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문자
<마태복음 13장 묵상 - 열매는 마음 밭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비유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묘한 진리를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마태복음 13장은 모두 천국 비유로 이뤄졌습니다.
비유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욱 심화된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방법인 반면에 대적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는 기능을 합니다.
천국 비유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효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자 비유를 깊이 묵상해 봅니다.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합니다. 씨앗과 땅이지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땅은 그 말씀을 듣고 받는 우리들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결실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의 결실의 여부는 전적으로 마음밭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마음밭은 인격의 중심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마음밭에서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면 결실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네 가지 마음밭에 대하여 말합니다.
첫째 길가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길가 밭은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받는 사람의 마음밭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여 이미 마음 밭이 굳어져 버린 사람입니다.
흙이 씨앗에 덮여 있을 때 싹을 내는데 밭이 굳어져 있으니 뙤악볕에 씨앗이 덩그러니 드러나 보이는 겁니다.
이걸 새(사탄)가 가만 놔두겠습니까? 주일에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 아니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빼앗겨 버립니다.
사탄의 주요 활동 중에 중요한 활동은 성도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감동을 못받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며 성도의 영적 각성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둘째,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흙이 깊지 않기에 말씀의 싹이 나오는 해가 돋은 후에는 타져서 뿌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긴 했는데 말씀으로 살다가 환난이나 불편, 핍박을 경험하는 순간, “즉시” 넘어지는 경우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되고 잘 풀릴 줄로만 알았는데 고난도 있고 십자가도 있다고 하니 시험이 들어 버립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말씀의 결실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때는 은혜 받는데 말씀의 위력과 복됨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문제는 감춰진 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척하는 숨은 죄악된 습관이나 세계관 등이 말씀이 뿌리내리는 것을 저지하여 성도의 영적 각성을 저지합니다.
셋째, 가시 떨기에 떨어지는 말씀씨앗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의 싹을 내지만 가시 기운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마음밭이 온통 욕심으로 가득차 말씀의 싹이 질식하여 죽어버리는 상태입니다.
과도한 욕망과 재리의 유혹은 말씀의 결실을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질식시켜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말씀씨앗들입니다.
좋은 땅은 습도, 햇빛, 무기질과 영양분이 가득찬 토양입니다.
말씀을 아주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 속에 담긴 모든 축복과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순종하는) 성도입니다.
예를 들어 온유와 인내에 관한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행함으로써 온유와 인내가 인격과 삶 속에 체험되는 신앙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고 실천하고 순종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네 가지 밭 모두의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앞의 세 밭은 듣고 받은 말씀이 어떤 요소에 의해 막혀 실천되지 못하여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자라야(실천하며 순종해야)합니다.
당시 풍년이 들면 7-8배 결실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신적인 풍요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은 갈 수록 영적인 풍요를 더욱 깊고 넓게 경험한다는 것을 30배~100배로 표현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 가운데 말씀에 순종을 통해 점진적인 결실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오늘도 열매맺는 날 되소서^^
'묵상'에 해당되는 글 185건
- 2014.01.14 <마태복음 13장 묵상 - 열매는 마음 밭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 2014.01.11 마태복음 11장 묵상 - 세례 요한의 수고와 무거운 짐에 대한 주님의 위로
- 2014.01.02 <마태복음 2장 묵상 - 나사렛에 오신 예수>
- 2013.12.31 묵상문자, <창세기 18장 묵상 - 내년 이맘 때 다시 오겠다.>
- 2013.12.25 누가복음 2장 1-14절 묵상, 가이사의평화 예수의평화
- 2013.12.20 전도서 1장 묵상 - 해 아랫 것, 해 너머의 것
- 2013.12.17 잠언 30장 묵상 - 짐승처럼만이라도 살 수 있는 지혜
- 2013.11.23 갈라디아서 6장 - 구름으로 세월을 보내는 이여~
- 2013.11.23 갈라디아서 5장 묵상 -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신 뜻
- 2013.11.21 시편 49편 묵상문자 - 생명을 가진 자여 당당하라
<마태복음 11장 묵상 - 누가 큰 자입니까?>
11장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방문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보낸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의 핵심은 “우리가 기다렸던 분이 예수님 당신이십니까?”였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길을 예비하려고 분투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한 일이 옳은 일입니까?”하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 분이라고 분명히 인식했는데,
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보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판단으로 감옥에 갇힌 요한이 자신의 생의 최후를 깨닫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신이 똑바로 살고 있는지 잘 살아 온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요?
우리 또한 이런 질문을 주님께 종종 드리곤 하죠.
“주님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무 바보처럼 사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귀신에 들려서(13절 참조) 그런 것이라 손가락질 하는데요?”
참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때론 바보처럼 느껴지고 어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죽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의미였고 목적이었던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평가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가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7절 이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겁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야생꿀을 먹으며 메뚜기를 잡아 먹고 사는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라니요?
‘큰 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이라 평가를 받으며 미친 사람 취급 받지만 예수님에게서는 가장 큰 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 판단하시는 ‘큰 자’ 소위 말하는 ‘영적 거인’은 말씀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삶의 부르심을 이뤄가는 사람이죠.
13절에 보면 '선지자와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죠.
신약성경에서 ‘선지자와 율법’ 또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이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눕니다. 선지서 율법서 시가서로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구분법이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마지막 장인 ‘말라기’ 마지막 장의 예언이 요한에 관한 예언이라는 뜻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 말라기 말씀이 말하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예수님이 확증해 주십니다.
요한은 이 말씀에 의해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이고 자신의 삶의 뜻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던졌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가 큰 자라는 겁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고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 헌신했던 사람이란 겁니다.
그런데 천국(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겁니다.(11절)
세례요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반응하며 움직이는 자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불면 그것에 맞춰 춤추고, 예수님이 슬피 울면 함께 우는 그 사람이 큰 자입니다. (17절)
예수님께 반응하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많은 희생과 피로를 감수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조롱도 이겨내야 합니다. 미친 사람이라는 평가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투신하는 삶, 말씀에 반응하는 삶에서 오는 누적된 피로도는 그 무엇으로도 풀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 안에서 인생을 하직하기 직전 상당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렸을 것이고 그 고단한 삶의 누적된 피로도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진리와 말씀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 ‘하나님 나라의 큰 자’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을 건내십니다.
11장의 마지막 세 절의 말씀은 꾸준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고단한 영적 거인들을 향해 던지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인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말씀 아닐까요?
고단한 예언자 요한을 향해 던지신 마지막 위로의 말이 우리 심령에 울려 퍼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묵상문자
<마태복음 2장 - 나사렛에 오신 예수>
본문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는 장입니다. 이 장에 나오는 지명(地名)에 대해 주목해 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은 집이라는 뜻의 '베트'와 떡이라는 '레헴'의 결합으로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이 떡집에서 태어났으니 말되죠? 하나님의 위트인 듯합니다.
헤롯의 박해를 피해 예수님 가족은 이주노동자로서 이집트에서의 삶을 사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나그네 삶의 애환을 이해하고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나중에 예수님의 성장기에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상기됐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땅의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고단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의 삶을 예표하는 일이었다 할 수 있을까요?
그 다음 나오는 지명이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입니다.
오늘 묵상은 나사렛이라는 지명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갈길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호수의 이름입니다.
그 호수를 타고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기도 하죠.
성지순례를 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갈릴리는 너무나 매력적인 땅입니다.
풍부한 물의 공급으로 농사도 잘 되고 고기도 잡을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을 줄 수 있는 환경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환경에서 30세가 되기까지 성장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연관찰에서 나온 비유들을 보면( 예를 들면 농사와 어업에 관련된 비유들과 다양한 자연과 관련된 비유들)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의 EQ 지수는 상당했을 것이고 그것은 나사렛에서의 성장 배경에서 나온것이라 이해됩니다.
그러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의 성장은 예수님이 공생애(공적인 활동)를 펼치시는 데 상당한 장애물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 출신인지를 가지고 갑론을박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나다나엘 같은 경우에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멀까지 하는 것을 보죠.
갈릴리 지방이 이스라엘 전체 안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나사렛이란 동네는 갈릴리에서조차 소외되고 차별 받는 곳이엇습니다.
그러기에 나사렛 출신 예수는 그의 출신에 따라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타이틀은 예수님의 십자가 명폐에까지 따라가 붙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명폐에 이런 타이틀이 붙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들의 왕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당시 이스라엘의 식민통치국이었던 로마인들의 눈에 보여진 예수도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천하디 천한 동네요 가장 소외된 땅이었던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성장하였습니다.
그분의 탄생이 베들레헴 마굿간이라는 최고의 겸손한(humble) 장소였을 뿐 아니라 성장 또한 가장 낮고 천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낮고 천한 곳에서의 삶이었던 것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고, 예수적이어야 한다면…
우리의 관심과 눈길이 머물러야 할 곳이 바로 나사렛적인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올 한 해 우리 삶이 나사렛을 향하기 원합니다.
소외된 곳, 불평등과 편견 때문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사렛 말입니다.
예수님이 서울에서 자라신다면 어느 동네에서 자라실까 짖꿎은 상상을 해 봅니다.
아마도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인 '염리동'이 아닐까요?
이곳이 서울에서 가장 낮고 천한 곳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죠.
사역지로 처음 염리동에 머물게 되었을 때, '이곳이 서울인가? 이것이 21세기의 서울인가?'하는 의구심을 가졌었습니다.
열악한 주변환경과 주거환경 탓에 도시 소외 계층들이 몰려들었고 이주노동자들의 안식처가 되어가는 염리동.
이곳은 참 나사렛 스러운 동네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사역하는 것에 자부심까지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머무실 법한 곳이기 때문이죠.
'올 한 해 더 낮은 자리에 머물길 원합니다. 더 소외된 이웃들의 삶에 동참하게 하소서.
더 차별받는 이들의 벗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나사렛 사람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창세기 18장 묵상 - 내년 이맘 때 다시 오겠다.>
"12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8장 12-15절)"
2013년의 마지막 날의 아침 묵상입니다.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이 99세요 사라가 90세에 하나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사라는 폐경을 넘어 죽음을 준비해야 나이가 아닌가요?
아브라함도 기력이 남아 있지 않고 희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의 약속 뿐이었습니다.
이제 자포자기로 넋을 잃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다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약속을 재확인 시켜주십니다.
내년 이맘 때에 너에게 돌아올 것인데 그 때에는 사라 너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비웃음이죠.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참 유머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사라의 웃음에서 유래가 됩니다.
둘에게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라고 웃어버리며 반응하는 사라에게 하나님은 웃음으로 반응해 주신것이지요. 하나님이 과연 나를 위하시는가 하는 우리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웃음으로 반응해 주시는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에게 다가왔던 부분은 "내년 이맘 때 내가 다시오겠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내년 이맘 때 내가 다시 올 때 너의 품에는 나의 약속의 열매가 안겨있을 것이다.
아멘
올해가 다 갔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날 아침에
빈 바구니로...
올해 이루지 못한 나의 목표와 열매때문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며 자책해 보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존재인가? 겨우 이것 이루려고 이 발버둥을 쳤는가? 참 후회스런 아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은 '내년 이맘 때 니가 바라는 그 열매를 너는 맺고 있을 것이다.'
한숨은 희망으로 바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약속이 다시 샘 솟듯 제 맘에 넘쳐 흐릅니다.
내년 이맘 때 , 그러니까 내년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우리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올 한 해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을 기대하며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맞아 봅니다.
내년 이맘 때 다시 만나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2013년의 마지막 날
김경헌 목사 올림
<누가복음 2장 1-14절>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한 명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이고 다른 한 분은 평화의 왕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추구한 평화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사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평화를 추구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며 발생되는 평화를 추구했죠.
로마의 황제는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본적지로 돌아가 호적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온 세계는 로마의 힘에 눌려 있었기에 가이사의 명령은 세계 만민이 복종해야할 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의 아낙네였던 마라아에게 까지 그 명령은 미치게 됩니다.
로마황제의 말은 질서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로마제국이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 백성들을 침묵시키고 이뤄낸 평화를 로마식 평화라 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이런 로마의 평화는 다른 사람을 억누른 결과로 얻는 평화이고 폭력으로 이뤄낸 평화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폭압적인 상황 가운데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목동들은 로마황제가 주는 평화와 전혀 다른 평화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와 기쁨의 소식을 맨 먼저 전해 들은 사람들은 폭력과 억압의 삶 맨 가장 자리에 놓여진 사람들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목동은 사회의 부랑자들이나 무지렁이들에게 남겨진 천하고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가장 자리 변두리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참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맨 먼저 전해졌습니다.
고달픈 순례의 인생길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정상인들의 사회에서 따돌림받은 비천한 목동을 선택하여 첫 성탄의 기쁜 소식을 맡깁니다.
정상인들의 경우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고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왜냐면 그 아기는 너무 연약하고 무력해 보이기에 그들을 구해줄 메시야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강보에 싸여 있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가 바로 온 세상의 주요, 그리스도요, 구세주라는 목동들의 믿음은 우리가 가져야할 성탄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가이사의 평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이 주는 평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라고 하지요. 폭력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강요당하는 평화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부인하여 주는 평화입니다. 가장이 자기의 혈기를 부인하면 가정의 평화를 선물로 줍니다.
사장님이 혈기를 죽이고 자기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회사의 가장 말단 직원까지 평화를 누립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기 사람 챙기기를 버리고 공공선에 투신하면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 즉 가이사의 평화가 아닌 어린 아기들 안에 발견되는 자기 비움의 평화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인생의 가장 고단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먼저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대와 나 그 평화를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참 평화를 전하십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평화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더 밝게 만들었음 좋겠습니다.
성탄 아침에 참 평화 샬롬을 전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기쁜 소식을 맡은 자요 여러분의 목자인 김경헌 목사 올림^^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해와 달을 만들어 주셔서 인간이 자연순환, 시간의 질서 아래 살 것을 예상하셨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전도서 1장 9절).
'해 아래'라는 말은 자연질서 안에서는 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 자체는 새로움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연을 대표하는 태양은 인간을 늙게(새롭지 않게) 만듭니다.
해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인간과 동물의 노화를 촉진시킨다고 합니다.
태양의 전자파만 아니면 우리는 2백년 3백년을 더 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해 아래 있기에 새롭지 못합니다.
해아래 벌어졌던 일은 훨씬 먼저 살았던 어떤 이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없는 것이지요.
전도서 기자(솔로몬)는 새것에 대한 추구를 위하여, 지식, 쾌락, 책 저술, 여색 탐닉 등 모든 극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아래서 새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전도서의 입장에 대하여 이렇게 답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인생은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립니다.
해 아래서 이뤄지는 모든 것은 영영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의 기쁨이 될 순 있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지요.
더 많이 갖는 것도, 더 아름다워지는 것도, 더 배부르는 것도 잠시의 기쁜일 뿐
해 아래서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해 아래서 시들해질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해 아래 있는 것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대신
해 너머 있는 영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영원한 기쁨을 누린 사람은 이 땅에서도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천국(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해 아래 것을 먼저 찾지 말고 해 너머의 영원한 것을 찾으십시오. (마태복음 6장 33절, 7장 7절)
주님 안에서 영락(永樂)을 누리는 하루를 보내소서!!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 아마존에서 순교한 선교사 짐 엘리엇-
잠언 30장 - 짐승처럼만이라도 살 수 있는 지혜
잠언 30장은 아굴의 잠언이라는 표지가 달렸습니다(1절).
아굴은 참 솔직한 사람이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2절의 그의 고백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짐승에 불과한 사람이라니 참으로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 잠언 전체를 풀어 나가기 위한 수사학적인(레토리컬) 표현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무슨 말이냐면, 잠언 30장에 보면 미물인 짐승과 벌레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짐승들과 피조물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의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이 만드신 특징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예를들면 개미나 사반, 메뚜기, 도마뱀과 같은 미물들입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잠언 30장 24-28절)"
작고 힘이 없고 리더십도 없고 초라해 보이는 미물들이지만 나름대로의 삶의 지혜를 가지며
힘있게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수사학적인 의도라 함은 이런 것이죠.
이런 미물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우리 인간은 어떠냐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내가 짐승이며 사람의 총명이 내게는 없지만 나는 이 짐승의 지혜라도 갖고 싶다는 아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우리 욕 중에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이 있죠.
적어도 짐승이 갖고 살아가는 지혜와 질서정도라도 갖추고 살아가라는 말이겠죠.
짐승들이 살아가는 총명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람만은 자신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기에 아굴은 자신이 구하는 솔직한 기도제목이 두 가지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8-9절)"
헛된 욕심으로 더 가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있는 것에 족하며 살아가게 해달라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배불리며 사는 인생, 이것이 적어도 짐승들이 살아가는 총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늘 아버지에게 구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 것에 족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방패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살게 하옵소서.
아멘
#묵상문자
<갈라디아서 6장 묵상-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
"9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디아서 5장 9-10절)"
계속 선한 일, 좋은 일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선한일의 결과로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되지만 그 수확이 더디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선한 일을 하라 권합니다.
때가 이르면(제 때가 되면) 거두게 된다 합니다.
아침에 창세기 15장에 아브람 이야기를 묵상한 내용과 오버랩이 됩니다.
자녀와 땅에 대한 약속을 받은지 10년이 지났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나 떨고 있니?" 불안에 떠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전광석화처럼 말씀으로 그의 폐부를 찌르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reward)이라. (창세기 15장 1절)"라고 말을 걸어 오시면서 10년 전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아브람은 10년동안 약속을 믿고 계속 선한 일에 투신했었죠. 롯을 위해 재물과 소유권까지 포기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걸고 전쟁에 참여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관된 선함에도 하나님의 수확의 때는 묘연했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웠고 불안해졌습니다.
그 때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확증 받고 다시 달려갈 용기를 얻은 것이 창세기 15장의 내용입니다.
내게 아직 열매가 없고 결과물이 없다고 낙심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자기의 때에 수확하여 거두게 될것입니다. 선한 일을 계속하되 낙심치 마십시오.
선한 은행의 잔고에 선한 생각과 착한 행실들을 저축해 놓면 어떨까요?? 때가 되면 와르르 하나님의 보상(reward)이 꾸러미로 쏟아져 돌아 올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싯귀 하나를 소개합니다.
"<언젠가 많은 것을....
Wer viel einst zu verkünden hat...>
(프리즈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언젠가 많은 것을 일러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 속에 말 없이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
이쯤되면 시라기보다 잠언에 가까운 듯합니다^^
언제인가 번개에 불을 켜기 위해 구름이 되어야 한다니, 참 기발한 표현이죠.
무엇보다 오랫동안이란 말이 가슴을 후벼 파네요.
우리는 번개를 준비하기 위해 오랜시간 계속 선한 수증기를 모으는 구름인가 봅니다.
오랫동안 뜬 구름처럼 외로움과 그늘의 시간을 견뎌야 할지 모르지만 때가 이르면(제 때가 되면) 한 줄기 벼락 되어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오랜 구름의 시간들 잘 견뎌 내소서~
#묵상문자 <갈라디아서 5장 묵상 - 우리를 이땅에 심은 뜻>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내 심은 탓인지 봉황은 아니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어라."
황진이의 싯귀입니다.
벽오동(푸른오동나무)을 심은 것은 100년에 한 번씩 나타나 벽오동에 앉았다가 날아간다는 길조 중의 길조인 봉황새를 보자는 뜻이란 거죠.
그런데 부족한 내가 심어서 인지 봉황은 안오고 휘영청 밝은 달만 걸렸다는 한숨 섞인 시입니다.
누가복음 13장 6-9절에
"6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무화과 나무가 심겨진 뜻은 열매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포도원 주인은 나무를 찍어버리라 하십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3년 째 되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가서 찍어버리자고 말합니다.
3년의 유예를 받은 무화과 나무는 물을 먹고 걸음을 먹고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장의 핵심적인 구절은 21-24절입니다.
"21.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2.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23.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4.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의 벽오동으로 심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뜻은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 입니다.
사랑(love), 기쁨(joy), 화평(peace), 인내(patience), 친절(kindness), 선함(goodness), 신실(faithfulness), 온유(gentleness), 절제(self-control)
이 아홉 가지입니다.
놀라운 인격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고 고매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이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23절에는 육체라고 합니다.
육신의 일은 성령의 열매맺게 하는 일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17절)"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은 적대관계에 놓여져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즉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육신의 생각을 제어하고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온전히 구해야 하며 성령님을 온전히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꽃피우게 되고 결국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뿌려지고 자란 씨앗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고
내가 뿌린 씨앗은 육신의 열매가 되는 것이지요.
성령이 뿌리면 벽오동이 되는 것이고 내 육신적인 생각으로 뿌린 씨앗은 육신의 열매를 맺는 볼품 없는 오동이 되는 것이죠.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 이웃들이 우리 인격의 열매를 따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따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심겨진 하나님의 무화과 나무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위에 앉게 하기 위해 심겨진 하나님의 벽오동입니다.
그 뜻을 기억하시고 온전히 성령님 따라가는 하루 보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