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g637sMpmxFQ
-본문 : 느헤미야 8장 1-12절
-제목 : 깨달아 밝히 아는 기쁨
1. 허기가 축복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저녁부터 아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몸살기도 있고 소화도 안되고 그렇다고 토하지도 못하고 너무 괴로워 하더군요.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다고 그러길래… “임신한거 아니야?” 라는 말을 던졌는데 끝을 흐리며 주섬주섬 주어 담았습니다. 제가 올해 한 농담 중에 가장 위험한 농담이었습니다^^ 다음 날까지 아내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계속 괴로워 했습니다. 뭘 먹으라 해도 입맛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와 애들이 아무리 잘먹더라도 아내는 진수성찬을 차려 놔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저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허기진 상태가 얼마나 축복인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를 느낀다는 것이 건강한 것이구나.’ 였습니다.
요즘 염산교회 아침 큐티집의 본문이 마태복음인데요. 마태복음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5장에서 7장의 산상수훈에 여덟 가지 복이 나오잖습니까? 그 여덟 가지 복 중에 첫째 복과 네 번째 복이 바로 이 비워진 상태인 허기와 배고픔에 관한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육신은 많이 채워진 것이 복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내면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가 복입니다. 그 허기를 의로움으로 채우려하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죠. 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배고파 하고 갈급해 하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영의 건강 상태를 이 영의 허기짐으로 판단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벌써 내 영이 병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그 안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내 영이 대체되어 채워져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량식품으로 채워 놓고 밥이 안먹힌다고 하는 거나 같은 격이죠.
2002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아무리 많은 승리를 취했더라도 여전히 나는 승리를 향한 갈망이 있다는 뜻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은 어떠십니까? 허기가 느껴집니까? 목마름이 있습니까? 여전히 배가 고프십니까?
2.포로귀환자들의 허기
본문도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진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로시기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 봅니다.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시드기야와 백성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포로 생활을 시작하죠. 포로 생활을 한 지 70년 이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이었던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합니다. 첫번째 귀환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 스룹바벨과 선지자 학개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세워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이 완공 된 후 60년 후에 바사왕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포로들의 두 번째 귀환이 이뤄집니다. 이 두 번째 포로들이 귀환할 때, 에스라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에스라 7장에 자세히 나오지요.
에스라 7장 6절에서 에스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순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은 모세의 율법에 도통한 학자요 제자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스라의 귀환이 얼마 있지 않고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자원하여 아닥사스다 왕의 어명을 받고 유다에 온 사람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완성된 성전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방해꾼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는데 성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을 완성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더 간단히 정리해 보면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습니다. 예배고 뭐고 당장 오늘 끼니를 떼울 것이 걱정이었고 밤이슬을 피해 가족들이 잠자야할 집을 짓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학개 같은 선지자들은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우선이여야’ 라고 깨우치며 성전 건축을 독려했습니다. 이제 성전건축이 되고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주위에 오랑케들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소위 안전과 안보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지요. 이제 안전하게 좀 살아보자 하고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만도 하고, 예배도 드릴 수 있고, 안전도 보장이 됐는데 뭔가 허전한 겁니다. 이것이 완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7월 초 하루에 초막절을 맞이하여 일제히 수문 앞에 있는 광장에 모여든 겁니다. 우리로 치면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것이지요. 이 백성들이 일제히 모여 에스라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기서 주목 해야 할 것이 에스라가 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들려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뭘 말하고 있냐면요. 이들의 삶에 허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먹고 살만도 하고 종교인으로서 주일이면 꼬박 꼬박 예배도 드리지만 여전히 뭔가 허전하고 갈증이 느껴졌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제사장이요 학사였던 에스라를 찾은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특별하게 만들어 준 높은 강단에 올라가 율법을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양 옆으로 레위인들이 늘어 섭니다. 11명이 좌우로 섰다고 나오지요.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꽤 긴 시간 내내 율법을 낭독합니다. 율법 낭독이 끝나자 에스라 좌우로 서 있던 레위 인들이 이제 그 말씀을 해석해주고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목적은 백성들로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염산교회 소금길 학당의 의미
저는 이 말씀에서 우리 교회의 소금길 학당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보릿고개를 잊은 지 오랩니다.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합니다. 국가적으로 안보가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울타리가 되어주는 안정된 국가가 있습니다. 또한 맘 놓고 자유롭게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종교생활이 이만큼 보장된 나라도 찾기 힘듭니다. 특히 교회 예배당을 찾기란 편의점 찾는 것보다 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서로가 드러내 표현은 안했지만 여전히 내 내면은 뭔가 허전하며 나의 신앙생활은 뭔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주일 예배 한 번만으로 그러니까 수동적인 예배생활의 참석으로는 나의 신앙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말씀을 찾아 나서야 하고 우리 스스로 말씀의 두루마리를 들고 그것을 해석해 주고 깨닫게 해줄 랍비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그 사명을 에스라와 레위인들에게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를 좀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들이 에스라에게 상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이 4절에 나오는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든 나무 강단이란 뜻입니다. 백성들이 서서도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위치하게 한 나무 강단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바로 우리 염산교회 안에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진 나무강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 강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될 뿐만 아니라 해석되어지고 여러분들은 말씀이 말하는 바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강단은 깨달음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말씀공급의 젖줄이었던 것입니다.
4. 깨달음의 복
깨달음만한 복이 있나 생각이 듭니다. 8-9절을 보면 이 레위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합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두 가지일 겁니다. 첫째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감격일 것이고, 둘째는 그 말씀이 백성들의 폐부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방망이가 자신들의 내면을 두들기자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와 직면하게 되고 그 죄 때문에 어찌할꼬 어찌할꼬 울게 된 것입니다.
우는 백성들에게 다시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인들이 말씀을 통해 권면합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깨달음을 통해 참 자유를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인생의 참 행복을 맛보았고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무거운 죄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깨달음을 통해 그 죄를 해결하는 복음을 듣고 자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통해 밝히 아는 것이 큰 복입니다. 옆에 분에게 고백합시다. “깨달음이 복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다름 아닌 깨달음과 깨우침을 주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배 이외의 보충수업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더 깊은 말씀의 바다에 빠져 들어 보십시오. 스스로는 깨우칠 수 없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시는 은혜를 누려 보십시오. 사람은 깨달음이 없이 변화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사 50:4)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마 13:23)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때입니다.
깨달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저는 작년 한 해 이런 기도를 늘 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날 마다 한 가지 이상씩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저에게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깨달음을 입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이곳 저곳에 ‘아하’ 하는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깨달을 때 내는 감탄사가 바로 ‘아하’아니겠습니까? 아하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어요? 소금길 학당을 통해 여기서도 ‘아하’ 저기서도 ‘아하’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슈바이쳐 선교사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한 명을 자신의 고국 독일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독일에 갔을 때는 한 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에 나갔던 흑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집안으로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입에서 입김이 나온 건데 연기로 알고 불이 난 걸로 잘 못 알았다는 거죠. 겨울이 없으니 입에서 연기나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 원주민은 그제서야 추우면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고등부 학생을 둔 여집사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딸이 잠이 너무나 많아서 교회 예배에 항상 지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 하얀밤 때 연극팀의 팀장을 맡아서 아이들을 이끌면서 지각하는 습관이 고쳐졌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팀장으로 아이들을 이끌다보니 미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늦게 나오는 친구들 때문에 많이 속썩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이끄시는 분들이 얼마나 수고한지도 깨닫고 늦으면 안되겠구나 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달음이 임한 후 이 아이는 교회에 지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쭉 말입니다.
저는 작년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소금길 학당이 열리던 해의 첫 번째 학기에 저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리와 역사”를 공부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이 분은 모태 신앙이셨고 어머니도 염산교회에서 내로라하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이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소금길 학당의 강의를 듣고 갖게 된 소감을 문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집사님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공개합니다.
“지난 해, 이스라엘 역사와 지리 수업으로 촉발된 말씀에 대한 기갈을 맛보았고, 성경 통독 시간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는 경이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기쁨으로 수금을 켤 수 있게 되었고,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토굴에서 나와 빛이신 주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 개를 가르쳐 주면 여덟 개를 까먹는 갱년기 아줌마이지만 ‘달콤한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딱딱한 텍스트가 아닌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로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집사님의 문자 내용은 한 마디로 소금길 학당에서 시작된 깨달음이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는 겁니다. 그 깨달음에서 촉발된 말씀에 대한 임팩트가 50년 넘게 나태하게 길들어져 왔던 자신의 신앙을 깨웠다는 것이지요. 그런 후 이제 매번 열리는 성경강좌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진정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인 줄 믿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말씀을 깨달아 밝히 알아 참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방금 특송을 하셨던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이번 해에도 최선을 다해서 양질의 강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김종익 에스라 목사님 좌우에 선 11명의 레위인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분들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 만으로, 그리고 예배 잘 드리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제작된 말씀의 강단에 동참하여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성장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서서 말씀을 찾아 나서십시오. 소금길 학당은 여러분들의 삶을 변화시킬 충분한 말씀의 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기독교신앙과 그리스 철학, 구약 성경통독, 기독교 에니어그램, 성서지리, 엄마방 스윗 리딩이 일제히 개강을 합니다. 신청서를 작성 못하신 분도 오실 수 있고, 동네 아줌마 친구들 모시고 와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을 권면합니다. 올 한 해 말씀을 향한 갈급함 하나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일어나면 말씀으로 달려가시고, 모든 일을 할 때 말씀이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할 때도 말씀으로 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샤워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립니다. 그럴 때 “샤워중이예요”라는 말 대신에 창세기 3장 11절을 말하는 것이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말씀의 영향력이 침투하고 말씀으로 한 해가 풍성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올 한해 우리 염산교회가 말씀으로 충만해 지는 해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지 배웠습니다. 올 한해 깨달음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옵소서. 염산교회에 깨달음의 장으로 소금길 학당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참 개달음과 참 자유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