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기도회 설교문입니다.
아래 설교영상 링크도 걸어놨는데 10분부터 설교가 시작됩니다.
(앞부분은 성경봉독과 전도보고영상이 있어서요)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제목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휴식같은 친구)
1.
저 어린 시절 “휴식 같은 친구”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김민우가 불렀나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생전에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주 5일제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판단을 받으셔야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요즘에는 한류라는 말이 있죠. Korean wave 그러니까 한국 열풍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류(主流)라고 있었습니다. ‘주님~주여~ 주여~ 외치며 예수님을 쫒아 다니는 고정팬들이 있었죠. 예수님도 못지 않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병자들 무리가 있었고, 여인들이 있었고,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예수 예수 외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어디에 나타나신다더라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은 마치 예수님의 경호원이라도 되듯이 그들의 스승을 자랑스러워 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질서잡기에 분주하였습니다. “거기 줄 서세요~ 어이 거기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 예수님 옷을 그렇게 잡아 당기면 안되지~ 벗겨지기라도 하면 어쩔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유일한 휴식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시간을 이용해 기도하셨고 아버지와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쉴 시간이 없이 바쁘셨고 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저희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과 영성훈련 시간을 가질 때 담임목사님께서 각자 책 읽을 시간을 정해서 말해 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모두 몇 시 몇 시 정확한 시간을 말했는데 제 아내는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시간”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유일한 자유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입니다. 엄마들 공감하시죠.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나만의 휴식의 시간. 모두 잠든 후… 그래서 그런 노래도 나왔나 봅니다. 모두 잠든 후에 사랑할거야~
어찌 그 고단함이 엄마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 땅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세대의 사람들은 30대 유부남들이 아닐까 합니다. 직장에서 가장 분주하게 뛰어다닐 나이고 신입사원들과 간부들 중간에 끼어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빛내고 결혼하여 집을 장만할 때 얻게 된 가계대출을 갚느라 허리가 휘어질 정도입니다. 게다가 결혼하고 10년이 안됐기에 자녀 양육에 손이 많이 가는 시기입니다. 직장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가면 자식새끼들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책읽어 달라 무등 태워달라, 말태워 달라, 번개 파워 할 테니 쓰러져달라 별의 별 요구를 다 합니다. 정말 30대 직장남들의 삶은 쉴 새가 없습니다. 물론 저를 꼬집어 얘기를 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니래두요^^ 생각해보니 공생애를 지내신 예수님도 30대 남자셨네요. 그 고단함을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30대로서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시던 주님께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을까요? 잠시 후에 공개됩니다.
2.
예수님의 엄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했는데 불안한 마음을 쫒을 수가 없었습니다. 약혼남 요셉이라는 청년은 잠잠히 그녀와 혼인서약을 파기하려고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의 슬픔은 더했습니다. 누군가의 지지가 필요했고 좌불안석 불안한 마음에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로 마리아는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먼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엘리사벳 만큼은 그녀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처지였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휴식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이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 6개월 된 아가 요한이 세차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길질은 일종의 시위였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몸은 먼 여행길로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마음은 불안하고 확신이 필요한 마리아를 향한 격한 아우성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그것을 감지했고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마리아~ 당신은 정말 복된 여자군요. 그리고 당신의 뱃속에 자라난 아기 또한 너무나 복된 아기예요. 당신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우리의 주인이 될 거예요. 힘내세요. 제 뱃속에 발길질 하며 뛰노는 아기를 느끼시죠? 이 아기도 당신을 지지하고 있잖아요.” 마리아는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는 6개월 된 아기 요한의 발길질을 심상찮게 봅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향한 지지이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친구 예수를 향한 격한 감격과 흥분이었습니다. 예수께 경배한 최초의 사람을 우리는 베들레헴의 목동들로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의 뱃 속의 아기 요셉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한 최초의 경배자였고 지지자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친구로서 지지자로서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예비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잉태의 순간부터 둘의 우정은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친구 한 명 있으신가요? 예수님께 휴식이 되어준 참 친구 세례 요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오늘 날로 치면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씀을 통해 비전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40장 3~5절과 그의 마음이 감동되어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년 부 수련회 때 회당에서 전도사님이 외치셨던 이사야 40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이 말씀을 들은 소년 요한은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 말씀에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비전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 주님이 가실 그 길을 미리 걸어보는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 그는 광야에서 이미 예수님이 사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미리 지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매우 단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4-5)” 낙타털 옷 생각만해도 거칠겠다는 것이 예상되지 않습니까? 큰 소리로 발성을 내기 위해 낙타털 옷 위에 가죽 띠를 찼던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단백질 공급을 위해 고기 대신 메뚜기를 잡아 먹었고 비타민과 당분 섭치를 위해 야생꿀을 따 먹었습니다. 고작 그것 입고, 고작 그것 먹고 살아갔던 겁니다. 너무나 단순한 삶이었죠. 단순했지만 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 또한 간단명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는 일반 평민뿐만 아니라 세리들 심지어 군인들에게까지 회개를 촉구하며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시대를 밝히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지요. 그의 예언의 대상은 군인에게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히 왕에게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헤롯 왕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결혼한 사건이 있은 후 세례요한은 헤롯을 비난하며 꾸짖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4.
오늘 본문의 말씀 11장은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옥에 갇힌 때 있었던 일이라 설명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냐면요. 요한이 하직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때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들려고 자신의 온 삶을 다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고단했습니다. 광야의 삶, 광야의 소리,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리와 늑대, 전갈과 독사의 위협도 있었지만 헤롯과 같은 권력자들의 위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30여년 그렇게 험난한 예언자의 삶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합니다.
2절 3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과 비전으로 똘똘 뭉친 요한의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의심하여 던진 질문이라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인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당신의 길을 예비하려고 분투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한 일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하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자신의 삶의 최후 순간을 준비하면서 요한은 자신이 잘 살아 온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의구심이라기보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의미였고 목적이었던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저는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밟고 가시도록 기꺼이 나의 길을 내어 드렸습니다. 주님 당신이 나를 사뿐이 즈려밟고 가길 바랐습니다. 부디 주님이 나의 길을 통해 순탄한 길을 가길 바랐던 것이지요. 나의 사역과 외침을 통해 주님 당신만이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이었던 주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잘 살아온 것입니까? 오실 그이가 정녕 당신이십니까?”
우리 중에 참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때론 바보처럼 느껴지고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충분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때론 18절 말씀처럼 귀신들린 거 아니야? 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제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 아주 어렸을 적에 저희 큰 누나가 교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하자, 예수 귀신에 미쳤다고 누나를 막 나무랐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 잘 믿었고 섬겨며 따랐더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신 들린 거 아니냐? 바보 아니냐 손가락질 당하고, 죽음의 위협까지 느껴하는 삶이라니… 얼마나 그 삶이 지치고 고단했을까요? 여러분 중에도 분명 그런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좁은 길 걸어가고 있는데 삶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마저 느끼며 어느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인 것이지요. 이 무거운 짐은 죄짐이라기 보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십자가였던 것이죠.
5.
요한의 말년의 삶은 그랬습니다. 그의 수고의 짐은 극에 달해 있었고, 너무 외로웠고, 고단했으며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느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겁니다. 주님의 최고의 평가입니다.
“요한 니가 가장 큰 자야~ 너는 나를 위해 니 모든 삶을 다 받쳤잖아. 너는 나를 위해 너의 삶을 소진했다.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고, 나를 부인하고 나만 흥하기를 바랐다는 걸 안다. 너는 반드시 천국에서 큰 기쁨을 누릴거야. 지못미.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는 나에게 휴식 같은 친구로 남아 있구나~ 나 한 번도 말은 안했지만 너 혹시 알고 있니? 너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걸? 이제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려라. 니가 졌던 십자가 이제 내가 지고 가련다. 먼저 아버지집에 가서 참 안식을 누리거라. 내 곧 너를 뒤따라 가 너를 볼 것이다. 참으로 고맙구나 요한!!”
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기본적으로 세례요한을 향하여 던지는 주님의 메시지라고 판단합니다. 휴식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할만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죽음 앞에 선 세례요한을 향한 주님의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바로 세례 요한과 같은 이들입니다. 영적거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수고한 예수에 미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영적 거인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쉼의 자리 안식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수고했다고 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위해 분투하며 누적하여 왔던 모든 피로를 덜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삶 가운데 있었던 유일한 ‘휴식 같은 친구였습니다.’ 주님의 삶을 기뻐해줬던 소파보다 더 부드러웠던 쉼터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께 이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이 되어주는 삶 말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니 나를 밟고 올라 서십시오 라고 외치는 삶입니다. 진리를 위해 삶을 드리고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참 위로를 누리십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하며 지지해 주십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하고 분투하며 달려온 고단한 삶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십니다. 주님이 이제 그들의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11장의 마지막 세 절의 말씀은 꾸준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고단한 영적 거인들을 향해 던지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인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말씀 아닐까요? 내가 너의 휴식 같은 친구이니 나에게로 와서 쉬어라!! 고단한 예언자 요한을 향해 던지신 마지막 위로의 말이 이제 우리 심령에 울려 퍼집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18-20절을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http://youtu.be/cyf28VZUhdQ
설교문2014. 2. 1.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