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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6 <2014년 3월 7일 금요기도회 콘티>
- 2014.03.05 <누가복음 18장 묵상 - 먼지의 기도>
- 2014.03.05 사랑의 훈풍
- 2014.03.04 <누가복음 17장 묵상 - 무익한 종>
- 2014.03.02 <서로의 짐들을 지십시오 (Bear one anther's burdens)>
- 2014.02.27 2014년 2월 28일 금요기도회 찬양 콘티
- 2014.02.20 <2014년 2월 21일 금요기도회 콘티>
- 2014.02.20 불편해도 괜찮다구???
- 2014.02.14 <마가복음 15장 묵상 -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삶은 시작입니다.>
- 2014.02.14 <마가복음 14장 묵상 -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더니...>
<누가복음 18장 묵상 - 먼지의 기도>
오늘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 가지 등장하는군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1-8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누가복음 특수자료인데 들어줄 때까지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대한 비교 대조 이야기(9-14절)은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 가짐에 대한 교훈을 일러줍니다.
그리고 18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여리고의 눈먼 거지의 치유사건(35-43절)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어 자신의 병을 치유받은 이야기입니다.
과부, 세리, 눈먼 거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와 또한 그에게 부르짖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먼저 내가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과부는 자신이 간청하는 상대가 비록 불의한 재판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간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불의한 재판장이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줄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파워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이죠.
바리새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벌리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기도를 드리는 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압도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란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부르짖습니다.
기도와 간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부르짖고 간구하는 상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 분은 나를 건질 능력이 있으시고, 고칠 힘이 있으시고, 나의 문제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풍성히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확신과 신뢰가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부르짖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다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과부는 원망과 원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합니다.
세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죄악의 참상을 바라보며 한 없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말할 필요가 없죠. 너무나 막막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나에게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아뢰었습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교회 전통에 의해 재의 수요일에는 가지를 태우고 남은 재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바르며 회개와 갱생을 촉구했습니다.
사순절(40일 동안 부활을 기다리는 절기)이라는 절기 자체가 부활을 기다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면의 성찰을 하는 시기이지요.
그 사순절의 시작이 바로 재의 수요일, 바로 오늘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우리 모두 드려야할 기도는 과부의 기도이며, 세리의 기도이며, 눈먼 거지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창세기 3장 19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줌 재로 돌아가는 먼지에 불과한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내 실존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흙으로부터 우리의 형상을 빚으셨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이며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실만큼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자신이 닥친 환란 앞에서 잿더미에 앉아 죄의 보속을 기다렸던 욥을 기억합니다(욥기 2장 8절).
아무쪼록 2014년 사순절에 내 영혼이 참 기도와 간구를 배워 영혼의 갱생을 누리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먼지에 불과한 내 영혼이 주님의 참 자비와 긍휼을 얻어 새롭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겨울왕국의 여왕 안나는 추위(the cold)에 대한 타고난 내성으로 그 추위를 극복하는 것 같더군요.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나는 추위에 어떤 모양으로든 괴로워해 본적이 없어)"라고 노래하기까지 하죠.
저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네요.
"The cold never bother me any more (추위는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못할거야)"
추위에 대한 내성에 의한 극복이 아닌 산들산들 봄바람으로 극복해 갈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의 훈풍(熏風)은 모든 얼어붙은 마음과 세계를 녹인다는 것이 영화의 주제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연인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사랑은 훈풍입니다.
사랑은 봄바람입니다.
사랑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만져줍니다.
나는 이제 노래하고 싶습니다.
"The Love makes me soft anyway (사랑은 나를 어떻게든 부드럽게 녹여줄거야^^)"
<서로의 짐들을 지십시오 (Bear one anther's burdens)>
오늘 담임목사님 설교 도중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왔다.
목사님은 이 구절을 설명하시면서
사모님과 나누셨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치매에 걸리면 사모님을 알아볼 때까지는 돌보다가
알아보지 못하면 목을 꼭 눌러서 짐을 덜어버리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시고 다시 맘을 고쳐먹으시고
서로에게 그렇게 고백했단다.
똥칠하더라도 끝까지 서로의 짐을 져주자고...
늘 실수투성이이고, 계획 없는 난봉꾼으로 아내의 삶에 끼어든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아내에게 큰 짐인 것이 분명하고 아내는 어느정도 감내하며
나를 지기도 하고 끌기도하고 업기도 하면서 짐을 지고 가고 있다.
반면 나는 아내의 짐을 져주고 있나? 돌아볼 일이다.
이런 저런 반성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어르신이 눈물을 훔치는 것 같았다.
그 분이 누구신지 알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그 어르신은 중도실명으로 맹인이 되신 아내분을 돌보는 어르신이었다.
매일 새벽기도에 아내를 모시고 와서 기도를 하는 분이셨다.
아내의 눈과 길이 되어 주시는 어르신이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울림이 있으셨나 보다.
그 어르신이 아내분의 짐을 지시며 걸어오셨던 사랑의 길을 상상하며...
먹먹해졌고, 나 또한 주님과 아내에게 뒤늦게 죄스러운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결혼이란 것, 부부가 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짐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이의 눈이 되어 주는 것이고, 다른 이의 길이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정수, 십자가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잖는가?
상대의 짐을 지는 것, 그것보다 큰 사랑이 있을까?
이러한 희생과 섬김의 사랑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의해 세찬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닌가?
오늘 그 어르신 옆에서 예배 드린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나?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이 외마디 말이, 마디마디가 돌맹이가 되어 내 굳어지고 얼어버린 가슴을 쳐 깨뜨리고 있다.
내 얼어 붙은 가슴에도 이제 봄이 찾아오려나보다.
이 봄에는 사랑을 하려나보다.
실리콘으로 만든 안경 코 받침이 하나 떨어져 나갔다.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간 것 마냥 그렇게 내 안경은 외다리로 2주일을 버텼다.
무심한 주인 잘 못 만나 외다리로 버틴 녀석이 대견하면서도
처음 느꼈던 불편함이 익숙함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씁씁함이 교차했다.
불편함 그것도 익숙해지니 문제가 되지 않더라.
그럼에도 문득 문득 느껴지는 한쪽 코에 가해지는 중압감이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숨길 수 없는 장애 안경 소유자였다.
불편함과 장애 그리고 결핍 더 나아가 죄를 지은 후 가해지는 중압감 그것은 초기 진화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불편함 그것은 몸부림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굳어지는 것이며 몸부림은 사라지고 만다.
불편함과 죄로부터 오는 불안감 그것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내 안의 몸부림임을 깨닫는다.
한 집사님과 함께 병원을 가게 됐다.
그 분은 무릎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함이었고 나는 손목의 치료를 위함이었다.
충격파 치료라는 익숙치 않은 치료가 가해졌다.
음파를 압축하여 피부나 인대 및 근육 조직에 손상을 주어 치료물질을 분비하게 하여 치료하는 방법이란다.
문제는 견딜 수 없이 아프다는 것이다.
근데 더 큰 문제는 그 집사님은 그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픔이 있어야 불편함을 느끼고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픈 것도, 고통을 느끼는 것도 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부족함, 외다리임을 인정하고 불편을 느끼는 순간
나는 치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오늘 코 받침대를 구해 내 안경에 걸어 본다.
온전함 가운데 오는 그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껴보려한다.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자신의 시련을 얼마든지 포용할 담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요셉 목사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줄을 다 붙잡았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