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9. 13:07

<출애굽기 15장 묵상 -홍해 뒤에 맛본 쓴맛.>


출애굽기 15장에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다의 노래와 마라의 쓴물로 말미암은 불신앙 사건이 그것입니다.

바다의 노래는 홍해 바다에서의 뜨거운 구원 감격과 감사를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의 메김과 미리암을 비롯한 여인들의 화답이 있는 형태의 노래였습니다.

우리도 홍해 도하의 현장 가운데 있었다면 노래하거나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겠죠?

그들의 목전에서 이집트의 말과 병거들과 바로가 수장되어가는 놀라운 풍경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구원체험은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감격을 처음 경험한 사건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은 아직도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이잖습니까?

그런데 그 구원의 감격의 유효기간은 며칠일까요?

오늘 본문은 딱 3일이라 일러줍니다.

그들이 사흘길을 가도록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홍해에서 난리굿(?)을 피우며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기억과 감응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쏟아집니다.

그러면서 모든 화살이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모아집니다.

마치 출애굽 사건을 모세가 기획한 것처럼 모세는 궁지에 몰리고 있습니다.

과연 모세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구원의 감격은 일상의 문제들을 봉착하며 함몰되어버리고 맙니다.

바다의 노래(구원감격)과 마라의 불신앙 사건(일상의 고단함)이 대척적인 관계에 놓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크고도 놀라운 구원 감격에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힘든 일을 만나고 시험의 한복판에 있을 때 앞으로 계속해서 이 불평의 후렴구를 남발하게 되겠죠?

“하나님이 과연 우리 가운데 계신가?”

혹시 지금도 이 불평으로 아침을 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쓴물을 한 모금 마시며 인생의 쓰디쓴 고배를 한탄과 불평으로 맞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26절)”

이 말씀은 곧 이런 말이죠.

“일상적인 순종이 이집트 사람에게 가한 모든 질병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할 것이다.”

즉 일상적인 순종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구원의 감격과 일상의 순종사이에서 불평할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오늘도 우리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마라의 쓴물과도 같은 우리네 인생길, 순종하면 그 쓴물도 단물로 바뀌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쓰디쓴 인생도 어느 새 달디단 생수로 바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첫 이적이 바로 이 물을 변화시키는 기적아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첫 이적 또한 물에 관련된 것이었구요.

순종하며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의 삶은 반드시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일상으로 뛰어들기 전 믿음으로 단단히 무장했으면 합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놀라운 일상의 믿음의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6. 07:15

<출애굽기 12장 묵상-급할수록 먹고 가라??!!>


유월절의 유래를 읽을 수 있는 본문입니다.

유월절은 새 해의 첫 달에 행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담고 있는 의미있는 행사가 바로 유월절이라는 것이지요.

‘유월'이란 '넘어가다(pass over)’라는 의미입니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며 '돌파해(pass through)’ 가던 죽음의 영이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 생존하게 됨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일회성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유월절 행사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식사’에 있습니다.

유월절에 먹는 식사는 세 가지가 준비되어집니다.

먼저 문설주와 인방에 바를 피를 다 쏟아 낸 어린양을 불에 구운 양고기입니다.

희생제물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집트의 노예살이의 쓰라린 시간들을 기억하게 만들 쓴 나물입니다.

그리고 채 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들어진 무교병, 즉 발효되지 않은 떡입니다.

발효되기 위해서는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지만 발효될 겨를도 기다리지 못한 채 구어낸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그만큼 급하고 긴박한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지요.

이 세 음식을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서서 먹어야 합니다.

상상하면 참 우스꽝스런 장면이지 않나요?

준비된 음식들도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이고 그 음식을 먹는 이들의 자세나 옷차림도 일상적이거나 정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이는 ‘신속한 탈출’을 예기한 식사라 그렇습니다.

이러한 식사가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 명절로 매해의 첫달에 기념되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민족이 추석에 송편을 먹고 설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이러한 식사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는 인원수의 산정은 기본적으로 가족단위이고 그 가족 안에서 그 양을 다 소화하지 못할 때는 이웃의 가정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식사 규정’이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던 어린양을 그냥 버리지 않고 함께 식탁의 공동체로 모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를 생각해 봅니다.

먼 길을 떠나야하는 신속한 탈출 앞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기로서 영양을 보충하고 나물로서 각종 영양소들을 섭취하게 하는 배려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식사’, 그리고 ‘식탁’이란 말이 참 정겹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여유를 느껴봅니다.

또한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가족과의 나눔, 이웃과의 나눔을 주지시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 많은 여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정신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가족들끼리 둘러 앉아서 식사할 시간이 없다고 푸념들입니다.

가히 ‘식탁’을 잃어버린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바빠서 함께 식사할 30분의 시간도 못 만드는 것일까요?

어딜 그렇게 바쁘게 탈출하려고, 분초를 다투는 목숨의 위협 앞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긴박한 식사들을 해가며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목숨을 위협하는 신속한 탈출 앞에서도 가족끼리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식탁의 공동체를 가지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여유를 되새겨 봐야겠습니다.


얼마전 담임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끝장인 21장을 설교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며 찾아간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용납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아침 식탁을 준비해 놓셨죠.

‘식탁’은 다시 시작하자는 몸짓이었고 용납의 제스쳐였다는 거죠.

우리도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위해 함께 숟가락 한 번 들어줄 수 있는 여유, 식탁을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갖자라 하셨지요.

그러면서 사도행전 29장을 살자고들 말하는데, 우리는 요한복음 22장의 삶을 새롭게 써갑시다라고 하시더군요.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실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는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요한복음 22장의 삶을 새롭게 써가자는 그 제안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긴급하고도 신속한 탈출 앞에서도 식탁을 나눌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오늘 유월절 본문에서 제가 깨닫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점심은 어떤 이와 함께 식탁을 나눠야할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부디 우리네 가정에 ‘식탁’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식탁이 사라진 세태가 회복되어 가정마다 식탁을 바탕으로한 공동체가 회복되고, 어떤 정치인이 말했던 것처럼 ‘저녁이 있는 삶’이 회복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8:05

<누가복음 16장 묵상 -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얻으라>


본문 1-13절에는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회계장부를 거짓으로 작성하는 불의한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성경의 대표적인 난해구절( 難解句節) 중에 하나입니다. 주인의 돈을 자신 맘대로 사용하고 장부를 허위로 꾸민 불의한 청지기인데 어떻게 주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영악한 이해타산에 몰두합니다(3절). 그런데 그의 거짓말은 비난받기보다는 그의 주인까지도 칭찬하는 “지혜로운 행동”으로 간주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우스꽝스럽고 불합리하여 보이는 청지기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란 말은 종말론적인 틀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도 종말론적인 상황 설정하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재산은 하나님이 맡겨 놓은 위탁재산일 뿐 그것이 가장 선하게 사용되려면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이 논지를 뒷받침 해주는 예입니다. 


불의한 청지지는 주인의 재산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 사실(査實 )한 후 조만간 그를 해고할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회계장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그 불의하고 부정직한 청지기가 갑자기 지혜롭게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낱낱이 불러다가 옛 채무증서들을 파기하고 새 채무증서를 써 줍니다. 조만간에 직장을 잃을 때에 자기에게 호의를 입은 채무자들이 그를 영접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아낌없이 선심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돈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태의 전말을 다 파악한 주인은 예상을 뒤엎고 그의 교활하고 영악스러운 행동을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칭찬합니다. 여기서 그 청지기가 칭찬받은 이유는 그가 주인을 잘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물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모두 불의한 재산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부자의 재산은 도덕적으로 완전 무결한 재산이 아니며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가치도 아닙니다. 어떤 부자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의 지원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총으로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땀과 노동으로만 부자가 된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숭배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종말론은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사용할 수 없는 날이 오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재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없어질 날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불의한 청지기는 종말론적인 이해타산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판단을 하였고, 친구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사용하여 사람을 샀고 친구를 샀던 것이 종말에 가서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세상의 재물을 거룩하게 낭비하여 우정을 쌓는 사람들은 영원한 집으로 초청되며 영접될 것입니다. 돈의 신적 위력에 홀린 사람은 사람의 가치를 보지 못합니다. 신적 위력이란 말은 돈과 하나님이 동등한 위치라는 겁니다. 돈에 마음이 팔리면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은 더더욱 보이지 않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사람도 버리고 하나님도 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둘 다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눈의 초점이 한 곳으로 모아 지지 두 곳 모두에 모아지지 않듯, 돈 아니면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돈보다는 사람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억만년 살면서 이 재물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곧 끝이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완벽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음을 14절 말씀이 잘 말씀해주고 있죠. 성령충만한 사람만이 돈의 신적인 위력, 즉 맘몬의 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만이 돈 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사람을 얻기 위해 돈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돈을 위해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돈을 이용하느냐? 이것을 통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거룩하게 낭비하여 친구를 얻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잘 이용하여 구원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8:03

<창세기 26장 묵상 - 삶의 후퇴, 신앙의 전진>


이삭이 자신의 아버지가 범하였던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죄도 가족 내력이 있나봅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다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이고 지내다 ㅊㄴㄹ ㅋ들통이 납니다. 이삭도 비슷한 상황에 처합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미리 언질을 주십니다. 기근이 났지만 이집트로 가지 말고 니가 지금 있는 그랄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아라고 말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너를 축복하며 니 후손을 축복할 것이니 이 땅에 계속 머무르라 말씀하십니다. 이삭은 그 아버지처럼 이집트로 가지는 않았지만 그랄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구걸 아닌 구걸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고 지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삭이 리브가를 껴 안은 모습이 발각이 되고 이삭은 위험에 처해졌지만 그랄왕의 아량으로 그땅에 계속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삭의 인생은 번성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해는 농사를 짓는데 백 배의 수확을 거둬들이기도 했으니까요. 이삭이  거부가 되자 그랄왕 아비멜렉은 그를 시기하여 그 땅에서 떠나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부터 이삭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이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 우물을 파서 물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삭이 지금 세대에 살았다 해도 그는 아마 우물 사업으로 부자가 됐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우물을 파면 그랄 땅의 목자들이 그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억지를 피며 이삭의 목자들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은 적극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그렇게 후퇴하기를 대 여섯번이나 하여 그는 브엘세바라는 곳에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인생의 번성함 뒤에 찾아온 후퇴라니 씁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후퇴 뒤에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깨닫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자신을 브엘세바로 이끄심을 알았습니다. 브엘세바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음성은 언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죠.브엘세바에 이르러서야 이삭은 자신의 삶에 놓쳤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그랄왕을 의지하려 했었던 그는 이제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온전히 모시며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때로 우리 삶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삶은 후퇴하더라도 신앙만은 후퇴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인생의 후퇴를 통해서라도 신앙의 전진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 후퇴에 후퇴가 거듭 되고 있습니까?? 포기와 물러섬에 익숙해 계시나요? 다만 그 후퇴 뒤에 하나님의 이끄심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인생의 후퇴가 신앙의 전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이삭의 삶을 통해 깨닫기 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8:01

 <창세기 21장 묵상 - 웃음을 주시는 분, 눈물을 닦으시는 분>


사라에게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물을 닦으십니다.

오랜 기다림으로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던 자에게는 웃음을 주시고,

서러움과 목마름으로 울부짖는 자에게는 참 위로와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 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6절)”

사라의 말입니다.

‘웃음’이라는 뜻의 아들 ‘이삭’을 90세에 낳은 여인의 감격에 찬 고백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 삶에 있으면 참 좋겠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주시는구나. 나를 보는이마다 내게 기쁘게 웃어줄거야’ 

참 좋은 말이지요?


한 사람의 웃음과 행복 뒤에는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까요?

사라의 아들 이삭과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차가 13세살이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고 걷기 시작하자 이 두 아들은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맘 속에 욕심이 생겼고 자기 아들에게만 온전한 상속을 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꼬드겨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쫒아 내게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의 제일 남단인 브엘세바를 거쳐 시나이 반도의 거친 광야길로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물가죽부대에 물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물이 떨어지는 만큼 하갈의 인내심과 희망도 바닥이 나고 있었습니다.

물이 완전히 떨어지자 하갈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아들을 가시덤블로 내동댕이치며  목노아 울어 버립니다.


“그는(하갈)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16-17절)”

아이의 신음과 울부짖음에 함께 아파하시며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분이라는 걸 이런 본문을 통해 깊이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그 그윽한 눈길에는 촉촉한 따스함이 어려 있습니다.

사라에게 웃음을 주셨던 하나님이, 이번엔 눈물을 닦으시고 갈 길을 밝히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듣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대면하는 우리 하나님은 웃음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로 웃게 하시며, 나로 눈물을 그치게 하시며, 나로 갈길을 밝히 보여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이야기를 묵상해 오며, 저의 삶은 귀한 본보기를 보고 있으며 희망을 갖습니다.

믿음의 가문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구나.

수 없이 많은 연단과 담금질 속에 빚어지는 것이 믿음의 가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제가 이룬 가정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는 자녀들에게 훌륭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며, 하나님의 그 고결한 성품을 물려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월이 지난 후 자녀들 때문에 웃게 될 날과 든든해져갈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끝이 없어 보이는 양육의 고된 길을 오늘도 묵묵히 감당해 보려 합니다^^ 결말이 이상하게 끝나는 것 같네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하시는 분이시며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 좋은 아버지라는 것을요!!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8:00

<창세기 18장 묵상 - 의와 공도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25년간 약속의 자손을 기다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날 때 주어진 후손 약속이 소돔 파멸의 시점에서 다시금 확증됩니다.

사라의 이삭 수태고지의 사명을 띠고 온 천사의 최종 목적지가 소돔이라는 것을 주목해 봅니다.

소돔은 극도의 불법과 원한에 찬 부르짖음 때문에 멸망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의인 한 명이 없을 정도의 부패와 타락이 심각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소돔 성의 죄악과 불법, 음란 상태를 실사하여 심판을 집행하려고 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 천사들은 소돔으로 향하던 중 아브라함의 집에 들러 사라의 잉태 소식을 알리고 떠나려 했을까요?

아마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건설할 나라와 공동체를 소돔 성과 대조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일 것입니다.


불법과 폭력으로 멸망당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대안공동체로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세워 나가게 될 나라를 부각 시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룰 나라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9절)"

의(쯔다카)와 공도(미쉬파트)가 아브라함 후손이 이룰 나라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라고 말합니다.


의로 번역된 히브리말 쯔다카는 사법적인 정의를 말합니다.

빈부와 위치와 상관 없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쯔다카, 의로 정의합니다.

공도로 번역된 미쉬파트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동체의 평등한 사랑과 인간다운 대우를 가리켜 쩨데카라고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룰 나라는 의와 공도의 베이스 위에 세워질 흔들리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깊숙이 유착된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라는 부유한 도시왕국들이 엄청난 진동 속에 파멸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의와 공도가 없었기에 흔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불타는 소돔성, 남색과 빈부격차, 불법재판과 폭력이 판치던 소돔성의 남은 의인을 구해달라고 중보기도하는 중보기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중보기도의 과정 안에서 그를 통해 약속하신 의와 공도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깨닫게 됐을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계약 조건은 다름 아닌 의와 공도입니다.

여기에서 발전된 것이 땅 신학입니다. 땅신학이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임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임대료를 잘 내고 살아가면 그 땅은 영원히 그들의 차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땅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야 할 임대료가 무엇이냐? 

바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의와 공도라는 것입니다. 


의와 공도의 나라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 위에 세워야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대한민국은 의와 공도의 나라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의와 공도의 임대료를 잘 지불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강조하는 의와 공도를 지키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하며 실천해야겠습니다.

의와 공도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힘있게 세워져 가기를 소원하며 긴글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9

<창세기 17장 묵상 - 변종(變種)과 열매맺음(聖化) >


우리 신앙은 단계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시고 우리의 믿음의 단계에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죠.

하나님과 아브람 두 계약의 당사자가 고기를 쪼갠 사이를 하나님 한 분만이 지나가는 일방적인 계약이었습니다.

그 계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일러주는 것이었죠.

계약이 있은 직후 16장에서 아브람은 계약을 파기하고 이집트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버립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샷따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장1절)"

'행하여 완전할 것'에 대한 명령은 이제 17장에서 맺어질 쌍방 계약(할례 계약) 안에 담길 계약적 요구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의 거의 일방적인 약속과 계약에만 의존하는 삶에서 진일보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계약적 의무를 준행해야 하는 쌍방 계약의 당사자로 격상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제 아브람 편에서 행해야할 일편단심으로 행하는 첫걸음은 할례입니다. 

할례란 구별과 성화(聖化)를 의미합니다(4-6절).

할례는 질적인 변종(變種-종자가 바뀜)을 의미합니다. 이제 '가문의 씨앗'이 아닌 '하나님의 씨앗'으로 종자의 성격이 바뀐 것이죠. 

데라가문의 씨족장에서 열국의 조상으로 종자가 바뀐 것입니다. 


15-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라하고도 약속을 하시며 사라의 몸에서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약속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전에 사라는 자신에게서 씨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나님이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여종 하갈에게서 아이를 만들어 냈었습니다.

사라의 신앙에 있어서도 한 단계 성장을 맛본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성화(聖化, sanctification)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하여 세상을 바꾸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 안에서 구별된 사람인 거죠.

우리는 세상의 씨앗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앗을 품고 있는 종자들입니다.

우리는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 대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질적인 변종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이며 열방에 복을 흘러보내는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종자의 변종에서 그치는 삶이 아니라 그 씨앗이 점점 자라 열매맺는 삶(聖化)으로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맺는 이 과정을 일컬어 성화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으면 끝~ 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질적인 변화를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지금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자라고 있고 할머니 사라도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계속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저에게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요구하십니다. 

쌍방적인 계약의 당사자로 저를 초청하십니다.

한 단계 성장한 제 모습을 기대하시며, 구별된 모습을 요구하시며 완전하게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자라갈 뿐만 아니라 그 열매가 온전하며 실하게 영글어가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죠.

이 한 여름 폭염에 열매들은 신이 났습니다.

열매들은 실실 웃습니다. 폭염에 실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실실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믿음의 벼랑 끝에서 우리 또한 실실 웃으며 한 단계 성장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심겨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씨앗으로 열매맺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8

<창세기 16장 묵상 -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부부의 믿음은 하향평준화가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녀 총각들이 믿음의 사람 훈련된 사람을 만나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아브람의 이야기, 남자들의 이야기만 나오다 오늘 갑자기 여자들의 이야기로 전환이 됩니다.

아브람이 자녀를 낳는 문제는 아브람의 믿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내 사라의 믿음도 필요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성장해 가는데 그에 맞춰 사라도 성장하고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던지며 본문을 살펴보니 ‘글쎄…’ 올시다.


분명히 15장에서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아브람은 그 말을 못 믿고 곧 바로 이런 실수를 한 것일까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사래가 오해한 것에서 시작되더군요. 15장 4절을 보십시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사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합니다. 사라는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아~ 내 남편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된다고 하는구나. 하나님이 나 사래의 몸에서 날 자라 하지 않고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라고 하시네. 그러면 내 여종을 시켜서라도 애를 낳게 해야겠다.’ 그래서 하갈에게 애를 낳게 한 겁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빠뜨리신 것 같아요. ‘네 아내 사래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거야”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정보를 빠뜨리십니다. 의도적으로 빠뜨리십니다. 이 정보를 빠뜨리신 이유는 사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에 같이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것 같은데 사래는 아직 더 성장해야 함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래를 훈련시키기 위해 그런 정보를 누락시킨 것 같습니다. 사래는 당장 달려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의도적인 정보 누락 이것은 우리네 삶에서도 맞닥뜨리는 하나님의 훈련방법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비전을 알려주시려면 명확하게 청사진을 보여주실 것이지 늘 알려주시는 정보가 조금 흐릿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옳은 길인지 긴가 민가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구요? 

그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느냐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신뢰하느냐를 보시고자 하는 겁니다. 심지어 벼랑끝까지 몰고 가실 때도 있습니다.

사래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날개를 펼친 것이 아니라 헬리콥터를 얻어 타버린 것이지요. 


본문의 두번째 포인트는 사래의 여종 하갈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친절함입니다.

하나님은 참 따뜻한 분이십니다. 좋은 분이시죠.

솔직히 이집트 여인인 사래의 여종 하갈은 사람취급도 받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아브람의 아기를 가진 것 외에는 어떤 가치도 없는 여인인 거죠.

여주인의 등살에 밀려 도망길에 오른 임산부 하갈은 홀몸이 아닌 몸으로 달려온 도망길에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겨우 샘을 찾아 목을 축이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묻는 질문을 보십시오.8절입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미 하갈의 이름을 알 뿐만 아니라 하갈의 근본적 아픔을 치유하려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하갈은 자신의 사정을 있는 것 없는 것 다 보태서 쏟아 놓게 됩니다.

그 쏟아 놓는 과정이 치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그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임할 복까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감동을 받은 하갈이 그 샘의 이름을 “야웨께서 나를 감찰하신다”라는 뜻의 우물로 바꿔버립니다.


내가 가는 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청사진이 아닌 나침반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명확한 그림이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다음 발걸음에 대한 정보의 누락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면서도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세심히 물어보시는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만나면 참 좋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들 가시나요?

그 길 위에서 나를 감찰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다음은 지오디의 ‘길’이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입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이 길에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나도 웃을 수 있을까..

오~지금내가..어디로..어디로..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살아야만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선 우리네 인생에 오늘 주님은 찾아오실 겁니다. 

나를 감찰하시며 안으시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 길이 벼랑끝이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믿고 신뢰하며 묵묵히 걸어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샬롬!!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7

큰 일의 성공 뒤에는 우울함이 찾아오는 건가요?

그래서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을 했나 봅니다.

15장의 분위기는 매우 우울하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이 후에'는 바로 앞 장에서 일어난 후에라는 말이겠죠?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4개국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전리품까지 다 포기하고 양보하고 돌아온 그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이지요. 

그 일 후에 아브람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합니다. 

그돌라오멜 동맹군이 보복 공격을 해오지나 않을까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보내면서 나를 보호해 줄 방패는 정작 누구인가 고민했겠지요.

또한 소돔왕에게 모든 전리품을 양보하고 돌아오면서 내가 포기한 전리품의 대가로 얻게될 상급(전리품)은 무엇일까 회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습적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히브리서 4장 12-13절).

말씀이 내 치부를 드러내고 민낯을 드러내게 되며 내 내면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속은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와 가나안 땅에 왔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는데 뭐가 이뤄지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서서히 의심의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약속 후에 벌써 10년의 세월이 흐른 겁니다.

할아버지 때의 10년은 청춘의 10년과는 다른 것이죠. 

흰머리도 많아지고 검버섯도 늘어나고 그런데 약속은 이뤄지지 않고 답답했겠죠.

요즘 제가 거울을 보며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이마의 면적을 보며 느끼는 자괴감(?)과 비슷한 감정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불평과 불만을 여과 없이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 말하며 매우 냉소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뭇별을 보여주며 반드시 약속이 이루어질 거라 설득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뤄주시기 위해 다시 언약을 맺으십니다.

고대 동방에서 당사자끼리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을 쪼개어 당사자 쌍방이 그 쪼개어 죽인 동물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를 통해 계약 위반 시에 이 동물처럼 쪼개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축들을 쪼개어 놓라고만 하고 아브람이 잠든 사이 혼자서 그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이는 아브람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나님 스스로를 결박하는 행위인 셈이죠.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가나안 땅 약속을 지킬 것임을 굳게 맹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얻는 몇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1. 약속의 성취가 더딤으로 인한 깊은 우울증과 자괴감이 기습적인 말씀의 습격을 통해 점령당하길 원합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며 방황하는 내 영혼 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하소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한 위로가 없습니다. 말씀하소서 주여~

2. 하나님은 강한 성이시요 방패가 되시며 나의 유일한 상급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불침번이 되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삶 깊숙히 체험하게 하소서.

3.  스스로를 결박하시면서까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그런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게 하소서.


하나님만이 방패요 상급임을 기억하며 체험하는 하루되시길 축복합니다.

우울함을 몰아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왈츠 한 곡 어떤가요?

요한 쉬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앨범을 틀어 놓고 쓰고 있는데 기분이 한결 좋아지네요~^^

왈츠와 같이 흥겹고도 힘있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9. 15. 07:57

<창세기 14장 묵상 - 신앙의 열매는 인격이다.>


아브람의 인격 성장이 괄목상대(刮目相對)네요.

일취월장으로 깊어져가는 인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명백한 효과는 인격의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져야함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13장에서 얄미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다 양보하고 척박한 산지에서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유목생활을 하던 아브람에게 다급한 소식이 찾아 듭니다.

바빌론 지역의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이 주도하는 4개국의 연합군이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 성을 점령하고 부녀와 인민들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길러오던 사병 318명과 근처의 동맹부족들을 설득하여 롯 탈환작전으로 뛰어 듭니다.

아브람이 용감히 싸운 결과 적을 섬멸하고 모든 부녀와 인민을 구하고 롯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전리품까지 챙겨 돌아오던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소돔왕에게 모든 전리품을 다 양도하고 이양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괄목할 인격성장의 증거들을 몇 가지 짚어 보죠.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의 순결까지 팔아먹던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겁쟁이 아브람이 318명의 군사들과 용감히 싸웠다는 것은 그의 급격한 인격 성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동맹국들을 설득하여 전쟁에까지 참여시켰다는 것은 그가 그 땅에서 거류민으로 살면서도 토착부족들을 포섭하는 인격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를 볼 때 아브람은 평소에 멜기세덱에게 영적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람은 또한 소돔왕으로부터 전리품을 모두 다 취하라는 제의를 받지만 자신이 약탈 전쟁을 일삼은 소돔 왕의 용병이라고 오해를 받을까 봐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제산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인격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대목입니다.


1. 정의로운 것에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투신하는 용기와 결단.

2.주위 사람들을 포섭하고 이끄는 인격과 지도력.

3.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며 따르는 배움의 자세.

4.재물의 유혹보다 명예를 선택하는 청렴함.


이 모든 것이 아브람의 인격성장을 지지해주는 대목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안위와 유익을 위한 통로가 아닙니다.

부단한 인격성장과 성품의 연마를 통해 맺힌 열매를 다른 사람이 따먹을 수 있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인격성장은 자신의 가족(롯)과 주위의 공동체들 그리고 한 나라에(소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인격이 부럽고 그의 용기가 저를 자극하며 그의 포기와 절제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저의 인격에도 가파른 성장이 있기를 기도하며 노력하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한 주의 시작...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