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에서 나사로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
지난 월요일 한 달마다 있는 '김응교선생님 인문학교실'에 다녀왔습니다.
12월과 1월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강독했습니다.
사흘 앞두고 교수님과 페이스북 친구 맺었다는 죄로 교수님의 발표 제의를 받았습니다.
주제는 "죄와 벌" 소설에서 "나소로의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였습니다.
살인자였던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라는 매춘부에게 와서 자신의 만행을 낱낱이 고할 때, 갑작스레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본문을 읽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바로 그 나사로 이야기 말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지요? 그냥 발표하면 횡설수설할까봐 발제 페이퍼를 만들어 갔습니다.
같이간 형님이 그냥 두기 아깝다고 페북에 공유해달래서 이렇게 올립니다.
참고로 1번 이유는 장종혁 형제의 페이스북 포스팅 내용을 인용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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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성에 의한 구원의 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안에 자신의 발작의 통제되지 않는 기폭제를 설치하는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으로 소설 안에 비쳐진 것일 수도 있다. 원전의 냉각수가 고장나듯 불현듯 주인공은 발작을 일으킨다.
제어능력이 없는 기폭제를 설치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인류에게, 이 시대에 필요한 힘은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의 남성적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은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망치고 헝클어놓았다.
이 남성적 엔트로피에 의해 헝클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죄와 벌』에서도 ‘소냐’라는 여성을 통해 ‘라스콜니코프‘라는 그 기폭제를 끌어안아 버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해지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도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나서 그를 향하여 날아올 정죄의 화살을 예상했는데 소냐는 그 모든 발작을 스펀지처럼 다 빨아드려 버린다.
그럼으로 그의 발작은 잠잠해졌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안식까지 누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구원은 여성성의 용서와 용납에서 오는 것 같다.
주인공의 발작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의해 그것이 용납되어짐으로 구원은 외부로부터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무덤을 열어젖히고 감긴 천을 풀어 놓을 대행자 소냐.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사로 이야기(네러티브)를 이 소설에 끌어 온 이유를 먼저 짚고 싶다.
나사로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이며 지은이는 왜 나사로 이야기를 중요한 모티브로 끌어 왔는가?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의 줄거리와 주제를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다가오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심을 알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3킬로 남짓 떨어진 동네다.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여 예수님은 베다니를 들르신 것이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는 예수님과 친분이 깊은 관계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3절), 친구(11절)로 소개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어 장사된지 이미 4일째였다. 무덤의 돌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시체는 천으로 두텁게 둘러 있었다.
슬피 우는 누이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신다(ego eimi - 나는 ~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25-26절)”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좀처럼 보여주시지 않던 눈물까지 보이신다.
예수님은 먼저 동굴로 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 명령하신다.
그런 후 큰 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때 어두컴컴한 무덤에서 손발은 천으로 감겨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는 죽었던 나사로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고 하시며 그를 옭아매고 있던 천을 풀어해치라 명하셨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곧 이루게 될 죽음의 극복, 즉 부활이 상징적으로 선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로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로 시선을 이끌어 간다. 요컨대 나사로의 부활은 곧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부활을 선취하며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왜 그의 소설에 끌어 왔을까? 그것은 에필로그의 끝부분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은 죽었던 자, 갇힌 자, 묶였던 자의 재기(再起, resurrection)이며 대전환을 상징하는 성서의 대표적 사건이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지은이는 죄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삶의 의미를 잃고 쓰러진 청년 라스꼴니코프의 삶의 부활과 대전환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죄에 대한 죄값, 즉 죄의 벌은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로마서 6장 23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청년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의 모형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면 이 나사로의 부활을 왜 소냐가 읽었는가?
소냐를 예수님의 대행자(agent)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셨고 무덤문을 열고 살아난 나사로를 칭칭 두르고 있던 천을 벗겨주었던 대행자가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예수님의 대행자로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사건을 도왔던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세상과 단절된 자신이 파놓은 무덤에 갇힌 자였다. 그의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의 전 존재를 죄의 결과인 혼돈과 광기 그리고 정신적인 방황과 분열이 옭아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 대신에 무장해제 시키는 역할을 소냐가 감당했다고 본다. 소냐는 혼자 씨름하고 있던 죄의 문제를 예기치 않은 고해성사를 통해 빛 가운데로 드러나게 해주었고, 라스콜니코프가 타인을 향해 품고 있던 의심과 두려움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죄의 올가미를 풀어해칠 수 있게 도왔던 것이다.
3. 용납받은 치유자 (A forgiven healer) 소냐.
다음으로 소냐가 나사로 본문을 읽었던 이유를 소냐 또한 죄로부터 용납을 받은 경험이 있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맛본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비록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생계형 매춘이었다지만 소냐는 매춘부였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서를 통해 죄의 용서를 깨달았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된 경험을 가진 자이다.
그녀가 죄의 문제를 씨름해 보았기에 그 죄의 강력한 핵주먹에 나가 떨어진 라스꼴니코프를 누구보다 이해하며 도와줄 수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용납받은 치유자(a forgotten healer)로 라스콜니코프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길라잡이였던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aeler를 살짝 변형함)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이라 표현하고 싶다.
진짜 치유자는 예수님이라면 소냐는 그 예수님에게까지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고 안내해주며 보호해주는 몽학선생(가정교사)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실재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라는 인도자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되고 참 치유와 구원을 경험한다.
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22. 0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