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묵상 - 새로고침(reset)>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제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의 이야기가 마가복음 마지막장 16장의 이야기인듯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죠.
첫째, 부활 소식의 전달자였던 여인들
둘째,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 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다 부활의 소식이 믿겨지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마저 너무 놀라서 제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두려워 떨고만 있습니다.(8절)
당시 그 시간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놀라운 일이긴 했겟지요.
그 여인들의 그 두려움과 놀라움의 생생한 감정을 제가 느낄 수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덤덤하고 무뎌진 것이겠지요?
마치 제자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아~ 이 아침에 주님의 부활 소식이 이다지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가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여인들을 통해 알리게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자들에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 봅니다.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과 여유를 주기 원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 살아나실 거란 것을 죽기 전에 누누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준비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여 흩어졌었고 예수 따르기를 포기한 절망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돌아가시기전 말씀하셨던 것처럼 갈릴리에 미리 가 있을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여인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갈릴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 청한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손내미심은 아닐까요?
컴퓨터 자판에 ‘새로고침(reset)' 키처럼, 배신과 부인 그리고 흩어짐의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의 소명과 비전을 리셋(reset)하자는 것일 겁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의 여정은 사흘 길 정도 될까요?
그 길을 걸으며 제자들은 예수님과 추억의 장소들을 지나야만 했을 겁니다.
밀밭을 거닐면서, 안식일에 밀을 따먹었던 그들을 변호해 주시던 자상한 주님을 떠올렸을 것이며
갈릴리 호수길을 걸으며, 그물을 던지고 있던 그네들을 부르시던 자상한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눈물지어야 했을 겁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 추억이기도 했겠지만 후회와 한숨의 길이기도 했겠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그냥 확 죽어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경험하며 가는 길이 '갈릴리로 가는 길'이었겟지요.
그 밑바닥 그 상태에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후회와 한숨과 절망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다시 토닥이며 새로운 비전과 소명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이 아침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부르심을 듣습니다.
“다시 시작하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내 삶을 리셋하려고 합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던 그 첫만남의 장소와 흥분 가운데로 더듬어 가보려 합니다.
첫 부르심과 첫사랑의 그곳 그곳으로 나를 부르시며 초대하시는 주님의 손내미심에 응답해 보려 합니다.
주님 무뎌지고 무덤덤해진 이 부족한 제자의 마음을 아시고 손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에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다시 일어섬으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옵소서.
아멘!
묵상2014. 2. 14. 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