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묵상 - 빈손이 가장 큰 손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부터 등장하는 일명 '부자 청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일단 그의 관심사는 영생이었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행동을 해야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은 모든 율법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라고 자뻑(스스로 뻐김)을 늘여 놓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건드리십니다.
부자 청년, 또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라는 말을 통해 이 젊은이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청년인데도 재물이 많다면, 정말 유능하거나 수완이 좋은 사람이던지 부모가 돈이 많고 지위가 있던지 둘 중 하나겠지요.
이 청년을 나타내주는 말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
율법을 그렇게 잘 수행하고 완벽한 삶을 살았음에도 올바른 청년, 거룩한 청년이 아니라 부자청년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라면 거룩한 청년, 홀리한 청년이란 평을 받고 싶지 부자청년은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부자청년이라는 말은그만큼 재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는 거겠죠.
행실은 올바르지만 재물을 참 사랑한 청년 뭐 이정도 이겠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어제 아브라함의 시험과 비슷한 종류의 시험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치면 "니 아들을 팔아 제사하라"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재물을 팔지 못했습니다.
재물보다 예수님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 집에 잉잉 울며 돌아가버립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봅니다.
두 아들일까? 평판일까? 재물일까? 안정된 노후일까?
나는 그것을 팔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참으로 본질적인 질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나는 나의 평판이나 안정된 삶을 위해 사는가?' 라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다 드린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놓지 못하고 부요해져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생각하시며 하신 말씀이 갑자기 내면을 강타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1장 7-8절)"
광야에 갔으면 광야에 걸맞는 삶을 사는 자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질문을 저에게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를 따르고 있느냐?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느냐?
니가 사랑하는 그 부드러운 것들, 부요한 것들 다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아~ 저는 근심하며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예 주님 저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다짐이 저의 진실한 고백이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대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버림이 영생의 지름길이며, 포기함이 배로 받는 길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다 버리고, 쥐었던 손을 다 펴고 겸손히 주님을 향해 폅니다.
주님 뜻대로 사용하소서. 크신 주님!! 나의 빈손 꼭 잡으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소서.
빈손이 가장 큰 손이라는 걸 이 죄인이 이제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