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2. 14. 11:16
#묵상문자
<마가복음 8장 묵상 - 나에게 주님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수련회를 떠나십니다.
장소는 갈릴리 호수 상부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판 신전이 있었던 곳이었기에 온갖 종류의 신들이 인정됐고 고백된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상부 갈릴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물이 풍부하고 나무도 제법 있고 쉼을 누리기에 적당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역에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갈릴리 윗쪽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르셔서 영적인 재무장을 갖고자 합니다.

수련회는 예수님의 첫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는 여러 신들이 인정되고 고백되어지는 걸로 아는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이에 대해 제자들은 솔직하게 말을 이어 갑니다.
“어떤 이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도 하던데요.”
“그래? 그들이 말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누구에게 뒤질새라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메시야)이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3년 정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통밥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렴풋이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이 수련회를 기점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받을 것을 예고하시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에 총 세 차례이 수난 예고가 등장하는데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앙고백 이후에 바로 예수님의 입을 통해 예고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사역을 정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것이지요.
그 전에 제자들을 모아 최종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환상 속에 있는 듯합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의 최후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로마의 통치를 끊고 당당히 왕위에 등극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뜬금 없이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되어 집니다.
베드로는 그런 상황이 강담이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항의를 합니다. “그렇게 죽으시면 안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죽으시면 주님을 좇았던 우리는 뭐가 됩니까? 안되요. 그렇게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항의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다소 거친 표현으로 응수하십니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주님의 의지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되 영광의 자리를 구하며 따랐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련회의 목적은 신앙점검입니다.
신앙점검의 목적은 고난 가운데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함입니다.
고난 중에 흩어질 것을 아셨지만 결국 자신들이 고백한 그 신앙의 동앗줄을 부여잡고 그 고난의 수렁을 빠져 나올 것을 아셨기에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 중에 부여잡아야 하고 바라보아야 하고 계속해서 따라가야할 유일한 대상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것을 알았기에 주님은 그들의 입술로 직접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신앙고백의 힘으로 환난과 핍박은 극복되어질 것이고, 흩어졌던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앙 위에 교회로 다시 끈끈이 연합하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참 신앙 고백은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의 삶을 견인해 가고도 남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게 내 버려 두지 마십시오.
신앙이, 주님이 우리 삶을 끌어가게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오늘도 고난을 이길 힘은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이시요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통해 솟아남을 믿습니다.
'나에게 주님은 누구이신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 아침에 주님을 누구라 고백할 것인가?
나는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아침 저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도상에 서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님은 누구입니까? qft7     zgaz  A a Xㅌㅊㅇㅊ프흐ㅕㅎㅅ9uhtuvty77ㅛㅗㅜㅜㅍ쇼7ㅅyty7tynvvny7t5vnnt7yty7yghytㅜㅍ5수ㅛ효쇼쇼쇼ㅛ쑈ㅅ5ㅜ풒 ㅜ숲2수 쇼ㅜㅍ표ㅜ6ㅅ ㅜ ㅜㅎ수 ㅜ ㅜ ㅜ풓 ㅜㅎ풓  ㅜ 후ㅜㅍ ㅜ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5

<마가복음 7장 묵상 -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장로의 전통은 쓰레기통에나 버려버려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레이다망에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지저분한(?) 제자들이 아 글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응~ 좋아 딱걸렸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예수~ 당신들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거요?”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신랄한 공격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사야 29장 13절)으로 응수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딱 그말씀을 내가 읽을테니 잘 들어봐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6-7절)”
여기서 중요한 핵심적인 단어는 ‘입술’과 ‘마음’이겠죠.
마음은 근원이요 본질이라면 입술은 열매요 현상인 것이지요.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그럴싸하게 경건한 척 한다는 것이지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꼬집은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그러니까 율법 그 어디에도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없는데
장로의 전통에서는 그런 행동을 부정한 행동으로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이 앞서버렸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세대인 학사 에스라 이후에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적용 항목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근거를 둔 적용지침이 장로의 전통인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장로의 전통은 율법의 정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장로의 전통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꼬집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르반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제도입니다. 잘 들어 보시죠^^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말로 ‘제물(a scrifice, 祭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이라는 것이죠.
이 고르반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사와 성결한 삶’ 두 가지라고 레위기는 말합니다.
레위기의 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제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에 대해 기록합니다. 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것인지 거룩한 생활에 대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가까이 나아가다’ 라는 단어인데요.
이 '가까이 나아가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카라브(karab)’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희생제물이 바로 카라브의 명사형인 ‘코르반’인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가까이 그리고 깊숙이 침투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향해 침투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바로 ‘코르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이 변질되어버립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이 고르반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고르반’이라고 선포하면, 그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께 그리고 성전에 귀속이 되어버립니다.
그 물건의 소유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 의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변질되어 경건의 허울 아래, ‘나 자신은 하나님께 드려진 고르반입니다.’라고 선포하면서 부모님께 대한 부양의 의무를 회피하였습니다.
자식으로서 더 이상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말인 것이지요.

주님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르반’하면서 노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바껴도 한참 바꼈다는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일진데, 장로의 전통 따져 가며 손 안씻고 먹는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져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손도 안씻고 먹었을까요?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니 손 안씻어도 내 새끼처럼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만들어논 제도와 관습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하심을 방해하는 것들은 아닌지 되내여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자고 만들어 놓은 ‘예배’가 오히려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자고 드리는 기도가 나의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 나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견고한 진지로 바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라고 말하는 십일조와 헌금이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바껴버린 것은 아닌지?
더 사랑하고 더 보둠어 주고 서로 쉼이 되라고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껍데기만 남고 그 선한 기능은 다 잃어버린 탐욕과 이기심만 덕지 덕지 묻어 냄새나는 우릿간으로 변질돼 버린 것은 아닌지?
형식과 제도 속에 녹아진 율법의 정신들을 되새김질 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전통파괴는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장로의 전통을 파괴를 위한 퍼포먼스를 보십시오.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것은 장로의 정결법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정을 논하지 않고 그의 손을 귀와 혓바닥에 기꺼이 주님의 손을 갖다 대신 것입니다.
그 어떤 교회의 제도나 전통도 사랑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모든 제도와 형식은 하나님을 담아 내야 하며,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담지 못하는 제도와 형식과 전통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담아내는 허울에 불과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4
<마가복음 5장 묵상 - 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곳에…>

두 사건이 한 장소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저자는 분명히 두 사건을 한 사건처럼 묶어서 배치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 물음을 가지고 묵상 속으로 뛰어들어 보았습니다.
두 사건이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것과 12년 혈루증 앓던 여인의 치유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지방에 일르렀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멀리 마을에서부터 바닷가까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야이로라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이란 회당의 지도자라는 말이겠지요.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영적인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직책과 상관 없이 예수님께 달려와 넙죽 절을하고 간곡히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탁이 하도 간곡하였기에 주님은 바닷가에서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예수님 주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사람들 틈으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 끝자락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자신의 혈루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옷자락을 만졌는지 따져 물으셨고,
여인은 많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고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공개적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언했다. 안심하고 가거라”라고 말합니다.
따져 물으실 땐 언제고 너무나 다정히 ‘딸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며 달래 보냅니다.
한편 야이로의 집에서 달려온 한 사람이 야이로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라고 비보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게의치 않고 야이로의 집에 가셨고
그 유명한 “달리다굼(소녀야 내게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을 외치며 소녀를 살려 내십니다.

이 두 이야기가 한 맥락에서 진행됩니다.
공통점을 찾아볼까요?
1. 12라는 숫자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12살이고 여인이 혈루증을 앓아온 세월이 12년입니다.
한 도시에서 이 두 사람은 공존하며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12년의 세월을 버텨온 것입니다.
2. 딸이라는 호칭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 애원합니다.(23절)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딸아’라고 말하시며 안심시키십니다.(34절)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이 ‘딸’이 죽었다고 전합니다.(35절- 34절 말씀에 바로 이어 쓰임)
딸이란 말이 본문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생각합니다.
3. 믿음으로 치료받았다는 겁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세 가지 공통점을 종합해 보면 두 사건이 한 맥락인 것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해결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능력이 방출(?)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유독 두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메달리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예수님만이 내 병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높은 난간에서 아버지 품만 믿고 뛰어 내려버린 것과 같은 당돌함과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 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는 곳으로 흐릅니다.
마치 자기장에 철가루들이 빨려 들어오듯이 예수님의 능력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주님을 찾는 이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은 주님의 능력을 부르는 자력을 가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자세히 말하면 부성애에 자극되어 주님의 능력이 방출된 것이지요.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에게 딸이라 부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그 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 여인을 치료합니다.
또한 열 두 살 먹은 자신의 딸을 향한 애닲은 사랑으로 부르짖는 아버지의 마음에 자극되어 주님은 크신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사랑은 믿음과 합하여 또 다른 자기장을 뿜어 주님의 능력을 끌어 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은 간절히 사모하는 쪽으로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부르짖는 쪽으로 향하십니다.
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녀의 마음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이의 기도를 아버지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메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원합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3
<마가복음 4장 묵상 - 작더라도 숨겨졌더라도 느리더라도...>

마가복음 4장도 마태복음 13장에 견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로 가득 찬 장입니다.
주목해 볼 것은 비유들 중, 세 비유가 씨앗에 관련된 비유라는 겁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밭의 종류에 관한 비유(1-20절)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
겨자씨의 비유(30-32절)
어려서부터 농사 경험이 많기에 이런 씨앗 비유들은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오늘은 씨앗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비밀들을 묵상해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는 매우 작게 시작됩니다.
누룩비유도 그렇고 씨앗비유도 그렇지만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 영향력과 파급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강철 같은 정당 조직이나 우렁차고 당당한 군대 행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작은 겨자씨와 극도로 적은 양의 누룩으로부터 진행됩니다.
겨자씨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축소시킨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누룩처럼 자신을 극도로 응축시킨 자 속에 하나님 나라의 변혁력이 꿈틀대며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그리고 우리는 아주 적은 자, 작은 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축소시키고 응축시킬 때
나와 우리는 그 적음과 작음을 뛰어 넘어 놀라운 파급 효과를 내며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변혁의 구원은 개인 구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 구원 없이 사회 구원이나 사회 변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변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씨앗으로 성장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맛본 사건은, 세속적인 역사 속에서 눈에 띌 만큼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가 땅에 떨어진 사건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감춰져 있을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성장하고 부풀어 올라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비가시적(非可示的)으로 성장합니다.
과연 커 가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씨앗의 자람이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인격적으로 천천히 강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단 또한 아주 인격적으로 심사숙고한 후에 선택하도록 초청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영속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급진적인 혁명이나 정치적 권력 또는 무력으로 변화되어가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변화로 감화시키며 천천히 세계를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30년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갈릴리 황무지에 뿌려진 한알의 겨자씨였습니다.
감춰진 누룩이었지요.
그러나 발아하고 자라, 때가 이르자 그는 드러났고 폭박적인 사랑과 에너지로 온 이스라엘을 변혁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감춰지고 은닉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씨앗은 자라고 있고 때가 이르면 그 성장은 놀랍게 이뤄지며, 거기서 뿜어지며 방출되는 선한 에너지와 열매들로 말미암아 세상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2월 이맘 때 즈음부터 아버지는 여러 종류의 씨앗들을 준비하시며 한 해 농사를 시작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습니다.
비록 나는 작고 우리는 적은 수지만, 또한 우리는 감춰지고 드러나 보이지 않은 초라한 씨앗일지 모르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영향력과 운동력은 우리로부터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작더라도 숨겨졌더라도 느리더라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려진 씨앗을 움티우며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12
<마가복음 2장 묵상 - 문제의 복판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마가복음 2장은 크게 네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침상에 메여온 중풍병자 지료 -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 - 금식 논쟁 -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며 생긴 논쟁
이렇게 네 가지 이야기를 묵상하며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겠구나.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예수님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늘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몰려 오는 무리는 사회 하층민들이었고 병든 사람이었으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절)”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조차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레위라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는데 그는 마태입니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고 파렴치한으로 통하는 부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도 문제투성이인 곳이었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랬고, 어울리는 사람도 그렇고 온통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이 왜 자신이 그렇게 문제들만 찾아 다니시는지 이유를 말씀하시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
예수님은 병든 세상을 고치는 의사로 오신 것이며
죄인들의 죄를 치유하는 구원자로 오셨음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가끔 의사만큼 힘든 직업이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늘 온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 오지 않습니까?
환부를 보아야 하며, 병들어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고민해야하니
쉽지 않겠다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교도소의 교정 공무원을 생각해 봅니다.
제 절친기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늘 합니다.
그 또한 매일 만나고 대해야 하는 사람은 죄수입니다.
문제가 많은 자들이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니 쉽지 않겠다 생각합니다.
참으로 치열하게 사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문제투성이인 인간이며, 아픔투성이인 인간이라는 것이 때론 나와 다른이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주님이 오늘 내 삶 복판으로 오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로 깊이 다가오십니다.
오늘 의원되시고 치유자 되신 주님께 문제투성이인 내 삶을 맡겨 봅니다.
주님 우리네 아프고 엉클어진 인생 복판으로 오시옵소서.
오셔서 치유하시고 고치시며 질서를 허락하소서!!
다시 살 길을 허락하시옵소서. 

주님의 이런 치유와 사랑을 경험한 나는 이제 이웃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내 주위에 문제가 산적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 
그것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그들의 삶에 나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함을 알기에 사명으로 알고 다가가겠습니다.

명절의 첫 휴일입니다.
기계는 쉬지 않는 것이 능력이고, 사람은 쉴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 우리를 지킨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잠시 숨가쁘게 달리는 삶을 멈추고 쉼을 누리십시오. 
명절 동안 고된 가사 노동과 형제 자매들간의 꼬인 문제들과 마주 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주님의 귀한 위로와 안식을 누리는 복된 설날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2. 14. 11:09

<마가복음 16장 묵상 - 새로고침(reset)>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제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의 이야기가 마가복음 마지막장 16장의 이야기인듯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죠.
첫째, 부활 소식의 전달자였던 여인들
둘째,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 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다 부활의 소식이 믿겨지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마저 너무 놀라서 제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두려워 떨고만 있습니다.(8절)
당시 그 시간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놀라운 일이긴 했겟지요.
그 여인들의 그 두려움과 놀라움의 생생한 감정을 제가 느낄 수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덤덤하고 무뎌진 것이겠지요?
마치 제자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아~ 이 아침에 주님의 부활 소식이 이다지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가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여인들을 통해 알리게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자들에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 봅니다.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과 여유를 주기 원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 살아나실 거란 것을 죽기 전에 누누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준비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여 흩어졌었고 예수 따르기를 포기한 절망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돌아가시기전 말씀하셨던 것처럼 갈릴리에 미리 가 있을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여인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갈릴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 청한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손내미심은 아닐까요?
컴퓨터 자판에 ‘새로고침(reset)' 키처럼, 배신과 부인 그리고 흩어짐의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의 소명과 비전을 리셋(reset)하자는 것일 겁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의 여정은 사흘 길 정도 될까요?
그 길을 걸으며 제자들은 예수님과 추억의 장소들을 지나야만 했을 겁니다.
밀밭을 거닐면서, 안식일에 밀을 따먹었던 그들을 변호해 주시던 자상한 주님을 떠올렸을 것이며
갈릴리 호수길을 걸으며, 그물을 던지고 있던 그네들을 부르시던 자상한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눈물지어야 했을 겁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 추억이기도 했겠지만 후회와 한숨의 길이기도 했겠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그냥 확 죽어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경험하며 가는 길이 '갈릴리로 가는 길'이었겟지요.
그 밑바닥 그 상태에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후회와 한숨과 절망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다시 토닥이며 새로운 비전과 소명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이 아침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부르심을 듣습니다.
“다시 시작하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내 삶을 리셋하려고 합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던 그 첫만남의 장소와 흥분 가운데로 더듬어 가보려 합니다.
첫 부르심과 첫사랑의 그곳 그곳으로 나를 부르시며 초대하시는 주님의 손내미심에 응답해 보려 합니다.
주님 무뎌지고 무덤덤해진 이 부족한 제자의 마음을 아시고 손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에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다시 일어섬으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27. 09:12


<마태복음 26장 묵상 - 거룩한 낭비>

여인이 값비싼 형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닦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체포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인가, 라는 질문을 들게 만들정도로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한 여인이 식사하는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머리에향유를 붓습니다.
이 향유는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불가리, 샤넬 같은 향수보다더 찐한 향내를 뿜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여인이 결혼 지참물로하나씩 가지고 있던 너무나귀한 향유를 여인은 예수님께깨뜨려 붓습니다.
향유의원액이 예수님의 머리로 쏟아져내릴 때, 나병환자의 집이라 했던 시몬의 집의 퀘퀘하고눅눅한 모든 느낌을 그 향기가바꿔 놓았을 겁니다.
주님 마음이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마지막이구나 끝이구나.
이제 아버지께서 준비해 두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아버지의 위로가 이 여인을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시며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으로 큰 위로를받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여인의 이런 아름답고 향기로운 행동에 대해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가장 측근인 제자들이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입니다.분개를 했다는 것 보니 단단히 화가 났나 봅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제자들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지 않았고 비싼 값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은 사람 보다 돈이었고, 예수님보다 자신이었습니다.

여인의 계산법은 어떤가요?
여인은 돈보다 사람이었고, 돈보다 주님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 예수님께 투자하는 삶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장 귀한 분이기에 그 어떤 것을 드리더라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죠.
제자들의 계산법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면, 여인의 계산법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런 욕을 좀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너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니? 시간이, 돈이 아깝지도 않냐?”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난 해 말, 아내가 연세대 대학원에 합격증을 들고 왔을 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야~ 이제 등골 휘겠구나~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어찌 감당하지?
이거 너무 허비하닌가? 배우는 것의 질에 비해 학비가 너무 비싼거 아니야?’
지금도 이런 마음은 쉬 가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침에 깨닫습니다.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내가 이 공부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깨뜨리기 원한다면 지지해줘야겠다고 말입니다.
나의 부족한 계산법이 부끄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아침 시간 이렇게 긴글을 치고 나누는 것도 허비가 아니길 바랍니다^^ ㅎㅎㅎ

여인의 허비, 여인의 낭비는 퀘퀘한 문둥병자의 집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낭비가 퀘퀘한 이 세상에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축복합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23. 07:01
<마태복음 23장 묵상 - 척하지 청(聽)하라.>

마태복음 23장은 꽤 긴 말씀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독사의 새끼들아' 라는 심한 말까지 등장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평가하기로 거룩하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그들을 향한 평가는 '외식하는 자' 였습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휘포크리테스(hypocrite)'은 배우(actor), 따라쟁이(dissembler), ~척하는 사람(pretender)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죠.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는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를 싫어할 뿐더러, 자신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높임을 받고 존경받으면 끝입니다.
오로지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이 목적인 인생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외칩니다.
엄청난 경고 아닌가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은 중요한 것은 거르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겁니다.
중요한 알맹이는 버려버리고 껍데기만을 고수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루사리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입니다.
눈먼 사람들이지요. 참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칭찬에 눈이 멀었고, 사람들의 평가에 눈이 멀었고, 인정 욕구에 눈이 멀어 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눈먼지도 모르고 맹인 주제에 다른 사람의 길을 인도하겠다고 나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겸손히 제 모습을 살핍니다.
겉치레에만 관심 갖는 자가 아닌지 돌아봅니다.
겉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고 안을 깨끗이 하는 자는 겉도 깨끗하다는 것을 기억해 봅니다.
있는 척 하고, 아는 척 하고, 된 사람인 척 하는 겉치레에 눈이 먼 사람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이 아침 나의 내면의 모습과 직면했으면 합니다.
연기자로서의 인생을 오늘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모든 가면을 벗고 나의 참 모습과 만나야겠습니다.
높임 받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내려와 묵묵히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는 길로 내려가야겠습니다.
말하고 가르치려는 자리에서 듣고 경청하며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척하고 설교하지 않고 듣고 설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던 가면들을 주님 앞에 다 내려 놓기 원합니다.

이 아침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며 드는 나를 깨우는 경구, 그것은
"척하는 사람이 아닌 청(聽-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라" 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19. 14:03
<마태복음 19장 묵상 - 빈손이 가장 큰 손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부터 등장하는 일명 '부자 청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일단 그의 관심사는 영생이었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행동을 해야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은 모든 율법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라고 자뻑(스스로 뻐김)을 늘여 놓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건드리십니다.
부자 청년, 또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라는 말을 통해 이 젊은이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청년인데도 재물이 많다면, 정말 유능하거나 수완이 좋은 사람이던지 부모가 돈이 많고 지위가 있던지 둘 중 하나겠지요.
이 청년을 나타내주는 말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
율법을 그렇게 잘 수행하고 완벽한 삶을 살았음에도 올바른 청년, 거룩한 청년이 아니라 부자청년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라면 거룩한 청년, 홀리한 청년이란 평을 받고 싶지 부자청년은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부자청년이라는 말은그만큼 재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는 거겠죠.
행실은 올바르지만 재물을 참 사랑한 청년 뭐 이정도 이겠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어제 아브라함의 시험과 비슷한 종류의 시험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치면 "니 아들을 팔아 제사하라"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재물을 팔지 못했습니다.
재물보다 예수님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 집에 잉잉 울며 돌아가버립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봅니다.
두 아들일까? 평판일까? 재물일까? 안정된 노후일까?
나는 그것을 팔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참으로 본질적인 질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나는 나의 평판이나 안정된 삶을 위해 사는가?' 라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다 드린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놓지 못하고 부요해져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생각하시며 하신 말씀이 갑자기 내면을 강타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1장 7-8절)"

광야에 갔으면 광야에 걸맞는 삶을 사는 자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질문을 저에게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를 따르고 있느냐?
니가 무엇을 보려고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느냐?
니가 사랑하는 그 부드러운 것들, 부요한 것들 다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아~ 저는 근심하며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예 주님 저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다짐이 저의 진실한 고백이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대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버림이 영생의 지름길이며, 포기함이 배로 받는 길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다 버리고, 쥐었던 손을 다 펴고 겸손히 주님을 향해 폅니다. 
주님 뜻대로 사용하소서. 크신 주님!! 나의 빈손 꼭 잡으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소서.
빈손이 가장 큰 손이라는 걸 이 죄인이 이제 깨닫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 14. 22:07

<마태복음 14장 묵상 - 떠난 자를 보내며 깊어지는 영성>

영국의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은 그의 친구 할렘의 죽음을 생각하며
17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며 “인 메모리움(In memorium)”이라는 시를 완성합니다.
이 시는 죽은 친구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신과 인간성에 대한 사랑에 의해 평화에 도달하는 마음의 순례기라고 할 수 있지요.

"굳은 맹세를 해 보지 않은 마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잡초 속에 고여 있는 물같이
부족을 모르는 안일을 나는 부러워 않노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내 슬픔이 가장 클 때 깊이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고
….
떠나간 한 사람을 위한 나의 슬픔을 용서하소서.
그는 당신이 지으신 이, 그렇게도 훌륭했던 분,
나는 그가 당신 안에 살고 있음을 믿나이다.
또한 그 곳에서.”

마태복음 14장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헤롯에 의해 요한은 참수형을 당합니다.
요한을 죽인 후 헤롯은 요한이 예수님으로 환생했다고 믿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이적이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헤롯은 요한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계속 눌림이 심했고, 아마도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말씀을 따르다 희생당했습니다.
그는 예언자로서 의롭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왕 앞이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형장의 이슬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큰 의미였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은 요한 죽음의 비보(悲報)앞에서 그 슬픔을 가눌 수 없었던 듯 합니다.
그 분은 혼자 울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갔고 슬픔의 바다에 잠시 머무르셨을 겁니다.
외딴 곳에서 그 고독을 깊이 들이키시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한 결단을 곤고히 하셨을 겁니다.
친구 요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과 자신이 짊어지게 될 십자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을 겁니다.
‘요한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맞이 하리라.
요한이 그의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듯이 나 또한 내 십자가를 감당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영성을 더 깊게 하였고 영력을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인 오병이어의 이적이 요한의 죽음 직후에 이뤄진 것이 아닐까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 안에 잃은 양처럼 유리하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촉발시켰고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주안에서 박해를 당하는 자들의 고난과 핍박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박해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그분의 은혜를 촉발시킵니다.
오늘 주를 위해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까?
주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받는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셨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신앙과 영성은 더 견고해질 것이며, 당신의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과 기적은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세례자 요한으로의 삶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비록 나의 아픔과 고통이 예수님께도 깊은 슬픔이겠지만
나의 죽음과 희생이 오병이어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의 위력은 더 확장시켜 나갈 것을 믿기에
주님께 드리는 나의 삶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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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