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5. 07:44

<창세기 43장 묵상 - 빨래판 >

삶은 쇠수세미처럼 너무나 거친데, 삶은 빨래판 처럼 너무나 굴곡진데 거기서 만들어지는 인격은 어찌 이리 부드럽고 매끈할 수 있을까?

아~ 삶과 인격은 그렇게도 다른 모양새를 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인간다움이 물씬 풍겨나오는 본문입니다.
가족을 그리워 하며 가족을 향한 애정과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요셉의 모습이 참 인간답습니다.
유일한 동복 동생인 베냐민을 보자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한 사람 요셉의 모습입니다.
20년 넘는 삶의 질곡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요셉의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생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기준으로 인간다움이란 눈물 흘릴 줄 아는 것입니다.
내 아픔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이는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세월호가 정치적인 이야기로 흐르는 것이 참 가슴 아픕니다.

어쩌다 자식 잃은 아비와 함께 우는 사람들이 종북세력이라 치부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까?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려주며 함께 잊지 않겠다고 금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정치적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약속했잖나요? 잊지 않겠다고... 우는 자와 함께 울겠다고...

저는 정치적인 노선과 상관 없이 여전히 울고 있고 해결되지 않는 자식들의 죽음의 의혹을 풀어 달라고 읍소하는 유가족들과 함께 우는 것이 참 인간적인 자세라 생각합니다.


청소년 시기의 요셉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건방지게 자신의 꿈을 형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까지 말하며 뻐기던 아이였습니다.
안하무인이었죠.
그런 그가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면면엔 친절이 베어 있습니다.
그의 따뜻한 환대는 형들을 당황케 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는 요셉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와 접대가 너무나 이상하고 어색한 상황이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그들을 다시 이집트로 보내며 했던 축복의 말을 기억했을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14절)"
여기에 사용된 은혜라는 단어가 '라하밈'이라는 단어입니다.
'동정(compassion)자비, 긍휼, 불쌍히 여김' 등의 뜻으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요셉의 삶에는 바로 이 은혜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친절했고, 자비가 넘쳤으며, 인애와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울줄 알았고, 함께 울어줄 줄 아는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통과했던 삶은 너무나 거친데 그의 인격은 어찌 이리 고매하며 부드러울 수 있을까요?
빨래판이 거칠 수록 빨래의 때가 더 잘빠지는 원리일까요?
숯돌이 거칠수록 뭉툭한 칼이 더 깍이고 다듬어지는 원리일까요?
거칠고 질곡이 있는 인생을 통과하며 요셉의 인격은 너무나 많이 다듬어져 있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군대 시절에 정말 많이 깍이고 담금질 되고 두들겨지면서 다듬어져 갔던 시기였습니다.
참 거칠고 메말랐던 광야와 같은 시기였지만 제 삶에 많은 연단과 인격의 훈련을 받은 시기였습니다.
우정을 배웠고 사랑을 배웠던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저는 사역자가 되면서부터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 있으면서 그러한 거친 삶의 현장에서 동떨어져 온실 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억지로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거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광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도전이 되는 아침입니다.
그 거칠고 메마른 삶의 열매가 쓴 열매가 아닌 달디단 은혜의 열매로 맺혀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빨래판 위에서 내 인격의 더러운 땟국물이 쪽쪽 빨려 나오고, 피존보다 더 진한 아름다운 인격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길 소망해 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3

<창세기 42장 묵상 - 꿈과 비전이 견인하는 삶인가?>


요셉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어릴적 꾸었던 두 번의 선명한 꿈을 이루는 것이었을까요?

형들과 부모님 앞에 보란듯이 성공하여 그들로 그의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었을까요?




요셉은 정신 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총리로서 너무나 바쁜 일상이었습니다.

7년의 풍년기에는 전국을 돌며 각 고을마다 곡식창고를 짓는 것을 관장했고 또 거기에 곡식을 들여 놓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었죠.

그동안 결혼도 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저처럼 말이죠^^

이제 7년의 풍년은 지나고 본격적인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흉년과 기근은 이집트 전국을 넘어 가나안 땅에까지 찾아온 재앙잉었습니다.

요셉은 분명 이 난국을 헤쳐가며 많은 이들을 도와가며 삶의 보람을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 한켠에는 삶의 보람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어떤 허전함이 존재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총리로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은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앞에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10명의 형들과 이집트 땅에서 대면하게 되다니요.

20년의 세월이 지난 이역만리 이집트 땅에서 맞게 되는 형들과의 조우, 그것은 요셉의 삶에 가해진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준비되었다 판단하신 듯합니다.




요셉은 42장 본문에서 두 번 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입니다(형들에게는 아직…).

요셉의 눈물은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20여년만에 가족을 다시 보게된 기쁨의 눈물이었을 것이고, 이집트에서 겪었던 녹녹치 않았던 인생에 대한 보상의 눈물이었을 것이며, 그와 가족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이기도 하겠죠.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9절)”

이 말씀을 대하며 요셉의 삶의 목적이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형들 앞에서 그렇게 유하게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그들에게 당했던 대로 되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돌로 말미암아 겪었던 이집트에서의 힘겨운 삶을 토로하며 그들의 양심에 고문을 가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지혜롭고 차분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 꾸었던 그 꿈만을 바라보며 그 꿈을 이루기에 혈안이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이집트에서 정신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9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요셉은 그 꿈을 까마득하니 잊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형들을 보고서야 그가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생각난 것이지요.




요셉의 삶에 어릴 적 꿈이 그의 목적과 방향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그를 지탱해주고 견인해 주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생각을 하며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저의 관심은 늘 ‘무엇을 하며 살지?’ ‘나는 어떤 사역자가 되어야 하지?’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내 꿈과 비전은 무엇인가? 그 꿈과 비전을 이루려면 나는 지금 우엇을 해야 하나? 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요셉의 삶은 이런 저의 삶의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요셉을 견인해주고 지탱해 주었던 힘은 꿈도 아니고 비전도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리 많이 등장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가 형통하였더라”

바로 이것입니다.

내 삶의 목적과 비전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 아침에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꿈으로 우리 삶을 견인해 갑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로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디딤돌로 사용하여 미래를 열게 하십니다. 

지금 여기, 현실에 충실하게 하며 그 성실함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꿈에 한걸음 다가서게 만드는 것이지요.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어느새 새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꿈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던 겁니다.




무엇을 이룰까, 어딜 향해 가야 하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내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와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2

< 창세기 40장 묵상 - 인생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구나!>


요셉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죠.

인생의 최저점을 찍어 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보석은 진흙 속에서도 빛나는 것이겠지요.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 실력과 됨됨이를 인정받아 감옥의 모든 일을 살피고 맡아 주관하게 됩니다.

간수장은 아예 감옥의 일에 손을 떼고 요셉이 다 알아서 하도록 맡겨버릴 정도였으니 요셉은 어딜 가나 그 성실과 됨됨이를 인정받는 멋진 청년이었군요.


오늘 본문에는 이집트왕 파라오의 두 관리, 즉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이 같은 날 동시에 서로 다른 꿈을 꾸었는데 풀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감옥에는 험악한 죄수들 뿐인데 그들의 꿈을 풀어 줄 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감옥의 죄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히 살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두 관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함을 보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 모습에서 세밀한 관리와 돌봄을 봅니다.

왜 간수장이 그에게 감옥 안의 제반 사무를 맡게 했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이 말 합니다.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대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그런데 여기서 요셉이 술맡은 관원과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먼저 술맡은 관원의 꿈을 풀어준 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러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4-15절)."

요셉은 좋은 의미에서 연줄을 잡아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대화 안에는 요셉이 자신의 그동안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풀어내고 있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한마디로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정을 돌봐줄 사람이 없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과 떡맡은 관원의 꿈은 해석해 줄지언정 정작 자신의 삶은 해석해낼 능력이 아직은 없나 봅니다.


요셉이 두 관리에게 했던 말이 겹쳐지면서 이 말을 자신에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이 두 관리에게 꿈을 해석해 줄 분이 하나님이란 걸 알리면서 했던 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을 자신에게 던지진 못했을까요?

"나의 인생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께 이르자!!" 

정작 중이 제 머리는 못 깍는 것일까요?

요셉의 인생과 그가 어릴 적 꾼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요셉이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왕의 관리의 연줄을 잡아 보려던 시도와 자신의 삶을 향한 억울함을 처리하지 못한 두 가지 이유로 요셉의 연단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조심스런 짐작을 해 봅니다.

요셉의 억울함과 그의 삶의 의미를 해석해 줄만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간절히 깨달을 그 때가 감옥에서 풀려날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내 삶의 의미와 해석 또한 하나님의 손에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왜 이곳에 있으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원통함과 억울함은 누가 풀어준단 말인가?

이 질문의 답이 하나님 한 분 뿐이란 것을 깨달을 때까지 저의 연단도 계속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내 삶에 풀어 해치실 하나님의 인도와 해석을 기대함으로 오늘 주일을 맞습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저의 삶을 해석해주시고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1

<창세기 33장 묵상 -  너의 미소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얼굴>



어제 본문이었던 32장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했죠.

그 때 야곱이 이 얍복나루의 씨름터의 지명을 ‘브니엘’로 불렀다는 것 기억나시죠?

브니엘(peniel)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죠. 

20년 만에 만나는 형 에서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의 하나님과 씨름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된 야곱, 그가 본 하나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겠죠? 하나님의 얼굴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정말 대단한 사건이긴 했나봅니다. 

창세기 33장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란 겁쟁이가 너무 많이 변해 있네요. 어제의 야곱 맞나요?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가족들의 맨 뒤에 숨어서 형을 만나려고 했던 야곱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가족들 맨 앞에서 형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본데서 시작됐다 봅니다.

우리 말로 ‘얼굴’은 ‘얼’과 ‘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얼이란 것은 정신을 의미하고, 꼴이란 모양을 의미하죠. 얼굴은 정신과 마음을 표현하고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분위기를 보았고 읽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본 하나님의 얼굴은 아마도 형과 화해하고 평화를 만들기 원하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얼굴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분의 얼굴 빛을 비춰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시편 67편 1절)


야곱은 일곱번이나 땅에 엎드려 형에게 절을 했습니다.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는 건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는 것이겠죠.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겸손한 태도이지요. 

그런데 야곱의 예상과 달리 에서는 야곱을 붙들고 울기 시작했고, 야곱도 함께 울었습니다. 에서의 눈물과 포옹은 야곱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 준 형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같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형의 얼굴이 그가 밤새 씨름하여 보았던 하나님의 얼굴과 닮았다는 거죠.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형을 통해 또 한 번 확인하고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구요. 

바로 우리의 이웃들의 환한 미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호의(친절)와 신적(神的)자비가 상대방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용서와 용납 그리고 사랑은 그의 얼굴에 녹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과 흡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던 야곱이 이를 증명하고 있잖습니까? 

오늘 나의 얼굴에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녹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링컨은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저는 제 얼굴에 책임져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 얼굴에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 있는지 의구심을 가져보며, 더욱 하나님 형상을 닮은 자로 정진하기를 다짐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던지는 작은 미소 속에서 우리의 이웃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부터 6일동안 휴가를 갖습니다.

휴가기간엔 묵상 문자를 쉴까합니다.

그동안 모두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얼굴로 다시 대면할 날을 기대합니다^^

샬롬!!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0

<창세기 32장 묵상 - 하나님을 지팡이로 삼는 절름발이 인생>


시간이 약이 될 수 있을까?

야곱의 마음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삼촌 라반과의 20년의 삶을 겨우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즐겁지만 않습니다. 왜 즐겁지가 않나요? 

그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형과의 갈등 때문입니다. 

형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빼앗고 형에게 가야했던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20년의 세월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의심 가운데 형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과 가축들의 행렬을 셋으로 나누고 자신은 맨 뒤에 따라가게 됩니다.

 형의 공격이 있으면 피하려는 얄팍한 생각이었던 거죠. 겁쟁이 야곱, 그래도 어떻게 살아 남은 인생인데...

얍복강이라는 강(실은 작은 시내예요)을 건너면서 가족들을 모두 앞서 보낸 후 그는 홀로 남았습니다. 

그날 밤 얍복강가에서 그는 정체를 모르는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밤을 지세며 씨름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그 씨름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리고 뼈가 엇나가 절름발이로 만듭니다. 절룩거리면서도 야곱은 그를 끝까지 놓지 않고 축복해 달라고 메달립니다.


그 천사가 야곱에게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이 질문은 야곱이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라고 압박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야곱입니다.”라는 대답은 ...

“나는 속이는자,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사는 경쟁적인 인생이었습니다.”라는 반성이 담긴 대답입니다. 

하늘의 씨름꾼은 이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불러줍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뜻이 이스라엘입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부분이 참 중요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된 것입니다. 31절 말씀은 그때 ‘해가 돋았다’는 말을 하며 야곱의 인생에 새로운 광명이 비치고 그의 삶에 새 날이 열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야곱은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야곱의 씨름은 기도였고, 그 기도를 통해 그는 자신의 씨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건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로 부른 것입니다.


브니엘에서의 씨름은 지난 삶의 요약이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은 지지 않으려고 투쟁하였던 씨름으로 요약됩니다. 형과의 씨름, 외삼촌 라반과의 씨름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죠.

야곱은 비록 인생들과의  씨름에서 승리하였지만 그 인생의 투쟁과 씨름 자체가 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비록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하룻밤의 기도를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달았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경쟁자로서의 삶의 경력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지팡이에 의지하는 절름발이가 된 것입니다. 

절름발이로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세상 기준으로 경쟁하며 복을 받고자 분투하며 달려 왔던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절름발이더라도 하나님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바른 길을 걸어가는 인생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내리침을 받아야할 환도뼈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

내리침을 받더라도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지팡이 삼아 걷는 인생 되기 원합니다.

오늘 내 삶의 현장이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기 원하며 내 삶이 '이스라엘' 되길 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39

<창세기 30장 묵상 - 공평하신 하나님>

야곱이 아들만 11명이요 딸 한 명을 낳은 끔찍한 참사(?)가 30장 전반부에 기술돼 있네요.
저는 아들 둘만 키워도 시쳇말로 뻗치는데... 야곱은 아들 11명 키우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겠구나 짐작해 봅니다.
물론 엄마가 네 명이니 그나마 수월하긴 했겠어요^^
제가 셋째를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야곱증후군이 나타나지 않을까여서 입니다.(믿거나 말거나^^)
셋째는 이쁜 딸로다 입양을 해야 할려나 봅니다.
자녀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네 명의 공식 비공식 아내를 골고루 생각하시며 골로루 자녀를 주는 배려를 허락하십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동생 라헬이 남편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불공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레아를 생각하시고 그에게 7명의 자녀나 허락하셨습니다. (15절에 보면 라헬의 허락을 받고서야 남편과 동침함을 봅니다.)

레아가 7명의 자녀를 낳는 동안 라헬은 안타깝게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남편과 자는 시간이 가장 많았고 혼자 독차지 하다 싶었는데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던 겁니다. 14년 동안 불임을 겪어야 했던 여인이 바로 라헬입니다.
라헬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그랬던 것 처럼 생산하지 못하는 아픔과 기다림의 시간을 오래 겪음을 통해 자신이 믿음의 영적 계보를 잇는 적임자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랜 기다림 가운데 낳은 아들 요셉이 야곱의 족속 전체를 구하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하나님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참 세심하면서도 세밀하게 각자의 형편을 살피시는 분이라는 거죠. 어떤 이에게는 양(量, quantity)으로 어떤 이에게는 양보다 질(質, quality)로 보상을 해주시는 것을 보십시오. 
어떤 이에게는 물질의 부를 허락하셨다면, 다른 이에게는 부는 없을지라도 인생의 깊이와 인격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나 가진 재물 없다고 너무 불평 불만 갖지 마십시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잖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인이 잘 아실거구요~

두번째 포인트는 야곱의 인격이 계속 다듬어져 가고 있다는 겁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야곱은 성실의 훈련을 해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신실함의 훈련이죠. 
야곱은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아들을 얻습니다.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었죠. 이제 야곱은 결단합니다. 삼촌의 집을 떠나 귀향할 때가 되었구나!!!!
이에 야곱은 14년 동안 미뤄왔던 삼촌과의 임금협상을 진행합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29절)"
이 말 한 마디에 야곱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라반의 가축이 야곱이 오기 전에 많지 않았지만 야곱이 열심히 해주어 재산이 수십배로 불어났습니다.
야곱은 무려 14년 동안 임금을 아예 받지 않고 무보수로 일을 했습니다. 
아내를 받는 조건으로 임금도 없이 일을 하는데도 그냥 대충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처럼 삼촌의 일을 했다는 겁니다. 
뭘 말하냐면요. 야곱이 정말 성실한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간사하게 남을 속이며 무임승차에 익숙했던 야곱이 이제 성실한 사람으로 완전히 환골탈퇴한 것입니다.

성실이란 어떤 거냐면요. 
어떤 일을 하던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야곱은 삼촌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한 것입니다.
이 자세를 달리 얘기하면 삶이 예배요, 예배가 삶인 삶입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하듯 예배의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다. 
반 드시 그 성실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결국 유전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도 하나님은 야곱의 양떼를 축복하시어 그를 거부로 만들어 주시잖습니까?
삼촌이 민무늬의 양을 주면서 얼룩무늬 양이 태어나면 너 다 가져라 했는데... 놀랍게도 야곱의 양들이 새끼를 나면 얼룩무늬 양을 낳게 되죠.
물론 이 과정에서 야곱의 노력과 지혜가 들어가긴 했습니다. (짝짓기 시기에 양들이 물마시는 건너편의 나무들을 얼룩으로 만들어 그것을 보고 얼룩 무늬 양을 낳게 한 것)
어쨌든 야곱의 성실함과 지혜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삶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인격 훈련의 또 다른 목표, 바로 성실의 훈련, 신실함의 훈련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의지하시고 성실하심으로 삶이 예배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38

<창세기 29장 묵상-뛰는 놈 아래 엎드리는 놈>


야곱의147년 인생은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부모님 슬하의 성장기 - 밧단아람의 라반 아래서의 나그네기 - 벧엘로의 귀향 - 이집트 망명기)

부모님 밑에서 형과 경쟁하며 속이며 살와 왔던 천 번째 시기를 보내고 

이제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시기에 그는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숙하지 못했었죠. 형과 경쟁에서 형을 속였고, 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이고 복을 가로챘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시기인 밧단아람에서의 삶은 첫번째 시기의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속이는 자에서 속임을 당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쏘는 놈 있다는데… 야곱은 자신이 나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요셉을 쏘아 쓰러뜨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외삼촌 라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번째 시기는 야곱의 성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 사기꾼 야곱이 영글어져 가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 장을 시작해서 야곱의 신앙과 인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숙해 가는지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그의 삼촌인 라반을 만나 자기 인생이 풀리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라반이란 사람은 야곱보다 더 교활하고 잘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라반의 수를 읽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형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뺏어 냈듯이, 라반은 야곱이 자신의 딸 라헬을 사랑한다는 약점을 이용해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할 계획을 짭니다. 

딸 라헬을 주는 조건으로 7년 동안 야곱의 노동력을 이용해 먹습니다. 7년이 지나자 둘째딸 라헬을 줘야할 기한이 찼습니다. 

라반은 못생기고 시력도 좋지 않아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안경잽이(?) 큰 딸 레아를 신부로 줍니다. 

첫날밤 야곱은 레아인지 라헬인지 구분도 하지 못하고 신부를 맞은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던 겁니다. (빰빰빰빰 빰 - 배경음악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1악장^^)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지요. 야곱은 라헬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라반의 집에서 일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부분에서 야곱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그가 바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사랑에 눈을 뜨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몸을 기꺼이 받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야곱이 그동안 뿌린대로 거두고 있다는 겁니다. 상황이

뒤바뀐 거죠. 

무슨 말이냐면요. 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이고 복을 차지했던 야곱이 이제는 시력이 좋지 않은 레아에게 속아 넘어 갔다는 겁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야곱은 7일만에 부인이 두 명이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레아와 라헬 자매는 남편 야곱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 자매간의 싸움을 보며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레아와 라헬의 경쟁은 자신과 형 에서의 경쟁을 상기시켰을겁니다.밧단 아람에서의 삶은 야곱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을 겁니다.형과 경쟁하고 아버지까지 속이며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뼈 아픈 반성이 있었을 겁니다. “아~ 내가 뿌린대로 거두는구나” 그러면서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을 했을 겁니다. 속임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억울한 지를 알게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하는 삶이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도 알게 됐을 겁니다. 



이제 야곱은 더 성숙해 가면서 사랑하는 법과 함께 새롭게 배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지사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이지요. 

야곱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지사지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것은 훈련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켜 가십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지금 뿌린대로 내가 거둘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존중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야곱은 지금 이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삶 전체를 네 시기로 나눈다면 몇번째 시기를 살아가고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야곱처럼 저 또한 밧단아람에서의 성숙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30대를 지나며 연예를 통해 결혼을 통해 그리고 자녀 양육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연예와 결혼은 다른 사랑이었으며,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은 분명 다른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사랑을 배워가야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인격적으로 깍아내야할 모난 성품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 분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신실하지 못한 것, 겸손하지 못한 것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인격적 결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것들을 다듬고 또 다듬는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겪고 있으며 상당한 시간동안 이 인고의 시간은 계속 될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2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야곱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다룸을 받죠.

저도 평생 하나님의 다루심 앞에서 다 이루었다 하지 않고 겸손히 저의 모남을 인정하며 무릎 꿇고 싶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되기보다, 뛰는 놈 아래 바짝 엎드리는 겸손하고 성숙한 사람 되기 원하는 것, 이것이 이 아침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샬롬.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37

<창세기 28장 묵상 - 떠나면 보이리라>

본문은 야곱의 삶의 분수령(터닝포인트)이 되는 벧엘의 체험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신앙의 전환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스무살에 여수 애양원에서 있었던 전도학교라는 수양회를 통해 예수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야곱도 어린 시절부터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직접 목격하였고 '복'을 누리고 전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뼛속 깊이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삶은 그와는 너무 동떨어진 삶처럼 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늬만 신자인 것이죠. 체험도 결단도 헌신도 없는 썬데이 크리스챤 말입니다.




이런 야곱의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는 계기는 '떠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속이면서 빼앗게 된 야곱의 삶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축복은 받아 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형을 피해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이죠.

그가 익숙했고 사랑했던 본토 친척 아비집 그리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익숙한 비빌 언덕들이 모두 제거 되고 들판에 홀현단신으로 내동댕이 쳐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하나님은 늘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참 비움의 상태, 그 때에 하나님이 비로소 보인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반면 그의 형 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전혀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자신의 모든 축복을 빼앗겨 버린 에서는 분노와 허탈감에 어찌할바를 모른 채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달래 보려합니다.

오늘 새벽기도 담임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서는 덧샘의 신앙이었고 야곱은 뺄샘의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현재 있는 히타히트 족의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이스마엘의 후손인 자매를 선택합니다. 그 자매는 당시 최고의 유행과 트렌드를 선도했던 이집트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에서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마음이 없이 삐딱선을 타버린 것이죠. 

같은 상황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 하나님과 조우하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오늘 깨닫는 진리는 간단하네요.
비우면 보이고, 떠나면 보이며, 의지하였던 것 놓으면 만져지고 만나지며 보이리라!!
힘든 길이라도 비우는 길, 떠나는 길을 선택해야 옳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는 아침입니다. 
마지막으로 들판에서 외롭게 자고 있던 고단한 나그네 인생 야곱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향한 음성으로 알고 되세겨 보며 묵상을 마무리 합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15절)”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36

<창세기 25장 묵상 -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


배고픈 형님을 코너로 몰아 장자권을 빼앗아버린(?) 야곱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울 수 있을까요?

오늘은 야곱의 어린시절을 묵상하며 조금 다른 각도로 그의 삶을 조명해볼까 합니다.


야곱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운명을 점지 받았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어린 자로 태어날 운명, 버금으로 살아갈 운명, 축복을 독차지 하지 못할 운명, 앞 선이의 발 뒤꿈치를 바라보며 걸어야할 운명이 그의 운명이었던 것이죠.


야곱, 그는 매우 목적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한 집념과 열정이 다른 이보다 뛰어났던 인물이죠.

아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태생적인 기질이요 재능(?)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의 이름 또한 그의 목적지향적인 됨됨이를 너무나 잘 드러내 줍니다.

야코브란 '발꿈치를 잡았다'라는 뜻입니다.

형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발꿈치를 잡아야했던 치열한 삶의 소유자 야곱입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앞으로 창세기에서 펼쳐질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지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내성적이었습니다. 늘 장막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장막에 머문다는 것은 어머니의 활동반경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로부터 세상을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반면 에서는 외향적이고 거친 남자였습니다. 

에서는 들에 나가 사냥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이삭은 첫째 아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형의 약점을 정확히 분석했습니다. 

배고프면 정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이 사냥을 하고 들어와서 완전히 탈진했을 때를 노립니다. 

마치 복싱에서 두들겨 맞아 정신 없는 상대를 코너로 몰아 부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에서는 장자권이 별거겠느냐며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립니다. 

일단 모든 상황은 야곱이 원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왜 그렇게 장자권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그야 유산과 축복권 때문였겠죠. 장자는 유산을 두 배로 받습니다. 그리고 장자는 언약을 이어 받는 사람이 됩니다. 

야곱은 복을 받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개척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타고난 기질과 성질은 어찌하겠습니까?

그것을 탓하며 운명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운명을 뛰어 넘을지는 자신의 몫이요 판단인 것이죠.

오늘은 저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어려서 공부를 무척 싫어하는 아이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은 책이요 숙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방학 숙제를 제대로 해서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려서 늘 듣던 말은 "너는 왜 그렇게 산만하냐?"였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10분 이상 버티기가 무척 힘든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서울대 법대가라고 서울 경(京)에 법 헌(憲)이라 지음 받은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이름 따라 대학을 법학과를 가긴했지만 그 법학은 저를 옥죄는 족쇄였습니다.

아예 대학 시절 공부를 놔버렸습니다.

그러던 제가 스물 아홉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생기자 책상머리에 앉게 되더군요.

선교지에 가서 목양할 양들을 위해 성경과 신학을 잘 배워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해지자 공부가 재밌어지더군요.

책상에서 엉덩이 떼지 않고 3시간까지 앉아 있기 일수였습니다.

제가 타고난 운명과 기질을 극복하는 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제가 에니어그램을 하면서 왜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하고 집중을 못하는 산만한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갖고 호기심을 갖는 그런 기질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명확한 목적의식은 그 기질을 뛰어 넘을 수 있게 도와주더군요.


너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야곱을 너무 파렴치하고 간사하게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른 각도에서 야곱을 바라보았습니다. 

명확한 목적의식은 우리 삶에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며 넘어서게 만드는 힘을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내 삶에 대한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35

<창세기 23장 묵상-은 400세켈, 대가를 지불하는 삶>


아브라함이 백년 넘게 함께 걸었던 인생의 동반자 사라를 예의를 다하여 떠나 보내는 본문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벌써 서른 일곱이 되어 있는 해에 사랑하는 아내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갑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히타히트족(헷족)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히타히트 족이 살고 있는 주류사회에 끼지 못하고 나그네요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형편입니다(4절).

그는 히타히트 사람들을 찾아가 묘지를 쓸 수 있도록 땅과 권리를 허락해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그 땅의 사람들은 어떤 무덤이든 원하는대로 골라 잡으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이란 사람의 밭과 동굴 무덤을 미리 물색해 두었던지 그의 밭과 동굴을 지목합니다.

에브론이 그냥 가져가라는 제의에도, 아브라함은 무료로 받지 않고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은 400세켈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밭과 막벨라 굴을 자신의 소유로 삼습니다.


나그네요 거류자로서 아브라함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의미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땅은 자신을 위한 땅이 아니라 망자가 되어버리긴 했으나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 사라를 위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저 세상으로 가긴했지만 아내를 예우하며 최선을 다해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향이 아닌 이역만리 가나안 땅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묻을 땅이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비애였을 겁니다.

적어도 죽은 가족들의 시신만은 안장하길 바라는 아브라함의 간절함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인격과 영향력을 새삼스레 발견합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상식으로 히타히트 족은 세계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던 민족으로 호전적인 민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히타히트 족 깊숙히 침투(?)하여 그들에게 호의를 받으며 인정받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히 그들을 사로잡을 인격적인 향기와 영적인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방 나그네 거류민에게 400세켈짜리 땅을 거저주겠다고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민족 사이에서 영향력이 없다면 과연 어떤 무덤이든지 당신이 원하는대로 골라 잡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참 겸손하고 청렴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의 인격은 물이 오를대로 오른 것 같습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땅을 삼으로 재물과 자기 이득을 먼저 챙기지 않는 장면도 그렇고

그곳 주민들 앞에 큰절을 하며 자신을 낮추는 모습도 그렇고

그의 인격의 향기가 묻어 나옵니다.

또한 그가 다른 목적이 아니라 무덤으로 땅을 샀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 선견지명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향을 떠난 이들도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성묘를 하며 가족의 무덤을 찾는 법입니다.

무덤만큼 확실하게 회귀본능을 자극할 꺼리도 없는 것이죠.

실제로 백여년 후 이집트로 건너갔던 야곱이 죽자 그 아들 요셉이 야곱의 시신을 아브라함이 사 놓았던 막벨라 굴에 안치시키는 걸 봅니다(창세기 49장 30절).

나그네로 살아가게될 자신의 후손들을 뭉치게 할 구심점으로 이 무덤을 삼은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개인적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삶에 대해 큰 감응이 있습니다.

목회자로 거저 받을 기회들이 많습니다.

어느새 그런 것에 익숙해 있는 저를 보며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거저 받고 대접받고 대우받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베풀며 대가를 지불하며 희생하며 말석에 앉는 훈련들을 평생해 가야겠습니다.

비육지탄(髀肉之嘆) 이란 말이 있죠.

원래 할 일이 없어 가만히 놀고 먹기 때문에 넓적다리에 살만 찜을 한탄한다는 뜻인데요 삼국지의 유비가 했던 말입니다.

유비는 조조에게 쫒겨 신야(新野)라는 작은 성에서 친척이었던 유표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4년간 할 일 없이 지내게 됩니다.

어느 날 유표의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우연히 변소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유난히 살이 찐 것을 보게 됩니다. 순간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그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연유를 캐묻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 넓적다리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말을 타는 일이 없어 넓적다리에 다시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은 사정없이 달려서 머지않아 늙음이 닥쳐올 텐데 아무런 공업(功業)도 이룬 것이 없어 그것을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비육지탄인데요.

저도 늘 대접 받고 거저 받아 누리는 삶을 살다가 어느날 문득 늘어난 뱃살을 보게 되며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치열한 영적전쟁과 목양의 자리로 부름을 받은 몸인데… 이렇게 살만 쪄서 되겠나 하는 반성이 들게 됩니다.

대가를 지불하며 말과 경주하여도 버금가는 영적 무장상태로 저를 단련해 가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