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장 묵상 -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장로의 전통은 쓰레기통에나 버려버려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레이다망에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지저분한(?) 제자들이 아 글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응~ 좋아 딱걸렸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예수~ 당신들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거요?”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신랄한 공격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사야 29장 13절)으로 응수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딱 그말씀을 내가 읽을테니 잘 들어봐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6-7절)”
여기서 중요한 핵심적인 단어는 ‘입술’과 ‘마음’이겠죠.
마음은 근원이요 본질이라면 입술은 열매요 현상인 것이지요.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그럴싸하게 경건한 척 한다는 것이지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꼬집은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그러니까 율법 그 어디에도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없는데
장로의 전통에서는 그런 행동을 부정한 행동으로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이 앞서버렸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세대인 학사 에스라 이후에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적용 항목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근거를 둔 적용지침이 장로의 전통인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장로의 전통은 율법의 정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장로의 전통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꼬집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르반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제도입니다. 잘 들어 보시죠^^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말로 ‘제물(a scrifice, 祭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이라는 것이죠.
이 고르반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사와 성결한 삶’ 두 가지라고 레위기는 말합니다.
레위기의 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제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에 대해 기록합니다. 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것인지 거룩한 생활에 대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가까이 나아가다’ 라는 단어인데요.
이 '가까이 나아가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카라브(karab)’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희생제물이 바로 카라브의 명사형인 ‘코르반’인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가까이 그리고 깊숙이 침투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향해 침투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바로 ‘코르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이 변질되어버립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이 고르반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고르반’이라고 선포하면, 그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께 그리고 성전에 귀속이 되어버립니다.
그 물건의 소유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 의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변질되어 경건의 허울 아래, ‘나 자신은 하나님께 드려진 고르반입니다.’라고 선포하면서 부모님께 대한 부양의 의무를 회피하였습니다.
자식으로서 더 이상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말인 것이지요.
주님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르반’하면서 노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바껴도 한참 바꼈다는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일진데, 장로의 전통 따져 가며 손 안씻고 먹는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져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손도 안씻고 먹었을까요?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니 손 안씻어도 내 새끼처럼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만들어논 제도와 관습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하심을 방해하는 것들은 아닌지 되내여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자고 만들어 놓은 ‘예배’가 오히려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자고 드리는 기도가 나의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 나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견고한 진지로 바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라고 말하는 십일조와 헌금이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바껴버린 것은 아닌지?
더 사랑하고 더 보둠어 주고 서로 쉼이 되라고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껍데기만 남고 그 선한 기능은 다 잃어버린 탐욕과 이기심만 덕지 덕지 묻어 냄새나는 우릿간으로 변질돼 버린 것은 아닌지?
형식과 제도 속에 녹아진 율법의 정신들을 되새김질 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전통파괴는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장로의 전통을 파괴를 위한 퍼포먼스를 보십시오.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것은 장로의 정결법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정을 논하지 않고 그의 손을 귀와 혓바닥에 기꺼이 주님의 손을 갖다 대신 것입니다.
그 어떤 교회의 제도나 전통도 사랑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모든 제도와 형식은 하나님을 담아 내야 하며,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담지 못하는 제도와 형식과 전통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담아내는 허울에 불과합니다.
묵상2014. 2. 14.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