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5. 07:56

<창세기 13장 묵상 -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


롯과 아브람의 종들이 다툽니다.

이유는 소유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땅은 좁은 데 재산의 가장 중요한 목록인 가축들이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툼은 아브람의 대범한 양보와 포기로 종결됩니다.

아브람은 손 아랫사람인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권한을 줍니다.

롯은 못이긴척 하며 기름져 보이는 땅을 선택합니다.

아브람이 바보가 아닌 이상 씁쓸한 마음을 지우기 힘들었을 겁니다.

'짜식 부모 없이 자라는 것을 거둬줬더니 좋은 것은 지가 먼저 먹어 버리네'

요런 유치한 생각도 애써 지우고 지웠겠죠.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저는 이 말씀이 크게 와 닿습니다.

아브람이 자신이 우선 선택할 권한을 포기했을 때...그 직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죠.

하나님은 아브람의 과감한 포기와 양보에 대해 약속의 재 확인으로 보상해 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보다 확실한 보상이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재확인 말입니다.


어떤 일을 선택하며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 늘 망설임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선택이 바른 선택이라는 하나님 편에서의 지지가 있다면 매우 큰 안정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포기를 보았고 그 마음을 위로하시며 보상해 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약속을 자주 확인 받는 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전을 받고, 비전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달려가는 길이지만 가끔 망설여질 때가 있습니다.

잘 가고 있는 것인가? 잘 선택한 것인가?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확인되어진다면 너무나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과 양보 그리고 포기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신 분이시네요.

반드시 보상해 주시고 지지해 주십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재확인으로 그 보상을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인 것이죠.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양보하며 포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시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5

창세기 12장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역사 그러니까 세계사를 기술해 오던 창세기의 저자는 갑자기 창세기 12장에서 한 인물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카메라의 줌을 잡아 당기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는 노아의 아들 셈의 족보가 길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셈족의 후손이었던 아브라함이 소개 되면서 창세기 12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새로운 민족의 탄생을 선포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탄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셈족을 포함한 인간의 역사가 '아래로부터'의 족보로 생성된 민족이라면, 아브라함에 의해 시작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독특한 목적과 약속에 대한 순종으로 형성된 '위로부터 생성된' 민족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지점이 구속사(救贖史-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세계사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이 중요하며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왕성하게 이어져 오던 셈족의 족보는 갑자기 아브람에게 와서 멈춰 버립니다.

낳고 낳음의 수없는 반복속에서 사래의 낳지 못함(不姙)은 돌발적인 불협화음입니다.

자연 종족계승의 좌절을 의미합니다.

75세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던 부부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던 말씀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아이를 낳아 종족을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궁극적 목적을 둔 본토 친척 아비집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도록 아브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그를 통한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계관과 종족번식의 가치 위에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부터 탈출을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의 유대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건설되기에 아브람은 가족적 유대로부터 창조적 탈출을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사래의 불임(不姙)과 씨족사회로부터의 이탈은 아브람을 무겁게 누르는 짐이었고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열국의 아비로 그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람의 믿음 위에 새롭게 그 역사의 서막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한 복은 그 가정과 그의 씨족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점의 원리가 아니라 나눔과 유통의 원리로서 '복읜 근원'의 삶에 초대하고 계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적인 불임(不姙)과 창조적인 분리(分離)에 대해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75세의 노인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인생의 불임과 생산하지 못하는 아픔들, 즉 열매 없는 공허함은 어쩌면 어쩌면 하나님의 복의 신호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은 창조적인 분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고 기대고 살아왔던 '본토 친척 아비집'은 무엇일까요?

거기로부터 탈출하여 분리되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도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적인 분리에 따르는 모험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나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은 무엇일까요? 나의 안정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어울리지 않는 '본토 친척 아비집'의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과감한 탈출과 분리를 하지 않고는 아브람이 들어섰던 믿음의 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빨고 있던 세상의 달달하고 기름졌던 것들을 끊고 하나님이 먹여주시는 이유식을 받아 먹어야겠습니다.

창조적인 탈출, 창조적인 분리를 통해 참 믿음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2

<창세기 11장 묵상 - 흩날리는 먼지이고 싶어라>


오늘 본문이 창세기 10장인줄 알고 묵상하다 큐티집을 펴 보니 11장이 본문이었네요.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만 나오는 장이어서

묵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묵상거리가 있겠거니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럴 땐 참 난감합니다. 

아무리 묵상해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때, 하나님의 성품이 본문에서 발견되어지지 않을 때…

그럴 때 그냥 ‘허허’하고 웃으며 덮습니다.

그런 날도 있는 것이지요.


급하게 부랴부랴 창세기 11장을 묵상합니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이 나오죠.

인간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흩어짐(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에 정면대항하는 항신(抗神)적인 결집인 것이죠.

창세기 4장에서도 아벨을 살해한 형 카인에게 내려진 벌이 땅에 유리하고 방황하는 벌이었습니다.

그 때도 아벨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딴 에녹성을 지어 하나님을 대항했었습니다.

바벨탑의 세대도 하나님의 유리 방황의 의도를 오해하고 탑을 쌓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과 탑(대)은 항상 교전 상태를 의미하며 잠재적인 전쟁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의미이죠.


항신적인 결집과 전 지구적인 일치와 단결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창조의 처음 의도대로 '흩어짐'이었습니다.

흩어짐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저는 인간을 향해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먼지의 특징은 흩어짐입니다.

바람이 부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먼지입니다.

먼지가 흩어지지 않으려고 물과 밀착하여 진흙을 만들고, 그 진흙이 변형되어 벽돌이 되어 하나님을 저항한 것입니다.

먼지는 흩어지는 것이 먼지다움입니다.

바람에 날려 바람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먼지다움입니다.


내 안에 벽돌처럼 단단한 자아를 부수어 다시 먼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抗神) 쌓고 있는 내 자아의 벽돌들을 이제 허물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는 바벨탑의 온전한 붕괴와 함께 시작됩니다(12장의 아브라함).

내가 무너지고 부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통해 이뤄질 수 없습니다.

나를 쳐부수고 깍아내는 먼지로의 치환의 아픔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나의 이름을 내려고 했던 교만과, 나의 가치와 신념으로 쌓으려 했던 탑을 이제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허황된 꿈과 목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게 부수고 또 부수어야 합니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드러날 때까지 말입니다.

바람과 함께 날리는 한 점의 먼지이고 싶습니다 주님.

주님이 흩으실 때 어디로든 날아가는 한 점의 먼지이고 싶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1

<창세기 9장 묵상 - 살림의 하나님>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이 핵심입니다.

제 생각엔 9장 첫머리에 이런 부가적인 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세기 1장 첫머리에 있는 상황설명이죠.

모든 땅위의 호흡하던 생물들은 싸그리 수장을 당하였고, 오로지 노아의 방주에 탔던 노아 가족과 동물들만이 공허한 땅 위에 내동댕이 쳐져 있습니다.

땅은 홍수 후에 혼돈 가운데 있으며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인간을 살려 번성시키시기 원하시며, 어떻게든 세상을 창조할 때 처음 가졌던 의도대로 인간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창세기 9장은 바로 하나님의 '살림'의 의지가 명백하게 드러난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의 의지들은 몇 가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먼저 첫 인간 아담에게 주셨던 복과 권세를 동일하게 노아에게 주십니다.

거기다 식물만 먹고 살던 인간에게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인간 살림의 의지라 봅니다.

홍수 이후에 땅에 먹을 것이 있었을리 만무하고, 먹고 살아가야할 노아 식구들을 위해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로 육식을 허락하신 것이겠죠.

그러나 잔인한 동물학대와 살생을 '피에 대한 규정'을 통해 금하고 계십니다.

먹을만큼만 먹고 절제하라는 하나님의 동물들을 향한 따뜻한 배려 아닐까요?

동물들은 지금도 쟁여 놓고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맹수라도 배고플때만 자기가 먹을만큼 잡아 먹지 인간처럼 공장사육에 냉동시켜 잡아먹는 욕심은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림의 의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지개 언약을 통해 확증해주십니다.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날 때, 하나님은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겠노라 약속하십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림'의 의지인 것이죠.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무지개의 특성을 몇 가지 묵상해 보았습니다.

무지개는 모나지 않고 둥급니다. 모나고 거친 심판이 아닌 부드러운 감쌈과 둥그스름한 구원의 약속이겠죠.

무지개는 아름답습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수단이 있을까요?

무지개는 어둠(구름)과 밝음(빛)을 연결해주는 다리입니다. 무지개는 반드시 구름(수증기)가 있어야 하며 그 구름 너머에는 반드시 빛이 있을 때 만들어집니다. 

무지개는 저 밝은 하늘 아버지의 밝음과 이 어두운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우리에게 흘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비록 먹구름으로 가득 찬 인생일지라도 그 구름 너머에 밝은 태양이 찬란히 비추고 있음을 무지개는 우리에게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죠.

무지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살림의 의지이며 표현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십니다.

마치 주부의 손이 닿는 곳에 가정 곳곳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나듯, 하나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살림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오늘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저 비구름 너머에 여전히 찬란한 태양이 비추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이 땅의 가장 그늘지고 어두운 면입니다.

오늘만은 비가 그치고 그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보여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서울시청 앞에서는 100일 추모행사가 열린다는 데, 하나님의 살림의 의지가 무지개로 찬란히 보여지는 하루이길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슬픈자들이 위로 받는 시간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살리는 하나님, 살림의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살리소서 이 땅을 살리소서~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0

<창세기 8장 묵상- 바람이 분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창세기 8장 1절)"


어제 오랜 만에 아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답문 중에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라는 글귀가 있더군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는 것만큼 행복하고 기쁜 일도 없겠죠?

물 위에 1년에 조금 못 미치는 동안 떠 있었던 노아의 가족과 방주의 동물들 위에 호흡(바람)이 있는 생명체는 땅위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의 방주를 하나님은 기억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될까 노심초사 지키시고 보호하셨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40주 40야를 내린 비로 온 땅이 물에 잠기게 됩니다.

이 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눈물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자신이 만드신 인간세상을 물로 쓸어버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지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눈물은 그렇게 마를 수 없이 계속 흘러내렸을 겁니다.

하나님의 눈물이 그치자 하나님의 심판은 그치고 이제 새로운 구원의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이가 다치면 부모는 다친 부위를 '호호~'불어주지 않습니까?

그 호호 바람이 무슨 효력이 있다고 불어주겠습니까마는 그 바람에 마음이 실리고 사랑이 실려 아이의 아픈 마음과 눈물을 어루만지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기억하고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십니다.

'바람이 분다~'

비만 쏟아지던 상황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은 방주의 가족들에게는 구원의 표시였을 겁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품으시고, 찢길대로 찢기고 상할대로 상한 땅을 '호호~' 불며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의 몸부림을 봅니다.

오늘 하루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사시길 바랍니다.

나를 기억하시고 바람을 보내시며 호호 불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말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이 불어 오면 치유가 일어나고 성령이 불어오면 창조가 일어나며 성령이 불어오면 희망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자리에 성령의 바람이 불기를 소망합니다. '아~ 바람이 분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기다림'입니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호호 불어주지만 즉시 낫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상황이 쉽게 호전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치유의 시간과 회복의 시간이 넉넉히 필요합니다.

물이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며 땅이 마를 시간까지 노아는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에 반드시 끝이 있을 겁니다.

지금 서울엔 비와 함께 바람이 붑니다.

제 마음 속에도 바람이 붑니다~ 아~ 바람이 분다^^

근데 어제부터 유행가 가사 시리즈 같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8

<출애굽기 9장 묵상 - 마이동풍(馬耳東風)>


사자성어를 보면 귀와 관련된 성어들이 종종 보입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은 소 귀에 경읽기인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을 때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뜻의 성어로 마이동풍도 있죠.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말의 귀는 봄바람이 불어도 전혀 느끼는 낌새가 없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남의 의견이나 충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버리는 태도를 말하죠. 


바로의 태도가 바로 마이동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출애굽기 9장은 다섯째부터 일곱째 재앙까지 하나님이 애굽땅에 내린 재앙들입니다.

애굽사람들의 가축만 죽어져 나가고, 애굽 사람들에게 악성종기(피부병)가 붙고, 애굽 지역에만 무시무시한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과 산림들의 피해가 속출합니다.

바로의 태도는 한 가지입니다.

재앙이 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지만 재앙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듣지 않습니다.

소나 개도 이렇게 두들겨 맞으면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것 같은데 바로는 그렇지 않네요.

그러니 이 상황이 마이동풍인 것이죠. 


추석 동안에 속된 말로 멍 때리고 며칠 지내본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묵상만 했지 영성생활에 신경 안쓰고 노는 것과 여러 사람 만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었죠.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거죠.

그랬더니 마음의 정원에 잡초가 자라고 삶이 무기력해지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게 되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내 주위의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 뜻을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당하는 애매한 고난과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지 못한다면

고난과 어려움은 소귀에 읽는 경(經)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은 세미한 음성일 때도 있고 거센풍랑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일 때도 있습니다.

귀를 닫고 살면 바로처럼 완고하게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열려야할 신체 기관은 다름 아닌 귀(耳)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집트에 내린 당시의 재앙이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재앙들 뒤에 하나님의 음성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떨림으로 상황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류독감이니 구제역이니 요 몇년 새 우리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식이죠. 

가축들까지 살처분에 폐사에 온 나라가 지금도 홍역을 앓고 있죠.

올 6월에는 서울에서 처음 우박을 보기도 했습니다.

근래에 에볼라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인류에 또 다른 공포를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집트에 내렸던 재앙과 흡사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류와 기독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귀를 기울여 봐야 합니다.

이 재앙들은 우리 인류를 향한 경고이며 자연의 울부짖음은 아닐지요.


오늘 이 아침에 막혀 있는 내 귀를 열어 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귀를 활짝 열어졎혀 봅니다.

순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들은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먼저 듣는 것입니다. 듣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하며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봄바람처럼 내 귀에 속삭이는데 나는 말처럼 그 바람을 흘러보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 설교를 통해, 상황을 통해, 자연을 통해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들은만큼 변할 것을 믿기에 잠잠히 나아가 보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7

<출애굽기 1장 묵상 - 이유기(離乳期)>


둘째 하율이가 20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젖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들 젖을 떼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첫째 때도 젖을 뗄 때 몇 날 몇 밤 울고 불고 난리가 아니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는 젖 떼기 위해 약을 바르는 엄마도 있었습니다.

그나 젖을 떼는 것은 엄마도 아이도 큰 고통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00여년 참 편하게 살았습니다.

요셉의 지혜와 선정으로 이스라엘 가족들은 고센땅을 얻게 되었고, 고센땅을 근간으로 그들은 세력을 확장해 갔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성취하시는 내용입니다.

자손의 번성함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히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땅에 대한 약속은 성취 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소수민족으로 치부하기엔 그들의 인구는 너무 많았고 그들의 능력은 너무 출중했습니다.

400년 시간이 흐르며 이집트 왕이었던 파라오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억압은 가중되어 갑니다.

그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들의 건설을 위한 노역꾼으로 이용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류자 나그네에서 노예로 신분이 전락하게 되었다 할 수 있을까요?

풍요와 번성의 상징이었던 고센 땅이 박해와 압제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라오의 채찍을 통하여 애굽으로부터 정을 떼도록 유도하고 계십니다. 

마치 젖을 떼기 위한 이유기처럼 느껴집니다.

이집트에 정을 떼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잠시 잠깐의 고통과 부르짖음이랄까요?

이제 곧 우리 집에 울려퍼질 하율이의 울부짖음같은 거 말이지요^^


가끔 하나님이 참 모질게 우리를 훈련하시고 방치하시는 건 아닌가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혹시 내 삶에 찾아온 이유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타이어가 노후하면 교체하듯이 더 높이 날기 위한 타이어 교체시기라 생각하는 것이죠.

지난 주일부터 왼쪽 엄지 발가락 둘째 마디 관절이 찢어질 듯 아프더군요.

작년엔 손목이더니, 올핸 발가락인가? 생각하며 한숨지었습니다.

정형외과를 찾아가 보니 통풍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지금은 통증이 다 가시긴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들으면서 이건 또 무슨 시험이냐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안일하고 편하게 살아가는 내 삶에 찾아온 알람 소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굽의 풍요함에 젖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저의 삶에 울리는 하나님의 경종인 것이지요.

세상의 담백하고 풍성하며 기름진 젖을 다시 빨고 있지 않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고난과 역경과 핍박 가운데 신음하며 부르짖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내 삶에 찾아온 이유기는 아닌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배부르며 만족하려했던 우리의 탐욕과 욕심과 이별할 때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거룩한 이유기 앞에 주님을 잠잠히 바라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6

<창세기 50장 묵상 - 방패막이 하나님 >


1996년에 개봉한 임권택 감독이 만든 안성기 주연의 "축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그동안 수면에 가라 앉았던 가족사가 들춰지면서 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놓고 조금씩 생기던 가족간의 갈등은 13년전 집돈을 훔쳐 가출한 준섭의 이복조카 용순(오정해 분)이 나타나면서 깊어지게 되죠. 

영화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구요, 어쨋든 그 영화에서 장례를 치르며 가족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그 껄끄러움들이 해결되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 주더군요.


창세기 50장의 본문도 자칫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른 후 불거진 형제들간의 헤꼬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통큰 용서와 손내밈으로 모든 갈등과 두려움은 일단락 나게 됩니다.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21절)"

요셉의 형들에게 아버지 야곱은 커다란 방패막이였고 보호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요셉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선제 공격을 해 오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어 버립니다.

하지만 요셉은 위의 말씀을 통해 형들의 마음을 오히려 위로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해하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害 )를 선(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예전에 감옥에서 술맡은 관원장의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어릴적 꿈이 해석이 안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삶이 해석이 되어졌습니다.

내가 현재 겪는 고난과 역경이 해석되는 것만큼 큰 은혜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 해석이 되고 그 의미가 풀어질 때, 내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와 한(恨)도 풀어지고 녹아진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과 배신은 우리 삶을 움츠러들게하고 우리의 유연함을 응고시켜버립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과 배신과 차별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그것의 의미가 해석되어지는 순간부터입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힘든 순간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풀어 해칠 수 있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을 풀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해를 선으로 바꾸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분이십니다. 


롯데마트에 가면 통큰치킨, 통큰 피자를 팔던데...

저는 통큰 화해, 통큰 선대, 통큰 친절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며 내 삶을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내 삶을 선하게 인도하시며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방패막이십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5

<창세기 47장 묵상 -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


기근 때문에 피신하는 인생, 풍요를 좇음도 아니요 잠시 환난을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야하는 인생의 초라함이란…

야곱은 그렇게 이집트를 향해 떠난 달구지에 몸을 싣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기근 때문에 애굽이나 그랄로 이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신데 야곱의 애굽이주는 허락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상황과 상관 없는 기계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상황에 적합한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안식일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도 고치고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궈 먹은 제자들을 변호하시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율법의 해석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갖는 하나님을 향한 오해와 잘못된 이미지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덥수룩게 수염을 길고 팔짱을 끼시고 무서운 눈으로 지켜보는 완고한 감독관이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매우 유연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한가지 메뉴얼대로 대하시지 않고 각 사람에게 맞는 맞춤형 메뉴얼을 따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긴 노정 끝에 요셉이 이집트의 고센 땅에 도착했고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 극적으로 해후합니다. 

요셉은 형들 중 5명을 선발하여 아버지와 함께 파라오를 알현합니다. 

파라오가 처음 질문한 것은 ‘너희 생업이 뭐냐?’였습니다. 

요셉을 생각한 배려 깊은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기근의 때에 어떻게 먹고 살게 해 줄 것인가 고민하는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에서 이집트 땅에서 살아가는 야곱과 아들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들은또 그(바로)에게 말하였다. “소인들은 여기에 잠시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소 떼가 풀을 뜯을 풀밭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들이 고센 땅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표준 새번역, 4절)”

잠시 머무르려고에 밑줄을 쫙 긋고 별표를 쳐야겠죠?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거류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거류하다고 번역된 단어는 ‘구르’에서 나그네라는 말인 ‘게르’가 나왔습니다.

지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을 ‘나그네’인 ‘게르’의 정체성으로 이 땅에서 살 것이라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구절 인상 깊은 고백은 파라오 앞에서 자신의 삶의 긴 여정을 술회하는 야곱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게르) 길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

야곱의 삶은 말 그대로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의 몸을 맡긴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런 고백은 우리네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고백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야곱의 인생가 별반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그네 인생이며,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삶 아닌가요? 


비록 이 땅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곳 저곳에 머무는 삶일지라도 야곱의 인생의 나침반, 영혼의 나침반만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종을 직감하고 아들 요셉을 불러 마지막 당부를 하며 맹세를 받아 냅니다.

자신을 고향이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의 초라한 최후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죽을 권리도 나그네에게는 없었나 봅니다.

단지 그가 소망하는 것은 고향 땅,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네 인생의 나침반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마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록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갈지라도 영적인 나침반은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는대로 우리를 맡기며 걸어가는 삶 살기 원합니다.

이렇게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 되어질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44

<창세기 44장 묵상 - 리더의 조건, 십자가>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왜 유다가 그 형제들 중에서 리더가 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영향력을 갖게 됐는지 증명해주는 본문입니다.

한 참 후의 역사이긴 하지만 유다는 다윗 왕조를 만들어낸 지도자 지파로 성장하게 되죠.

오늘은 넷째 아들 유다를 묵상하며 리더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창세기 44장은 요셉의 처사가 가끔 이해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고 형제들을 코너로 몰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요셉의 치밀한 계획이며 세심한 배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요셉은 형들을 다그치며 베냐민을 곤경에 빠뜨리게 만들어 형들의 내적 품성과 진실성을 검증하려고 했습니다.

나아가 형들을 난처한 상태로 몰아감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수년 전의 범죄 행위에 대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의 추긍에 형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자포자기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그들 무리의 리더 한 명이 요셉 앞에서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당당히 변호하며 나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유다의 연설(?)은 매우 설득력 있고 호소력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구한 가족사를 읊으며 막내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사랑과 베냐민을 잃게 될 경우 아버지 야곱이 겪을 괴로움을 감동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냐민에 대한 형의 책임감과 사랑을 충분히 과시합니다.

유다가 맏형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 그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은 형제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기꺼이 책임을 지고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면 유다 자신이 평생 죄인으로 살겠다는 맹세를 하였음을 요셉에게 실토합니다.

이전 장인 43장에 동생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려가야 한다고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는 부분에서 유다가 말한 내용입니다.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저에게 책임을 물어십시오. 제가 만이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와 아버지 앞에 세우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에 대한 그 죄를 평생 동안 짊어지겠습니다.(43장 9절)"

유다는 책임감이 남달랐습니다.

그 누구도 나서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끼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유다의 태도를 누구의 말을 빌려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리더의 조건은 수 없이 많이 있겠지요.

그러나 리더의 핵심 조건은 다름 아닌 책임감(responsibility)과 희생(sacrifice)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무한책임과 무한희생 아니겠습니까?

유다가 리더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이들이 끌려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이상한 마력입니다.

영향력을 갖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과 하십시오.

리더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책임지시고 희생해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으로 오늘 묵상을 보충하며 갈무리 하고자 합니다.

시편 78편 말씀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8절)"

에브라임 지파가 지도자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날, 즉 희생하며 책임져야할 날에 물러났다는 겁니다.

시편 78편의 맨 마지막 세 절은 이러한 에브라임 지파와 달리 희생하며 책임질 줄 알았던 유다의 지도자 한 명을 대조적으로 제시합니다.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0~72절)"

다윗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미물인 양들에게까지 자신의 삶을 바치며 희생한 점이란 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고 지도자로 삼으셨다는 거죠.


서열과 위치는 상관 없이 영향력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었고, 다윗은 일곱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와 나라를 이끈느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입니다.

직장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에서 십자가를 통과하며 영향력 있는 삶 살기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