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에 해당되는 글 185건
- 2014.02.14 <마가복음 8장 묵상 - 나에게 주님은…?>
- 2014.02.14 <마가복음 7장 묵상 -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장로의 전통은 쓰레기통에나 버려버려라!>
- 2014.02.14 <마가복음 5장 묵상 - 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곳에…>
- 2014.02.14 <마가복음 4장 묵상 - 작더라도 숨겨졌더라도 느리더라도...>
- 2014.02.14 <마가복음 2장 묵상 - 문제의 복판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 2014.02.14 <마가복음 16장 묵상 - 새로고침(reset)>
- 2014.01.27 마태복음 26장묵상- 거룩한 낭비 1
- 2014.01.23 <마태복음 23장 묵상 - 척하지 청(聽)하라.>
- 2014.01.19 마태복음 19장 묵상 - 빈손이 가장 큰 손입니다.
- 2014.01.14 <마태복음 14장 묵상 - 떠난 자를 보내며 깊어지는 영성>
<마가복음 7장 묵상 -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장로의 전통은 쓰레기통에나 버려버려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레이다망에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지저분한(?) 제자들이 아 글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응~ 좋아 딱걸렸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예수~ 당신들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거요?”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신랄한 공격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사야 29장 13절)으로 응수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딱 그말씀을 내가 읽을테니 잘 들어봐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6-7절)”
여기서 중요한 핵심적인 단어는 ‘입술’과 ‘마음’이겠죠.
마음은 근원이요 본질이라면 입술은 열매요 현상인 것이지요.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그럴싸하게 경건한 척 한다는 것이지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꼬집은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그러니까 율법 그 어디에도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다, 라고 한 적이 없는데
장로의 전통에서는 그런 행동을 부정한 행동으로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이 앞서버렸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세대인 학사 에스라 이후에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적용 항목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근거를 둔 적용지침이 장로의 전통인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장로의 전통은 율법의 정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장로의 전통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꼬집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르반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제도입니다. 잘 들어 보시죠^^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말로 ‘제물(a scrifice, 祭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이라는 것이죠.
이 고르반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사와 성결한 삶’ 두 가지라고 레위기는 말합니다.
레위기의 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제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에 대해 기록합니다. 후반부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것인지 거룩한 생활에 대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가까이 나아가다’ 라는 단어인데요.
이 '가까이 나아가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카라브(karab)’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희생제물이 바로 카라브의 명사형인 ‘코르반’인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가까이 그리고 깊숙이 침투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향해 침투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 바로 ‘코르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이 변질되어버립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이 고르반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고르반’이라고 선포하면, 그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께 그리고 성전에 귀속이 되어버립니다.
그 물건의 소유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 의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변질되어 경건의 허울 아래, ‘나 자신은 하나님께 드려진 고르반입니다.’라고 선포하면서 부모님께 대한 부양의 의무를 회피하였습니다.
자식으로서 더 이상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말인 것이지요.
주님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르반’하면서 노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뭔가 바껴도 한참 바꼈다는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일진데, 장로의 전통 따져 가며 손 안씻고 먹는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져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손도 안씻고 먹었을까요?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니 손 안씻어도 내 새끼처럼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만들어논 제도와 관습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하심을 방해하는 것들은 아닌지 되내여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자고 만들어 놓은 ‘예배’가 오히려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자고 드리는 기도가 나의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 나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견고한 진지로 바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라고 말하는 십일조와 헌금이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바껴버린 것은 아닌지?
더 사랑하고 더 보둠어 주고 서로 쉼이 되라고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껍데기만 남고 그 선한 기능은 다 잃어버린 탐욕과 이기심만 덕지 덕지 묻어 냄새나는 우릿간으로 변질돼 버린 것은 아닌지?
형식과 제도 속에 녹아진 율법의 정신들을 되새김질 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전통파괴는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장로의 전통을 파괴를 위한 퍼포먼스를 보십시오.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것은 장로의 정결법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정을 논하지 않고 그의 손을 귀와 혓바닥에 기꺼이 주님의 손을 갖다 대신 것입니다.
그 어떤 교회의 제도나 전통도 사랑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모든 제도와 형식은 하나님을 담아 내야 하며,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담지 못하는 제도와 형식과 전통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담아내는 허울에 불과합니다.
<마가복음 16장 묵상 - 새로고침(reset)>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제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의 이야기가 마가복음 마지막장 16장의 이야기인듯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죠.
첫째, 부활 소식의 전달자였던 여인들
둘째,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 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다 부활의 소식이 믿겨지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마저 너무 놀라서 제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두려워 떨고만 있습니다.(8절)
당시 그 시간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놀라운 일이긴 했겟지요.
그 여인들의 그 두려움과 놀라움의 생생한 감정을 제가 느낄 수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덤덤하고 무뎌진 것이겠지요?
마치 제자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아~ 이 아침에 주님의 부활 소식이 이다지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가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여인들을 통해 알리게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자들에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 봅니다.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과 여유를 주기 원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 살아나실 거란 것을 죽기 전에 누누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준비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여 흩어졌었고 예수 따르기를 포기한 절망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돌아가시기전 말씀하셨던 것처럼 갈릴리에 미리 가 있을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여인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갈릴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 청한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손내미심은 아닐까요?
컴퓨터 자판에 ‘새로고침(reset)' 키처럼, 배신과 부인 그리고 흩어짐의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의 소명과 비전을 리셋(reset)하자는 것일 겁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의 여정은 사흘 길 정도 될까요?
그 길을 걸으며 제자들은 예수님과 추억의 장소들을 지나야만 했을 겁니다.
밀밭을 거닐면서, 안식일에 밀을 따먹었던 그들을 변호해 주시던 자상한 주님을 떠올렸을 것이며
갈릴리 호수길을 걸으며, 그물을 던지고 있던 그네들을 부르시던 자상한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눈물지어야 했을 겁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 추억이기도 했겠지만 후회와 한숨의 길이기도 했겠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그냥 확 죽어버릴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경험하며 가는 길이 '갈릴리로 가는 길'이었겟지요.
그 밑바닥 그 상태에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후회와 한숨과 절망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다시 토닥이며 새로운 비전과 소명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이 아침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부르심을 듣습니다.
“다시 시작하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내 삶을 리셋하려고 합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던 그 첫만남의 장소와 흥분 가운데로 더듬어 가보려 합니다.
첫 부르심과 첫사랑의 그곳 그곳으로 나를 부르시며 초대하시는 주님의 손내미심에 응답해 보려 합니다.
주님 무뎌지고 무덤덤해진 이 부족한 제자의 마음을 아시고 손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에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다시 일어섬으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옵소서.
아멘!
<마태복음 26장 묵상 - 거룩한 낭비>
여인이 값비싼 형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닦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체포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인가, 라는 질문을 들게 만들정도로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한 여인이 식사하는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머리에향유를 붓습니다.
이 향유는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불가리, 샤넬 같은 향수보다더 찐한 향내를 뿜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여인이 결혼 지참물로하나씩 가지고 있던 너무나귀한 향유를 여인은 예수님께깨뜨려 붓습니다.
향유의원액이 예수님의 머리로 쏟아져내릴 때, 나병환자의 집이라 했던 시몬의 집의 퀘퀘하고눅눅한 모든 느낌을 그 향기가바꿔 놓았을 겁니다.
주님 마음이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마지막이구나 끝이구나.
이제 아버지께서 준비해 두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아버지의 위로가 이 여인을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시며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으로 큰 위로를받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여인의 이런 아름답고 향기로운 행동에 대해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가장 측근인 제자들이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입니다.분개를 했다는 것 보니 단단히 화가 났나 봅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제자들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지 않았고 비싼 값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계산법은 사람 보다 돈이었고, 예수님보다 자신이었습니다.
여인의 계산법은 어떤가요?
여인은 돈보다 사람이었고, 돈보다 주님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 예수님께 투자하는 삶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장 귀한 분이기에 그 어떤 것을 드리더라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죠.
제자들의 계산법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면, 여인의 계산법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런 욕을 좀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너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니? 시간이, 돈이 아깝지도 않냐?”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난 해 말, 아내가 연세대 대학원에 합격증을 들고 왔을 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야~ 이제 등골 휘겠구나~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어찌 감당하지?
이거 너무 허비하닌가? 배우는 것의 질에 비해 학비가 너무 비싼거 아니야?’
지금도 이런 마음은 쉬 가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침에 깨닫습니다.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내가 이 공부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깨뜨리기 원한다면 지지해줘야겠다고 말입니다.
나의 부족한 계산법이 부끄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아침 시간 이렇게 긴글을 치고 나누는 것도 허비가 아니길 바랍니다^^ ㅎㅎㅎ
여인의 허비, 여인의 낭비는 퀘퀘한 문둥병자의 집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낭비가 퀘퀘한 이 세상에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축복합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마태복음 14장 묵상 - 떠난 자를 보내며 깊어지는 영성>
영국의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은 그의 친구 할렘의 죽음을 생각하며
17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며 “인 메모리움(In memorium)”이라는 시를 완성합니다.
이 시는 죽은 친구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신과 인간성에 대한 사랑에 의해 평화에 도달하는 마음의 순례기라고 할 수 있지요.
"굳은 맹세를 해 보지 않은 마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잡초 속에 고여 있는 물같이
부족을 모르는 안일을 나는 부러워 않노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내 슬픔이 가장 클 때 깊이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고
….
떠나간 한 사람을 위한 나의 슬픔을 용서하소서.
그는 당신이 지으신 이, 그렇게도 훌륭했던 분,
나는 그가 당신 안에 살고 있음을 믿나이다.
또한 그 곳에서.”
마태복음 14장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헤롯에 의해 요한은 참수형을 당합니다.
요한을 죽인 후 헤롯은 요한이 예수님으로 환생했다고 믿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이적이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헤롯은 요한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계속 눌림이 심했고, 아마도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말씀을 따르다 희생당했습니다.
그는 예언자로서 의롭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왕 앞이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형장의 이슬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큰 의미였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은 요한 죽음의 비보(悲報)앞에서 그 슬픔을 가눌 수 없었던 듯 합니다.
그 분은 혼자 울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갔고 슬픔의 바다에 잠시 머무르셨을 겁니다.
외딴 곳에서 그 고독을 깊이 들이키시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한 결단을 곤고히 하셨을 겁니다.
친구 요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과 자신이 짊어지게 될 십자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을 겁니다.
‘요한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맞이 하리라.
요한이 그의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듯이 나 또한 내 십자가를 감당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영성을 더 깊게 하였고 영력을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인 오병이어의 이적이 요한의 죽음 직후에 이뤄진 것이 아닐까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 안에 잃은 양처럼 유리하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촉발시켰고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주안에서 박해를 당하는 자들의 고난과 핍박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박해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그분의 은혜를 촉발시킵니다.
오늘 주를 위해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까?
주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받는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셨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신앙과 영성은 더 견고해질 것이며, 당신의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과 기적은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세례자 요한으로의 삶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비록 나의 아픔과 고통이 예수님께도 깊은 슬픔이겠지만
나의 죽음과 희생이 오병이어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의 위력은 더 확장시켜 나갈 것을 믿기에
주님께 드리는 나의 삶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