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묵상 -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더니...>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겟세마네 언덕에서 예수님은 피 땀흘려 기도하십니다.
성지답사갔을 때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과정을 본 적 있습니다.
올리브를 그야말로 짖이기고 비틀어 눌러 압축하고 쥐어 짜야만 거기에서 정결한 기름이 나오더군요.
예수님은 기름틀에 들어간 올리브처럼, 세상을 밝힐 기름을 그리도 간절하게 준비하고 계셨나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말입니다.
오늘 하필 겟세마네 언덕에서 기도하는 주님과 대조적으로 골아 떨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하필'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새벽기도 후 본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저는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 머리를 갖다 대고 기도를 빙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시간 가량 지나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심령을 깊이 울립니다.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여 ㅠㅠ 저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십니다.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주님을 버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을 걱정해 드리는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을 겁니다. 주님!! 내가 누구인데요 수제자 베드로 아닙니까?"
31절 말씀을 보니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라는 말씀이 굵은 글씨로 다가오네요.
힘있게 말할정도로 자신있었던 베드로...
반면에 주님은 "오늘 이 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에 닭 울기 전에 니가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나를 버릴 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완전부정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삶을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나눴던 모든 우정과 애정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힘있게 호언장담했던 그 약속이 아직도 따끈이 살아 있는 이 밤에 말입니다.
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던 베드로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봅니다.
살아보겠다는 욕구,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있을까요?
진리를 위해 사는 것, 진리를 따르는 것 그것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헌신짝보다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베드로는 기름틀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도망을 선택합니다.
겟세마네(기름틀)에서 골아 떨어질 때부터 예상했던 수순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올리브의 생명이 순결한 기름으로 치환되어 더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봅니다.
어제 묵상이 "깨어 있으신가요?"라는 제목이었는데...
저는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했네요.
저는 기름짜는 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닭이 두 번 울리는 듯한 환청에 도망치듯 본당을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 이밤에 저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저의 실체이고, 주님 앞에서 발가 벗겨진 제 모습입니다.
주님은 힘있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보다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베드로의 참 모습을 어쩌면 더 바랐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짜내야 하는 것은 어설픈 약속이나 포부가 아닙니다.
진실한 눈물 한 방울을 우리 주님은 원하지 않을까요?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무릎꿇으며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짖이겨 지고 쥐여 짜여지는 고통을 거부하는 생올리브 상태인 내 모습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여전히 기름틀을 거부하는 모습이지만... 진실한 눈물을 짜내며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보려고 다짐해 봅니다.
하지만 이 다짐도 신뢰할 수 없기에 잠잠히 주님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생 올리브인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 주신 기름틀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순결한 기름되어 주님처럼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 비추는 삶 살기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