이 있어서 사서 만들 넣어 보았어요. 그런데 빵이 하나도 부풀지 않는 거예요. 그때  밀가루가 부풀지 않는 가지 경우를 알게 됐죠. 언제 밀가루 반죽이 부풀지 않을까요?

첫째, 제대로 누룩이 아니면 부풀지 않습니다.  둘째, 누룩은 온전한데 누룩이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부풀지 않습니다.

 

첫째, 누룩이 온전한 누룩이 아니면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없습니다. 누룩이 밀가루에 달라 붙어 발효(fermentation)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누룩이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겉모양은 누룩인데 밀가루가 썩은 것이라면 누룩의 효과를 없겠죠. 썩은 밀가루는 다른 밀가루도 썩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 썩는 , 부패하는 것과 발효는 비슷하면서도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발효되면 몸에 좋은 항생(antibiotic)물질이 나와 더욱 맛나게 합니다. 하지만 썩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발효와 부패는 보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결과는 전혀 판입니다. 우리 나라 음식에는 발효식품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습니다. 김치와 된장이 대표적인 발효식품이죠. 음식들은 썩지 않고 발효되어 우리 입맛을 돋굽니다. 젓갈(salted fish) 보세요. 젓갈은 정말 신기합니다. 분명 생선의 시체인데 썩지 않고 발효되어 독특한 맛과 향내를 냅니다. 누룩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진짜 누룩에 달라붙어 있으면 자연스레 누룩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달라 붙어 예수님처럼 살기 원할 진짜 누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둘째,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지 않으면 밀가루는 그대로 있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을 절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누룩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변화는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세상 앞에서 두려워 때가 있습니다. 그냥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  튀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괜히 예수님처럼 발효됐다가 사람들의 비호감만 사지 않을까 고민이 됩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밀가루로 살아가면 안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롭게 거듭난 삶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것을 세례라고 하죠. 세례 받은 교인이란 밀가루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누룩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된 삶이 맛깔나는(tasty)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누룩으로 살아갈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변화된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변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누룩이 빵을 맛깔나게 하듯,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맛나게 바꿔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의 누룩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누룩으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로마의 통치 하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엄청난 박해와 탄압에 시달렸습니다. Colosseum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찢겨 가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죠. 그들은 누룩이기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어느 누룩의 영향력이 먹혀 들어가게 됐고 300 로마는 기독교 국가로 변화되었죠.

우리는 밀가루가 되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없습닏다.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밀가루의 모습으로는 아무 영향력을 가질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이런 변화들이 우리 가운데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세상 속의 밀가루들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누룩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자는 겁니다. 너희는 다른 거야? 라는 핀잔을 들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때문이예요라고 분명하게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소심한 누룩이어도 좋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직장 사무실만이라도 좋습니다. 여러분 바로 옆집만이라도 좋습니다. 그들 속에서 누룩으로 살아가 보십시오. 그들을 도우며 의미와 보람을 가져 보십시오. 안에서 발효되어 보십시오. 이웃들과 컨텍을 시도해 보십시오. 인사도 건내보시고 말도 건내보십시오. 의외로 이웃들도 여러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학교의 클래스 안에서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살아가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처럼 힘들어 하는 친구들과 괴롭힘 당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그런 어린이가 되면 좋겠어요. 웃으면서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예요. 항상 주변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가 있나 살피고 도와주는 그런 어린이들이 되면 좋겠어요. 여러분 모두가 1 동안 누룩이 되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맛을 잃어버린 우리 이웃들에게 인생은 만한 의미로 가득하다는 알려주는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의 가운데 가득하길 빕니다.

 

Sermon Title: Little Yeast in the Big World | Scripture: Matthew 13:33 / translated by Melody Lee

1.

The new year has dawned. 2022 has passed and 2023 is presented before us like a blank sheet of paper. How should we fill the new year? How should we live to say we lived a good life? At one time, the phrase “Be rich!” was a popular New Year’s greeting in Korea. It was because they thought that a good life was one full of material wealth. However, while Korea prospered and became rich, Korean society became sick. It has become the country with the most people in the world who commit suicide or want to commit suicide. There are too many people with mental illness. We realize that having a lot of things doesn't mean being happy. Then, how should we live to say we lived a good life? I would like to ask our children. How can I live a good life?

As I often say, living a worthwhile and meaningful life is a good life. When do people's lives become worthwhile and meaningful? I mentioned this previously: When we connect with others and help others our lives become worthwhile and meaningful. When December 2023 arrives, I hope we can all say, “I lived a really good year.” To do that, we have to live worthwhile and meaningful lives. That is why Jesus said, "Live like little yeast" through today's message.

 

Today's message is a parable that can be read in the same way as the parable of the mustard seed I spoke about last month. Similar to the mustard seed parable, the key message of these two parables is how fruitful they become from a tiny beginning. That is the nature of God's kingdom. The kingdom of God starts small, but the speed of growth is fast and the results are enormous.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yeast that a woman took and mixed into about sixty pounds of flour until it worked all through the dough.” (Matthew 13:33)

 

Because the Kingdom of Heaven is compared to yeast, it's hard for us to relate and understand, isn't it? Have you ever seen yeast? Nuruk is yeast (traditional Korean fermentation starter, term used in the Korean translation). Nuruk also indicates fermentation. Adding yeast to flour makes the bread rise and become chewy. Simply put, yeast is a type of fungus. Fungi love high temperature and humidity environments. It reproduces rapidly in places with moisture and high temperatures. Some of you may have had this experience living in Korea. In winter, the draft is so bad that we put vinyl on the windows to block the wind. However, if there is no ventilation, mold forms on the walls. Those who have athlete's foot, known as one of the three intractable diseases of mankind, know how powerful fungi are. Yeast is also a fungus, so it has very strong power.

 

There are good fungi, and the most representative one is yeast. Yeast combines with sugar to cause fermentation. As it ferments, it produces carbon dioxide and ethanol. The dough rises because of the carbon dioxide produced during fermentation. The ethanol produced during fermentation gives off the smell of alcohol.  It is because of yeast that the bread smells like alcohol.

 

Jesus said that the woman put yeast in the flour, but we can safely assume this woman put yeast in the flour to make bread. Sixty pounds of flour are about 36 liters. Sixty pounds of flour was enough to make bread for 100 people during the time of Jesus.

 

Sixty pounds of flour was an enormous amount of flour to make at home. Why did Jesus tell us sixty pounds of flour? It is to emphasize a much larger quantity than is commonly thought. Even though it is a small amount of yeast, it attaches to an enormous amount of flour to ferment and swell into bread. It is to emphasize that the propagation speed and ripple effect are massive for a small amount of yeast. The kingdom of God has these characteristics. The kingdom of God begins with a small amount, but has a mighty power.

 

2.

Everyone, Christianity, or in other words, the gospel, is just like this. Christianity was treated like fungi under Roman rule. Although they were treated as useless fungi, the gospel spread powerfully in Rome. The gospel is not far from the world. The gospel clings to the world and changes it anew. Just as yeast attaches itself to flour and ferments to create new carbon dioxide and ethanol, the gospel clings to the world and renews it. This is the amazing power of the gospel.

 

One Heart Church is a small community. But the Lord wants the world to change through us. Even though the world is as big as sixty pounds of flour, if you have a little yeast that has been fermented well, you can transform all the flour. Today's text clearly tells us. He said that a little yeast put into sixty pounds of flour could make it all rise.

 

Have you ever experienced bread that doesn't rise because you used strange yeast when making bread? At my house we have yeast from Trader Joe’s that I bought. When I tried adding it to make bread my bread didn’t rise. At that time, I discovered two cases where flour does not rise. When will the dough fail to rise? First, if it is not proper yeast, it will not rise. Second, the yeast is not incorporated into the flour, it will not rise.

 

First, if it’s not proper yeast, your bread will not rise. Yeast sticks to the flour and needs to be fermented, but if it is not proper yeast, it is useless. It looks like yeast, but if the flour is rotten, it won't have the effect of yeast. Rotten flour causes other flour to become rotten as well.

 

Everyone, rotting and fermentation are similar, but the results are very different. When fermented, antibiotic substances that are good for the body come out and make it more delicious. But when it rots, it becomes useless. This fermentation and rotting doesn't look much different from the outside, but the results are completely different. There are more fermented foods in our national cuisine than in any other country. Kimchi and doenjang (soybean paste) are representative fermented foods. These foods are fermented without spoiling and stimulate our taste buds. Look at salted fish. Salted fish is really amazing. It is obviously the carcass of a fish, but it is not rotten. It is fermented, giving it a unique taste and smell. We too through our faith in Jesus become new people who can bring beautiful change to this world.

 

Second, if yeast is not incorporated into the flour, the flour has no choice but to remain unchanged. If we do not enter the world, we can never change the world. Although we may be just small yeasts, changes happen when we live our different lifestyle in the world with others. But sometimes we are afraid in front of the world. It's tempting to just live a quiet, unobtrusive life like everyone else does. We worry that we won’t be able to handle people’s disdain like Jesus. We wonder if we could just live like flour, like other people in the world.

 

Do not be afraid to crucify yourself with Christ and live a new born again life. It is called baptism to show that we died on the cross with Christ and were resurrected with Christ in front of many people. Baptized church members are those who have decided to live a life of yeast, not a life of flour. Those who acknowledge that a life transformed into a person of Jesus Christ is a tasty life have no choice but to live as yeast in the world. Because they are so happy that they have changed, they want others to change like them.

 

The purpose of our being born on this earth is to display the glory of God in this world. We are the yeast of this world. We all must create God's kingdom in the world with God's yeast. Under Roman rule, the Early Church saints suffered tremendous persecution and oppression. They did not deny God even though they were eaten by lions in the Colosseum and were torn to pieces. They did not give up being yeast. At some point, the influence of this yeast worked, and 300 years later, Rome was transformed into a Christian country.

 

We cannot change this world and expand the kingdom of God by becoming flour. We must be yeast. We cannot have any influence on  the people of the world by being the same flour as them. These changes occur among us when we live a life of giving ours for others like Jesus did. Jesus even described it as a life of bearing the cross. It is not as flour in the world, but with the identity of yeast and living with different thoughts and values. It’s good to hear others tell you off and ask, “Why are you different?” You have to tell them clearly, "It's because we live a life that follows Jesus." It's good even if you're timid. Even just your work office is fine. Even just next door to you is fine. Live as yeast among them. Have meaning and reward by helping them. Try to ferment among them. Try contacting your neighbors. Talk to them and say hello. Surprisingly, your neighbors may have been waiting for you to come too.

 

Children try to live differently from other friends in the class of school. I hope you become children who help their friends who are having a hard time and who are being bullied like God's children. It is good to greet your friends with a smile. I hope you become children who always look out for those who need your help and help those around you. I hope all of you will become yeast during the upcoming year and create a world worth living in. I hope it will be a year that tells our neighbors who have lost the taste to live that life is full of meaning to live. May the grace and blessings of the Lord be filled in your year.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46-16

제목: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Where is your brother?)

 

1.

가족을 건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특히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무거운 숙제입니다. 한국 어르신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농사에 빗대어 자식 농사라고도 부르곤 하셨죠.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녀를 키우는 것은 수고해야 하고 시기 적절한 보살핌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있기에 즐겁고 보람된 일들도 많지만, 자녀들을 키우며 겪는 수고와 애씀은 더 많은 듯 합니다. 또 자녀가 많으면 아이들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요. 아무리 쌍둥이도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특히 형제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 형제의 이야기는 대부분 갈등의 이야기이고, 그 갈등은 서로가 너무 달라서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형제의 이야기인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만 형제라는 히브리 말 아흐(אָח)’6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아담의 삶에 분명 이 두 아들의 탄생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큰 아이를 낳은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얻다, 생산하다라는 뜻의 가인이라 짓습니다. 곧이어 둘째 아들 아벨이 태어났으니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적잖은 위로가 됐을 겁니다. 큰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은 서로가 너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목자의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 먹이를 찾고 자라는 양을 키우는 것에 비하면 척박한 땅을 가는 농사가 훨씬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힘들게 농사를 지어본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그들의 제사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각자가 생산해 낸 것에서 취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제물과 제물을 드린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에서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해석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제물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곡식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신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깔뱅주의적인Calvinism 전통에서는 그 이유를 가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중에 동생을 돌로 쳐죽인 것을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벨은 제사를 더 정성스럽게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신약의 용어를 가져와서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요한복음 4)’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합리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의 자유를 우리의 좁은 견해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가인의 제물과 그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했는지 솔직히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 이후에 나타난 가인의 반응입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반응이라면 가인은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무엇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즐거워 하지 않고 자신의 제물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받지 않는지 성찰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가인의 마음을 아시고 따끔하게 충고하시죠. 7절 말씀입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이 가인의 행실을 가지고 평가하며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르지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반응하고 있는 가인에게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도 가인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져버리고 오히려 죄에게 주도권을 넘겨 줘버립니다. 동생을 죽이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3.

가인은 인류 최초의 판사가 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는 사법시험을 치르지도 않았고 누가 그를 재판관으로 세우지도 않았는데도 동생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합니다. 가인의 법정에서 내려진 동생 아벨에 대한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가인의 법정은 공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긍휼과 자비 또한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인데도 그에게 베풀 자비와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가인의 법정을 지배하는 원리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동생의 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시기심이었고 그를 사형에 처하는 기준 또한 시기심과 같은 뿌리를 둔 질투였습니다.  결국 시기심과 질투는 가인의 마음의 문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를 통째로 삼켜버린 뱀과 같이 폭력적이었습니다. 가인의 판결의 칼날은 아벨을 향한 것 같았지만 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하나님에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인은 동생을 죽여 하나님에게 분풀이 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벨이 뭔 죄라고 아벨이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를 찾아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집에 돌아온 아빠가 엄마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아빠의 이유 없는 화풀이에 짜증이 난  엄마는 잘못도 없는 아들에게 큰 소리 칩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화가 난 아들은 밖으로 나가 강아지에게 발길질 하지요. 풀리지 않는 분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이어져 내려갑니다.

 

가인의 모든 폭력적인 결정의 뿌리는 비교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의 제물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를 비교했습니다. 가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은 늘 동생보다 앞서야 했고 동생보다 좋은 결과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강요당한 삶의 습관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들어 낸것인지는 모르지만 가인은 비교했고 괴로워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비교하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비교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합니다. 비교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가인의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는 어리석은 판결을 내리게 했고,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판결문을 보십시오. “니가 흘리게 한 동생의 피로 인해 땅이 더럽혀졌다. 그리고 이제 동생의 피를 받아 마신 땅은 너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니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수확은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너는 객이 되어 떠돌아 다니며 살게 될 것이다.” 아벨을 죽인 저주의 결과는 농사꾼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인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일 때는 그렇게 폭력적이더니 이제는 마치 자기가 피해자라도 되는 것 마냥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죠. 내가 하면 로멘스고 다른 이가 하면 불륜이다. 가인은 동생에게 스스로 내린 판결은 정당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판결은 부당하다고 따지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가인이 아벨을 향해 내린 판결보다 더 이상한 일이 가인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항변에 반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인이 이제 자기가 떠돌이가 되고 객이 되어 살아가면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을 품으로 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15)”

형제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예상하며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토록 자기 중심적인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동생을 쳐죽인 죄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을 죄인인 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놀랍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스스로 위험에 빠진 인간을 부둥켜 안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4.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이야기에 바로 잇대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한 가족이자 친구처럼 지낸 자신의 형제를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 연약한 인간을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대조시킵니다. 형제를 죽인 죄인의 살길을 염려하시고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가인 나쁜 놈, 가인과 같이 살면 안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서로의 다름과 차이을 인정하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형제가 여섯 번 반복되는 것은 형제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시편103).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첫걸음은 형제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314절도 시편 103편 말씀과 마찬가지로 형제 사랑을 영원한 생명과 연결시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줍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5.

아우 아벨은 나보다 더 연약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들의 판결자가 되어서 판단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죠.

지금도 하나님은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심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형제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의 노예에서 벗어나 아우 사랑 또는 이웃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질투 또는 시기심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아우와 이웃들의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내 옆에 있는 이들로 말미암는다는 이 놀라움을 깨닫는 사람만이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신비로 다가옵니다.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 신비로워 하는 자만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아우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그들을 도우며 살 때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가인을 위해 보호자로 자청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Vulnerable한 존재가 되어버린 가인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잖아요. 그의 몸에 잘 보이는 곳에 표시를 해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 또한 시기심과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vulnerable한 존재들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vulnerable한 아우들은 누가 있을까요? 여러분의 사시는 동네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미네소타와 로체스터 안에는 많은 난민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낙인 찍힌 가인처럼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네소타에 와서 히잡을 한 여성들이나 무슬림 복장을 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눈에 띄더군요. 솔직히 다른 종교와 피부색,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이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사는 집 주변에도 여러 아프리카계 난민으로 보이는 이웃들이 있더라구요. 그들에게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걸어주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이 받는 위로는 클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 미국 땅에 이주해 왔을 때 미국사람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주고 웃어줄 때 느꼈던 우리 마음의 평안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vulnerable 한 존재들이 있지 않은지 살피고 서로 돌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로체스터에 온지 1년 미만인 분들은 모두 취약함 가운데 계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라를 이주해 온 분들은 더더욱 그렇구요. 어느 누구나 낯선 땅에 들어가면 취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이야기 나눌 상대도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편안하게 느꼈던 안정적인 곳을 떠나 왔기에 모든 것이 불안합니다. 한국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합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아 보이고 자존감이 확 떨어집니다. 이런 분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시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냥 웃어주고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큰 격려가 될 겁니다.  진로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 임산부들도 정서적으로 돌봄이 필요하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아우네요.

 

요한 일서 3장 말씀에서 말하듯,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아우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아우 또는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들과 나를 비교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연약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신비함으로 대하십시오. 그가 있음으로 나됨이 이뤄진다는 신비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비감이 우리 삶에 사라질 때 인생은 버거워지고 다른 이들을 향한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지금도 묻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의 아우는 누구이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자가 아닌 형제이자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길 우리 주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설 곳이 없는 이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시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Text: Genesis 4:6-16

Title: Where is your brother?

translated by Myunha Kim

 

1.

Taking care of a family is not an easy journey. Raising children is a particularly difficult task. Korean elders often used to refer to raising children as farming and thus, called it “child farming.” Because raising children, like farming, requires hard work and timely care. Several aspects of having children are enjoyable and worthwhile, but it also seems that many times there is more hard work and effort in raising children as well. Additionally, if you have multiple children, you will need to provide adapt the way you care for each child. I've heard that even twins are very different from each other.

We must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tory immediately following Adam and Eve after they were expelled from the Garden of Eden is the story of the brothers. Only in Genesis 4, the Hebrew word for brother, ‘Ah (אָח)’, is used six times. The birth of these two sons must have been a great comfort in Adam and Eve's life. The joy of giving birth to their firstborn was so great that they named him Ga-in, which means “to obtain, to produce.” Soon after, when their second son, Abel, was born, it must’ve been very comforting for Adam and Eve to have two sons. Cain, the eldest son, and Abel, the second son, seem to have been very different from one another. This is evident when you look at their career choices. Cain became a farmer, and Abel became a shepherd. The life of a farmer plowing the fields and the life of a shepherd tending sheep are completely different lifestyles. Farming in a barren land where thornbushes and thistles grow must not have been easy. Of course, the life of a shepherd was also difficult, but I think farming in barren land was much more difficult than finding food for oneself and raising sheep. This is my opinion purely from my experience in farming.

2.

The conflict between Cain and Abel arises from their different sacrifices or offerings. Cain and Abel took what they each had produced and offered these things as sacrifices to God. However, the problem arises from the different attitudes of the two people who offered it. Until now, many interpreters have made great efforts to find out what the difference was between Cain and Abel's offerings. Some even make the ridiculous claim that God prefers animals to grains. The Calvinist tradition interprets the reason as Cain having a problem. You can assume what kind of person he was by observing that he later stoned his younger brother to death. Some interpret it because Abel offered sacrifices more carefully. Referring to the New Testament terminology, Abel says that God accepted the sacrifice because he offered it “in Spirit and truth” (John 4). Any interpretation is reasonable, but we honestly cannot judge God's will from our narrow views. Frankly, we do not know why Cain's offering did not please God. It was simply God's will.

An important factor is Cain's reaction after making his sacrifice. If it was a humble and honest response, Cain should have reflected on himself. He would have thought to reflect on why God did not accept him and if there was a problem with his offering that God did not like. However, Cain tried to find the reason for someone other than himself. God knew Cain's heart at that time and gave him harsh advice in Verse 7.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rule over it.” It seems that God was evaluating Cain's heart and conduct, He is warning Cain, who is reacting with a wrong attitude and action. Even after hearing these words from God, Cain did not change his mind or his heart. No, rather, he didn't understand God even more. He forgot God's Word that he had to rule over sin, and instead gave the initiative to sin and decided to kill his younger brother.

3.

Cain decides to become mankind's first judge. He decides to pass judgment on his brother even though he has not taken the BAR exam, and no one has made him a judge. Cain's court sentenced his brother Abel to death. Cain's court was not only without justice, but it was hard to find any sort of mercy. Even though Abel is his brother who shares the same blood, there seems to be no mercy or love to be given to him. The principles governing Cain's court were envy and jealousy. The criterion for judging Abel's sin was envy, and the criterion for Cain punishing him was jealousy, which also had the same root as envy. In the end, envy and jealousy were as violent as the snake that coiled around the door of Cain's heart and swallowed him whole. The blade of Cain's judgment seemed to be aimed at Abel, but it was pointed at God. Cain wanted to take his anger out on God by killing his brother, but he couldn't take out his anger on God. What sin did Abel have to die for? People try to relieve their anger by finding a weaker being than themselves. After being fed up with the boss at work, the dad comes home and yells at his spouse out of anger. The wife, annoyed by her husband’s unprovoked anger, yells at her son without any plausible reason. Angry at the mother's nagging, the son goes outside and kicks the dog. Unresolved anger bites its tail and passes on to those who are weaker.

The root of Cain's violent actions stemmed from the act of comparing. He compared his offering to Abel's and God's evaluation of them. Cain did not want to admi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rothers. He always had to be ahead of his brother and outperform his brother. I don't know if it was enforced by his parents or if it's something he created himself, but Cain compared and suffered. As we discussed last week, a life of comparison is an unhappy life. The results of comparing are truly devastating. Comparison is a self-defeating, foolish act. The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ain's comparison led to a foolish judgment and returned to him like a boomerang. Look at God's sentencing that came back as a boomerang. “Now you are under a curse and driven from the ground, whic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your brother’s blood from your hand. When you work the ground, it will no longer yield its crops for you. You will be a restless wanderer on the earth.” The curse of killing his brother Abel was fatal for Cain, who had to live as a farmer.

Cain was so violent when he killed his younger brother, but now he is arguing against God as if he was the victim. Humans are such fragile beings. There is a saying that it is a “fire within me”. If I do it, it's romance, but if someone else does it, it's an affair. Isn't Cain arguing that the judgment he passed on his brother was just and that God's judgment against him was unjust?

However, it was at this moment that something stranger than Cain's judgment toward Abel was happening to Cain. It means that God is responding to Cain's protest. Cain complains to God that if he continues to live as a wanderer and a stranger, everyone will try to kill him. God takes such a sinner into his arms and speaks. "It will not be like that. Anyone who kills Cain will be punished sevenfol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so that no one who met him could kill him (v. 15)."

When Cain unleashed his merciless judgment on his brother, he was unaware. But now as he anticipates the dangers approaching him, Cain realizes the seriousness of his circumstance.

It is amazing the mercy and compassion of God, who takes himself as the protector of Cain, a sinner who deserves punishment for the sin of striking and killing his brother. We can observe God's love to embrace human beings who are in danger due to disobedience.

4.

Why does the story of Cain and Abel appear right after Genesis 3 which is the story of the fall of humanity? First, it is to show the reality of humanity that has left God. It is to accuse the human weakness and sinfulness which led to killing a brother, who was like a family member and friend, due to envy and jealousy. Then, the Bible contrasts the love and mercy of God who embraces the weak, sinful human being. The mercy of God who cares about the life of the murderer and being his protector is amazing.

The story of Cain and Abel does not convey the message that Cain is a bad guy and that you should not live like Cain. Rather, it wants to show us how destructive humans can be when we compare ourselves to others and fail to acknowledge each other's diversities and differences. Brotherhood repeated six times is meant to tell us how valuable brotherly love is. It was meant to be paradoxical to show how good and beautiful it is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in unity (Psalm 103). The first step in living as a child of God is brotherly love.

Like the words of Psalm 103, 1 John 3:14 connects brotherly love with eternal life.

“We know that we have passed from death to life because we love each other. Anyone who does not love remains in death.”

5.

The younger brother Abel represents those who are weaker. God did not call us to judge as judges for those who are weaker than ourselves. Rather, He called us to be protectors of the weak and to love them.

Even now, God asks us, “Where is your brother Abel?” He invites us not to be judges but to be brothers. He calls us to get out of the slavery of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omparison and move to the place of brotherly love or neighborly love.

Is there any way to escape from the sin of envy or jealousy? There are two ways. First, I must not be the judge of my brother and neighbors. To do so, we must not forget that we are nothing more than a ‘day-living’ creature. Only those who realize the mystery that my ‘identity’ comes from the people next to me. Only those who are mystical about the existence of others can advance to loving others.

Second, when we feel responsible for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and live by helping them, we can become true people of God. The fact that God volunteered to be a guardian for Cain, who became a murderer, showed us what kind of life we should lead. God won't just leave Cain who has become a vulnerable being. He puts a mark on his body where he can see it, revealing that he is protected by God. We also must embrace vulnerable beings to escape from the bondage of envy and jealousy.

Who are the vulnerable brothers around us? It may be different depending on where you live, but many refugees live as our neighbors here in Rochester and greater Minnesota. They left their homes and came to this strange land for a better life, yet many times they are discriminated against like Cain who was stigmatized. When I first came to Minnesota, I noticed women wearing hijabs and Africans wearing Muslim attire. To be honest, it is true that people with different religions, skin colors, and cultures feel unfamiliar and strange. Around the house where I live, several neighbors appear to be African refugees. The consolation they receive will be great just by smiling at them, talking to them, and saying hello. We all remember the peace of mind we felt when we first immigrated to this land and the Americans were kind to us and smiled at us.

We will have to take care of each other to see if there are vulnerable brothers in our church. For instance, if you have been to Rochester for less than a year, you can think of it as vulnerable. This is especially true for those who have immigrated to the country. Everyone is vulnerable when they enter a foreign land. Emotionally unstable. There aren't many people to talk to. Everything is unstable because he or she has left the stable place where they or felt comfortable. I sometimes make absurd mistakes here in a foreign land that I would never make in Korea. Then I realize how foolish I probably looked and my self-esteem plummets. However, telling those people it's okay and warmly encouraging them will be greatly comforting. Simply, sharing a smile or asking them how they're doing will add a lot of encouragement to their lives.

As the words of 1 John: 3 say, those who do not love their brothers and sisters remain in death. Loving our 'brother' is evidence of our faith. If you are a man of faith, love your brother or your neighbor. Treat those around you mystically so as not to fall into the weakness of envy or jealousy by comparing yourself to them. Only those who live with a sense of understanding that “I become who I am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ose around me” can taste true freedom in life. When this sense of mystery disappears from our lives, life becomes burdensome and the room for others disappears. The Lord still asks us who want to live a life of faith. “Where is your brother?” Who is your brother and where is he now? Our Lord desperately wants you to respond to His call to live as a brother and neighbor, not as a judge. I bless you to live a blessed life that provides a place for those who have no place to stand.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가복음 1:1-8      

제목: Way maker

 

1.

151710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 앞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을 붙입니다. 논쟁이라는 뜻의 “Disputatio”라는 이 문서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강력하고도 폭발적인 저항 운동이된 종교개혁을 촉발시킵니다. 루터는 무엇 때문에 ‘95개조 반박문으로 불리는 ‘Disputatio’를 써야만 했을까요? 그는 이 문서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했나요? 반박문의 주요 내용은 면벌부(免罰符)’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면벌부란 말 그대로 벌을 면하게 해주는 부적이었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인들은 연옥(煉獄, Purgatory)을 믿었습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곳으로 믿어졌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헌금을 통해 죽은 자들의 연옥에 있는 시기를 줄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보다 먼저 죽은 이를 위해 헌금함에 동전을 넣으면, 그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연혹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라고 믿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 면벌부가 사제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들 중에는 자신의 빚을 면벌부 판매로 메꾸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성당을 짓는다는 명분 하에 교황의 주도로 면벌부가 판매되기도 했죠. 마틴 루터는 이러한 면벌부 판매가 성경에 반대되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 없이 따라가는 길이 아닌 정반대의 바른 길을 가고자 저항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이 저항운동은 쯔빙글리(Ulich Zwingli), 쟝 깔뱅(Jean Cavin)같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퍼져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큰 개혁의 뜻을 세웠습니다. 그 구호는 사제들의 사리사욕에 의해 왜곡된 기독교가 아닌 성경의 원래의 뜻과 목적을 따르는 참 기독교로 돌아가기 원하는 간절한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물 근원(根源)을 향하여또는 물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가진 “Ad Fontes(back to the sources)라는 라틴 말은 종교개혁자들이 만들 새로운 길의 지향점을 알려주었죠. 이것이 종교냐?라는 강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거짓 종교에 대한 반발심은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Protestant’는 그들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을 정확히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했죠.  지향점이 다른 삶 말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가는 자들이라는 뜻이잖아요. 종교개혁의 뜻을 기리는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개혁자들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지향점을 재 조정해 보고자 합니다.

 

2.

지난 10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날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빚진 마음으로 소설 하얼빈을 올 여름에 출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안중근 의사의 삶을 추적해오며 자료를 모았고 그의 삶을 하얼빈이라는 소설을 통해 조명했습니다. 저도 몇 주 전에 드디어 소설 하얼빈을 손에 넣었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며 저는 이런 질문을 계속 되내었습니다. “내가 만약 안중근이었다면과연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 “안중근이 자신의 신념을 실행해 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순국했습니다. 그가 죽을 당시 셋째는 아빠 얼굴도 못 본 갓난 아이였습니다. 제가 만약 안중근이었다면 처자식을 버리고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의 가문은 천주교 신앙을 가진 황해도 해주의 권세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는 가문의 권세를 입고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험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슬하에는 큰 딸 밑에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막내 아들이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 혼자서 러시아 연해주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납니다. 그는 마치 물 맷돌 다섯개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달려간 다윗처럼, 권총에 실탄 일곱 알을 채워 들고 하얼빈 역으로 향합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토 한 사람의 광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내 몰리고 불행해졌다고 믿었습니다. 이토를 없애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총알 일곱 발 중 여섯 발을 쐈고 그 중 세발이 이토의 급소를 관통합니다. 황해도의 시골청년이 쏘아 올린 이 혁명적인 시도는 큰 파장을 일으키며 독립 운동에 불을 지핍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천주교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안중근 사건과 선을 긋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책임자였던 프랑스 신부 뮈텔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정죄합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고향 성당의 빌렘 신부가 여순 감옥에 가서 그의 고해성사를 행하고자 요청했을 때도 뮈텔 신부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같은 프랑스인이었던 빌렘 신부는 뮈텔의 뜻을 저버리고 개인적으로 안중근을 찾아 가 그의 고해성사를 행했습니다. 안중근이 죽기 3일전의 일이었죠. 천주교는 1993년이 될 때까지 안중근의 의로운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938월이 되어서야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고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며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안중근의 행위는 한 명을 죽인 살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화를 해친 원흉을 없앤 의로운 행위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안중근이 스스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부의 어떤 지시도 없이 스스로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다는 거죠. 그의 마음 속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도 좋다는 강한 의지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의 가문이 겪게 될 어떤 핍박도 그를 꺽지는 못했던 겁니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이 불지핀 개혁의 불이 전 유럽으로 번져갔듯, 안중근의 의로운 행동은 이후의 많은 독립 운동의 불씨가 됩니다. 시골뜨기였고 포수에 불과했던 한 사람의 결심과 행동은 그렇게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게 만들었죠.

 

3.

마가복음도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소개하며 그가 만든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갈 그 길이 될 것이라고 마가복음은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걸어갈 길의 방향과 그의 길의 방향이 일치했다는 겁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제사장 가문인 레위지파였습니다. 그 또한 제사장으로 앞 날이 보장된 삶이었습니다. 그가 제사장이 되었다면 사람들의 존경도 받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는 출생의 비밀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백발에 그를 낳았습니다. 그를 잉태할 당시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예언을 받았죠. 그 예언을 간단히 말하면 그가 메시아가 올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예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천사는 일러줬죠(1:15-18). 그는 평범한 제사장의 삶은 못 살 운명이었던 겁니다. 성인이 되자 그는 예루살렘의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을 만들기 위해 유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존경받는 자리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죠.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의 올 길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길을 닦는 Way maker였던 겁니다.

 

아마도 그의 어린 시절부터 책상머리에는 이사야서 403절 말씀이 붙여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세례자 요한의 비전과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똑바르고 곧게 만드는 것이죠. 세례자 요한은 마틴 루터처럼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선구자 역할을 요한이 했습니다. 요한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길이 만들어 졌으니 그렇습니다. 루터 또한 중세와 근대를 가른 혁명적 인물이었죠. 안중근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은 평화의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요한과 루터 그리고 안중근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바꿔 놓은 혁명가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혁명은 사람들이 붐비는 광장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텅비고 황량한 들녘에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외진 곳이 광야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광야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분리되고 단절된 공간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의 외침은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라.” 그런데 그의 단순한 외침에 도대체 무슨 힘이 있었길래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많이 몰려든 것일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권위를 느끼고 그에게로 와서 침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가문 마저 초라한 광야의 예언자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항상 신비롭습니다. 도대체 세례자 요한의 이런 권위는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성전을 중심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무리들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특권을 박차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모든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샘 근원을 찾아 광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인도하심을 받은 삶을 기억하며 그도 광야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광야에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하는지 안 하는지 그는 직접 실험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 광야에서 그는 하나님의 강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선배였던 엘리야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받은 적이 있었죠. 그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진 거친 혁명가였습니다.

 

4.

그렇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으라.” 주님이 오실 길을 만드는 도구와 연장은 회개와 회개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간단한 이 요구는 우리 전 존재를 흔들어 놓는 매우 강력한 요구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무거운 요구입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혁명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혁명(革命)의 한자는 가죽 혁()에 목숨 명()자입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혁명과 같다고 한 이유는 목숨을 내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부를 벗겨 가죽을 만들어 새사람이 되고, 목숨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혁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회개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Metanoia)’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목표, 삶의 타겟, 삶의 과녁을 완전히 다르게 설정하는 삶입니다. 그냥 적당히 교회 발만 딛어 놓고 모양만 신자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껍대기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알맹이를 취하는 삶입니다. 나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나의 욕망을 새롭게 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가는 삶의 방식과 반대의 방향으로 protest하며 가야할 지도 모릅니다. 굶어 죽더라도 삶의 근원이 되는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찌 적당히 믿어서 될 일입니까? 완전히 나의 가죽을 벗겨서 새사람을 만들고 온전히 뜯어 고치는 혁명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회개 후에 새롭게 태어난 의식으로 세례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삶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가 걸어간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거기에 길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광야에서 참된 삶의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길이 되어 많은 이들을 진리이신 예수께로 안내했습니다.

 

5.

세례 요한의 혁명은 광야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를 강타하였습니다. 요한이 요구한 회개의 삶은 누가복음 3장에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였다면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삶의 변화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잉여의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장에 2년 넘게 입지 않고 있는 고가의 옷, 그리고 여러분의 냉동실에 반 년 넘게 먹지 않고 있는 음식물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에게 잉여의 급여가 있습니까? 혹시 그것은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삶에 이웃과의 나눔과 공유가 없다면 여러분의 회개는 껍대기에 불과합니다. 다시 회개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한은 요구합니다. 너희 직업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뺏어내지 말라고 합니다. 높아진 지위로 이웃들의 존엄성을 짓밟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갑질하지 말라는 것이죠. 모두가 동등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바로 요한이 걷고자 했던 길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그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자주 말하지만 제가 이해하는 이웃 사랑은 나를 통해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귀함과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음식과 옷 그리고 돈을 나누는 것이 별것 아닐 지 모르지만 받는 그 사람은 그 섬김을 통해 존귀함을 느낍니다. 이런 나눔과 베풂의 삶의 방식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나야 할 종교 개혁과 진정한 혁명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은 자연스레 이웃을 지향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함께 걸어가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 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따라가는 Rival Gospel이 아니라 참 복음을 따른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을 향한 Rival story가 아닌 예수님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십시오. 오로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SPC 평택 공장의 사고는 이 시대 라이벌 복음의 단면입니다. SPC는 직원들의 팔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여러 번 발생했는데도 기계 점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20대 비계약직 직원이 빵 소스 배합작업 중 앞치마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며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사건 현장의 기계를 흰 천으로 가린 채 공장을 재가동했다고 합니다. 동료 직원의 생명과 존귀함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이윤만을 위해 돌아가는 기계인듯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라이벌 복음입니다. 돈과 이윤을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도 짓밟을 수 있다는 무서운 악마적인 발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돼 버린 소비주의 자본사회의 민낯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샘 근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성경 전체를 요약한 우리의 샘 근원입니다. 이웃을 사람답게 대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야 말로 소비시대의 거짓 복음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혁명은 매우 작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개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조정하고 지향점을 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의 삶과 말씀이 진리라면 그의 삶의 방식에 나를 던지는 것이 마땅한 삶 아닐까요? 엘리야의 심정으로 세례자 요한은 지금도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맘몬)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18:21).”

 

그 작은 혁명과 작은 개혁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례 요한과 함께, 좁고 낮지만 바른 길을 향해 걸어가 보지 않으시렵니까? 내 옆의 이웃들에게 손 내밀고 함께 나누고 베푸는 그런 삶의 방식으로 함께 걸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산다고 세상이 변하겠어?’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 주변 만이라도 밝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틴 루터나 안중근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행동의 변화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그 길은 더 또렷해 지고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작은 삶의 변화가 길이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야 말로 way maker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의 지향점의 변화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이뤄내야할 작은 종교개혁일 것입니다.

 

Text: Mark 1:1-8

Title: Way maker

translated by Wi Chun-il 

1.

On October 31, 1517, Martin Luther affixed the "95 Theses" in Latin on the door of the Wittenberg Cathedral. The document, “Disputatio,” which means “dispute,” sparks the “Reformation,” which became the most powerful and explosive resistance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Why did Luther have to write Disputatio, which is called 95 Theses? What was he trying to argue with this document? The main content of the rebuttal was against the Plenary indulgence (免罰符). The word indulgences was literally an amulet to avoid punishment. At that time, Catholics believed in Purgatory. Purgatory was believed to be somewhere between heaven and hell. It was believed that the giving of the living could reduce the time of the dead in purgatory. It was believed that if someone puts a coin in the treasury for somebody who died before, the soul of the dead will be transferred from purgatory to heaven with the sound of the coin falling. The problem, however, was that this pardon became a means of making money for the priests. Many of the priests tried to pay off their debts with the sale of indulgences. In addition, under the pretext of building St. Peter's Basilica, indulgences were sold at the initiative of the Pope. Martin Luther resisted through the ‘95 Theses’ that this sale of indulgences was wrong, contrary to the Bible. He resisted to follow the right path, the opposite of the path that everyone at the time followed without thinking.

 

Martin Luther's resistance movement spread throughout Europe through Reformers such as Ulich Zwingli and Jean Cavin. The Reformers set the will of great reform, “Let's go back to the Bible.” The slogan contained the earnest desire to return to true Christianity that follows the original will and purpose of the Bible, rather than Christianity distorted by the self-interest of the priests. The Latin word “Ad Fontes (back to the sources),” which means “toward the water source” or “let’s return to the water source,” indicated the direction of the new path the Reformers were going to make. The resentment against false religion, which began with a strong doubt, ‘Is this religion?’ ignite the Reformation. At that time, the Reformers risked their lives to carry out their will. ‘Protestant’ was a sarcastic term for them, but it was also an accurate description of their way of life. It means that their life had a different direction from others. Protestant means those who go in the opposite direction against the direction of the world. How do you live on the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which commemorates the will of the Reformation, to live up to the will of the reformers? We would like to re-adjust the direction of our lives through the stories of these two people.

 

2.

October 26th is the day that Ahn Jung-geun killed Ito Hirobumi at Harbin Station. Novelist Kim Hoon published his novel “Harbin” this summer with a heart in debt to Ahn Jung-geun. He has been tracking the life of Ahn Jung-geun for many years, collecting data, and illuminating his life through a novel called 'Harbin'. A few weeks ago, I finally got a book ‘Harbin’ and read it right away. As I read the novel, I kept asking these questions. “If I were Ahn Jung-geun… Would I have been able to do that?”, “What was the power that Ahn Jung-geun had to carry out his beliefs?” He passed away at the age of thirty-two. At the time of his death, his third child was an infant who had never even seen his father's face. If I had been Ahn Jung-geun, I would not have been able to make such a decision by abandoning his wife and children.

 

Ahn Jung-geun was a Catholic believer. He was a man of faith in Christ. His family was a powerful family in Haeju, Hwanghae-do, with Catholic beliefs. He was able to live comfortably under the authority of his family. But he dared to choose the rough road. He had two sons under his eldest daughter. He goes on his own to the Russian Primorsky Territory to fight for independence when his youngest son is in the womb of his wife. Like David running to Goliath with five water millstones, he heads to Harbin Station with seven bullets in his pistol. Ahn Jung-geun understood that it was God's will to kill Ito. He believed that one man's madness drove many people to death and made them unhappy. He was convinced that getting rid of Ito was the way to peace in the East. According to his belief, he fired six of his seven bullets, three of which pierced Ito's vital points. This revolutionary attempt, launched by a rural youth in Hwanghae Province, caused a great stir and ignited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Catholic Church, which baptized Ahn Jung-geun, draws a line with the incident by Ahn Jung-geun for political reasons. The French priest Mutel, who was in charge of Catholicism in Joseon (Korea) at the time, condemned Ahn Jung-geun as a murderer. Even when priest Willem of the hometown church who baptized Ahn Jung-geun requested to go to Yeosun Jail to perform the sacrament of confession, priest Mutel did not allow it. Priest Willem, who was also a Frenchman, abandoned Mutel's will and personally went to Ahn Jung-geun to pefrom the sacrament of his confession. It was three days before Ahn Jung-geun died. The Catholic Church did not recognize Ahn Jung-geun's righteous deeds until 1993. It wasn't until August 1993 that Cardinal Kim Su-hwan said, "His action was an act in the process of carrying out the war of independence in the face of Japanese imperial aggression, and it is self-defense and deserves to be viewed as a righteous action" admitting it was an effort for greater peace. Ahn Jung-geun's act was not recognized as a murder that killed one person, but as a righteous one that removed the culprit that harmed the peace of many people.

 

What surprised me while reading the novel was that Ahn Jung-geun decided to shoot Ito Hirobumi himself. That is, it was planned and carried out on its own without any direction from the superior. A fire was burning in his heart. He had a strong will to sacrifice his life for the sake of peace in the East. None of the persecutions that his wife, children, and his family would endure could not stop him. Just as the fire of reform ignited by Martin Luther spread throughout Europe, Ahn Jung-geun's righteous action becomes the sparks of many subsequent independence movements. The determination and action of one man, just a country man and a catcher, became a way, and many people followed it.

 

3.

The Gospel of Mark also introduces a humble man and guides the path he made. The Gospel of Mark introduces that the path he walked will be the path that Jesus Christ will follow. This means that the direction of the path Jesus was walking in coincided with the direction of his path. Both his father and mother were of the tribe of Levi, a priestly family. He also had a life with a guaranteed future as a priest. If he had become a priest, he would have been respected by the people and would have been able to live well. But he was the one with the secret of birth. His parents gave birth to him at old age. When she conceived him, he received a prophecy from an angel of God. Simply put, the prophecy was that he would prepare the way for the Messiah to come. The angel told me that preparing the way would convert many people (Luke 1:15-18). He was not doomed to live the life of an ordinary priest. Upon reaching his adulthood, he left his home in Jerusalem and went into the wilderness of Judea to make his way. He refused to take a seat of respect. And he did not really care about eating well and living well. His only concern was to do God's will. God's will for him was to prepare the way of the Messiah. He was a way maker paving a new path.

 

Perhaps from his childhood, the words of Isaiah 40:3 were attached to the head of his desk.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John the Baptist’s vision and mission were clear. It is to prepare the way for the Messiah and to make his way straight. John the Baptist, like Martin Luther, marked an era. John played the role of a forerunner between the Old and New Testaments. It is because the way for Jesus to come was made through John's activity. Luther was also a revolutionary figure that separated the medieval and modern times. Through Ahn Jung-geun's righteous actions, Koreans were able to dream of a world of peace again. John, Luther, and Ahn Jung-geun were revolutionaries who changed the times in that sense.

 

John the Baptist's revolution did not begin in a crowded square. He was but a cry in the wilderness. The wilderness is a remote place, isolated from everything, in an empty and desolate field. As I said before, the wilderness is a separate and isolated space where no one can help. But what in the world was John the Baptist doing there? His cry was simple. “Repent. And be baptized.” But what was the power behind his simple cry that so many people flocked to him? Isn't it amazing? He is but a cry in the wilderness, yet many are listening to him. People felt the authority of his words, and they came to him and began to be baptized. Even the Herod family who ruled Palestine could not ignore the voice of a poor prophet in the wilderness. I always find this part mysterious. Where did John the Baptist's authority come from?

 

John the Baptist was wary of the Pharisees and priests who were enjoying privileges centered on the temple. He left the priestly privilege and went into the wilderness. He wanted to return to the Word to live by the Word, and cut himself off from all he relied on. Rather, he went into the wilderness to find the source of the spring. He, too, chose to live in the wilderness, remembering the life in which their ancestors experienced God's presence and were led in the wilderness. In the wilderness, where he could depend on nothing, he wanted to test whether God's word really works or not. In that wilderness he received strong guidance from God. Elijah, who was his predecessor, also had God's powerful guidance in the wilderness. He was a tough revolutionary with the heart of Elijah.

 

4.

Then, should we also go into the wilderness like John the Baptist? John the Baptist says: “Repent and bring forth fruit befitting repentance.” The tools that made the way for the Lord to come were repentance and the fruits of repentance. However, this simple request is a heavy demand that is not easy because it is a very powerful request that shakes our entire existence. Because repenting and bearing the fruits of repentance is like a revolution. The Chinese characters for revolution (革命) mean leather () and life (). The reason I said that repenting and bearing the fruits of repentance is like a revolution is because it is something you risk your life for. Wouldn't it be a revolution to peel off skin to make leather, to become a new person, and to be born anew?

 

Becoming Christians begins with repentance. To be a disciple of Christ is to choose a way of life tha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way you used to live. The Greek word for repentance is “Metanoia”, which means to completely change the direction of your life. It is a life that sets a life goal, and a life target completely differently. It is not just a life of living as a believer only by the appearance of the church, just in moderation. It is a life of throwing off the shell completely and taking the kernel. It is not using God for my own desires, but a life that renews my desires for God. You may have to protest in the opposite direction to the way of life that everyone in the world follows. Even if you die of starvation, you struggle to return to the Word that is the source of your life. How can you believe this in moderation? It is impossible without a revolution that completely peels off my skin to create a new person and completely revive it. Therefore, after repentance, baptism was performed as a new born ordinance.

 

John the Baptist knew this. His own life was so feeble, but he knew that if people gathered to follow in the footsteps he had walked, a path would be made there. That is why John walked and walked the path of true life in the wilderness. His way of life became a way, leading many to the Truth, Jesus.

 

5.

John the Baptist's revolution began in the wilderness and struck all Judea. The life of repentance that John demanded is specifically introduced in Luke 3. It was to bear the fruit of life. If you repent, you must change your life.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change in life had to be concretely revealed in the attitude toward neighbors. Whoever has two sets of underwear should give it to the one who doesn't have it, and whoever has surplus food should share it with his neighbor. Have you ever wondered if expensive clothes that you haven't worn in your closet for over two years and food that you haven't eaten in your freezer for over half a year aren't yours, but your neighbor's? Do you have a surplus salary? Could it be that it is a gift from God to share with our neighbors? Without sharing and sharing with your neighbors in your life, your repentance is just a shell. You must repent again and bear fruit worthy of repentance. John demands to tax collectors and soldiers; Don't use your job to take more from others. Don't trample on the dignity of your neighbors with your elevated status. In other words, don't be rude. The way of life where everyone lived as equal neighbors was the path that John wanted to walk.

 

It was a way of life that respected others and reminded us of the preciousness of his life. As I say often, loving neighbor that I understand is “to make the other person realize their dignity and preciousness as a human being through me.” It may not be a big deal for me to share my food, clothes, and money, but the recipient feels honored through his service. This way of life of sharing and giving is the way of life of Christians, different from the world. This way of life is the path Jesus walked.

 

The Reformation and real revolution that must take place in this age must occur in our attitudes in life. A life oriented toward God naturally leads to a life oriented toward neighbors. Because Jesus wants his followers to walk together on the path to love their neighbors. This is not the Rival Gospel that all the people of the world follow, but the life that follows the true Gospel. It is a life that follows the story of Jesus, not the Rival story of success that the world seeks.

 

Look at what is happening in the world right now. The accident at the SPC Pyeongtaek factory, which does not care about the safety of workers only to make a profit, is a cross-section of the rival gospel of this age. SPC did not inspect the machine despite several accidents in which employees' arms were caught in the machine. As a result, a non-contract worker in her 20s died when her apron got sucked into the machine while mixing bread sauce. But the next day, it is said that they restarted the factory with the machine at the scene of the incident covered with a white cloth. He offered condolences by giving various kinds of bread to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deceased, which gave them misery. Beloved One Heart Church congregation, this is the rival gospel that is dominating the world. It is a terrifying and demonic idea that even human dignity can be trampled on for profit. This is the bare face of a consumerist capitalist society where profit has become an idol.

 

The source of the spring that the Bible speaks of is this;  “Love Go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is is our fountain source, which summarizes the entire Bible. An attitude of life that treats and respects neighbors like human beings is a way of life that goes against the false gospel of the age of consumption. A revolution must start with something very small and mundane. Reform begins with reorienting our lives and adjusting our direction. If the life and words of Jesus are the truth, wouldn't it be the right life to throw me into his way of life? With the heart of Elijah, John the Baptist still calls us today. “How long are you going to sit on the fence? If God is the real God, follow him; if it’s Baal (Mammon), follow him. Make up your minds! (1 Kings 18:21). We invite you to that small revolution and small reform. With Jesus and John the Baptist, why don't you walk towards the narrow and low but upright path? Why don't we walk together in such a way of life of reaching out, sharing and giving to the neighbors next to me? Instead of thinking, ‘Will the world change if I live like that?’, how about making a bright and warm world just around you? You don't have to be as grandiose as Martin Luther or Ahn Jung-geun. A small change in your actions will make a difference. And the path will become clearer and clearer for those who want to follow it. We believe that small changes in our lives together with our neighbors will become the way and make this world beautiful. You are a way maker if you are living like that, aren’t you?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218-24

제목: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1.     무촌 사이

우리는 부부사이를 보통 무촌이라 하죠.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일촌입니다. 그런데 다른 핏줄에서 태어난 한 여자와 한 남자를 우리는 무촌이라 부르며 가장 가까운 사이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것이 비생물학적인 외부자와의 삶을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인 관계(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떠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조금은 무모한 결정과 모험이 바로 이 결혼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대신에 여러분 부부의 이름을 넣어서 읽는다면 여러분의 느낌은 어떨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23절을 저희 부부의 이름을 넣어 읽는다면 이렇게 되겠죠. 그때에 김경헌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천지은!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닭살 돋죠? 어떤 분은 하지마~ 정신 나갔어? 제발 그러지마~”라고 남편에게 헤드락을 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다 낳아 주신 부모를 버리고 낯설었던 남자 또는 여자와 함께 살고 계십니까? 배우자와의 만남과 삶을 통해 어떤 의미들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아직 싱글이시라면 나의 반쪽을 찾아가는 건 잘하는 일이며 의미있는 일일까요?

 

여자와 남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또는 여자와 남자가 둘이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데도 어떻게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그 의미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결혼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일단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담은 인류의 원형적 존재라는 겁니다. 아담은 인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원형(archetype)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경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맞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것을 보고 기뻐하셨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창조시에 사람(아담)을 만드시고는 좋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죠. 그런데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은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원형이기에 우리들의 존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다른 이들과 연결될 때 우리의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9월 첫주 부임 설교 때 말씀드렸었죠. 우리의 참 인간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구요.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만드신 표현을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구절에서 주어로 1인칭 복수를 쓰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복수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만드신 표현에서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복수로 사용된 걸까요? 창세기를 쓸 당시에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게 없었지만 우리는 삼위일체를 통해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과 땅을 만들 시작때에 이미 존재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혼돈과 공허 위를 운행하고 계시기도 하셨죠(2). 인간을 만들 때 우리들의 형상으로 만들자고 한 것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삼위일체란 참으로 신비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세 위격(位格, persons)이 한 본질(essence, substance)을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어도 어렵고 쉽게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헬라어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고(inter-penetration) 내재(inter-dwelling)하면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삼위일체는 공동체적인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위해 활동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위해 활동하시는 공동체성을 띈다는 것이죠.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방식입니다. 성자는 성령을 통해 성부를 위해 일하십니다.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는 성령을 통해 성자를 섬기십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서로를 위하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존재방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방식을 그대로 인간에게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자체가 공동체적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또한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그 뜻은 창조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관계적인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또한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모습, 즉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바로 모든 관계가 평화롭게 회복된 나라일 겁니다.

 

인간은 만들어질 때부터 공동체적인 DNA가 존재 깊은 곳 안에 심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여야 하는 이유는 참 인간됨을 공동체를 통해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또한 공동체적인 존재 방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관계적인 존재(relational being)라는 겁니다. 이 관계적인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이 부부의 삶이구요. 그래서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 걸쳐 남녀의 창조와 그들의 관계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아담의 반쪽으로 하와를 만들다.

오늘 읽은 창세기 2장은 아담을 통해 여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외과의사분들도 여기 계시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외과적 수술 과정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은 아담의 존재를 통해 여자를 만들어 내시죠. 잠든 사이라 말하는데 마치 마취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저도 큰 수술을 한 번 받았을 때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마취약 들어갑니다라고 말하고 바로 정신이 나가더라구요. “김경헌 씨 일어나세요.”하기에 깨어났는데 6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구요. 아담도 잠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여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얼마나 놀라고 흥분됐을까요?

 

여기서 사용된 갈빗대라는 히브리 단어 첼라(צְלָעֹת)는 해부학적인 용어로 성경에서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첼라는 성전과 관련된 단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언약궤의 양쪽 면에 달려 있는 손잡이, 성전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 등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대칭적인 것의 한 쪽면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쓰인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갈빗대의 반쪽면을 취한 거죠. 그러니까 아담의 반쪽 면을 취하셨다는 거죠. 갈비뼈는 우리 몸에서 가장 대칭적인 뼈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쪽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죠.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가 아니라 아담의 반쪽면을 취하시고 떼어낸 부분에는 새로운 살로 메꿔 놓으신 겁니다.

 

그러기에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볼 때 이런 고백을 하죠.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군요(새번역).”라구요. 이 해석을 뒷받침 해주는 단어 하나가 더 있는데 18절에 돕는 배필로 번역되는 네게드(נֶ֫גֶד)’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반대편(opposite side)이라는 뜻입니다. 배필이라는 말보다 반쪽의 다른 면이 원어에 가까운 뜻입니다. 말그대로 남자는 여자의 반쪽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누가 더 낫고,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따질 수 없다는 겁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건 여자를 어떤 재료로 만들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의 대칭적인 동등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되는 것이 몸을 섞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발견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의 관계를 통해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신비를 깨닫는 것이죠.

 

이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시대에는 혁명적인 선포입니다. 오히려 여성을 통해 남성의 존재가 의미를 갖고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혁명이 바로 성경의 첫 부분부터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창조가 진행될 수록 더 완벽하고 고등적인 피조물들이 만들어지죠. 남자가 만들어지고 여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남자분들은 기분 나쁠 지 모르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더 완벽하고 고등적인 존재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지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복잡하고 세밀합니다. 여자들은 출산이라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남자 아이 셋을 키우는 것보다 여자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여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훨씬 감정 소모가 심합니다. 제 아내는 이것을 결혼 전부터 알았던 것인지 저의 소원과는 상관 없이 남자 아이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행히도 남자 아이 셋을 가진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아내 말 잘 들으라고 그러시나 봅니다. 저도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내의 의견이 거의 옳다는 겁니다. 아내 앞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내 주장을 꺽지 못하지만, 돌아서면 그래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인정하긴 싫다.” 라고 혼자 생각하곤 합니다.

 

4.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왜냐면 관계적인 분이신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거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함께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구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배우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배워가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안에서 인생의 참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구요.

 

관계란 갈비뼈가 양쪽으로 동등하게 나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등한 존재들이 동등한 위치와 가치에서 출발하지 않고 온전한 관계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부부는 동등합니다. 어는 누구도 다른 누구에 비해 존귀한 이가 없고 월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다른 이를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까지 말씀하시죠. 부부관계는 물론이요 모든 관계는 이러한 상호 동등성에서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 시키기 위해 우리와 동등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고 고통을 몸소 경험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겸손해질 때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과 동등해지지 않고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화해한다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exchange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동등한 자격에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와 죽음을 교환하신 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고린도후서 519절에서는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하셨던 대수술을 십자가에서 다시 행하셨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찌르셔서 물과 피를 쏟아 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의 구멍난 갈빗대 사이로 흐르는 물과 피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도 사랑하시는 인간과 그들의 세상과 화해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반쪽이셨던 독생자 예수를 그렇게 희생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그분의 또 다른 반쪽인 우리를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태초에 무너졌던 인간과의 관계는 아름답게 다시 회복되어진 것이죠.

 

5.     일상의 관계망들 안에 열매 맺는 삶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 우리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질을 우리와 공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만큼의 존귀함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존귀함은 나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고 어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상호존중과 동등함의 태도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 직장, 학교, 동아리, 동네 등등 얽히고 섥혀 있는 관계의 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관계망을 이웃이라 부릅니다. 이 관계망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들 안에서 상호존중과 화해가 이뤄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가정의 관계들 안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길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의 관계망들 안에 아름다운 화해와 샬롬의 열매들이 맺히길 축복합니다.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관계망 속에 있는 이가 나를 통해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들이 꽃피우고 열매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Sermon scripture: Genesis 2:18-24

Title: In the beginning there were relationships. / translated by  Deacon Ji Yun Kang

 

1. no degree of kinship

In Korea we usually refer to a married couple as “muchon” meaning the closest degree of kinship. Siblings born to one parent are considered the first degree of kinship. However, a woman and a man born of different bloodlines are called Muchon, and we live as the closest member of a family. If you think about it, marriage means leaving one's biological relationship (parent-child relationship) in order to live with a non-biological outsider. In that respect, it seems that this marriage is rather a risky decision and quite an adventure.

 

How would you feel if you put your husband and wife's names in the text we read today instead of Adam and Eve? So, if we read verse 23 with my name and my wife’s name, it would be like this. At that time, Kyung-Hun Kim said: “You just showed up, you Chun Ji-Eun! The bone is my bone, the flesh is my flesh”. Yes, sounds cheesy, right? Some of the wives might say "Oh stop! Now that’s awkward!” and might want to keep her husband from going any further. Did you leave your parents who gave birth to you to live with a man or a woman whom you did not know before? What meanings are you discovering through meeting and living with your spouse? If you're still single, do you think it will be good and meaningful to find your half?

 

Women and men are clearly different. But the Bible says that a man and a woman, or a woman and a man, become one and become one flesh. As separate beings, how can they become one body, and what does that mean? And what does it mean to take Adam's rib and make Eve? And what does this mean for us living in the present? We would like to examine the meaning of our marriage, family, and church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Adam and Eve in Genesis 2.

 

2.Man made in the image of God

First of all, we must point out that Adam is the archetypal being of mankind. Adam is the archetype that represents and symbolizes man. So Adam's experience can be the existential experience for all of us. That it was not good for Adam to be alone was not in line with God's principle of creation. When God saw what he had made, he was pleased and said it was good. He made man (Adam) at the time of creation and said twice that it was good. But it was not good in God's eyes for Adam to be alone. Since Adam is the archetype representing mankind, our existence is more meaningful when we are together than when we are alone. Actually, our existence is complete when we are connected with others. I spoke about this the first week of September during my inauguration sermon. Our true humanity is completed through our relationships with others.

 

God made man in his own image. However, Genesis 1:26 uniquely describes the expression God made in His image.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hi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beast of the field that dwells upon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beast that creeps on the earth”. I would like to note the use of the first person plural as the subject in this verse. 'We' is clearly plural. In the expression that God made in His own image, God is expressed in plural. Why is God used in the plural?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Genesis, there was no such thing as the doctrine of the Trinity, but we can interpret this verse through the Trinity. The Gospel of John tells us that Jesus, who was the Word in the beginning, already existed when God the Father began to create the heavens and the earth. Also, the Spirit of God was operating over chaos and emptiness (verse 2). When we created human beings, Jesus and the Holy Spirit were included in what we asked to make in our image.

The Trinity is indeed a mysterious doctrine. God revealed by Jesus Christ means that three persons share one essence (substance). It is also a doctrine tha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raditionally, the Greek expression ‘Perichoresis’ is used to describe the existence of the Triune God. This means that they exist by inter-penetration and inter-dwelling with each other. Simply put, the Trinity is a word that represents a communal way of being. In other words,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exist for each other. It means that they do not work for themselves, but rather have a sense of community that works for each other. This is the way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exist. The Son works for the Father through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reveals the Father through the Son. The Father serves the Son through the Holy Spirit. It's hard to understand, but God exists for each other. This is the most characteristic way of being God. However, when creating human beings, the Triune God implanted their way of being in humans as they are. This means that God itself is communal, and that human beings who resemble God's image are also relational and communal. This is a very important part. What is the title of today's sermon?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It means that the good and beautiful aspects of creation are relational. It was a good thing in God's eyes to see humans having a relationship with God and also with each other. That was the original form of creation. Therefore, the image of the kingdom of heaven, that is, the image of the kingdom of God, is a kingdom in which all relationships are peacefully restored.

 

From the moment humans were created, a communal DNA was planted deep within their being. That is why a person can discover his own meaning when he is in a community. The reason the church should be a community is that true humanity can be achieved through the community. Since God Himself is a communal being,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also be in a communal way of existence. If the church loses its sense of community, it is no longer a church. The important point is this.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means that we are relational beings. The life of a married couple is the most fundamental form of this relationship. That is why the first two chapters of Genesis portray the nature of the creation of men and women and their relationship.

3. Eve is created from the halves of Adam.

Genesis chapter 2, which we read today, describes the process by which the woman was created through Adam. We have surgeons in our congregation, and it seems that some kind of surgical procedure was performed on Adam by God. While Adam was asleep, God created a woman from Adam. Bible says while asleep, and it reminds me of anesthesia. I too have the experience of lying on an operating table when I had a major operation. The nurse said, "We are now injecting anesthesia" and I fell to sleep right away. When I woke up to the sound of the nurse calling me, “Mr.Kim Kyung-heon, wake up,” six hours had already passed. Adam closed his eyes for a moment, and then opened his eyes to see a woman approaching him. We can only imagine how surprised and excited Adam might have been.

 

The Hebrew word for rib as used here, chela (צְלָעֹת), is an anatomical term never used in the Bible. Chela is often used as a word related to the temple. For example, it was used to refer to the handles on both sides of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north and south sides of the temple. This word is used to refer to one side of a symmetrical thing. So He didn't just take one of Adam's ribs but half of Adam's rib. So He took the half of Adam. The ribs have the most symmetrical bone structure in our body. God did not take one of Adam's ribs, but took the half of a rib from Adam and filled the removed part with new flesh.

 

That is why Adam confesses this when he sees Eve for the first time. “The bones are my bones, and the flesh is my flesh” (New Translation). There is one more word that supports this interpretation, 'neged' (נֶ֫גֶד), which is translated as “helpful matchmaker” in verse 18. This word means the opposite side. ‘The other side of the other half’ means closer to the original language than the word ‘matched’. Literally, a man is made from the half of a woman. It doesn't matter who is better and who has the upper hand. Making a woman out of ribs is not about what material the woman is made of. It emphasizes the symmetrical equality of men and women. Being a man and woman means more than mixing bodies. It really is half and half meeting and becoming one. As a couple, we must discover this mystery. It is about realizing that there is magic in finding one’s true self through relationships.

 

In the world at the time this book of Genesis was written, women were msuperiorerely an accessory to men. But the Bible says that women are equal to men. This is a revolutionary proclamation in ancient times. It is through women that the existence of men has meaning and that they realize the true purpose and meaning of life. A revolution that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religion is happening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of the Bible.

 

As creation progresses, more perfect and superior being are created. It is significant that men are made and then women are made. Men may feel offended, but in my view, women are more complete and superior than men, because women were created later. That is why women are much more complex and detailed than men. It is women who have the function of giving birth. That's why it's much harder to raise three girls than it is to raise three boys. In my view, raising girls is much more emotionally exhausting. Whether my wife knew this before her marriage or not, she desperately wanted to have a son, despite my wishes. So, unfortunately, I became a father of three boys. That’s why conventional wisdom is saying, listen to your wives. What I also experience existentially is that my wife's opinion is almost always right. In front of my wife, I can't admit that because of my pride, but when I turn around, I say, "Yeah, I think my wife is right. But I don't want to admit it to myself."

 

4.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Humans are relational beings. Because it resembles God, who is a relational being. God says that from Genesis chapter1, he will make men and women and discover the true meaning of life in each other's relationships. And Genesis chapter 2 tells us that their very existence itself is dependent on each other. We are made to love one another. That is why we find the true meaning of life in a relationship of love. We basically learn love and practice love through our relationships with our spouses. That’s how you discover the true meaning of life in it.

 

Relationships are like ribs divided equally on both sides. A perfect relationship cannot be achieved without equal beings starting from equal positions and values. Married couples are equal. No one is more noble and superior than the other. Rather, Jesus goes so far as to say, "Think of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All relationships including married couples can develop into healthy relationships from this mutual equivalence.

 

Look at Jesus Christ. He came wearing a human body equal to ours to reconcile us with God. He had been through all the tribulations that humans go through and experienced the pain himself. A remarkable history of salvation occurred when Jesus gave up equality with God and became humble as an equal to man. This is because the problem of human sin could not be solved without being equal to humans. In Romans 5:10, it is said that we have reconciled with God because of the death of God's son. The original meaning of the word reconciliation here is exchange. Reconciliation is an equal exchange between Jesus’ righteousness and our sin and death. And furthermore, Corinthians 5:19 entrusted us with a position of reconciliation. God did the major surgery on Adam again on the cross. He put Jesus Christ to sleep on the cross and stabbed him in the ribs to pour out water and blood. This was a tremendous love of God.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was born through the water and blood flowing through the hollow ribs of Jesus.

So he sacrificed Jesus, who was half of God, to make peace with the people he loved so much and their world. And God recovered us, the other half of him that had been lost. The relationship with humans that collapsed at the beginning was beautifully restored at the cross.

 

5. Life that bears fruit in everyday relationships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God's greatest joy is to have fellowship with us, who are in His image. In a way, God shared with us the unique nature of his existence. The fact that we are born in the image of God means that we are just as worthy as God. We must know that the worthiness does not apply only to us but to everyone we meet and hang out with. This attitude of mutual respect and equality is what makes our relationships beautiful.

 

You're all living in a network. I live in a network of intertwined relationships, such as home, work, school, clubs, neighborhood, etc. This network is called a neighbor. What is the way to achieve God's kingdom and God's will in this relational network? If mutual respect and reconciliation are achieved within all the relationships we have, what can it possibly be other than the kingdom of God? I wish you all the best in your family's relationships. I give you blessings so that you will have a beautiful reconciliation and the fruits of Shalom in your daily network. Loving your neighbors is not far-fetched. When someone within your relationship network feels their self-worth through you, that’s neighborly love. I hope and pray that through you, your spouse and your neighbors will blossom and bear fruit.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