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2. 14. 11:18
<마가복음 13장 묵상 - 깨어있으신가요? >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감람산 위에 앉아 있습니다. 
골짜기 건너 맞은 편 언덕에는 성전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저 맞은 편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허물어지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폐하기 위해 자신이 친히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이 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며칠이 지나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실 것입니다.
그런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없이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에게 어떠한 자세로 종말에 임해야 하는지 설교하시는 것이지요.

중심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미혹되지 말라. 환란을 참고 끝까지 견디라. 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또렷한 정신과 분별력을 가지란 말로 해석할 수 있겠죠.
흐리멍텅하게 살아가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이 무화과 잎삭이 나올 때인지 열매를 맺을 때인지 시기를 분별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금요기도회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10시 30분이 넘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잠들어 있기에 집에 들어가도 썩 유쾌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집에 가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쓸쓸한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느때 집에 들어가면 "아빠"하고 아이가 달려옵니다.
또는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아빠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으로 아빠가 언제 오실까,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아닐까요?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오늘도 아빠가 오시리라 기대하며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아버지가 언제 오시든, 주어진 관계들 누리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깨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는 삶 살고 싶습니다. 

오늘 화요일 전 교회적으로 전도하는 날입니다.
우리 1교구 식구들의 적극적인 동참 기대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 아닐까요?
우리만 잘 믿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나눠야겠습니다.
직장에 나가시는 분이나 여의치 않으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가능 하신 분들은 모두 동참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염리동 주변 이웃들에게 전해 보아요~
10시 30분에 시작하지만, 정 시간이 안되시는 분들은 점심 드시고 12시 30분까지 교회로 오셔도 됩니다.
많은 동참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깨어지내십시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7
<마가복음 12장 묵상 -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도대체 알기나 하는건가?>

어제 개그맨 윤형빈이 격투기 데뷔전을 치렀나봅니다. 격투기에 별 관심이 없지만 아침에 검색을 해보니 윤형빈이 케이오 승을 했다는군요. 마가복음 12장의 사건이 꼭 링 위에서 맞장 뜨는 장면인 것 같아 꺼낸 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대적자들과의 미묘한 신경전을 묘사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란 크게 네 부류입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들,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포도원 농부비유를 통해 선빵(펀치)를 날립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겨 놓고 멀리 갔는데, 이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사람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이야기입니다. 농부로 비유되는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펀치였습니다. 대적자들이 흥분하여 차례대로 몰려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의도는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13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지를 묻고 있습니다.
18절에는 사두개인들의 공격인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기에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논쟁을 합니다. 28절에는 서기관들이 몰려 와서 율법에 관한 질문으로 덤벼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완승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지혜와 위엄 앞에 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들은 모두 하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통달하셔서 그들의 정곡을 찌르고 그들의 실체가 허당이란 것을 드러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대적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대적하기 위해 성경이니 율법이니 운운하면 다가오지만 너희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는 거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두 가지를 몰라도 한참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서 어떤 것에 중점적으로 관심을 갖고 알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 두 가지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맥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행하다 보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성경을 가까이 하다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행하신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실 때,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행하심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무엇을 행하실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닮아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인 서기관 한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29절부터 31절까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정말 최대한 간단히 한 단어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의 근본 바탕을 두고 행해집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경의 사랑의 정신을 알지 못하면 성경이 난해한 책이며, 성경만큼 이해하기 힘든 책도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 렙돈을 헌금으로 전부 드린 과부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산법이 세상의 계산법과는 너무 다르기에 도통 이해하기 힘들죠.
많이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일부를 떼어 많은 돈을 헌금했고, 극심하게 가난한 차상위 계층의 한 여인이 자신이 가진 전부인 동전 두 개를 헌금했는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과부의 헌금이 가장 많이 했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과부가 가진 사랑의 총량(總量,total amount)이 다른 이들이 드린 사랑의 총량보다 많다는 것이지요.
여인은 자신이 드릴 연보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 렙돈 전부를 드렸던 것이지요. 그 녀의 사랑은 자신의 가난을 초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오로지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녀의 사랑이 가장 컸던 것이지요.
그녀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두 렙돈을 드린 여인의 삶 앞에서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나는 성경을 아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도대체 아는 사람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거늘, 제 삶이 꽹과리 딱 그것인듯 합니다.
성경을 더 알아야겠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6
#묵상문자
<마가복음 8장 묵상 - 나에게 주님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수련회를 떠나십니다.
장소는 갈릴리 호수 상부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판 신전이 있었던 곳이었기에 온갖 종류의 신들이 인정됐고 고백된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상부 갈릴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물이 풍부하고 나무도 제법 있고 쉼을 누리기에 적당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역에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갈릴리 윗쪽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르셔서 영적인 재무장을 갖고자 합니다.

수련회는 예수님의 첫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는 여러 신들이 인정되고 고백되어지는 걸로 아는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이에 대해 제자들은 솔직하게 말을 이어 갑니다.
“어떤 이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도 하던데요.”
“그래? 그들이 말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누구에게 뒤질새라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메시야)이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3년 정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통밥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렴풋이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이 수련회를 기점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받을 것을 예고하시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에 총 세 차례이 수난 예고가 등장하는데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앙고백 이후에 바로 예수님의 입을 통해 예고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사역을 정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것이지요.
그 전에 제자들을 모아 최종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환상 속에 있는 듯합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의 최후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로마의 통치를 끊고 당당히 왕위에 등극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뜬금 없이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되어 집니다.
베드로는 그런 상황이 강담이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항의를 합니다. “그렇게 죽으시면 안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죽으시면 주님을 좇았던 우리는 뭐가 됩니까? 안되요. 그렇게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항의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다소 거친 표현으로 응수하십니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주님의 의지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되 영광의 자리를 구하며 따랐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련회의 목적은 신앙점검입니다.
신앙점검의 목적은 고난 가운데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함입니다.
고난 중에 흩어질 것을 아셨지만 결국 자신들이 고백한 그 신앙의 동앗줄을 부여잡고 그 고난의 수렁을 빠져 나올 것을 아셨기에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 중에 부여잡아야 하고 바라보아야 하고 계속해서 따라가야할 유일한 대상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것을 알았기에 주님은 그들의 입술로 직접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신앙고백의 힘으로 환난과 핍박은 극복되어질 것이고, 흩어졌던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앙 위에 교회로 다시 끈끈이 연합하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참 신앙 고백은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의 삶을 견인해 가고도 남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게 내 버려 두지 마십시오.
신앙이, 주님이 우리 삶을 끌어가게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오늘도 고난을 이길 힘은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이시요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통해 솟아남을 믿습니다.
'나에게 주님은 누구이신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 아침에 주님을 누구라 고백할 것인가?
나는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아침 저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도상에 서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님은 누구입니까? qft7     zgaz  A a Xㅌㅊㅇㅊ프흐ㅕㅎㅅ9uhtuvty77ㅛㅗㅜㅜㅍ쇼7ㅅyty7tynvvny7t5vnnt7yty7yghytㅜㅍ5수ㅛ효쇼쇼쇼ㅛ쑈ㅅ5ㅜ풒 ㅜ숲2수 쇼ㅜㅍ표ㅜ6ㅅ ㅜ ㅜㅎ수 ㅜ ㅜ ㅜ풓 ㅜㅎ풓  ㅜ 후ㅜㅍ ㅜ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5

<마가복음 7장 묵상 -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장로의 전통은 쓰레기통에나 버려버려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레이다망에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지저분한(?) 제자들이 아 글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응~ 좋아 딱걸렸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예수~ 당신들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거요?”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신랄한 공격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사야 29장 13절)으로 응수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딱 그말씀을 내가 읽을테니 잘 들어봐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6-7절)”
여기서 중요한 핵심적인 단어는 ‘입술’과 ‘마음’이겠죠.
마음은 근원이요 본질이라면 입술은 열매요 현상인 것이지요.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그럴싸하게 경건한 척 한다는 것이지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꼬집은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그러니까 율법 그 어디에도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없는데
장로의 전통에서는 그런 행동을 부정한 행동으로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이 앞서버렸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세대인 학사 에스라 이후에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적용 항목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근거를 둔 적용지침이 장로의 전통인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장로의 전통은 율법의 정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장로의 전통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꼬집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르반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제도입니다. 잘 들어 보시죠^^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말로 ‘제물(a scrifice, 祭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이라는 것이죠.
이 고르반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사와 성결한 삶’ 두 가지라고 레위기는 말합니다.
레위기의 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제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에 대해 기록합니다. 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것인지 거룩한 생활에 대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가까이 나아가다’ 라는 단어인데요.
이 '가까이 나아가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카라브(karab)’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희생제물이 바로 카라브의 명사형인 ‘코르반’인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가까이 그리고 깊숙이 침투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향해 침투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바로 ‘코르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이 변질되어버립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이 고르반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고르반’이라고 선포하면, 그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께 그리고 성전에 귀속이 되어버립니다.
그 물건의 소유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 의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변질되어 경건의 허울 아래, ‘나 자신은 하나님께 드려진 고르반입니다.’라고 선포하면서 부모님께 대한 부양의 의무를 회피하였습니다.
자식으로서 더 이상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말인 것이지요.

주님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르반’하면서 노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바껴도 한참 바꼈다는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일진데, 장로의 전통 따져 가며 손 안씻고 먹는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져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손도 안씻고 먹었을까요?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니 손 안씻어도 내 새끼처럼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만들어논 제도와 관습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하심을 방해하는 것들은 아닌지 되내여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자고 만들어 놓은 ‘예배’가 오히려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자고 드리는 기도가 나의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 나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견고한 진지로 바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라고 말하는 십일조와 헌금이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바껴버린 것은 아닌지?
더 사랑하고 더 보둠어 주고 서로 쉼이 되라고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껍데기만 남고 그 선한 기능은 다 잃어버린 탐욕과 이기심만 덕지 덕지 묻어 냄새나는 우릿간으로 변질돼 버린 것은 아닌지?
형식과 제도 속에 녹아진 율법의 정신들을 되새김질 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전통파괴는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장로의 전통을 파괴를 위한 퍼포먼스를 보십시오.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것은 장로의 정결법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정을 논하지 않고 그의 손을 귀와 혓바닥에 기꺼이 주님의 손을 갖다 대신 것입니다.
그 어떤 교회의 제도나 전통도 사랑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모든 제도와 형식은 하나님을 담아 내야 하며,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담지 못하는 제도와 형식과 전통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담아내는 허울에 불과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4
<마가복음 5장 묵상 - 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곳에…>

두 사건이 한 장소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저자는 분명히 두 사건을 한 사건처럼 묶어서 배치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 물음을 가지고 묵상 속으로 뛰어들어 보았습니다.
두 사건이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것과 12년 혈루증 앓던 여인의 치유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지방에 일르렀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멀리 마을에서부터 바닷가까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야이로라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이란 회당의 지도자라는 말이겠지요.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영적인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직책과 상관 없이 예수님께 달려와 넙죽 절을하고 간곡히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탁이 하도 간곡하였기에 주님은 바닷가에서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예수님 주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사람들 틈으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 끝자락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자신의 혈루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옷자락을 만졌는지 따져 물으셨고,
여인은 많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고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공개적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언했다. 안심하고 가거라”라고 말합니다.
따져 물으실 땐 언제고 너무나 다정히 ‘딸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며 달래 보냅니다.
한편 야이로의 집에서 달려온 한 사람이 야이로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라고 비보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게의치 않고 야이로의 집에 가셨고
그 유명한 “달리다굼(소녀야 내게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을 외치며 소녀를 살려 내십니다.

이 두 이야기가 한 맥락에서 진행됩니다.
공통점을 찾아볼까요?
1. 12라는 숫자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12살이고 여인이 혈루증을 앓아온 세월이 12년입니다.
한 도시에서 이 두 사람은 공존하며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12년의 세월을 버텨온 것입니다.
2. 딸이라는 호칭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 애원합니다.(23절)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딸아’라고 말하시며 안심시키십니다.(34절)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이 ‘딸’이 죽었다고 전합니다.(35절- 34절 말씀에 바로 이어 쓰임)
딸이란 말이 본문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생각합니다.
3. 믿음으로 치료받았다는 겁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세 가지 공통점을 종합해 보면 두 사건이 한 맥락인 것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해결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능력이 방출(?)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유독 두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메달리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예수님만이 내 병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높은 난간에서 아버지 품만 믿고 뛰어 내려버린 것과 같은 당돌함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 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는 곳으로 흐릅니다.
마치 자기장에 철가루들이 빨려 들어오듯이 예수님의 능력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주님을 찾는 이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은 주님의 능력을 부르는 자력을 가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자세히 말하면 부성애에 자극되어 주님의 능력이 방출된 것이지요.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에게 딸이라 부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그 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 여인을 치료합니다.
또한 열 두 살 먹은 자신의 딸을 향한 애닲은 사랑으로 부르짖는 아버지의 마음에 자극되어 주님은 크신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사랑은 믿음과 합하여 또 다른 자기장을 뿜어 주님의 능력을 끌어 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은 간절히 사모하는 쪽으로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부르짖는 쪽으로 향하십니다.
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녀의 마음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이의 기도를 아버지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메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원합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3
<마가복음 4장 묵상 - 작더라도 숨겨졌더라도 느리더라도...>

마가복음 4장도 마태복음 13장에 견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로 가득 찬 장입니다.
주목해 볼 것은 비유들 중, 세 비유가 씨앗에 관련된 비유라는 겁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밭의 종류에 관한 비유(1-20절)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
겨자씨의 비유(30-32절)
어려서부터 농사 경험이 많기에 이런 씨앗 비유들은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오늘은 씨앗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비밀들을 묵상해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는 매우 작게 시작됩니다.
누룩비유도 그렇고 씨앗비유도 그렇지만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 영향력과 파급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강철 같은 정당 조직이나 우렁차고 당당한 군대 행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작은 겨자씨와 극도로 적은 양의 누룩으로부터 진행됩니다.
겨자씨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축소시킨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누룩처럼 자신을 극도로 응축시킨 자 속에 하나님 나라의 변혁력이 꿈틀대며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그리고 우리는 아주 적은 자, 작은 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축소시키고 응축시킬 때
나와 우리는 그 적음과 작음을 뛰어 넘어 놀라운 파급 효과를 내며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변혁의 구원은 개인 구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 구원 없이 사회 구원이나 사회 변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변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씨앗으로 성장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맛본 사건은, 세속적인 역사 속에서 눈에 띌 만큼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가 땅에 떨어진 사건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감춰져 있을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성장하고 부풀어 올라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비가시적(非可示的)으로 성장합니다.
과연 커 가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씨앗의 자람이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인격적으로 천천히 강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단 또한 아주 인격적으로 심사숙고한 후에 선택하도록 초청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영속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급진적인 혁명이나 정치적 권력 또는 무력으로 변화되어가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변화로 감화시키며 천천히 세계를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30년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갈릴리 황무지에 뿌려진 한알의 겨자씨였습니다.
감춰진 누룩이었지요.
그러나 발아하고 자라, 때가 이르자 그는 드러났고 폭박적인 사랑과 에너지로 온 이스라엘을 변혁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감춰지고 은닉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씨앗은 자라고 있고 때가 이르면 그 성장은 놀랍게 이뤄지며, 거기서 뿜어지며 방출되는 선한 에너지와 열매들로 말미암아 세상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2월 이맘 때 즈음부터 아버지는 여러 종류의 씨앗들을 준비하시며 한 해 농사를 시작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습니다.
비록 나는 작고 우리는 적은 수지만, 또한 우리는 감춰지고 드러나 보이지 않은 초라한 씨앗일지 모르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영향력과 운동력은 우리로부터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작더라도 숨겨졌더라도 느리더라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려진 씨앗을 움티우며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2
<마가복음 2장 묵상 - 문제의 복판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마가복음 2장은 크게 네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침상에 메여온 중풍병자 지료 -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 - 금식 논쟁 -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며 생긴 논쟁
이렇게 네 가지 이야기를 묵상하며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겠구나.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예수님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늘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몰려 오는 무리는 사회 하층민들이었고 병든 사람이었으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절)”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조차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레위라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는데 그는 마태입니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고 파렴치한으로 통하는 부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도 문제투성이인 곳이었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랬고, 어울리는 사람도 그렇고 온통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이 왜 자신이 그렇게 문제들만 찾아 다니시는지 이유를 말씀하시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
예수님은 병든 세상을 고치는 의사로 오신 것이며
죄인들의 죄를 치유하는 구원자로 오셨음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가끔 의사만큼 힘든 직업이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늘 온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 오지 않습니까?
환부를 보아야 하며, 병들어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고민해야하니
쉽지 않겠다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교도소의 교정 공무원을 생각해 봅니다.
제 절친기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늘 합니다.
그 또한 매일 만나고 대해야 하는 사람은 죄수입니다.
문제가 많은 자들이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니 쉽지 않겠다 생각합니다.
참으로 치열하게 사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문제투성이인 인간이며, 아픔투성이인 인간이라는 것이 때론 나와 다른이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주님이 오늘 내 삶 복판으로 오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로 깊이 다가오십니다.
오늘 의원되시고 치유자 되신 주님께 문제투성이인 내 삶을 맡겨 봅니다.
주님 우리네 아프고 엉클어진 인생 복판으로 오시옵소서.
오셔서 치유하시고 고치시며 질서를 허락하소서!!
다시 살 길을 허락하시옵소서. 

주님의 이런 치유와 사랑을 경험한 나는 이제 이웃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내 주위에 문제가 산적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 
그것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그들의 삶에 나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함을 알기에 사명으로 알고 다가가겠습니다.

명절의 첫 휴일입니다.
기계는 쉬지 않는 것이 능력이고, 사람은 쉴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 우리를 지킨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잠시 숨가쁘게 달리는 삶을 멈추고 쉼을 누리십시오. 
명절 동안 고된 가사 노동과 형제 자매들간의 꼬인 문제들과 마주 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주님의 귀한 위로와 안식을 누리는 복된 설날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09

<마가복음 16장 묵상 - 새로고침(reset)>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제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의 이야기가 마가복음 마지막장 16장의 이야기인듯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죠.
첫째, 부활 소식의 전달자였던 여인들
둘째,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 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다 부활의 소식이 믿겨지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마저 너무 놀라서 제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두려워 떨고만 있습니다.(8절)
당시 그 시간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놀라운 일이긴 했겟지요.
그 여인들의 그 두려움과 놀라움의 생생한 감정을 제가 느낄 수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덤덤하고 무뎌진 것이겠지요?
마치 제자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아~ 이 아침에 주님의 부활 소식이 이다지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가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여인들을 통해 알리게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자들에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 봅니다.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과 여유를 주기 원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 살아나실 거란 것을 죽기 전에 누누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준비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여 흩어졌었고 예수 따르기를 포기한 절망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돌아가시기전 말씀하셨던 것처럼 갈릴리에 미리 가 있을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여인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갈릴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 청한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손내미심은 아닐까요?
컴퓨터 자판에 ‘새로고침(reset)' 키처럼, 배신과 부인 그리고 흩어짐의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의 소명과 비전을 리셋(reset)하자는 것일 겁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의 여정은 사흘 길 정도 될까요?
그 길을 걸으며 제자들은 예수님과 추억의 장소들을 지나야만 했을 겁니다.
밀밭을 거닐면서, 안식일에 밀을 따먹었던 그들을 변호해 주시던 자상한 주님을 떠올렸을 것이며
갈릴리 호수길을 걸으며, 그물을 던지고 있던 그네들을 부르시던 자상한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눈물지어야 했을 겁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 추억이기도 했겠지만 후회와 한숨의 길이기도 했겠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그냥 확 죽어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경험하며 가는 길이 '갈릴리로 가는 길'이었겟지요.
그 밑바닥 그 상태에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후회와 한숨과 절망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다시 토닥이며 새로운 비전과 소명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이 아침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부르심을 듣습니다.
“다시 시작하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내 삶을 리셋하려고 합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던 그 첫만남의 장소와 흥분 가운데로 더듬어 가보려 합니다.
첫 부르심과 첫사랑의 그곳 그곳으로 나를 부르시며 초대하시는 주님의 손내미심에 응답해 보려 합니다.
주님 무뎌지고 무덤덤해진 이 부족한 제자의 마음을 아시고 손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에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다시 일어섬으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speramus
찬양콘티2014. 2. 14. 06:40

<2014년 2월 14일 금요기도회 찬양 콘티>


주제 : 연약함을 떨치고 함께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높이세!


1. 약할 때 강함되시네(F—>G)

2.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 후렴만(G)


3. 평화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의 삶에 (E)


4. 일어나라 주의 백성(G)

5. 주 예수의 이름 높이세(G)


6. 예수 이름 높이세 (수 많은 무리들 줄지어- G)

7. 주 임재 안에서(G—>A)


————————


오랜만에 콘티 올립니다.

5 주 정도 찬양인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시 콘티를 짜려하니 쉽지 않군요^^

그래도 주님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만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은혜가 있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샬롬!!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2. 1. 20:58

지난 주 금요기도회 설교문입니다.
아래 설교영상 링크도 걸어놨는데 10분부터 설교가 시작됩니다.
(앞부분은 성경봉독과 전도보고영상이 있어서요)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제목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휴식같은 친구)


1.

저 어린 시절 “휴식 같은 친구”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김민우가 불렀나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생전에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주 5일제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판단을 받으셔야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요즘에는 한류라는 말이 있죠. Korean wave 그러니까 한국 열풍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류(主流)라고 있었습니다. ‘주님~주여~ 주여~ 외치며 예수님을 쫒아 다니는 고정팬들이 있었죠. 예수님도 못지 않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병자들 무리가 있었고, 여인들이 있었고,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예수 예수 외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어디에 나타나신다더라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은 마치 예수님의 경호원이라도 되듯이 그들의 스승을 자랑스러워 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질서잡기에 분주하였습니다. “거기 줄 서세요~ 어이 거기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 예수님 옷을 그렇게 잡아 당기면 안되지~ 벗겨지기라도 하면 어쩔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유일한 휴식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시간을 이용해 기도하셨고 아버지와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쉴 시간이 없이 바쁘셨고 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저희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과 영성훈련 시간을 가질 때 담임목사님께서 각자 책 읽을 시간을 정해서 말해 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모두 몇 시 몇 시 정확한 시간을 말했는데 제 아내는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시간”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유일한 자유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입니다. 엄마들 공감하시죠.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나만의 휴식의 시간. 모두 잠든 후… 그래서 그런 노래도 나왔나 봅니다. 모두 잠든 후에 사랑할거야~

어찌 그 고단함이 엄마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 땅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세대의 사람들은 30대 유부남들이 아닐까 합니다. 직장에서 가장 분주하게 뛰어다닐 나이고 신입사원들과 간부들 중간에 끼어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빛내고 결혼하여 집을 장만할 때 얻게 된 가계대출을 갚느라 허리가 휘어질 정도입니다. 게다가 결혼하고 10년이 안됐기에 자녀 양육에 손이 많이 가는 시기입니다. 직장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가면 자식새끼들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책읽어 달라 무등 태워달라, 말태워 달라, 번개 파워 할 테니 쓰러져달라 별의 별 요구를 다 합니다. 정말 30대 직장남들의 삶은 쉴 새가 없습니다. 물론 저를 꼬집어 얘기를 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니래두요^^ 생각해보니 공생애를 지내신 예수님도 30대 남자셨네요. 그 고단함을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30대로서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시던 주님께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을까요? 잠시 후에 공개됩니다.

2.

예수님의 엄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했는데 불안한 마음을 쫒을 수가 없었습니다. 약혼남 요셉이라는 청년은 잠잠히 그녀와 혼인서약을 파기하려고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의 슬픔은 더했습니다. 누군가의 지지가 필요했고 좌불안석 불안한 마음에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로 마리아는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먼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엘리사벳 만큼은 그녀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처지였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휴식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이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 6개월 된 아가 요한이 세차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길질은 일종의 시위였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몸은 먼 여행길로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마음은 불안하고 확신이 필요한 마리아를 향한 격한 아우성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그것을 감지했고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마리아~ 당신은 정말 복된 여자군요. 그리고 당신의 뱃속에 자라난 아기 또한 너무나 복된 아기예요. 당신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우리의 주인이 될 거예요. 힘내세요. 제 뱃속에 발길질 하며 뛰노는 아기를 느끼시죠? 이 아기도 당신을 지지하고 있잖아요.” 마리아는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는 6개월 된 아기 요한의 발길질을 심상찮게 봅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향한 지지이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친구 예수를 향한 격한 감격과 흥분이었습니다. 예수께 경배한 최초의 사람을 우리는 베들레헴의 목동들로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의 뱃 속의 아기 요셉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한 최초의 경배자였고 지지자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친구로서 지지자로서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예비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잉태의 순간부터 둘의 우정은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친구 한 명 있으신가요? 예수님께 휴식이 되어준 참 친구 세례 요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오늘 날로 치면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씀을 통해 비전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40장 3~5절과 그의 마음이 감동되어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년 부 수련회 때 회당에서 전도사님이 외치셨던 이사야 40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이 말씀을 들은 소년 요한은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 말씀에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비전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 주님이 가실 그 길을 미리 걸어보는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 그는 광야에서 이미 예수님이 사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미리 지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매우 단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4-5)” 낙타털 옷 생각만해도 거칠겠다는 것이 예상되지 않습니까? 큰 소리로 발성을 내기 위해 낙타털 옷 위에 가죽 띠를 찼던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단백질 공급을 위해 고기 대신 메뚜기를 잡아 먹었고 비타민과 당분 섭치를 위해 야생꿀을 따 먹었습니다. 고작 그것 입고, 고작 그것 먹고 살아갔던 겁니다. 너무나 단순한 삶이었죠. 단순했지만 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 또한 간단명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는 일반 평민뿐만 아니라 세리들 심지어 군인들에게까지 회개를 촉구하며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시대를 밝히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지요. 그의 예언의 대상은 군인에게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히 왕에게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헤롯 왕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결혼한 사건이 있은 후 세례요한은 헤롯을 비난하며 꾸짖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4.

오늘 본문의 말씀 11장은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옥에 갇힌 때 있었던 일이라 설명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냐면요. 요한이 하직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때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들려고 자신의 온 삶을 다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고단했습니다. 광야의 삶, 광야의 소리,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리와 늑대, 전갈과 독사의 위협도 있었지만 헤롯과 같은 권력자들의 위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30여년 그렇게 험난한 예언자의 삶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합니다.

2절 3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과 비전으로 똘똘 뭉친 요한의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의심하여 던진 질문이라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인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당신의 길을 예비하려고 분투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한 일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하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자신의 삶의 최후 순간을 준비하면서 요한은 자신이 잘 살아 온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의구심이라기보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의미였고 목적이었던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저는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밟고 가시도록 기꺼이 나의 길을 내어 드렸습니다. 주님 당신이 나를 사뿐이 즈려밟고 가길 바랐습니다. 부디 주님이 나의 길을 통해 순탄한 길을 가길 바랐던 것이지요. 나의 사역과 외침을 통해 주님 당신만이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이었던 주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잘 살아온 것입니까? 오실 그이가 정녕 당신이십니까?”

우리 중에 참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때론 바보처럼 느껴지고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충분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때론 18절 말씀처럼 귀신들린 거 아니야? 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제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 아주 어렸을 적에 저희 큰 누나가 교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하자, 예수 귀신에 미쳤다고 누나를 막 나무랐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 잘 믿었고 섬겨며 따랐더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신 들린 거 아니냐? 바보 아니냐 손가락질 당하고, 죽음의 위협까지 느껴하는 삶이라니… 얼마나 그 삶이 지치고 고단했을까요? 여러분 중에도 분명 그런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좁은 길 걸어가고 있는데 삶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마저 느끼며 어느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인 것이지요. 이 무거운 짐은 죄짐이라기 보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십자가였던 것이죠. 

5. 

요한의 말년의 삶은 그랬습니다. 그의 수고의 짐은 극에 달해 있었고, 너무 외로웠고, 고단했으며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느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겁니다. 주님의 최고의 평가입니다. 

“요한 니가 가장 큰 자야~ 너는 나를 위해 니 모든 삶을 다 받쳤잖아. 너는 나를 위해 너의 삶을 소진했다.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고, 나를 부인하고 나만 흥하기를 바랐다는 걸 안다. 너는 반드시 천국에서 큰 기쁨을 누릴거야. 지못미.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는 나에게 휴식 같은 친구로 남아 있구나~ 나 한 번도 말은 안했지만 너 혹시 알고 있니? 너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걸? 이제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려라. 니가 졌던 십자가 이제 내가 지고 가련다. 먼저 아버지집에 가서 참 안식을 누리거라. 내 곧 너를 뒤따라 가 너를 볼 것이다. 참으로 고맙구나 요한!!” 

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기본적으로 세례요한을 향하여 던지는 주님의 메시지라고 판단합니다. 휴식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할만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죽음 앞에 선 세례요한을 향한 주님의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바로 세례 요한과 같은 이들입니다. 영적거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수고한 예수에 미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영적 거인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쉼의 자리 안식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수고했다고 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위해 분투하며 누적하여 왔던 모든 피로를 덜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삶 가운데 있었던 유일한 ‘휴식 같은 친구였습니다.’ 주님의 삶을 기뻐해줬던 소파보다 더 부드러웠던 쉼터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께 이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이 되어주는 삶 말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니 나를 밟고 올라 서십시오 라고 외치는 삶입니다. 진리를 위해 삶을 드리고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참 위로를 누리십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하며 지지해 주십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하고 분투하며 달려온 고단한 삶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십니다. 주님이 이제 그들의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11장의 마지막 세 절의 말씀은 꾸준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고단한 영적 거인들을 향해 던지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인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말씀 아닐까요? 내가 너의 휴식 같은 친구이니 나에게로 와서 쉬어라!! 고단한 예언자 요한을 향해 던지신 마지막 위로의 말이 이제 우리 심령에 울려 퍼집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18-20절을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http://youtu.be/cyf28VZUhdQ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