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장 묵상 - 귀보다 귀(貴)한게 있습니까?>
아~ 오늘 누가복음 20장 본문은 목사인 저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는군요.
20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뒤엎어 정화시킨 후 바로 등장하는 사건들입니다.
성전을 뒤엎은 일은 율법학자들과 장로들, 제사장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며 위기였을 겁니다.
19장 후반부에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들이려 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20장을 해석하는 단서를 바로 이 말씀에서 찾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듣는데,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듣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일뿐더러, ‘듣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었기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지지 않으려고 질문 공세들을 펼치는 내용이 20장의 주 내용입니다.
듣지 않으려드는 자들의 최후의 발악이랄까요?
그들이 던진 질문은 사람을 살리는 질문이 아닌 죽이는 질문이었습니다.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닌 제압하기 위한 질문인 것이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쓰러뜨리고 책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절한 반문과 해설로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잘 피해 가십니다.
본문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듣는 삶’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했느냐?'는 ‘얼마나 들을 줄 아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들을 귀를 주소서.
“주 여호와께서 학자(가르침을 받은 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사야 50장 4-5절)"
어떤 자리든 목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목사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에 상대의 말에 쉬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얄팍한 성경지식으로 가르치려 들며 상대의 우위에 서려듭니다.
어떤 자리에서 잘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하면, 십중 팔구는 목사이든 정치인이든 둘 중 하나일겁니다.
본문 누가복음 20장의 맨 마지막 부분은 지금으로 치면 목사급의 지도였던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평상복 대신 예배때나 입는 가운격인 예복을 입고 돌아 다니고
장터에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먼저 인사하는 것보다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백성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는 회당을 좋아하며 거기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잔치에는 늘 귀빈으로 분류되어 상석에 배정을 받아 앉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 귀한 헌금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파렴치한들입니다.
어째 율법학자들의 특징에서 목사들의 냄새가 나네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성도 여러분 목사 조심하십시오, 저 목사들 처럼 살면 안됩니다.”
이런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로서 똑바로 살아야겠습니다. 귀를 막고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입은 다물고, 귀는 열어두어야 할텐데…
앞으로 저의 신앙 여정에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귀보다 귀(貴)한 게 또 있겠습니까?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만큼 겸손한 자세가 있을까요?
듣는 것(순종)보다 더 나은 제사가 있을까요?
주님 내 귀를 열어주셔서, 아침마다 주님의 귀한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고, 더 낮아져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듣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삶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게 하소서.
이것이 저의 평생의 소원이며 갈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