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1. 27. 09:12


<마태복음 26장 묵상 - 거룩한 낭비>

여인이 값비싼 형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닦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체포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인가, 라는 질문을 들게 만들정도로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한 여인이 식사하는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머리에향유를 붓습니다.
이 향유는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불가리, 샤넬 같은 향수보다더 찐한 향내를 뿜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여인이 결혼 지참물로하나씩 가지고 있던 너무나귀한 향유를 여인은 예수님께깨뜨려 붓습니다.
향유의원액이 예수님의 머리로 쏟아져내릴 때, 나병환자의 집이라 했던 시몬의 집의 퀘퀘하고눅눅한 모든 느낌을 그 향기가바꿔 놓았을 겁니다.
주님 마음이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마지막이구나 끝이구나.
이제 아버지께서 준비해 두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아버지의 위로가 이 여인을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시며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으로 큰 위로를받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여인의 이런 아름답고 향기로운 행동에 대해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가장 측근인 제자들이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입니다.분개를 했다는 것 보니 단단히 화가 났나 봅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제자들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지 않았고 비싼 값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은 사람 보다 돈이었고, 예수님보다 자신이었습니다.

여인의 계산법은 어떤가요?
여인은 돈보다 사람이었고, 돈보다 주님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 예수님께 투자하는 삶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장 귀한 분이기에 그 어떤 것을 드리더라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죠.
제자들의 계산법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면, 여인의 계산법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런 욕을 좀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너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니? 시간이, 돈이 아깝지도 않냐?”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난 해 말, 아내가 연세대 대학원에 합격증을 들고 왔을 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야~ 이제 등골 휘겠구나~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어찌 감당하지?
이거 너무 허비하닌가? 배우는 것의 질에 비해 학비가 너무 비싼거 아니야?’
지금도 이런 마음은 쉬 가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침에 깨닫습니다.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내가 이 공부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깨뜨리기 원한다면 지지해줘야겠다고 말입니다.
나의 부족한 계산법이 부끄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아침 시간 이렇게 긴글을 치고 나누는 것도 허비가 아니길 바랍니다^^ ㅎㅎㅎ

여인의 허비, 여인의 낭비는 퀘퀘한 문둥병자의 집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낭비가 퀘퀘한 이 세상에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축복합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1. 25. 05:38

어떤 작은 도시에 마틴 아브데이치라는 구두 수선공이 살았습니다. 그는 지하에 작은 방을 하나 갖고 있었고, 그 방에 길을 향해 난 작은 창 하나가 있었습니다. 창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았고 신발로도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성실했고 일감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언제나 착한 사람이었지만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구둣방을 차리기 전 아직 고용주 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틴의 아내는 세 살배기 아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아들도 몇 년 못살고 고열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습니다. 마틴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부터 교회당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아는 순례자 노인이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마틴은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슬픈 일을 털어 놨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청하는 건 빨리 죽게 해 달라는 것뿐예요. 이제 저는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없으니까요. “ 노인은 대답합니다. “자네에게는 그런 말할 권리가 없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판단할 수 없어. 만일 하나님께서 자네의 아들이 죽고 자네가 살기를 원하신다면, 그게 최선임이 틀림없네. 자네의 절망은 자네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럼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마틴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자넨 그 분을 위해 살아야해. 그분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웠을 때 자넨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게 편하게 보일거야.” 마틴이 잠시 침묵한 뒤에 물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신을 위해 살 수 있지요?” 노인이 대답합니다. “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가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셨지. 복음서를 읽어 보게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알게 될걸세. 그 안에 모든게 나와 있어

 

그날 저녁부터 마틴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휴일에만 읽을 생각이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마음이 매우 가벼워져서 매일 읽게 되엇습니다. 그 때부터 마틴의 모든 삶이 변했습니다. 마틴의 삶은 평화롭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는 틈만나면 성경을 읽었고 읽을수록 더욱 잘 이해되고 행복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하루는 잠 자기전 누가복음 7장의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던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집에 오신 손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지. 손님이 누구였지? 바로 그리스도였어! 만일 내게 오신다면 나도 그렇게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마틴하고 큰 소리가 났습니다.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내가 내일 갈 것이니 거리를 내다 보거라

 

다음날 마틴은 기도문을 외우고 불을 피운 뒤 양배추 스푸와 메밀 죽을 준비했습니다. 따뜻한 차도 주전자에 담아 난로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마틴은 창가에 앉아 일하는 것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한 노인이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마틴은 노인을 흘긋 보고 나서 일에 몰두 했습니다. 노인이 삽을 세워 놓고 손을 호호 불며 잠시 쉬려고 하였습니다. 마틴은 그를 불러 차를 따라주었고 몸을 녹이게 해 주었습니다. 노인은 마틴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눈치를 챘고 누구를 기다리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네 부끄럽지만 내 주님 그분을 기다리고 있답니다.”하고 그 노인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습니다. 노인은 가고 마틴은 계속 창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초라한 행색으로 아기를 팔에 안고 가던 여자가 지나쳤지만 이내 멈춰섰습니다. 여자는 벽에 기대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를 감싸려고 했지만 아기를 감쌀 수 있는 변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기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마틴은 그녀를 집안으로 불려들였습니다. 마틴은 아침에 준비해 둔 빵과 스푸를 준비했습니다. “앉아서 먹어요 아기는 내가 돌볼 테니 나도 아이를 키워봤기 때문에 아기 다루는 법을 알지요. 그런데 따뜻한 천이나 옷이 없나요?” 여인은 군대에 간 남편이 소식도 없고 일을 구해 보지만 너무 야위어서 써주지 않고 마지막 남은 숄까지 전당잡힌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마틴은 자신의 낡은 외투를 가져와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받아요 닳고 해지긴 했어도 아기를 감싸는 데 적당할거예요.” 마틴은 저당잡힌 숄을 찾을 수 있도록 돈까지 쥐어주어 보내고 계속 창밖을 보았습니다.

 

한 사과장수 노파가 사과를 거의 팔았는지 사과가 몇 개 남은 바구니를 들고 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허름한 모자를 쓴 소년이 사과를 냅다 들고 지나치려 하다 노파에게 잡혔습니다. 노파는 아이를 경찰로 데려가겠다고 소리쳤고 아이는 자기가 훔치지 않았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던 일을 놓고 마틴은 그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마틴은 노파를 타이기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테니까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 중에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을 용서하세요.” 노파는 마틴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마틴의 설득으로 일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해는 졌고 등불을 켤 때가 되었습니다. 마틴은 등불을 켜고 성경 책을 펼쳤을 때 어제의 꿈이 떠올랐고, 꿈에 대해 생각하자 마자 마치 누군가 뒤에서 걷고 있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귓가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 마틴 마틴, 나를 모르느냐? “ “누구십니까?” “나였느니라라는 소리와 함께 눈을 쓸던 노인이 미소를 짓고 다가와 사라졌고 또 나였느니라하는 소리와 함께 아기를 팔에 안은 여자가 웃으며 다가 오더니 사라졌습니다. 다시 한 번 나였느니라하는 소리와 함게 노파와 사과를 든 소년이 걸어 나와 미소를 짓더니 또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틴의 영혼은 기쁨으로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바로 그 펼쳐진 부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위쪽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대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리고 그 면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제 마틴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었고, 구주께서 정말로 그날 자신에게 오셨으며 자신이 그분을 기쁘게 맞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의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게 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내게 오십니다^^

40절 말씀을 읽고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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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24. 08:03

 함석헌 선생이 쓴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詩)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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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4. 1. 23. 07:01
<마태복음 23장 묵상 - 척하지 청(聽)하라.>

마태복음 23장은 꽤 긴 말씀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독사의 새끼들아' 라는 심한 말까지 등장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평가하기로 거룩하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그들을 향한 평가는 '외식하는 자' 였습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휘포크리테스(hypocrite)'은 배우(actor), 따라쟁이(dissembler), ~척하는 사람(pretender)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죠.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는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를 싫어할 뿐더러, 자신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높임을 받고 존경받으면 끝입니다.
오로지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이 목적인 인생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외칩니다.
엄청난 경고 아닌가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은 중요한 것은 거르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겁니다.
중요한 알맹이는 버려버리고 껍데기만을 고수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루사리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입니다.
눈먼 사람들이지요. 참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칭찬에 눈이 멀었고, 사람들의 평가에 눈이 멀었고, 인정 욕구에 눈이 멀어 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눈먼지도 모르고 맹인 주제에 다른 사람의 길을 인도하겠다고 나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겸손히 제 모습을 살핍니다.
겉치레에만 관심 갖는 자가 아닌지 돌아봅니다.
겉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고 안을 깨끗이 하는 자는 겉도 깨끗하다는 것을 기억해 봅니다.
있는 척 하고, 아는 척 하고, 된 사람인 척 하는 겉치레에 눈이 먼 사람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이 아침 나의 내면의 모습과 직면했으면 합니다.
연기자로서의 인생을 오늘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모든 가면을 벗고 나의 참 모습과 만나야겠습니다.
높임 받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내려와 묵묵히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는 길로 내려가야겠습니다.
말하고 가르치려는 자리에서 듣고 경청하며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척하고 설교하지 않고 듣고 설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던 가면들을 주님 앞에 다 내려 놓기 원합니다.

이 아침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며 드는 나를 깨우는 경구, 그것은
"척하는 사람이 아닌 청(聽-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라" 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22. 09:50

<"죄와 벌"에서 나사로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

지난 월요일 한 달마다 있는 '김응교선생님 인문학교실'에 다녀왔습니다.
12월과 1월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강독했습니다.
사흘 앞두고 교수님과 페이스북 친구 맺었다는 죄로 교수님의 발표 제의를 받았습니다.
주제는 "죄와 벌" 소설에서 "나소로의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였습니다.
살인자였던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라는 매춘부에게 와서 자신의 만행을 낱낱이 고할 때, 갑작스레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본문을 읽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바로 그 나사로 이야기 말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지요? 그냥 발표하면 횡설수설할까봐 발제 페이퍼를 만들어 갔습니다.
같이간 형님이 그냥 두기 아깝다고 페북에 공유해달래서 이렇게 올립니다.
참고로 1번 이유는 장종혁 형제의 페이스북 포스팅 내용을 인용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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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성에 의한 구원의 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안에 자신의 발작의 통제되지 않는 기폭제를 설치하는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으로 소설 안에 비쳐진 것일 수도 있다. 원전의 냉각수가 고장나듯 불현듯 주인공은 발작을 일으킨다.
제어능력이 없는 기폭제를 설치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인류에게, 이 시대에 필요한 힘은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의 남성적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은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망치고 헝클어놓았다.
이 남성적 엔트로피에 의해 헝클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죄와 벌』에서도 ‘소냐’라는 여성을 통해 ‘라스콜니코프‘라는 그 기폭제를 끌어안아 버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해지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도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나서 그를 향하여 날아올 정죄의 화살을 예상했는데 소냐는 그 모든 발작을 스펀지처럼 다 빨아드려 버린다.
그럼으로 그의 발작은 잠잠해졌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안식까지 누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구원은 여성성의 용서와 용납에서 오는 것 같다.
주인공의 발작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의해 그것이 용납되어짐으로 구원은 외부로부터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무덤을 열어젖히고 감긴 천을 풀어 놓을 대행자 소냐.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사로 이야기(네러티브)를 이 소설에 끌어 온 이유를 먼저 짚고 싶다.
나사로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이며 지은이는 왜 나사로 이야기를 중요한 모티브로 끌어 왔는가?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의 줄거리와 주제를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다가오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심을 알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3킬로 남짓 떨어진 동네다.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여 예수님은 베다니를 들르신 것이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는 예수님과 친분이 깊은 관계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3절), 친구(11절)로 소개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어 장사된지 이미 4일째였다. 무덤의 돌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시체는 천으로 두텁게 둘러 있었다.
슬피 우는 누이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신다(ego eimi - 나는 ~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25-26절)”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좀처럼 보여주시지 않던 눈물까지 보이신다.
예수님은 먼저 동굴로 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 명령하신다.
그런 후 큰 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때 어두컴컴한 무덤에서 손발은 천으로 감겨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는 죽었던 나사로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고 하시며 그를 옭아매고 있던 천을 풀어해치라 명하셨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곧 이루게 될 죽음의 극복, 즉 부활이 상징적으로 선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로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로 시선을 이끌어 간다. 요컨대 나사로의 부활은 곧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부활을 선취하며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왜 그의 소설에 끌어 왔을까? 그것은 에필로그의 끝부분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은 죽었던 자, 갇힌 자, 묶였던 자의 재기(再起, resurrection)이며 대전환을 상징하는 성서의 대표적 사건이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지은이는 죄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삶의 의미를 잃고 쓰러진 청년 라스꼴니코프의 삶의 부활과 대전환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죄에 대한 죄값, 즉 죄의 벌은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로마서 6장 23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청년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의 모형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면 이 나사로의 부활을 왜 소냐가 읽었는가?
소냐를 예수님의 대행자(agent)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셨고 무덤문을 열고 살아난 나사로를 칭칭 두르고 있던 천을 벗겨주었던 대행자가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예수님의 대행자로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사건을 도왔던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세상과 단절된 자신이 파놓은 무덤에 갇힌 자였다. 그의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의 전 존재를 죄의 결과인 혼돈과 광기 그리고 정신적인 방황과 분열이 옭아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 대신에 무장해제 시키는 역할을 소냐가 감당했다고 본다. 소냐는 혼자 씨름하고 있던 죄의 문제를 예기치 않은 고해성사를 통해 빛 가운데로 드러나게 해주었고, 라스콜니코프가 타인을 향해 품고 있던 의심과 두려움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죄의 올가미를 풀어해칠 수 있게 도왔던 것이다.

3. 용납받은 치유자 (A forgiven healer) 소냐.
다음으로 소냐가 나사로 본문을 읽었던 이유를 소냐 또한 죄로부터 용납을 받은 경험이 있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맛본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비록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생계형 매춘이었다지만 소냐는 매춘부였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서를 통해 죄의 용서를 깨달았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된 경험을 가진 자이다.
그녀가 죄의 문제를 씨름해 보았기에 그 죄의 강력한 핵주먹에 나가 떨어진 라스꼴니코프를 누구보다 이해하며 도와줄 수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용납받은 치유자(a forgotten healer)로 라스콜니코프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길라잡이였던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aeler를 살짝 변형함)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이라 표현하고 싶다.
진짜 치유자는 예수님이라면 소냐는 그 예수님에게까지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고 안내해주며 보호해주는 몽학선생(가정교사)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실재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라는 인도자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되고 참 치유와 구원을 경험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19. 14:03
<마태복음 19장 묵상 - 빈손이 가장 큰 손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부터 등장하는 일명 '부자 청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일단 그의 관심사는 영생이었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행동을 해야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은 모든 율법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라고 자뻑(스스로 뻐김)을 늘여 놓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건드리십니다.
부자 청년, 또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라는 말을 통해 이 젊은이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청년인데도 재물이 많다면, 정말 유능하거나 수완이 좋은 사람이던지 부모가 돈이 많고 지위가 있던지 둘 중 하나겠지요.
이 청년을 나타내주는 말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
율법을 그렇게 잘 수행하고 완벽한 삶을 살았음에도 올바른 청년, 거룩한 청년이 아니라 부자청년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라면 거룩한 청년, 홀리한 청년이란 평을 받고 싶지 부자청년은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부자청년이라는 말은그만큼 재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는 거겠죠.
행실은 올바르지만 재물을 참 사랑한 청년 뭐 이정도 이겠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어제 아브라함의 시험과 비슷한 종류의 시험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치면 "니 아들을 팔아 제사하라"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재물을 팔지 못했습니다.
재물보다 예수님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 집에 잉잉 울며 돌아가버립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봅니다.
두 아들일까? 평판일까? 재물일까? 안정된 노후일까?
나는 그것을 팔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참으로 본질적인 질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나는 나의 평판이나 안정된 삶을 위해 사는가?' 라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다 드린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놓지 못하고 부요해져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생각하시며 하신 말씀이 갑자기 내면을 강타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1장 7-8절)"

광야에 갔으면 광야에 걸맞는 삶을 사는 자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질문을 저에게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를 따르고 있느냐?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느냐?
니가 사랑하는 그 부드러운 것들, 부요한 것들 다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아~ 저는 근심하며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예 주님 저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다짐이 저의 진실한 고백이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대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버림이 영생의 지름길이며, 포기함이 배로 받는 길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다 버리고, 쥐었던 손을 다 펴고 겸손히 주님을 향해 폅니다. 
주님 뜻대로 사용하소서. 크신 주님!! 나의 빈손 꼭 잡으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소서.
빈손이 가장 큰 손이라는 걸 이 죄인이 이제 깨닫습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17. 23:24
죄와 벌 완독.
긴 호흡으로 읽어내야하는 명작 중에 명작.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벌래)같은 존재들은 죽여도 상관 없다 생각하는 한 20대 청년.
평소 이처럼 여기던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우연찮게 현장에 있게된 노파의 순진무구한 이복 여동생까지 죽이며 예기치 않은 죄의 덫에 걸려든 청년.
그를 죄의 형벌에서 건지기 위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나긴 기다림과 사랑. 특별히 소냐라는 생계형 생존형 매춘부 소녀의 애뜻한 사랑에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이야기.
시쳇말로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일종의 추리심리소설이다. 그러나 추리 이상의 그 무언가를 이 소설에서 읽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힘이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한 여인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힘에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인용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를 훌쩍 들어올려 그녀의 발 밑으로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끌어 안았다. 첫순간 그녀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질려버렸다. 그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벌벌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 다 창백하고 여위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원천이되어 주었다.
....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
그의 베개 밑에는 복음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집어들었다. 이 책은 그녀의 것으로 그에게 나자로의 부활 부분을 읽어준 바로 그 책이었다. (죄와 벌 하권 498쪽, 민음사)"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
그의 베개밑에 복음서가 놓여 있었다.
캬~ 너무나 황홀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다니 도스또예프스키는 참으로 위대한 작가로구나!!
아직도 심장이 발렁발렁한다.
좀처럼 잠을 이루기 힘들 것 같은 감동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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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14. 22:07

<마태복음 14장 묵상 - 떠난 자를 보내며 깊어지는 영성>

영국의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은 그의 친구 할렘의 죽음을 생각하며
17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며 “인 메모리움(In memorium)”이라는 시를 완성합니다.
이 시는 죽은 친구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신과 인간성에 대한 사랑에 의해 평화에 도달하는 마음의 순례기라고 할 수 있지요.

"굳은 맹세를 해 보지 않은 마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잡초 속에 고여 있는 물같이
부족을 모르는 안일을 나는 부러워 않노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내 슬픔이 가장 클 때 깊이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고
….
떠나간 한 사람을 위한 나의 슬픔을 용서하소서.
그는 당신이 지으신 이, 그렇게도 훌륭했던 분,
나는 그가 당신 안에 살고 있음을 믿나이다.
또한 그 곳에서.”

마태복음 14장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헤롯에 의해 요한은 참수형을 당합니다.
요한을 죽인 후 헤롯은 요한이 예수님으로 환생했다고 믿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이적이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헤롯은 요한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계속 눌림이 심했고, 아마도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말씀을 따르다 희생당했습니다.
그는 예언자로서 의롭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왕 앞이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형장의 이슬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큰 의미였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은 요한 죽음의 비보(悲報)앞에서 그 슬픔을 가눌 수 없었던 듯 합니다.
그 분은 혼자 울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갔고 슬픔의 바다에 잠시 머무르셨을 겁니다.
외딴 곳에서 그 고독을 깊이 들이키시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한 결단을 곤고히 하셨을 겁니다.
친구 요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과 자신이 짊어지게 될 십자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을 겁니다.
‘요한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맞이 하리라.
요한이 그의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듯이 나 또한 내 십자가를 감당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영성을 더 깊게 하였고 영력을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인 오병이어의 이적이 요한의 죽음 직후에 이뤄진 것이 아닐까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 안에 잃은 양처럼 유리하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촉발시켰고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주안에서 박해를 당하는 자들의 고난과 핍박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박해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그분의 은혜를 촉발시킵니다.
오늘 주를 위해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까?
주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받는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셨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신앙과 영성은 더 견고해질 것이며, 당신의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과 기적은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세례자 요한으로의 삶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비록 나의 아픔과 고통이 예수님께도 깊은 슬픔이겠지만
나의 죽음과 희생이 오병이어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의 위력은 더 확장시켜 나갈 것을 믿기에
주님께 드리는 나의 삶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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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14. 06:50

#묵상문자
<마태복음 13장 묵상 - 열매는 마음 밭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비유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묘한 진리를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마태복음 13장은 모두 천국 비유로 이뤄졌습니다.
비유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욱 심화된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방법인 반면에 대적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는 기능을 합니다.
천국 비유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효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자 비유를 깊이 묵상해 봅니다.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합니다. 씨앗과 땅이지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땅은 그 말씀을 듣고 받는 우리들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결실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의 결실의 여부는 전적으로 마음밭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마음밭은 인격의 중심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마음밭에서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면 결실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네 가지 마음밭에 대하여 말합니다. 
첫째 길가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길가 밭은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받는 사람의 마음밭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여 이미 마음 밭이 굳어져 버린 사람입니다. 
흙이 씨앗에 덮여 있을 때 싹을 내는데 밭이 굳어져 있으니 뙤악볕에 씨앗이 덩그러니 드러나 보이는 겁니다.
이걸 새(사탄)가 가만 놔두겠습니까? 주일에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 아니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빼앗겨 버립니다.
사탄의 주요 활동 중에 중요한 활동은 성도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감동을 못받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며 성도의 영적 각성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둘째,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흙이 깊지 않기에 말씀의 싹이 나오는 해가 돋은 후에는 타져서 뿌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긴 했는데 말씀으로 살다가 환난이나 불편, 핍박을 경험하는 순간, “즉시” 넘어지는 경우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되고 잘 풀릴 줄로만 알았는데 고난도 있고 십자가도 있다고 하니 시험이 들어 버립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말씀의 결실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때는 은혜 받는데 말씀의 위력과 복됨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문제는 감춰진 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척하는 숨은 죄악된 습관이나 세계관 등이 말씀이 뿌리내리는 것을 저지하여 성도의 영적 각성을 저지합니다.

셋째, 가시 떨기에 떨어지는 말씀씨앗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의 싹을 내지만 가시 기운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마음밭이 온통 욕심으로 가득차 말씀의 싹이 질식하여 죽어버리는 상태입니다. 
과도한 욕망과 재리의 유혹은 말씀의 결실을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질식시켜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말씀씨앗들입니다. 
좋은 땅은 습도, 햇빛, 무기질과 영양분이 가득찬 토양입니다. 
말씀을 아주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 속에 담긴 모든 축복과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순종하는) 성도입니다. 
예를 들어 온유와 인내에 관한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행함으로써 온유와 인내가 인격과 삶 속에 체험되는 신앙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고 실천하고 순종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네 가지 밭 모두의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앞의 세 밭은 듣고 받은 말씀이 어떤 요소에 의해 막혀 실천되지 못하여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자라야(실천하며 순종해야)합니다. 
당시 풍년이 들면 7-8배 결실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신적인 풍요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은 갈 수록 영적인 풍요를 더욱 깊고 넓게 경험한다는 것을 30배~100배로 표현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 가운데 말씀에 순종을 통해 점진적인 결실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오늘도 열매맺는 날 되소서^^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1. 14. 06:41

http://youtu.be/g637sMpmxFQ

-본문 : 느헤미야 8장 1-12절

-제목 : 깨달아 밝히 아는 기쁨

1. 허기가 축복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저녁부터 아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몸살기도 있고 소화도 안되고 그렇다고 토하지도 못하고 너무 괴로워 하더군요.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다고 그러길래… “임신한거 아니야?” 라는 말을 던졌는데 끝을 흐리며 주섬주섬 주어 담았습니다. 제가 올해 한 농담 중에 가장 위험한 농담이었습니다^^ 다음 날까지 아내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계속 괴로워 했습니다. 뭘 먹으라 해도 입맛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와 애들이 아무리 잘먹더라도 아내는 진수성찬을 차려 놔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저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허기진 상태가 얼마나 축복인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를 느낀다는 것이 건강한 것이구나.’ 였습니다. 

요즘 염산교회 아침 큐티집의 본문이 마태복음인데요. 마태복음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5장에서 7장의 산상수훈에 여덟 가지 복이 나오잖습니까? 그 여덟 가지 복 중에 첫째 복과 네 번째 복이 바로 이 비워진 상태인 허기와 배고픔에 관한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육신은 많이 채워진 것이 복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내면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가 복입니다. 그 허기를 의로움으로 채우려하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죠. 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배고파 하고 갈급해 하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영의 건강 상태를 이 영의 허기짐으로 판단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벌써 내 영이 병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그 안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내 영이 대체되어 채워져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량식품으로 채워 놓고 밥이 안먹힌다고 하는 거나 같은 격이죠. 

2002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아무리 많은 승리를 취했더라도 여전히 나는 승리를 향한 갈망이 있다는 뜻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은 어떠십니까? 허기가 느껴집니까? 목마름이 있습니까? 여전히 배가 고프십니까?

2.포로귀환자들의 허기

본문도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진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로시기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 봅니다.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시드기야와 백성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포로 생활을 시작하죠. 포로 생활을 한 지 70년 이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이었던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합니다. 첫번째 귀환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 스룹바벨과 선지자 학개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세워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이 완공 된 후 60년 후에 바사왕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포로들의 두 번째 귀환이 이뤄집니다. 이 두 번째 포로들이 귀환할 때, 에스라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에스라 7장에 자세히 나오지요. 

에스라 7장 6절에서 에스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순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은 모세의 율법에 도통한 학자요 제자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스라의 귀환이 얼마 있지 않고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자원하여 아닥사스다 왕의 어명을 받고 유다에 온 사람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완성된 성전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방해꾼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는데 성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을 완성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더 간단히 정리해 보면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습니다. 예배고 뭐고 당장 오늘 끼니를 떼울 것이 걱정이었고 밤이슬을 피해 가족들이 잠자야할 집을 짓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학개 같은 선지자들은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우선이여야’ 라고 깨우치며 성전 건축을 독려했습니다. 이제 성전건축이 되고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주위에 오랑케들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소위 안전과 안보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지요. 이제 안전하게 좀 살아보자 하고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만도 하고, 예배도 드릴 수 있고, 안전도 보장이 됐는데 뭔가 허전한 겁니다. 이것이 완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7월 초 하루에 초막절을 맞이하여 일제히 수문 앞에 있는 광장에 모여든 겁니다. 우리로 치면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것이지요. 이 백성들이 일제히 모여 에스라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기서 주목 해야 할 것이 에스라가 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들려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뭘 말하고 있냐면요. 이들의 삶에 허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먹고 살만도 하고 종교인으로서 주일이면 꼬박 꼬박 예배도 드리지만 여전히 뭔가 허전하고 갈증이 느껴졌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제사장이요 학사였던 에스라를 찾은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특별하게 만들어 준 높은 강단에 올라가 율법을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양 옆으로 레위인들이 늘어 섭니다. 11명이 좌우로 섰다고 나오지요.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꽤 긴 시간 내내 율법을 낭독합니다. 율법 낭독이 끝나자 에스라 좌우로 서 있던 레위 인들이 이제 그 말씀을 해석해주고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목적은 백성들로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염산교회 소금길 학당의 의미

저는 이 말씀에서 우리 교회의 소금길 학당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보릿고개를 잊은 지 오랩니다.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합니다. 국가적으로 안보가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울타리가 되어주는 안정된 국가가 있습니다. 또한 맘 놓고 자유롭게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종교생활이 이만큼 보장된 나라도 찾기 힘듭니다. 특히 교회 예배당을 찾기란 편의점 찾는 것보다 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서로가 드러내 표현은 안했지만 여전히 내 내면은 뭔가 허전하며 나의 신앙생활은 뭔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주일 예배 한 번만으로 그러니까 수동적인 예배생활의 참석으로는 나의 신앙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말씀을 찾아 나서야 하고 우리 스스로 말씀의 두루마리를 들고 그것을 해석해 주고 깨닫게 해줄 랍비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그 사명을 에스라와 레위인들에게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를 좀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들이 에스라에게 상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이 4절에 나오는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든 나무 강단이란 뜻입니다. 백성들이 서서도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위치하게 한 나무 강단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바로 우리 염산교회 안에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진 나무강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 강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될 뿐만 아니라 해석되어지고 여러분들은 말씀이 말하는 바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강단은 깨달음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말씀공급의 젖줄이었던 것입니다. 

4. 깨달음의 복

깨달음만한 복이 있나 생각이 듭니다. 8-9절을 보면 이 레위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합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두 가지일 겁니다. 첫째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감격일 것이고, 둘째는 그 말씀이 백성들의 폐부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방망이가 자신들의 내면을 두들기자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와 직면하게 되고 그 죄 때문에 어찌할꼬 어찌할꼬 울게 된 것입니다. 
우는 백성들에게 다시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인들이 말씀을 통해 권면합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깨달음을 통해 참 자유를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인생의 참 행복을 맛보았고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무거운 죄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깨달음을 통해 그 죄를 해결하는 복음을 듣고 자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통해 밝히 아는 것이 큰 복입니다. 옆에 분에게 고백합시다. “깨달음이 복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다름 아닌 깨달음과 깨우침을 주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배 이외의 보충수업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더 깊은 말씀의 바다에 빠져 들어 보십시오. 스스로는 깨우칠 수 없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시는 은혜를 누려 보십시오. 사람은 깨달음이 없이 변화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사 50:4)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마 13:23)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때입니다.

깨달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저는 작년 한 해 이런 기도를 늘 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날 마다 한 가지 이상씩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저에게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깨달음을 입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이곳 저곳에 ‘아하’ 하는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깨달을 때 내는 감탄사가 바로 ‘아하’아니겠습니까? 아하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어요? 소금길 학당을 통해 여기서도 ‘아하’ 저기서도 ‘아하’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슈바이쳐 선교사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한 명을 자신의 고국 독일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독일에 갔을 때는 한 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에 나갔던 흑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집안으로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입에서 입김이 나온 건데 연기로 알고 불이 난 걸로 잘 못 알았다는 거죠. 겨울이 없으니 입에서 연기나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 원주민은 그제서야 추우면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고등부 학생을 둔 여집사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딸이 잠이 너무나 많아서 교회 예배에 항상 지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 하얀밤 때 연극팀의 팀장을 맡아서 아이들을 이끌면서 지각하는 습관이 고쳐졌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팀장으로 아이들을 이끌다보니 미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늦게 나오는 친구들 때문에 많이 속썩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이끄시는 분들이 얼마나 수고한지도 깨닫고 늦으면 안되겠구나 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달음이 임한 후 이 아이는 교회에 지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쭉 말입니다.

저는 작년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소금길 학당이 열리던 해의 첫 번째 학기에 저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리와 역사”를 공부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이 분은 모태 신앙이셨고 어머니도 염산교회에서 내로라하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이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소금길 학당의 강의를 듣고 갖게 된 소감을 문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집사님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공개합니다. 
“지난 해, 이스라엘 역사와 지리 수업으로 촉발된 말씀에 대한 기갈을 맛보았고, 성경 통독 시간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는 경이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기쁨으로 수금을 켤 수 있게 되었고,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토굴에서 나와 빛이신 주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 개를 가르쳐 주면 여덟 개를 까먹는 갱년기 아줌마이지만 ‘달콤한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딱딱한 텍스트가 아닌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로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집사님의 문자 내용은 한 마디로 소금길 학당에서 시작된 깨달음이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는 겁니다. 그 깨달음에서 촉발된 말씀에 대한 임팩트가 50년 넘게 나태하게 길들어져 왔던 자신의 신앙을 깨웠다는 것이지요. 그런 후 이제 매번 열리는 성경강좌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진정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인 줄 믿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말씀을 깨달아 밝히 알아 참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방금 특송을 하셨던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이번 해에도 최선을 다해서 양질의 강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김종익 에스라 목사님 좌우에 선 11명의 레위인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분들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 만으로, 그리고 예배 잘 드리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제작된 말씀의 강단에 동참하여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성장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서서 말씀을 찾아 나서십시오. 소금길 학당은 여러분들의 삶을 변화시킬 충분한 말씀의 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기독교신앙과 그리스 철학, 구약 성경통독, 기독교 에니어그램, 성서지리, 엄마방 스윗 리딩이 일제히 개강을 합니다. 신청서를 작성 못하신 분도 오실 수 있고, 동네 아줌마 친구들 모시고 와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을 권면합니다. 올 한 해 말씀을 향한 갈급함 하나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일어나면 말씀으로 달려가시고, 모든 일을 할 때 말씀이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할 때도 말씀으로 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샤워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립니다. 그럴 때 “샤워중이예요”라는 말 대신에 창세기 3장 11절을 말하는 것이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말씀의 영향력이 침투하고 말씀으로 한 해가 풍성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올 한해 우리 염산교회가 말씀으로 충만해 지는 해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지 배웠습니다. 올 한해 깨달음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옵소서. 염산교회에 깨달음의 장으로 소금길 학당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참 개달음과 참 자유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