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콘티2014. 3. 6. 22:18

<2014년 3월 7일 금요기도회 콘티>

주제 : 큰 일을 이루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

1. 슬픈 마음 있는 사람 (E)

2.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G)

3. 찬송을 부르세요 (G)

4.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G)

5.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G)

6.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요 (G)

7. 주님 곁으로 날 이끄소서 (A)

8. 비전 (A)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5. 07:43

<누가복음 18장 묵상 - 먼지의 기도>

오늘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 가지 등장하는군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1-8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누가복음 특수자료인데 들어줄 때까지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대한 비교 대조 이야기(9-14절)은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 가짐에 대한 교훈을 일러줍니다.
그리고 18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여리고의 눈먼 거지의 치유사건(35-43절)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어 자신의 병을 치유받은 이야기입니다.

과부, 세리, 눈먼 거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와 또한 그에게 부르짖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먼저 내가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과부는 자신이 간청하는 상대가 비록 불의한 재판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간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불의한 재판장이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줄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파워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이죠.
바리새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벌리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기도를 드리는 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압도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란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부르짖습니다. 
기도와 간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부르짖고 간구하는 상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 분은 나를 건질 능력이 있으시고, 고칠 힘이 있으시고, 나의 문제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풍성히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확신과 신뢰가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부르짖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다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과부는 원망과 원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합니다. 
세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죄악의 참상을 바라보며 한 없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말할 필요가 없죠. 너무나 막막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나에게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아뢰었습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교회 전통에 의해 재의 수요일에는 가지를 태우고 남은 재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바르며 회개와 갱생을 촉구했습니다.
사순절(40일 동안 부활을 기다리는 절기)이라는 절기 자체가 부활을 기다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면의 성찰을 하는 시기이지요.
그 사순절의 시작이 바로 재의 수요일, 바로 오늘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우리 모두 드려야할 기도는 과부의 기도이며, 세리의 기도이며, 눈먼 거지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창세기 3장 19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줌 재로 돌아가는 먼지에 불과한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내 실존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흙으로부터 우리의 형상을 빚으셨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이며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실만큼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자신이 닥친 환란 앞에서 잿더미에 앉아 죄의 보속을 기다렸던 욥을 기억합니다(욥기 2장 8절).
아무쪼록 2014년 사순절에 내 영혼이 참 기도와 간구를 배워 영혼의 갱생을 누리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먼지에 불과한 내 영혼이 주님의 참 자비와 긍휼을 얻어 새롭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3. 5. 07:39

겨울왕국의 여왕 안나는 추위(the cold)에 대한 타고난 내성으로 그 추위를 극복하는 것 같더군요.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나는 추위에 어떤 모양으로든 괴로워해 본적이 없어)"라고 노래하기까지 하죠.


저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네요.

"The cold never bother me any more (추위는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못할거야)"

추위에 대한 내성에 의한 극복이 아닌 산들산들 봄바람으로 극복해 갈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의 훈풍(熏風)은 모든 얼어붙은 마음과 세계를 녹인다는 것이 영화의 주제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연인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사랑은 훈풍입니다.

사랑은 봄바람입니다.

사랑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만져줍니다.


나는 이제 노래하고 싶습니다.

"The Love makes me soft anyway (사랑은 나를 어떻게든 부드럽게 녹여줄거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4. 06:35
<누가복음 17장묵상 - 무익한 종>

요즘 북한 지하교회 실정을 그린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원래 제목은 ‘사도(Apostle)’라고 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북한 지하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사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는 지은이의 의도가 담겨있는 제목인 거 같습니다. 

1. 믿음의 양보다 질.
5-10절까지의 말씀은 전도여행으로 파송되었다가 돌아온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전도로 보냄을 받았던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는되 되지 않자 약간은 실망섞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돌아와 푸념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으니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질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 믿음은 겨자씨만한 양이 있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적당한 물과 햇빛과 온도가 있으면 싹이 움트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기도의 양이나 믿음의 양이 적다기 보다 기도의 질과 믿음의 질의 문제 콸러티의 문제는 아닐까요?

2.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전도여행 후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를 간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처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들의 믿음의 싹이 자라게 막아 버린 것은 마음 곳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나는 유익한 존재야'라고 생각하는 인정욕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인정욕구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본질과 임무를 도둑질 해 가 버립니다.
보냄을 받은 자이지 인정받는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종은 그냥 주인을 위해 충성 봉사하는 겁니다. 주인님 상차려 왔으니 칭찬해주시죠~ 주인님 마당 쓸고 왔으니 잘했다 해주십시오~ 이러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가정과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고, 또한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던 것이죠.
그들은 충분히 격려받고 인정받고 높임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익한 종이라는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내 안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인정욕구는 무익한 종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집어 삼켜버리려 듭니다.
또한 참 믿음의 씨앗이 자라는 것도 막아 버리구요.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십시오. 모든 존귀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고백만이 믿음의 참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3. 2. 10:19

<서로의 짐들을 지십시오 (Bear one anther's burdens)>

오늘 담임목사님 설교 도중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왔다.

목사님은 이 구절을 설명하시면서
사모님과 나누셨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치매에 걸리면 사모님을 알아볼 때까지는 돌보다가
알아보지 못하면 목을 꼭 눌러서 짐을 덜어버리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시고 다시 맘을 고쳐먹으시고
서로에게 그렇게 고백했단다.
똥칠하더라도 끝까지 서로의 짐을 져주자고...

늘 실수투성이이고, 계획 없는 난봉꾼으로 아내의 삶에 끼어든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아내에게 큰 짐인 것이 분명하고 아내는 어느정도 감내하며
나를 지기도 하고 끌기도하고 업기도 하면서 짐을 지고 가고 있다.
반면 나는 아내의 짐을 져주고 있나? 돌아볼 일이다. 

이런 저런 반성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어르신이 눈물을 훔치는 것 같았다.
그 분이 누구신지 알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그 어르신은 중도실명으로 맹인이 되신 아내분을 돌보는 어르신이었다.
매일 새벽기도에 아내를 모시고 와서 기도를 하는 분이셨다.
아내의 눈과 길이 되어 주시는 어르신이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울림이 있으셨나 보다.
그 어르신이 아내분의 짐을 지시며 걸어오셨던 사랑의 길을 상상하며...
먹먹해졌고, 나 또한 주님과 아내에게 뒤늦게 죄스러운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결혼이란 것, 부부가 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짐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이의 눈이 되어 주는 것이고, 다른 이의 길이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정수, 십자가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잖는가?
상대의 짐을 지는 것, 그것보다 큰 사랑이 있을까?
이러한 희생과 섬김의 사랑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의해 세찬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닌가?

오늘 그 어르신 옆에서 예배 드린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나?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이 외마디 말이, 마디마디가 돌맹이가 되어 내 굳어지고 얼어버린 가슴을 쳐 깨뜨리고 있다. 
내 얼어 붙은 가슴에도 이제 봄이 찾아오려나보다. 
이 봄에는 사랑을 하려나보다.

Posted by speramus
찬양콘티2014. 2. 27. 17:45

<2014년 2월 28일 금요기도회 찬양 콘티>


1.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C)

2. 주 품에 품으소서(C)

 -->통성기도


3. 생수의 강이 내게서 흐르네(G)

4. 마지막 날에(G)


5. 생명 주께 있네(G)


6.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F)

--> 성도간의 교제


7. 우~ 주를 찬양 하나이다 (F)

8.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F)

Posted by speramus
찬양콘티2014. 2. 20. 20:39

<2014년 2월 21일 금요기도회 콘티>

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G)
2.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G)

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G)
4.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G)
5.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G)

6. 날 사랑하심 (예수사랑하심을 후렴만 -D)
7. 내게 있는 향유옥합 (D)

8.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C)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2. 20. 08:02

실리콘으로 만든 안경 코 받침이 하나 떨어져 나갔다.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간 것 마냥 그렇게 내 안경은 외다리로 2주일을 버텼다.
무심한 주인 잘 못 만나 외다리로 버틴 녀석이 대견하면서도
처음 느꼈던 불편함이 익숙함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씁씁함이 교차했다.
불편함 그것도 익숙해지니 문제가 되지 않더라.
그럼에도 문득 문득 느껴지는 한쪽 코에 가해지는 중압감이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숨길 수 없는 장애 안경 소유자였다.
불편함과 장애 그리고 결핍 더 나아가 죄를 지은 후 가해지는 중압감 그것은 초기 진화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불편함 그것은 몸부림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굳어지는 것이며 몸부림은 사라지고 만다.
불편함과 죄로부터 오는 불안감 그것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내 안의 몸부림임을 깨닫는다.

한 집사님과 함께 병원을 가게 됐다.
그 분은 무릎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함이었고 나는 손목의 치료를 위함이었다.
충격파 치료라는 익숙치 않은 치료가 가해졌다.
음파를 압축하여 피부나 인대 및 근육 조직에 손상을 주어 치료물질을 분비하게 하여 치료하는 방법이란다.
문제는 견딜 수 없이 아프다는 것이다.
근데 더 큰 문제는 그 집사님은 그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픔이 있어야 불편함을 느끼고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픈 것도, 고통을 느끼는 것도 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부족함, 외다리임을 인정하고 불편을 느끼는 순간 
나는 치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오늘 코 받침대를 구해 내 안경에 걸어 본다.
온전함 가운데 오는 그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껴보려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9
 <마가복음 15장 묵상 -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삶은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매장에 관한 본문입니다.
버림 받은 한 유대 청년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 받았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 왜 당신의 아들을 이리도 왜 면하십니까? 이렇게 내 버리십니까?” 하는 간절한 절규입니다.
예수는 모퉁이에다 내다 버린 돌이었고, 짖밟힌 장미었습니다.
버림받은 감정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설령 거부당했을지라도 버림받았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조롱하며 말하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대적자들의 입을 통해 고백되어진 예수님의 희생의 이유 아니겠습니까?
자기는 구원에서 제외시킨 체 다른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과 죽음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구원하기 위해 버려지고 소외된 삶을 택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장 45절)”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임을 압니다.
나를 이 땅에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지요.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 내 목숨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삶이 아니라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는 삶, 버림받더라도 소외되더라도 짖밟히더라도 나의 건짐이 아닌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삶 이것이 저에게 주어진 십자가 일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참으로 쉽지 않은 좁고도 거치른 길입니다.
내키지 않는 길입니다.
언제쯤 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담담히 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믿음의 증인들 선배들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로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용기를 허락합니다.
여기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루마니아의 차오세스크 정권 아래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침례교 목사였던 요셉산이란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갖은 고난에 지쳤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한 책을 읽었고 내용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한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해 질문했습니다.
“주님, 저를 심문하는 자들을 포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제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자신의 시련을 얼마든지 포용할 담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를 향한 고문과 심문은 변함이 없었으나 고문하는 공산당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바겼습니다.
그들의 모든 말을 포용했고 부드럽게 반응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그의 태도는 오히려 공산당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 고문을 하던 당원은 “널 당장 죽이겠다!”고 외쳤습니다.

요셉 목사님은 그를 향해 대답합니다.
“이해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무기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면 언제든지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나에게도 마지막 무기가 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무기를 사용하면 나도 마지막 무기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 당원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네 마지막 무기가 무엇이냐.” 

요셉 목사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형편은 더 좋아질 것이지만, 당신의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가 했던 모든 설교는 나의 피로 얼룩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살았을 때보다 내가 죽었을 때 훨씬 더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몇 주 후 목사는 비밀정보를 통해 그 당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아주 미친 놈이야. 우리가 어디 바보인 줄 아나봐.”
정말 그 당원들은 더 이상 목사를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요셉 산 목사님은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줄을 다 붙잡았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줄을 다 놓고 내 인생을 주 예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 부지를 위해 좀더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여러 줄을 잡아보고자 발버둥치는 저의 삶에 우리는 경종이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라고 담대히 말하는 그 목사님의 고백이 저를 도전합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고백교회를 이끌다 결국 나치 정권에 의해 순교하셨던 본회퍼 목사님이 죽음 직전에 던지신 말 한마디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삶은 시작입니다." - 본회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8
<마가복음 14장 묵상 -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더니...>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겟세마네 언덕에서 예수님은 피 땀흘려 기도하십니다.
성지답사갔을 때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과정을 본 적 있습니다.
올리브를 그야말로 짖이기고 비틀어  눌러 압축하고 쥐어 짜야만 거기에서 정결한 기름이 나오더군요.
예수님은 기름틀에 들어간 올리브처럼, 세상을 밝힐 기름을 그리도 간절하게 준비하고 계셨나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말입니다.

오늘 하필 겟세마네 언덕에서 기도하는 주님과 대조적으로 골아 떨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하필'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새벽기도 후 본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저는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 머리를 갖다 대고 기도를 빙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시간 가량 지나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심령을 깊이 울립니다.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여 ㅠㅠ 저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십니다.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주님을 버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을 걱정해 드리는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을 겁니다. 주님!! 내가 누구인데요 수제자 베드로 아닙니까?"
31절 말씀을 보니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라는 말씀이 굵은 글씨로 다가오네요.
힘있게 말할정도로 자신있었던 베드로...
반면에 주님은 "오늘 이 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에 닭 울기 전에 니가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나를 버릴 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완전부정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삶을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나눴던 모든 우정과 애정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힘있게 호언장담했던 그 약속이 아직도 따끈이 살아 있는 이 밤에 말입니다.

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던 베드로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봅니다.
살아보겠다는 욕구,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있을까요?
진리를 위해 사는 것, 진리를 따르는 것 그것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헌신짝보다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베드로는 기름틀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도망을 선택합니다.
겟세마네(기름틀)에서 골아 떨어질 때부터 예상했던 수순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올리브의 생명이 순결한 기름으로 치환되어 더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봅니다. 

어제 묵상이 "깨어 있으신가요?"라는 제목이었는데...
저는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했네요.
저는 기름짜는 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닭이 두 번 울리는 듯한 환청에 도망치듯 본당을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 이밤에 저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저의 실체이고, 주님 앞에서 발가 벗겨진 제 모습입니다.

주님은 힘있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보다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베드로의 참 모습을 어쩌면 더 바랐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짜내야 하는 것은 어설픈 약속이나 포부가 아닙니다.
진실한 눈물 한 방울을 우리 주님은 원하지 않을까요?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무릎꿇으며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짖이겨 지고 쥐여 짜여지는 고통을 거부하는 생올리브 상태인 내 모습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여전히 기름틀을 거부하는 모습이지만... 진실한 눈물을 짜내며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보려고 다짐해 봅니다. 
하지만 이 다짐도 신뢰할 수 없기에 잠잠히 주님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생 올리브인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 주신 기름틀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순결한 기름되어 주님처럼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 비추는 삶 살기 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