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5. 07:34

<출애굽기 10~11장 묵상 -심판, 그것은 거룩한 구별입니다.>


이집트에게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교훈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재앙을 통해 뭔가를 가르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집트 사람들과 바로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얼마나 강력한 신인지를 심어주길 바라셨습니다.

열 재앙은 모두 이집트를 다스리며 이집트 인들의 생활 깊숙히 파고들었던 민간 신앙의 신들을 향한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박 재앙은 하늘의 여신 누트, 곡물과 풍산의 여신 오시리스, 폭풍우의 신 셋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흑암의 재앙은 태양신 레, 호루스, 누트, 하토르에 대한 공격이었구요.

장자 재앙은 재 생산과 출생의 신이었던 민, 출산을 관장하는 신 헤케트에 대한 공격인 것이죠.

이집트 사람들은 계속 연이어지는 재앙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겠죠.

히브리인들의 신이 이 모든 신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을 것입니다. 

결국 파라오의 종들과 이집트 백성들이 모세 앞에 와서 절하며 제발 애굽을 떠나 달라고 비는 형국까지 이르게 됩니다(출11:1-8절)

이는 모세가 이제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 재앙은 또한 히브리인들에게도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출 10장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들려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며, 내가 주님(야웨)임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런 재앙들을 내리시고 계시다는 것이죠.

재앙이 거듭될수록 히브리인들의 인상에 야웨 하나님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거지인 고센 땅에만 차별하여 내리지 않는 재앙들을 보면서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신들을 선택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이 고조되어 갔겠죠.

음악 용어로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해가고 찬양이 강력해져 갔을 것입니다.

모세의 참견으로 지푸라기도 받지 않고 벽돌을 구어야 했던 지난 날의 원망과 한숨이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 점점 씻겨져 내려갔을 것입니다. 


열 재앙 중 단연 가장 강력한 재앙은 ‘장자 심판’의 재앙입니다.

장자 심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재앙에 할애된 분량(11-13장)만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적법한 계승자입니다.

장자의 죽음은 계승자들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죠.

즉 이집트 파라오 체제는 계승되고 존속될 가치가 없는, 시효가 다 지나 버린 낡은 체제인 것이죠. 

오히려 이스라엘 장자들은 다 살아 남을 것이며, 이는 그들이 맏아들로 성별되어 세계 만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바쳐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결국 구분과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적법한 계승자들과 폐기처분되고 실효성을 잃어버린 장자들과의 구분이 바로 장자 심판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였음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출 11:7)"

심판은 곧 구별이며 구별은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도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 죄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하여 꼬치 꼬치 따지며 죄를 추긍하는 것으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은 가라지와 알곡의 구별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가라지에서 알곡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재앙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발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심판주’하면 상당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제 ‘심판주’하면 오히려 나를 구별하여 보호하며 건져내실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이겠죠.

재앙이 거듭될수록 히브리 백성들은 심판주로서 그들을 구분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내 삶 앞에 벌어지는 심판과 재앙이 곧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단편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더 알기 원합니다. 내 구주시며 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그리고 아버지를 알면 알수록 깨닫게 되겠죠. 세상은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하며 나 또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요.

왜냐하면 세상과 나 사이에는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구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도 이 거룩한 구분을 경험하시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깨닫는 시간 사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8. 7. 07:25

<창세기 22장 묵상 - 하나님이 복 그 자체이십니다>


학교다닐 때 시험을 좋아하셨나요? 시험을 즐기는 사람은 드물겠죠? 

시험은 우리를 늘 긴장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이 없는 방학을 좋아하나 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시험지 한 장을 받아 듭니다.

그것도 너무나 어려운 시험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25년만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모두 태워 드리는 제사)로 받치라는 겁니다. 

인신(人身)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지요. 너무나 부조리해 보이는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침묵 가운데 드려진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현재 살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산까지는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3일 길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왜 브엘세바 뒷 산이 아니라 3일 길이나 걸어가서 아들을 죽여 제사를 드리라 했을까요? 

3일의 시간은 그가 마음을 고쳐 먹고 브엘세바로 돌아갈 수 있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일의 시간동안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일관성 있는 믿음의 태도가 유지되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손에 불과 칼을 지고 말없이 걸어가는 아브라함 앞에는 태울 나무를 지고 가는 아들 이삭이 있습니다. 

조용히 산 꼭데기를 향하는 그들의 침묵을 깨는 아들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시험이 아니라, 아들 이삭의 믿음에 있어서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삭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일까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일까요? 

아들의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상외로 담담합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쓸 양을 친히 준비할 것이야(8)” 

드디어 아들 이삭을 향하여서 칼을 들어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이 멈추게 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예상치 않은 준비하심(여호와 이레) 때문에 부활의 잔치로 반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잘 통과 했고 A+(수)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이 시험의 성격과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독자를 떼어 내는 고통도 감수할 만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복 주심에만 관심 갖는지를 검증한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께만 집중하는지 아니면 독자 이삭에게만 집중하는지 판단하는 시험이었던 것이지요. 

내가 받은 복에만 관심 갖는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이 나의 복 자체이신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삭이 복입니까? 하나님이 복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시험지가 우리 삶에 던져집니다. 

복을 주신 분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인지? 아니면 복 그것에 대한 집착인지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신다(예레). 여와를 경외하다(야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예레) 세 히브리어 동사 모두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입니다. 

시험지를 던져 주시고 하나님은 마치 감독관 처럼 우리를 주시하십니다(예레). 시험 감독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야레) 의식하며 시험에 임하듯,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면 하나님은 즉시 움직이시며 준비하시는 분(예레) 이시라는 거죠.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시험입니다. 시험 감독관이 시험보는 아이의 태도를 주시하다 온전히 시험에 몰입하면 시험의 답을 알려줘버리는 얼토당토 않는 시험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그분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마음입니다.

순종은 즉시(immediately), 기쁘게(gladly), 온전히(completely)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시험은 수시로 찾아 옵니다.

시험 문제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복 자체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복의 결과물인지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지 마시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지세요.

그리고 고백하세요.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복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라구요~

그리고 하나 더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기억하세요.

선생님은 시험 문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 친구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맡긴다는 것을요.

감당할 수 있기에, 능히 풀 수 있다 믿기에 그 시험이 나를 찾아 온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7. 25. 17:21

<공감과 연대...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오늘 한 장로님 댁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이분은 굴직한 건설회사의 이사까지 지내다 2년 전에 퇴직하신 분이십니다.
장로님께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시면서 자신은 퇴직하기 전까지 사회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고백하시더군요.
퇴직해 보니까 내가 공감하지 못했고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느껴지고 보이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퇴직하시고 1년 동안은 자가용 타고 다니셨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서서 기다리는 것도 뻘쭘하고 다른 사람이 볼 것 같아 도저히 탈 수 없으셨답니다.
그러다 버스를 타기 시작하셨고 지하철을 타기 시작하면서 차로 다닐 때 보지 못했던 이웃들의 모습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장로님께서 이런 맥락에서 한 가지 더 말씀하신 것이 자신의 군대 이야기였습니다.
장교로 지원할 수도 있엇는데, 육군 예비역 병장으로 전역을 하셨답니다.
이유는 복무기간이 짧았기 때문이었답니다.
근데 막상 사병으로 근무해보니까 장교와 사병의 위치와 처신이 하늘과 땅차이라는 것을 느끼며 사병으로 온 것이 후회가 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병으로 오기를 잘 했다고 느낀 것이 민초들의 고충과 사회 하층민, 기층민들의 삶을 경험하게 됐다는 겁니다.
중졸자들의 회한과 눈물을 보았고 가난한 자들의 한숨을 듣게 되었다는 거죠.
참고로 이 분은 대학을 안암동의 K대(일명 스카이 명문)를 나오신 분이셨고 장교로 갔다면 본인은 그걸 경험하지 못하고 기고만장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한 것만 배웠을 거라 소회를 말씀하시더군요.



다시 퇴직 이야기로 돌아와서 퇴직하시면서 가장 큰 변화가 눈물이 많아지셨다는 거랍니다.
아니 없던 눈물이 생기셨답니다.
퇴직 후 가난한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리어카 끌고 다니며 폐지 줍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셨답니다.
그러면서 그런 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계시는지 공감이 가기 시작하셨답니다.
내가 어려워져 보니까 공감이 가고 그들의 자리에 서 볼 여유가 생긴 것이지요.



저는 이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과 연대'라는 단어를 떠올려 봤습니다.
장로님의 변화는 인간스러움의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인간스러움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아픔에 동참하는 공감이 아닐까요?
어려운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에 손 내밀 줄 아는 연대감이 있는 것이 지극이 인간다운 모습이죠.
공감과 연대는 바로 리더가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공신력을 잃어 버린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레미제라블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한 이기적인 동아리로 축소되어버린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반대로 비참한 진창과 수렁에 빠진 사람의 운명에 동참할 수 있는 동정심이 바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지점이라고 피력합니다. 
레미제라블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자비와 동정이 바로 공신력을 되찾을 수 있는 좌표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의 삶에 가슴 깊이 공명할 수 있는 그런 감수성, 공감과 연대감을 갖는 것이 우리네 교회의 가장 큰 숙제인 것이지요.
이런 감수성이 이 시대의 리더가 갖출 가장 중요한 능력이요 자질이라 믿습니다.



이회창씨가 연속으로 두 번이나 대선에서 물먹은 이유를 아는 선생님께서 이렇게 분석을 하시더군요.
이회창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사법고시를 통과하며 이시대의 엘리트 코스란 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 기층민들의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능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목포상고 출신에게 밀리고, 부산상고 출신에게 밀린 거라는 거죠.
상고 출신은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던 사람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고 이해할 줄 알았을 거라는 거죠.
빗나간 말이지만, 동작을 나경원 후보는 너무나 엘리트 코스만 밟아 왔습니다.
그 분이 흑석동 산동네 판자촌의 휴지줍는 꼬부랑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며 공감할 능력이 있을까요?
글쎄요~~??
적어도 오늘 만난 장로님의 고백에 의하면 당신이 퇴직하시고 바닥에 내려오기 전까지 그런 삶을 이해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그러시더군요.



다시 돌아와서... (몇 번 돌아오는건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 ㅎㅎ)
이 모든 맥락에서 저에게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염산교회와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종암교회에서의 사역은 큰 특권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대 레미제라블들의 삶을 가장 근접하여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의 사역경험에서 싹트는 공감과 연대의 능력은 나의 삶과 사역의 자양분이 되어 나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 살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아우성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죽어서 갈 천당만 생각하는 영적 이기주의자들의 동아리로 축소 되어어서는 안됩니다. 
벼랑끝에 내 몰린 사람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연대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공감과 연대의 감수성을 가진 젊은 지도자들을 길러 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들은 강남의 8학군이 아닌 염리동의 숭문 고등학교나 북아현동의 중앙여고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시대는 공감과 연대의 감수성을 지닌 지도자를 원합니다.
지극히 인간다운 지도자 말입니다.
이웃의 희노애락에 깊이 공명하며 울줄 알며 울릴 줄 아는 인간다운 사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공감과 연대에 대한 글을 여기서 마무리 하려 합니다. 바이 짜이찌엔 ~ 긴 글 읽어 주어 감사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7. 22. 06:52

<창세기 7장 묵상 - 아름다운 구속>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나비 애벌레들의 이야기입니다.

뜻도 목적도 모른 채 모든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기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올라가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즈려 밟아야만이 오를 수 있는 수 많은 높은 탑들이 애벌레들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높은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 곳에 오른 애벌레들은 허무하게 저 아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저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주인공 애벌레는 목적도 없는 정상으로의 허무한 경쟁을 내려 놓고 번데기의 과정을 통해 나비로 거듭나게 되죠.

그 번데기의 구속을 거친 후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비가 된 후 애벌레들이 그렇게도 오르고 싶은 정상을 훨훨 비상해 오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이 애벌레들의 탑쌓기를 방불케 합니다.

오직 다른 이를 짖누르고 밟아서 오르고 또 오르려는 인간들의 시퍼런 욕망들로 가득찬 세상이었습니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탐욕의 바다를 하나님이 물로 덮어 버립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독야청청하게 의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노아에 대한 짧은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1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9,16절)”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헛된 욕망의 탑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의 거푸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했습니다.

방주에로의 아름다운 구속을 자처한 것입니다.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19-20절)”

방주에로의 아름다운 구속은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오로지 물 위에 있는 방주만이 오를 수 있는 그곳으로 노아는 올라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단지 방주에 구속되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를 올려 세우고 계신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순종의 원리라 생각됩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참 자유이며 우리를 높이는 비결임을 깨닫게 됩니다.

애벌레가 번데기의 구속의 시간을 통해 아름다운 나비로 참 자유를 얻듯이, 우리네 삶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과 하나님의 명령에 구속됨을 통해 참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미로운 순종을 하는 자들은 물이 차오름과 동시에 그의 삶도 부상하게 될 것이며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감미로운 순종을 드리는 하루 되길 원합니다.

세상 헛된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귀한 말씀과 명령에 결박당하기 원하며 구속당하기 원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구속이 있을까요?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6. 27. 16:51


리 염산국제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캄보디아 부부이다.
지난 4월 말에 딸을 출산하고 이름을 은혜(grace)로 지었다고 한다.
이들이 우리 교회에 온 것에서 시작해서 지난 주에 아이를 출산하고 다시 나오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하며 잠시 나누고자 한다.

남편 씽허와 부인 쏘우마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 유학을 온 유학생 부부이다.
결혼 한지 6년 차에 접어드는 학생 부부이다.
두 사람이 작년 이맘 때 우리 교회에 처음 나왔다. 
당시 조경제 형제의 전도로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고 다행히 우리 염산국제교회로 안내되었다.
참고로 염산국제교회는 염산교회 안의 외국인 나그네들의 공동체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창세기 설교를 해 오고 있다.
작년에 이들이 올 당시 아브라함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부부의 불임과 믿음에 의한 출산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의 마음이 동함을 느꼈다.
당시 두 사람이 올해 안에 임신하면 좋겠다고 축복해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두 사람은 거짓말같이 임신을 했다.
두 사람의 교회 생활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시발탄이었다.

아내의 출산과 남편의 서강대 대학원 논문 마무리 때문에 두 사람은 올 초부터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산부인과로 찾아가 이들을 심방했고 기회가 되면 교회에 나오라 권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두 달이 지났다.
한 참 야곱이 20년 만에 벧엘을 다시 방문하여 재단을 쌓은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에 이들이 들어 왔다.
설교의 핵심은 처음 구원의 경험, 은혜의 경험을 한 곳(벧엘)을 다시 찾아 신앙을 회복한다는 이야기였다.
공교롭게 이들의 방문은 설교 내용과 오버랩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방문했던 곳이었던 우리 국제교회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 왔다는 것이 놀랍기만할 따름이었다.
닭살이 확 돋아 올랐다.
실은 이들이 나오기 며칠 전 이대쪽에 차를 타고 가면서 쏘우마(부인)가 유모차를 끌고 가는 것을 유연히 보게 되었다.
내려서 인사할 겨를은 없었고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들이 다시 우리 공동체를 기억하고 나오면 좋겠네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기도가 드려진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증명되었다.

그들이 무슨 뜻으로 딸의 이름을 "은혜(grace)"로 지었는지 아직 물어 보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삶 자체가 내가 보기에는 은혜이다.
우연찮은 만남을 통해 교회를 소개 받고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다시 그 은혜의 경험을 하였던 첫 장소로 찾아온 이들의 걸음이 은혜 아니고 그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꼭 한국에서 신앙이 깊어져서 캄보디아 돌아가 교수활동하며 많은 대학생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은혜는 내 사역과 나의 온 존재를 물들이며 적시며 진행중이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6. 24. 08:21

<가사노동과 영성훈련의 상관관계>


대딩시절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 (두란노)"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지은이가 수도원의 설거지 같은 잡일(chores)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는 것이었다.

과연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집안의 잡일과 영성훈련과 상관 관계가 있나?라는 의문을 오랜 시간동안 품고 온 나이다. 

오늘 그 중간 점검 결과를 되세겨 보고자 한다.


먼저 이 땅의 많은 로렌스 자매들이 가사노동과 영성훈련의 상관관계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 로렌스 자매들은 가족을 위해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며 깊은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이 땅의 대표적인 로렌스 자매인 어머니들 그들이 신앙이 깊은 이유가 어디 있나를 따져봤을 때, 개인적인 결론은 가사노동을 묵묵히 수행해온 결과라 믿는다. (교회의 대다수의 구성원은 여성^^)


가사노동에는 많은 인내심과 희생이 필요하다.

가사노동은 말 그대로 집안에 널부러진 것들을 정리하고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다.

청소를 생각해보라. 이것은 마치 천지창조를 방불케 한다.

천지창조가 무엇인가? 그것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혼돈과 흑암 속에 있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 바로 천지창조이다.

청소는 흑암과 혼돈가운데 널부러져 있는 집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 넣는 거룩한 창조의 작업이다.

이 창조의 작업을 수행하며 영성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만드는 행위 이것 또한 창조의 모방이다.

서로 다른 재료들 섞고 열을 가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맛을 내고 모양을 내는 행위는 거룩한 창조적 예술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영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색무취의 신앙에 맛과 색깔을 입히는 과정이라 본다. 

형의상학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이 표현되고 새깔을 내며 행해지는 것 그것이 영성이다.

그러기에 음식을 만드는 작업은 맛과 샊갈이 없는 재료들을 버무려 만들어내는 거룩한 창조의 행위인 것이다. 

자연스레 이 조리과정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설거지, 이것은 남편들이 도울 수 있는 가정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사노동이다.

설거지란 다름 아닌 죄씻음의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이 숭고한 작업을 통해 내면의 정화가 일어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 죄씻음의 행동을 통해 마치 집안의 모든 가사활동을 하였고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다 씻은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설거지가 뭐 별거라고 그거 하나 했다고 잰체 하고 그러지들 마시오들^^


가사노동은 인내심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실례로 아침에 빨래 개기를 했다.

무슨 빨래가 이렇게도 많은지 빨래 개기 시작하며 틀어놨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번 1악장(런닝타임 20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작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3악장에 들어갈 때서야 끝을 냈다.

빨래 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족들 옷을 그들의 서랍장에 넣는 정리까지 인내심 없이는 정신착란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이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자는 반드시 깊은 영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결혼한 남녀들의 진정한 영성의 훈련장은 가정이다.

가정의 일상다반사와 잡일 가운데서 의미를 발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수행하는 것, 그것은 도를 닦는 행위에 비견된다.

결론적으로 가사노동과 영성훈련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 행해지는 영성이기에 영성훈련 중 가정에서 행해지는 영성훈련은 가장 중요하면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고까지 본다.

매일 벌어지는 가사노동을 감사함으로 또한 인내함으로 기쁨으로 감당해가다보면 내가 곧 로렌스가 돼 있을 것이며 내가 곧 바울이 돼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음악과 함께 행해지는 가사노동은 영성훈련을 하는 데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우리의 뇌 활동을 활발하게 하며 정서를 순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음악을 틀어 놓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개다 보면 자연스레 기도와 깊은 묵상의 결과물들이 나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시답잖은 주장과 글을 여기까지 읽어 오느라 애쓰셨고, 감사합니다^^

한 가지 이런 주장에 맞지 않는 딜레마는 가사노동은 정말 하기 싫다. 

집에 오면 그냥 푹 쉬었으면 좋겠다^^ 끝~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6. 15. 13:18

<친정아버지 목회>

 

2년 전부터 교구사역을 시작하며 어르신(노인)사역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청년과 청소년들과만 어울리다 어른들을 섬겨야 하니 낯설기 그지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메시지의 변화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비전과 미래를 언급했던 설교의 내용은 어른들에게는 개발의 편자인듯 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뻘, 이모 뻘 되시는 분들의 목자로 지도자로 섬겨야하는 입장이 어색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저분들의 한숨과 저 어르신들의 주름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회의감마저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분은 상주 지역의 천석꾼은 아니어도 오백석꾼의 아들 정도는 될만큼 꾀나 부잣집에서 자라오신 분이셨습니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그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올 정도로 탄탄한 집안이었고 잘 배우신 덕망있으신 분이시죠.

그런데 이 어르신이 10년 전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하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서울에 있던 한옥집을 처분하고 염리동의 단 칸방으로 옮겨 오시면서부터 교회를 다니시기 시작했고 염산교회 교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 어르신은 묵상문자를 보내드리면 늘 답장을 하시며 감사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가르침에 너무 감사하며 계속 배움에 정진하겠습니다.”하시면서 겸손을 표현하십니다. 실제로 문자를 바탕으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신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많은 고통과 시련을 목사님의 참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OOO 올림

 

나이를 불문하고 말씀을 향한 갈망이 성도들에게는 있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나이와 상관 없이 양무리들은 의지할 대상을 찾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분은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절뚝거리시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분이십니다. 작년부터 무릎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작년 가을에 수술을 하기로 하셨었는데 재정부담과 두려움 때문에 수술을 못하셨더군요.

봄 대심방 때 수술하라고 격려해드리면서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에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셔서 병실을 찾아 갔습니다.

같이 간 심방대원들에게 수술을 결단하게 된 배경을 말씀하시면서

목사님이 심방 중에 기도를 해주시는데 힘이 불끈 솟아 올랐어요. 그래서 든든한 마음이 들었고 수술을 결정하게 됐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덧붙여 이런 말씀까지 하시는 겁니다.
수술 후에 목사님이 병실로 들어오시는데 친정아버지 보듯이 반가운 거예요.”

친정아버지를 보는 느낌이란 어떤 걸까? 평생 느낄 수 없는 감정이지만 적잖은 충격이 되었습니다.

어르신 마음이 얼마나 쇠약해지시고 위로가 필요하셨으면 자기 손주뻘 되는 목사를 보며 친정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하시겠는가?

 

이 두 사건을 지난 주에 겪으면서 어르신 목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비록 어르신들이 인생 경험과 연륜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시지만 그들의 마음 또한 기댈 곳이 필요하며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오히려 친정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1983년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오형제중 가장 맞이었던 큰 누나를 서울로 시집을 보내신 부모님은  처음으로 시집간 큰 딸에게서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시던 아버지는 진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 아버지도 우는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친정아버지의 마음이었던 듯 합니다.

먼 곳에 시집보내시며 미안한 마음과 딸의 시집살이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는 마음아니겠습니까?

남자는 강하나 친정아버지는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저의 목회도 어르신을 만나든 젊은이를 만나든 친정아버지 목회가 되리라 다짐해 봅니다.

 

Posted by speramus
2014. 4. 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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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콘티2014. 4. 8. 07:14
<4월 4일 콘티>

주제 말씀 : 사사기 6장 11-16절 / 여전히 너는 큰 용사

1.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G)
2. 모든 상황 속에서 (G-->A, 후렴에서 시작해서 첫소절로 넘어가며 키업, 노래 후 통성기도)

3. 예수 나의 첫 사랑되시네(A)

4. 생명 주께 있네 (G, 엔딩에서 '주께~'로 리타르단도 하며 돌린 ㅣㅖㅔ후, 드럼 싸인 주고 다음
5. 생수의 강이 내게서 흐르네(G)

6.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 합니다. (F-->G)
7. 날 채워주소서 (G, 통성기도)

8. 주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날은 멀지 않았네 (A)



<4월 11일 콘티>

주제 말씀 : 마가복음 2장 13-17절 /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1. 시작됐네(A)

2. 손을 높이 들고 (E)
3. 해 뜨는 데부터(E, 리타르단도 엔딩)
4. 이 날은 주가 지으신 날(E, 전주로 시작함)

5. 주와 같이 길가는 것(캠퍼스워십 버전 -E)

6. 주님 말씀하시면 (C)
7.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C, 후렴부로 이어짐)
8. 영광 영광 할렐루야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후렴만 - C)


<4월 25일 콘티>

주제 말씀 : 마태복음 3장 1-6절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교회

1. 내 평생 사는 동안 (D)

2. 예수 사랑하심을 (D)
3. 주의 자비가 내려와 (D)

4. 일어나라 주의 백성 (G)

5. 온 맘 다해 (F, 끝부분에서 여리게 엔딩)
6. 이 땅에 오직 주밖에 없네(F-G, 첫 시작 아예 무트해서 목소리로만, crecendo)
7. 날 채워주소서(G)
8.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G-->A, 후렴부분부터 시작해서 두 세번 반복한 후, 첫소절로 돌아가며 키업)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7. 07:36

<누가복음 20장 묵상 - 귀보다 귀(貴)한게 있습니까?>


아~ 오늘 누가복음 20장 본문은 목사인 저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는군요.

20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뒤엎어 정화시킨 후 바로 등장하는 사건들입니다.

성전을 뒤엎은 일은 율법학자들과 장로들, 제사장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며 위기였을 겁니다.

19장 후반부에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들이려 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20장을 해석하는 단서를 바로 이 말씀에서 찾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듣는데,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듣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일뿐더러, ‘듣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었기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지지 않으려고 질문 공세들을 펼치는 내용이 20장의 주 내용입니다.

듣지 않으려드는 자들의 최후의 발악이랄까요?


그들이 던진 질문은 사람을 살리는 질문이 아닌 죽이는 질문이었습니다.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닌 제압하기 위한 질문인 것이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쓰러뜨리고 책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절한 반문과 해설로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잘 피해 가십니다.


본문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듣는 삶’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했느냐?'는 ‘얼마나 들을 줄 아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들을 귀를 주소서. 

“주 여호와께서 학자(가르침을 받은 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사야 50장 4-5절)"


어떤 자리든 목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목사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에 상대의 말에 쉬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얄팍한 성경지식으로 가르치려 들며 상대의 우위에 서려듭니다.

어떤 자리에서 잘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하면, 십중 팔구는 목사이든 정치인이든 둘 중 하나일겁니다.


본문 누가복음 20장의 맨 마지막 부분은 지금으로 치면 목사급의 지도였던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평상복 대신 예배때나 입는 가운격인 예복을 입고 돌아 다니고

장터에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먼저 인사하는 것보다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백성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는 회당을 좋아하며 거기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잔치에는 늘 귀빈으로 분류되어 상석에 배정을 받아 앉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 귀한 헌금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파렴치한들입니다.

어째 율법학자들의 특징에서 목사들의 냄새가 나네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성도 여러분 목사 조심하십시오, 저 목사들 처럼 살면 안됩니다.” 

이런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로서 똑바로 살아야겠습니다. 귀를 막고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입은 다물고, 귀는 열어두어야 할텐데…

앞으로 저의 신앙 여정에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귀보다 귀(貴)한 게 또 있겠습니까?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만큼 겸손한 자세가 있을까요?

듣는 것(순종)보다 더 나은 제사가 있을까요?

주님 내 귀를 열어주셔서, 아침마다 주님의 귀한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고, 더 낮아져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듣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삶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게 하소서.

이것이 저의 평생의 소원이며 갈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