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5. 07:34

<출애굽기 10~11장 묵상 -심판, 그것은 거룩한 구별입니다.>


이집트에게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교훈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재앙을 통해 뭔가를 가르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집트 사람들과 바로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얼마나 강력한 신인지를 심어주길 바라셨습니다.

열 재앙은 모두 이집트를 다스리며 이집트 인들의 생활 깊숙히 파고들었던 민간 신앙의 신들을 향한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박 재앙은 하늘의 여신 누트, 곡물과 풍산의 여신 오시리스, 폭풍우의 신 셋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흑암의 재앙은 태양신 레, 호루스, 누트, 하토르에 대한 공격이었구요.

장자 재앙은 재 생산과 출생의 신이었던 민, 출산을 관장하는 신 헤케트에 대한 공격인 것이죠.

이집트 사람들은 계속 연이어지는 재앙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겠죠.

히브리인들의 신이 이 모든 신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을 것입니다. 

결국 파라오의 종들과 이집트 백성들이 모세 앞에 와서 절하며 제발 애굽을 떠나 달라고 비는 형국까지 이르게 됩니다(출11:1-8절)

이는 모세가 이제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 재앙은 또한 히브리인들에게도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출 10장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들려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며, 내가 주님(야웨)임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런 재앙들을 내리시고 계시다는 것이죠.

재앙이 거듭될수록 히브리인들의 인상에 야웨 하나님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거지인 고센 땅에만 차별하여 내리지 않는 재앙들을 보면서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신들을 선택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이 고조되어 갔겠죠.

음악 용어로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해가고 찬양이 강력해져 갔을 것입니다.

모세의 참견으로 지푸라기도 받지 않고 벽돌을 구어야 했던 지난 날의 원망과 한숨이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 점점 씻겨져 내려갔을 것입니다. 


열 재앙 중 단연 가장 강력한 재앙은 ‘장자 심판’의 재앙입니다.

장자 심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재앙에 할애된 분량(11-13장)만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적법한 계승자입니다.

장자의 죽음은 계승자들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죠.

즉 이집트 파라오 체제는 계승되고 존속될 가치가 없는, 시효가 다 지나 버린 낡은 체제인 것이죠. 

오히려 이스라엘 장자들은 다 살아 남을 것이며, 이는 그들이 맏아들로 성별되어 세계 만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바쳐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결국 구분과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적법한 계승자들과 폐기처분되고 실효성을 잃어버린 장자들과의 구분이 바로 장자 심판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였음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출 11:7)"

심판은 곧 구별이며 구별은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도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 죄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하여 꼬치 꼬치 따지며 죄를 추긍하는 것으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은 가라지와 알곡의 구별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가라지에서 알곡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재앙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발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심판주’하면 상당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제 ‘심판주’하면 오히려 나를 구별하여 보호하며 건져내실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이겠죠.

재앙이 거듭될수록 히브리 백성들은 심판주로서 그들을 구분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내 삶 앞에 벌어지는 심판과 재앙이 곧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단편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더 알기 원합니다. 내 구주시며 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그리고 아버지를 알면 알수록 깨닫게 되겠죠. 세상은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하며 나 또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요.

왜냐하면 세상과 나 사이에는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구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도 이 거룩한 구분을 경험하시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깨닫는 시간 사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8. 7. 07:25

<창세기 22장 묵상 - 하나님이 복 그 자체이십니다>


학교다닐 때 시험을 좋아하셨나요? 시험을 즐기는 사람은 드물겠죠? 

시험은 우리를 늘 긴장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이 없는 방학을 좋아하나 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시험지 한 장을 받아 듭니다.

그것도 너무나 어려운 시험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25년만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모두 태워 드리는 제사)로 받치라는 겁니다. 

인신(人身)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지요. 너무나 부조리해 보이는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침묵 가운데 드려진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현재 살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산까지는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3일 길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왜 브엘세바 뒷 산이 아니라 3일 길이나 걸어가서 아들을 죽여 제사를 드리라 했을까요? 

3일의 시간은 그가 마음을 고쳐 먹고 브엘세바로 돌아갈 수 있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일의 시간동안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일관성 있는 믿음의 태도가 유지되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손에 불과 칼을 지고 말없이 걸어가는 아브라함 앞에는 태울 나무를 지고 가는 아들 이삭이 있습니다. 

조용히 산 꼭데기를 향하는 그들의 침묵을 깨는 아들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시험이 아니라, 아들 이삭의 믿음에 있어서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삭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일까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일까요? 

아들의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상외로 담담합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쓸 양을 친히 준비할 것이야(8)” 

드디어 아들 이삭을 향하여서 칼을 들어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이 멈추게 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예상치 않은 준비하심(여호와 이레) 때문에 부활의 잔치로 반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잘 통과 했고 A+(수)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이 시험의 성격과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독자를 떼어 내는 고통도 감수할 만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복 주심에만 관심 갖는지를 검증한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께만 집중하는지 아니면 독자 이삭에게만 집중하는지 판단하는 시험이었던 것이지요. 

내가 받은 복에만 관심 갖는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이 나의 복 자체이신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삭이 복입니까? 하나님이 복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시험지가 우리 삶에 던져집니다. 

복을 주신 분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인지? 아니면 복 그것에 대한 집착인지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신다(예레). 여와를 경외하다(야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예레) 세 히브리어 동사 모두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입니다. 

시험지를 던져 주시고 하나님은 마치 감독관 처럼 우리를 주시하십니다(예레). 시험 감독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야레) 의식하며 시험에 임하듯,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면 하나님은 즉시 움직이시며 준비하시는 분(예레) 이시라는 거죠.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시험입니다. 시험 감독관이 시험보는 아이의 태도를 주시하다 온전히 시험에 몰입하면 시험의 답을 알려줘버리는 얼토당토 않는 시험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그분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마음입니다.

순종은 즉시(immediately), 기쁘게(gladly), 온전히(completely)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시험은 수시로 찾아 옵니다.

시험 문제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복 자체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복의 결과물인지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지 마시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지세요.

그리고 고백하세요.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복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라구요~

그리고 하나 더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기억하세요.

선생님은 시험 문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 친구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맡긴다는 것을요.

감당할 수 있기에, 능히 풀 수 있다 믿기에 그 시험이 나를 찾아 온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7. 22. 06:52

<창세기 7장 묵상 - 아름다운 구속>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나비 애벌레들의 이야기입니다.

뜻도 목적도 모른 채 모든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기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올라가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즈려 밟아야만이 오를 수 있는 수 많은 높은 탑들이 애벌레들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높은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 곳에 오른 애벌레들은 허무하게 저 아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저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주인공 애벌레는 목적도 없는 정상으로의 허무한 경쟁을 내려 놓고 번데기의 과정을 통해 나비로 거듭나게 되죠.

그 번데기의 구속을 거친 후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비가 된 후 애벌레들이 그렇게도 오르고 싶은 정상을 훨훨 비상해 오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이 애벌레들의 탑쌓기를 방불케 합니다.

오직 다른 이를 짖누르고 밟아서 오르고 또 오르려는 인간들의 시퍼런 욕망들로 가득찬 세상이었습니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탐욕의 바다를 하나님이 물로 덮어 버립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독야청청하게 의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노아에 대한 짧은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1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9,16절)”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헛된 욕망의 탑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의 거푸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했습니다.

방주에로의 아름다운 구속을 자처한 것입니다.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19-20절)”

방주에로의 아름다운 구속은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오로지 물 위에 있는 방주만이 오를 수 있는 그곳으로 노아는 올라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단지 방주에 구속되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를 올려 세우고 계신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순종의 원리라 생각됩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참 자유이며 우리를 높이는 비결임을 깨닫게 됩니다.

애벌레가 번데기의 구속의 시간을 통해 아름다운 나비로 참 자유를 얻듯이, 우리네 삶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과 하나님의 명령에 구속됨을 통해 참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미로운 순종을 하는 자들은 물이 차오름과 동시에 그의 삶도 부상하게 될 것이며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감미로운 순종을 드리는 하루 되길 원합니다.

세상 헛된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귀한 말씀과 명령에 결박당하기 원하며 구속당하기 원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구속이 있을까요?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7. 07:36

<누가복음 20장 묵상 - 귀보다 귀(貴)한게 있습니까?>


아~ 오늘 누가복음 20장 본문은 목사인 저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는군요.

20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뒤엎어 정화시킨 후 바로 등장하는 사건들입니다.

성전을 뒤엎은 일은 율법학자들과 장로들, 제사장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며 위기였을 겁니다.

19장 후반부에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들이려 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20장을 해석하는 단서를 바로 이 말씀에서 찾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듣는데,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듣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일뿐더러, ‘듣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었기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지지 않으려고 질문 공세들을 펼치는 내용이 20장의 주 내용입니다.

듣지 않으려드는 자들의 최후의 발악이랄까요?


그들이 던진 질문은 사람을 살리는 질문이 아닌 죽이는 질문이었습니다.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닌 제압하기 위한 질문인 것이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쓰러뜨리고 책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절한 반문과 해설로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잘 피해 가십니다.


본문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듣는 삶’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했느냐?'는 ‘얼마나 들을 줄 아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들을 귀를 주소서. 

“주 여호와께서 학자(가르침을 받은 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사야 50장 4-5절)"


어떤 자리든 목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목사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에 상대의 말에 쉬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얄팍한 성경지식으로 가르치려 들며 상대의 우위에 서려듭니다.

어떤 자리에서 잘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하면, 십중 팔구는 목사이든 정치인이든 둘 중 하나일겁니다.


본문 누가복음 20장의 맨 마지막 부분은 지금으로 치면 목사급의 지도였던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평상복 대신 예배때나 입는 가운격인 예복을 입고 돌아 다니고

장터에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먼저 인사하는 것보다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백성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는 회당을 좋아하며 거기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잔치에는 늘 귀빈으로 분류되어 상석에 배정을 받아 앉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 귀한 헌금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파렴치한들입니다.

어째 율법학자들의 특징에서 목사들의 냄새가 나네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성도 여러분 목사 조심하십시오, 저 목사들 처럼 살면 안됩니다.” 

이런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로서 똑바로 살아야겠습니다. 귀를 막고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입은 다물고, 귀는 열어두어야 할텐데…

앞으로 저의 신앙 여정에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귀보다 귀(貴)한 게 또 있겠습니까?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만큼 겸손한 자세가 있을까요?

듣는 것(순종)보다 더 나은 제사가 있을까요?

주님 내 귀를 열어주셔서, 아침마다 주님의 귀한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고, 더 낮아져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듣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삶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게 하소서.

이것이 저의 평생의 소원이며 갈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5. 07:43

<누가복음 18장 묵상 - 먼지의 기도>

오늘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 가지 등장하는군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1-8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누가복음 특수자료인데 들어줄 때까지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대한 비교 대조 이야기(9-14절)은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 가짐에 대한 교훈을 일러줍니다.
그리고 18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여리고의 눈먼 거지의 치유사건(35-43절)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어 자신의 병을 치유받은 이야기입니다.

과부, 세리, 눈먼 거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와 또한 그에게 부르짖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먼저 내가 부르짖고 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과부는 자신이 간청하는 상대가 비록 불의한 재판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간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불의한 재판장이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줄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파워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이죠.
바리새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벌리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기도를 드리는 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압도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란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부르짖습니다. 
기도와 간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부르짖고 간구하는 상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 분은 나를 건질 능력이 있으시고, 고칠 힘이 있으시고, 나의 문제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풍성히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확신과 신뢰가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부르짖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다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과부는 원망과 원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합니다. 
세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죄악의 참상을 바라보며 한 없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눈먼 거지는 말할 필요가 없죠. 너무나 막막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나에게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아뢰었습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교회 전통에 의해 재의 수요일에는 가지를 태우고 남은 재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바르며 회개와 갱생을 촉구했습니다.
사순절(40일 동안 부활을 기다리는 절기)이라는 절기 자체가 부활을 기다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면의 성찰을 하는 시기이지요.
그 사순절의 시작이 바로 재의 수요일, 바로 오늘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우리 모두 드려야할 기도는 과부의 기도이며, 세리의 기도이며, 눈먼 거지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창세기 3장 19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줌 재로 돌아가는 먼지에 불과한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내 실존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흙으로부터 우리의 형상을 빚으셨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이며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실만큼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자신이 닥친 환란 앞에서 잿더미에 앉아 죄의 보속을 기다렸던 욥을 기억합니다(욥기 2장 8절).
아무쪼록 2014년 사순절에 내 영혼이 참 기도와 간구를 배워 영혼의 갱생을 누리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먼지에 불과한 내 영혼이 주님의 참 자비와 긍휼을 얻어 새롭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3. 4. 06:35
<누가복음 17장묵상 - 무익한 종>

요즘 북한 지하교회 실정을 그린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원래 제목은 ‘사도(Apostle)’라고 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북한 지하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사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는 지은이의 의도가 담겨있는 제목인 거 같습니다. 

1. 믿음의 양보다 질.
5-10절까지의 말씀은 전도여행으로 파송되었다가 돌아온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전도로 보냄을 받았던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는되 되지 않자 약간은 실망섞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돌아와 푸념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으니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질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 믿음은 겨자씨만한 양이 있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적당한 물과 햇빛과 온도가 있으면 싹이 움트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기도의 양이나 믿음의 양이 적다기 보다 기도의 질과 믿음의 질의 문제 콸러티의 문제는 아닐까요?

2.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전도여행 후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를 간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처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들의 믿음의 싹이 자라게 막아 버린 것은 마음 곳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나는 유익한 존재야'라고 생각하는 인정욕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인정욕구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본질과 임무를 도둑질 해 가 버립니다.
보냄을 받은 자이지 인정받는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종은 그냥 주인을 위해 충성 봉사하는 겁니다. 주인님 상차려 왔으니 칭찬해주시죠~ 주인님 마당 쓸고 왔으니 잘했다 해주십시오~ 이러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가정과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고, 또한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던 것이죠.
그들은 충분히 격려받고 인정받고 높임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익한 종이라는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내 안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인정욕구는 무익한 종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집어 삼켜버리려 듭니다.
또한 참 믿음의 씨앗이 자라는 것도 막아 버리구요.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십시오. 모든 존귀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고백만이 믿음의 참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9
 <마가복음 15장 묵상 -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삶은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매장에 관한 본문입니다.
버림 받은 한 유대 청년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 받았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 왜 당신의 아들을 이리도 왜 면하십니까? 이렇게 내 버리십니까?” 하는 간절한 절규입니다.
예수는 모퉁이에다 내다 버린 돌이었고, 짖밟힌 장미었습니다.
버림받은 감정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설령 거부당했을지라도 버림받았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조롱하며 말하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대적자들의 입을 통해 고백되어진 예수님의 희생의 이유 아니겠습니까?
자기는 구원에서 제외시킨 체 다른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과 죽음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구원하기 위해 버려지고 소외된 삶을 택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장 45절)”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임을 압니다.
나를 이 땅에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지요.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 내 목숨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삶이 아니라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는 삶, 버림받더라도 소외되더라도 짖밟히더라도 나의 건짐이 아닌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삶 이것이 저에게 주어진 십자가 일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참으로 쉽지 않은 좁고도 거치른 길입니다.
내키지 않는 길입니다.
언제쯤 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담담히 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믿음의 증인들 선배들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로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용기를 허락합니다.
여기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루마니아의 차오세스크 정권 아래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침례교 목사였던 요셉산이란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갖은 고난에 지쳤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한 책을 읽었고 내용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한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해 질문했습니다.
“주님, 저를 심문하는 자들을 포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제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자신의 시련을 얼마든지 포용할 담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를 향한 고문과 심문은 변함이 없었으나 고문하는 공산당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바겼습니다.
그들의 모든 말을 포용했고 부드럽게 반응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그의 태도는 오히려 공산당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 고문을 하던 당원은 “널 당장 죽이겠다!”고 외쳤습니다.

요셉 목사님은 그를 향해 대답합니다.
“이해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무기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면 언제든지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나에게도 마지막 무기가 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무기를 사용하면 나도 마지막 무기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 당원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네 마지막 무기가 무엇이냐.” 

요셉 목사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형편은 더 좋아질 것이지만, 당신의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가 했던 모든 설교는 나의 피로 얼룩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살았을 때보다 내가 죽었을 때 훨씬 더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몇 주 후 목사는 비밀정보를 통해 그 당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아주 미친 놈이야. 우리가 어디 바보인 줄 아나봐.”
정말 그 당원들은 더 이상 목사를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요셉 산 목사님은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줄을 다 붙잡았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줄을 다 놓고 내 인생을 주 예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 부지를 위해 좀더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여러 줄을 잡아보고자 발버둥치는 저의 삶에 우리는 경종이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라고 담대히 말하는 그 목사님의 고백이 저를 도전합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고백교회를 이끌다 결국 나치 정권에 의해 순교하셨던 본회퍼 목사님이 죽음 직전에 던지신 말 한마디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삶은 시작입니다." - 본회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8
<마가복음 14장 묵상 -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더니...>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겟세마네 언덕에서 예수님은 피 땀흘려 기도하십니다.
성지답사갔을 때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과정을 본 적 있습니다.
올리브를 그야말로 짖이기고 비틀어  눌러 압축하고 쥐어 짜야만 거기에서 정결한 기름이 나오더군요.
예수님은 기름틀에 들어간 올리브처럼, 세상을 밝힐 기름을 그리도 간절하게 준비하고 계셨나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말입니다.

오늘 하필 겟세마네 언덕에서 기도하는 주님과 대조적으로 골아 떨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하필'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새벽기도 후 본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저는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 머리를 갖다 대고 기도를 빙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시간 가량 지나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심령을 깊이 울립니다.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여 ㅠㅠ 저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십니다.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주님을 버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을 걱정해 드리는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을 겁니다. 주님!! 내가 누구인데요 수제자 베드로 아닙니까?"
31절 말씀을 보니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라는 말씀이 굵은 글씨로 다가오네요.
힘있게 말할정도로 자신있었던 베드로...
반면에 주님은 "오늘 이 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에 닭 울기 전에 니가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나를 버릴 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완전부정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삶을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나눴던 모든 우정과 애정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힘있게 호언장담했던 그 약속이 아직도 따끈이 살아 있는 이 밤에 말입니다.

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던 베드로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봅니다.
살아보겠다는 욕구,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있을까요?
진리를 위해 사는 것, 진리를 따르는 것 그것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헌신짝보다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베드로는 기름틀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도망을 선택합니다.
겟세마네(기름틀)에서 골아 떨어질 때부터 예상했던 수순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올리브의 생명이 순결한 기름으로 치환되어 더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봅니다. 

어제 묵상이 "깨어 있으신가요?"라는 제목이었는데...
저는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했네요.
저는 기름짜는 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닭이 두 번 울리는 듯한 환청에 도망치듯 본당을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 이밤에 저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저의 실체이고, 주님 앞에서 발가 벗겨진 제 모습입니다.

주님은 힘있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보다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베드로의 참 모습을 어쩌면 더 바랐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짜내야 하는 것은 어설픈 약속이나 포부가 아닙니다.
진실한 눈물 한 방울을 우리 주님은 원하지 않을까요?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무릎꿇으며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짖이겨 지고 쥐여 짜여지는 고통을 거부하는 생올리브 상태인 내 모습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여전히 기름틀을 거부하는 모습이지만... 진실한 눈물을 짜내며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보려고 다짐해 봅니다. 
하지만 이 다짐도 신뢰할 수 없기에 잠잠히 주님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생 올리브인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 주신 기름틀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순결한 기름되어 주님처럼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 비추는 삶 살기 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8
<마가복음 13장 묵상 - 깨어있으신가요? >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감람산 위에 앉아 있습니다. 
골짜기 건너 맞은 편 언덕에는 성전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저 맞은 편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허물어지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폐하기 위해 자신이 친히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이 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며칠이 지나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실 것입니다.
그런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없이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에게 어떠한 자세로 종말에 임해야 하는지 설교하시는 것이지요.

중심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미혹되지 말라. 환란을 참고 끝까지 견디라. 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또렷한 정신과 분별력을 가지란 말로 해석할 수 있겠죠.
흐리멍텅하게 살아가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이 무화과 잎삭이 나올 때인지 열매를 맺을 때인지 시기를 분별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금요기도회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10시 30분이 넘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잠들어 있기에 집에 들어가도 썩 유쾌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집에 가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쓸쓸한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느때 집에 들어가면 "아빠"하고 아이가 달려옵니다.
또는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아빠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으로 아빠가 언제 오실까,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아닐까요?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오늘도 아빠가 오시리라 기대하며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아버지가 언제 오시든, 주어진 관계들 누리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깨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는 삶 살고 싶습니다. 

오늘 화요일 전 교회적으로 전도하는 날입니다.
우리 1교구 식구들의 적극적인 동참 기대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 아닐까요?
우리만 잘 믿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나눠야겠습니다.
직장에 나가시는 분이나 여의치 않으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가능 하신 분들은 모두 동참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염리동 주변 이웃들에게 전해 보아요~
10시 30분에 시작하지만, 정 시간이 안되시는 분들은 점심 드시고 12시 30분까지 교회로 오셔도 됩니다.
많은 동참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깨어지내십시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7
<마가복음 12장 묵상 -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도대체 알기나 하는건가?>

어제 개그맨 윤형빈이 격투기 데뷔전을 치렀나봅니다. 격투기에 별 관심이 없지만 아침에 검색을 해보니 윤형빈이 케이오 승을 했다는군요. 마가복음 12장의 사건이 꼭 링 위에서 맞장 뜨는 장면인 것 같아 꺼낸 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대적자들과의 미묘한 신경전을 묘사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란 크게 네 부류입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들,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포도원 농부비유를 통해 선빵(펀치)를 날립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겨 놓고 멀리 갔는데, 이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사람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이야기입니다. 농부로 비유되는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펀치였습니다. 대적자들이 흥분하여 차례대로 몰려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의도는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13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지를 묻고 있습니다.
18절에는 사두개인들의 공격인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기에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논쟁을 합니다. 28절에는 서기관들이 몰려 와서 율법에 관한 질문으로 덤벼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완승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지혜와 위엄 앞에 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들은 모두 하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통달하셔서 그들의 정곡을 찌르고 그들의 실체가 허당이란 것을 드러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대적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대적하기 위해 성경이니 율법이니 운운하면 다가오지만 너희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는 거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두 가지를 몰라도 한참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서 어떤 것에 중점적으로 관심을 갖고 알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 두 가지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맥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행하다 보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성경을 가까이 하다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행하신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실 때,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행하심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무엇을 행하실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닮아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인 서기관 한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29절부터 31절까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정말 최대한 간단히 한 단어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의 근본 바탕을 두고 행해집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경의 사랑의 정신을 알지 못하면 성경이 난해한 책이며, 성경만큼 이해하기 힘든 책도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 렙돈을 헌금으로 전부 드린 과부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산법이 세상의 계산법과는 너무 다르기에 도통 이해하기 힘들죠.
많이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일부를 떼어 많은 돈을 헌금했고, 극심하게 가난한 차상위 계층의 한 여인이 자신이 가진 전부인 동전 두 개를 헌금했는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과부의 헌금이 가장 많이 했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과부가 가진 사랑의 총량(總量,total amount)이 다른 이들이 드린 사랑의 총량보다 많다는 것이지요.
여인은 자신이 드릴 연보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 렙돈 전부를 드렸던 것이지요. 그 녀의 사랑은 자신의 가난을 초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오로지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녀의 사랑이 가장 컸던 것이지요.
그녀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두 렙돈을 드린 여인의 삶 앞에서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나는 성경을 아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도대체 아는 사람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거늘, 제 삶이 꽹과리 딱 그것인듯 합니다.
성경을 더 알아야겠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