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3. 5. 13. 09:57

<사무엘상 30장 아침 묵상 나눔>

1. 영적인 날씨5월이 벌써 13일이 지났다니 쏜 살 같군요.
주일엔 쉴틈 없이 바쁩니다. 특히 카이로스 선교훈련이 주일 오후에 있다보니
강의가 있고 순서를 맡은 날이면 정말 바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월요일 아침시간은 나만의 시간입니다.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며 가장 두뇌활동이 활발한 시간이죠.
이 아침 시간이 참 좋네요^^

2. 삼상 30장 관찰
1) 블레셋의 아기스와 함께 출정하고 돌아온 다윗과 600명의 군사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시글락 성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 망연자실합니다.
그들의 아내와 세간들은 모두 온데 간데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자고 들고 일어납니다.
위기에 처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하는, 제사장이 입는 옷인 에봇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 아말렉 족속을 쫒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쫒아가 아말렉 도적떼를 소탕합니다.
그런데 전리품을 어떻게 나누냐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600명 중 200명은 탈진하여 싸움에 못나갔는데 싸움에 나가지 않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전리품을 배부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어난 것이지요.
다윗은 여기서 그의 통치 기반이될 중요한 원칙을 세웁니다.
싸웠던 자나 남아서 지켰던 자나 동일한 비율로 배분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리품을 자신의 고국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내는 것을 통해
다윗의 정치 기술이 업그레이드 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해석 및 묵상
1) 위기란 "위험한 기회"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겪는 가장 큰 위기입니다.
블레셋의 외국 생활에서 아말렉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었을 뿐 아니라 가족까지 잃어버립니다.
상실의 아픔에 부하들의 모반이 더해져 다윗은 벼랑끝에 서있습니다.
위기란 '위험한 기회'라고 누군가 말했나요?
위기의 순간에 다윗은 위대했습니다.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큰 곤경은 다윗에게 채찍질을 가해 하나님 편으로 더욱 힘있게 달리게 만든 것이다.
삶의 위기는 주기적으로 우리 삶을 괴롭힌다.
위기의 순간에 나는 누구를 의지하는가?
다윗은 그 절박한 순간에도 사울처럼 마음이 쫒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굳게 믿는 자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 수 있습니다.(사7:9)

2) 은혜로 공동체는 성장한다.
다윗이 싸움에 나갔던 자나 남아서 지킨 자들에게 동일하게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을 볼 때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3시, 6시, 9시, 11시에 들어온 품꾼들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 씩을 주인에게서 받죠.
하나님 나라의 비유인데, 은혜의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란 받지 못할 것을 받는 것을 일컫는 것이죠.
비겁하게 전쟁에 나갈 용기가 없었던 자들도 동일하게 전리품을 얻는 은혜(헤세드)의 공동체를 다윗은 세운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죠.
자격이 없는 자들이 분배받고 은혜의 기회를 누리는 나라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죠. 
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자격이나 행실이나 업적으로 대우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혜택을 거저 받는 것이고, 동일하게 받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에 이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이 대한민국도 이런 나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혜의 원리가 다스리는 나라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헤세드의 원칙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를 잠식해 가기를 기도해 봅니다.

4. 적용
적용은 늘 어렵습니다. 
내 삶의 청사진 안에서 앞 길을 인도받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위기의 순간에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5. 10. 11:43

1.영적인 날씨

요즘에 계속 같은 연약함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내 모습에 잠잠히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공사중이며 깍여져 가는 중입니다. 주님 죄송해요~

2. 삼상 27장 관찰

1) 계속되는 사울의 추격에 지쳤는지 다윗은 해외도피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가 피해서 간 곳이 의외의 곳입니다.

21장에서 한 번 피신했었던 원수의 땅 블레셋의 아기스왕에게 입니다. 
그를 죽이려드는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척 했던 위협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을텐데 다윗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2) 다윗은 21장의 상황과는 달리 식솔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둘람굴의 마음 상한 자 버려진 비류들의 우두머리가 된 다윗이지요.
600명을 거느렸다고 하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3천명에 육박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다윗의 리더십을 평가하고 훈련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기스 앞에 다시 가지 않았겠죠. 
하지만 다윗은 그가 거니는 무리들을 위해 용단을 내렸습니다.
이전의 피신이 단순한 목숨부지였다면, 이번의 아기스 피신은 리더로서 그의 무리를 살리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무리수가 분명 있는 선택이었지만 리더이기에 선택한 것이죠. 
또한 블레셋 땅에서 1년 4개월이라는 시간은 외교훈련과 치리와 행정적인 실무 훈련이었울 겁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의 실제적인 훈련을 시키심으로 지도자로서의 면모와 자세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하사받고 사람들을 이끌어 보는 경험은 작은 자치단위지만 그를 연단시키는 훌륭한 도구였겠죠. 

3. 해석 및 묵상

1) 하나님은 다윗이 극복하지 못했던 아기스 트라우마를 다시 맞닥드리게 하심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때론 우리 삶에 재차 일어나는 동일한 시험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은 분명 하나님의 훈련과 치유의 과정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다윗을 리더(왕)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플랜 에이가 치밀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리더로서 자신이 아닌 팔로워들을 위한 선택을 해야했으며 그의 자리가 이전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개인적으로 아빠라는 자리가 사람 되게 하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나를 지도자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때론 용감한 결단히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지도자로서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3)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훈련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부드럽고 온유하며 겸손한 리더로 성장시키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 해외의 1년 4개월의 경험이 다윗의 리더십에 큰 경험을 주었습니다.
낯선환경과 익숙치 않은 자리는 훈련의 차원일 수 있습니다. 일명 광야라 할 수 있죠. 

4. 적용
- 재차 일어나는 실수와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극복하기. (화와 분을 다스리기. )
- 나에게 허락한 양무리들을 더 사랑하기. (묵상나눔 계속하기??)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4. 2. 13:36

<부활절에 흰 옷을 입는 이유>


1. 순결과 승리를 기념하는 색 하얀색.


때 묻지 않은 하얀 색은 순결과 순수, 순정을 상징한다. 

세속의 찌든 때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 빛, 태고의 빛으로서의 하얀색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다. 거룩함이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하얀 색은 영혼의 맑음이요, 깨끗함이며 오롯함이다.

부활절의 하얀색 옷(소복)의 유래는 바로 여기서 연원한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계 3:4-5)


또한 부활절의 하얀색 옷은 승리한 자들이 입는 옷이다.

사데 교인들에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에 승리한 자들은 흰 옷을 입을 것이라 한다.

죽음을 이긴 예수의 승리를 기념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얀 색 옷을 입는다.


2. 온전한 항복의 상징으로서의 하얀색.

승리하는 자가 입는 흰 옷 말고도 패배한 자의 흰 옷도 있다. 

전쟁에서 항복의 표시로 백기를 드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1907년 네덜란드에서 가진 국제평화회의 때부터, 항복하는 쪽이 하얀 천으로 만든 깃발을 펄럭이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하얀 천에다 승리한 상대방 군대의 상징 휘장을 그려 넣으라고 하얀 천의 깃발을 드는 거라는 해석이 있다. 

항복의 상징으로 하얀 색깔 천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서 항복한 존재다. 

자기 교만과 오만, 고집 따위 물리치고 주님 앞에 깨끗이 투항해야 한다. 

그런 뜻으로 그리스도인은 새하얀 영혼의 옷을 입고 새하얀 항복의 깃발을 날리며 주님께 생사고락을 온전히 내어맡겨야 한다. 


부활절은 인간이 불의와 억압, 죽음까지 떨치고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백기를 흔들며 투항하는 날이다. 

그의 선한 포로가 되어 사는 쪽이 악마와 내통하고 주님과 어깃장 놓아 대결하며 사는 편보다 훨씬 나은 선택임을 고백하는 날이다. 

그런 뜻으로도 하얀색은, 부활절의 모든 하얀색은 감격스러운 회심의 표징이다. 

저 들의 하얀 백합화와 저 하얀 어린 양과 저 떠도는 하얀 흰 구름 또한… 


-기독교 사상, 2010년 6월호 임의진의 글 참조함-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2. 1. 15:58

<누미노제(numinose), 하나님의 실존, 거룩한 낯섦으로의 초대>


1. 요한계시록 설교하기.

오늘 내일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새벽에 설교하고 있다.

느낀 점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2장과 3장은 7교회를 향한 요한의 편지이다.

7교회를 향한 편지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첫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마지막 부분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이 등장한다.


2. 예수그리스도는 무지개인가?

특별히 첫부분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다 다르다.

마치 무지개와 같이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한다.

“오른 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일곱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아닌가!!


3. 누미노제(numinose)

나는 요한의 이 다양한 예수그리스도의 경험이 부럽기만 하다.

예수그리스도는 위치와 앵글에 따라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러한 모습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존 앞에서 꼬끄라 뜨려져 엎드러져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늘여 놓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현존을 경험한 자들이 갖는 신비적인 경외감의 감정을 일컬어

누미노제(numinose)라고 한다.

피조물이라 느끼게 하는 신적인 신비와 압도적인 권위나 분위기가 누미노제이다.


요한이 권면의 맨 앞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 경험에 바탕으로한 묘사를 둔 것은 바로 신적인 경외감(누미노제)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일 게다.

피조물로서 느끼는 신적인 신비로 말미암아 압도되는 분위기를 이끌기 위함이다?

자신이 그랬듯이 말이다.

요한은 교회의 주되신 예수님의 용모를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예수님의 실존, 예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꼬끄라뜨려 질 수 밖에 없다.

그분의 임재 앞에서 참된 경외감이 누미노제가 회복되길 원한다. 


4.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경건한 낯섦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편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구약의 진노의 하나님이 마치 십자가에서 그분의 진노를 다 쏟아 내시고난 후

순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냐고 김회권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없는 교회는 타락한 교회요 인간들의 사교장 이상이 아니라고 그러셨다.


밋밋한 신앙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실존적인 경험을 느껴보지 못했거나

느낀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분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이 없기에 거룩한 떨림이나 전율에서 나오는 인격의 깨어짐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하나님과 어떤 의미에서 낯설어지는 것이다.

경외감이란 바로 거룩한 낯섦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접촉은 낯선 전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이면에 거룩한 낯섦의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긴장감이 풀어질 때 신앙은 밋밋해지고 자기 중심적으로 흐르게 된다.

오늘 나는 요한이 경험했던 그 거룩한 경외감에서 온 전율을 느끼기 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과 접촉하기 원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 31. 07:55

<승리(勝利)가 무엇인가?>

어제 장년 성경공부(신명기) 시간에 한 집사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그 집사님은 신앙이 생기신지 얼마 안되신 분이셨다.
"목사님, 교회에서 승리하세요 승리하세요 그러잖아요.
승리라는 것이 싸워서 이기는 건데 승리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이죠?"

나는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다.
기본적인 틀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에 대한 제압이란 것이다.
이 중 3)번에 대해 강조를 두어 얘기하고자 한다.

1) 자아와의 싸움
우리 자아는 언제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잔존하는 죄성은 하나님을 거스른다.
이 죄성과 옛 자아와의 싸움과 씨름에서의 이김이 승리다.

2) 어둠의 세상 주관자와의 싸움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싸움이 있다고 한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일반적으로 이 싸움은 영적전쟁이라 부른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지금 나와 공동체와 우리 지역 사회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실체를 간파하고
싸워 이기는 것이다.
자세한 방법은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포스팅 하고자 한다. 
오늘은 3번에 초점을 맞췄으니 ㅎㅎ

3) 무질서와 혼돈의 영역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승리다.
혼돈하면 생각나는 성경의 책은 '창세기'다.
창세기 1장은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다름 아닌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그 안정된 질서 가운데 참 안식을 누리실 수 있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우리 삶에 참 안식이 없는 이유는
혼돈과 무질서 가운데 있을 때 이다.
'마음이 심난하다, 번잡스럽다, 안정되지 않다.' 이런 류의 표현들은
평안이 없는 마음상태, 안식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들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한 마디로 질서가 없는 상태란 말이다.
혼란스럽게 널부러진 여러 선택들과 사건들.
우선순위를 찾지 못하고 질서를 잡지 못한 일상들.
이런 삶에는 안식이 없다.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우선순위(priority)를 정한다는 것이다.
마치 혼돈의 세계 가운데, 하루 하루 창조의 계획과 질서로 창조를 완성해가셨던 하나님처럼 말이다.
혼돈과 무질서의 마음상태와 우선순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승리라 할 수 있다.
이 질서가 잡힐 때, 내 삶에 참 안식이 찾아온다.
승리 이후에 누리는 꿀맛같은 안식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서를, 우선순위를 내가 잡으려고 하면 더 혼란에 빠진다.
우선순위와 질서는 철저히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한다.
나의 혼돈의 삶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시고 새롭게 재 창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하나님께 철저히 위탁된 삶은 혼돈이 없다. 참 안식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승리란 무엇인줄 아는가? 라는 노래가 있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그렇다 주님만, 주님만, 주님만 사시게 하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님만 말씀하게 하시는 것,
그것을 통해 내 안의 모든 혼돈과 무질서가 잠재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1. 9. 14:37

염리동 산동네(?)에서 산지 이제 만 1년이 되어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미끄러지듯이 깍여 내려간 언덕의 경사를 보고 와~ 했었다.

꾸불꾸불한 골목숲 깊숙이 숨겨진 보물인양 가파른 염리동 언덕을 헐떡이며 발견하게되는 산위의  교회, 그곳이 염산교회이다.

염리동 언덕의 정점, 최고의 전망이 가능한 곳에 염산교회가 있으며 우리집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우리집을 방문하기 위해 온 손님들은 늘상 그 언덕의 경사와 미로같은 골목에 관한 이야기로 인사를 시작한다.

산위의 마을이 숨겨지지 못하리라는 마태복음의 말씀이

이곳에 오면  레마로 다가온다. 

염산교회의 예배는 순례자들의 예배라 할 수 있다.

유대땅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은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향한다.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대에 있기에 그들이 성전으로 향하는길은

늘 산을 오르는 가파른 순례의 길이었다.

염산교회의 교인들의 교회를 향한 발걸음은 성전을 오르는 발길과 흡사하다.

교인들은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순례자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성소를 향해 올라가는 그 순례의 고단함을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예배 전에 충만하게 갖고 오게되니

그 예배는 그야말로 순례자들의 향연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곳에서 산지(山地)의 삶을 배운다.

산지란 무엇인가? 단순히 높은 위치에 위치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지하면 생각나는 인물은 단연 '갈렙'이리라.

갈렙은 여호수아 14장에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이 산지를 저에게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갈렙이 요구한 산지는 헤브론이었다. 

예루살렘 근처 더 크게는 사해 주위로 형성된 유대산지 중의 한 성읍이었다.

이 산지는 이스라엘 중앙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석회암질의 고지대이다.

석회암지대이기에 물이 없고, 나무도 많지 않다.

삶을 영휘해 가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또한 그곳에는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적들이 있다.

정복하기에 결코 녹녹치 않은 땅이었다.

늘 싸움이 있었음을 얘기한다.



이곳 염리동에서 살면서 산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평지 사람들보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겨울철 눈 올 때 확실히 다르다.

겨울철 산동네에 눈이 오면 비상이다. 

차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도 오가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눈오는 날 오히려 이곳 언덕의 눈이 더 빨리 치워지고 차들이 더 안전하게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엔 참 신기했다. 

다른 평지에는 눈이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는데 이곳에는 제설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져 눈이 더 빨리 치워지고 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삶의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와 삶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늘 감지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가기에 이뤄지는 결과가 아닐까?

갈렙이 산지를 선택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 본다.

그는 더 어렵고 힘들고 위험이 도사린 산지의 삶을 선택함으로

그의 삶의 나태함과 안일함을 떨쳐내 버리고 싶었으리라.

늘 도사리고 있는 어려움과 적들은 그의 영혼을 더욱 연단시키는 도구들이었다.

그를 깨어 있게 만드는 자극제였던 것이다. 



요며칠 목사님들이 사는 사택에 동파인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물이 나오지 않거나 평소보다 훨씬 적게 나오고 있다.

산후조리원에서 아내와 아가가 집에 들오오자 마자 닥친 어려움이다.

아가를 목욕할 물이 없어 발을 동동거려 보기도했다.

그런데 산지의 삶을 묵상하며 이 또한 웃어 넘기고 있다.

산지는 소나기가 석회암질에 침투하지 못해 흘러 넘쳐 홍수를 이룰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물을 찾기가 너무나 힘든 장소 아니던가?

이 부족함을 통해 풍성했던 시절에 대한 감사를 되내어 본다.



하박국은 그의 글의 마지막에 이런 노래를 실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산지-山地)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3장 17-19)

높은 곳, 즉 산지를 다니게 하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겠다는 하박국의 노래다.

산지의 삶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든 삶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감사한 삶인 것이다. 

산지를 허락하신 하나님, 평지의 영성이 아닌 산지의 영성으로 평생 살아가게 하소서!!

나로 높은 곳을 다니며 주님을 자랑하게 하소서!!

따지고 보면 그전의 종암교회도 언덕위에 있는 곳이었지 않나?

높은 곳만 다니게 하시려나?? ㅎㅎㅎ

산지에서의 삶은 나를 더욱 강하고 근력있게 연단할 것이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11. 26. 07:24

<인생의 2/3는 광야다??!!>


1. 모세의 삶, 광야 종합선물세트.

어제 예배를 드리며 문득 

모세의 삶의 2/3가 광야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40세까지는 좋았다.

40~80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1차 광야기였다.

80~120세는 온갖 종류의 광야 종합선물세트의 2차 광야기였다.


2. 광야는 삶이었다.

모세에게 있어 광야는 일상이었으며 삶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의 전반기에 경험했던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전에 이미 광야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광야의 삶의 신학을 세웠을 것이다.



3. 원망과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두 가지 반응.

광야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불평과 원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3일만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반응하셨다.

삶과 직결되는 생계형 불평에 대해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셨다.

예를들면 물이 없다고 부르짖으면 반석에서 물이나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을 주셨다.

하지만 욕심에서 나오는 탐욕적 원망과 불평은 징계로 응수하셨다.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로 대표되는 고기 욕심의 말로를 우리는 안다.


4. 온유함이 어떤 사람보다 뛰어났던 비결.

원망과 불평의 장소 광야의 가장 큰 기능은 훈련의 장소라는 것이다.

광야는 믿음의 삶들을 훈련하며 연단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모세는 40년의 미디안 광야삶을 통해 왕궁의 때를 벗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거듭남의 경험을 했다.

광야가 그를 그렇게 훈련시킨 것이다.

광야를 한 번도 깊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

훈련은 원망과 불평의 때를 다 벗기게 한다.

모세는 광야 훈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5. 축제의 광야.

광야는 사람을 단순하게(simple) 만든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광야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람은 단순해진다.

하늘만 쳐다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광야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광야에서 매일 매일 축제가 벌어진다.

아침마다 만나를 주으며 하나님의 공급을 묵상하며 찬양한다.

신발은 헤어지지 않고 옷은 찢어지지 않는다.(신명기 8장)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의 연속이 광야에서 펼쳐진다.

그러기에 광야는 더이상 죽음의 장소가 아닌 축제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6. 광야를 통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와 그림의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그 노래의 후렴 가사가 

"주는 네 광야를 통해 주가 하나님이심을 들어내시리"이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인생의 2/3는 광야다.

오늘도 묵묵히 광야의 삶 가운데 하나님만 붙들며 걷기 원한다.

온유함이 모세보다 더 승해지기를 소망하며...

광야를 묵묵히 맞이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11. 20. 16:17

<'새 노래(New song)'의 의미>


찬양팀 자매로부터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새노래로 찬양하라"에서 새노래의 원어적 뜻이 그냥 New song 인가요?

라는 질문이었다.

원어를 물어보는 이 당돌함에 일단 박수 ㅎㅎ

이런 질문이 들어와야 나같은 사람은 공부를 한다.


1. 사전적인 의미

시편 33:3절을 펴고 원어 성경을 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히브리 성경과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 둘 다를 편다.

히브리 말로는 쉬르 하다쉬(שִׁיר חָדָשׁ) 라는 용어군요.

하다쉬를 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New(48회), New Thing(4회) Fresh(53회) 사용" 되었군요.(BDB사전)

70인 성경에는  Kainos 라는 형용사가 쓰였는데

"새로운, 사용되어지지 않은, 이상한, 주목할만한" 요정도의 뜻이 있는 단어군요.(Bauer사전)

즉 새로운 노래라는 것은 

예전에 사용되어지지 않은 노래, 신선한 노래, 새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 되어짐을 알 수 있겠죠.


2. 새 노래란 어떤 의미인가?

그렇다면 말 그대로 '새 노래'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시편의 기자가 의미하는 새 노래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새로운 가사의 노래

 2) 새로운 가락(멜로디)의 노래

 3)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부르는 노래

 4) 새로운 내용과 주제로 부르는 노래


이 중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4개의 복합적인 뜻을 내포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네 가지 뜻 중에 4번의 뜻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래라는 것이 가락이 있어야(2번의 뜻) 하긴 하지만

가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락이 담아내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기에

새 노래의 주제와 내용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됨됨이를 찬양하는 것이지요.


3.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노래하라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되어집니다.

이 때 쓰인 단어도 하다쉬이죠.

하나님은 날마다 새롭게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다른 색깔로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의 진실하심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그 진실하심도 날마다 새롭게 우리 삶가운데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제와 내용 또한 날마다 새로울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노래하는 것은 모짜르트가 아닌 이상 어렵지만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자신이 오늘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성실하심에 대해

새로운 내용으로 노래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4. 오늘 새롭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본성을 노래하라

그러기에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것은

오늘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을 높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집니다.

즉 내가 노래하는 내용되신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됨됨이가

내 노래의 새로운 주제여야 된다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5. 추신

저에게 원어로 무슨 뜻이냐? 이런 질문 가끔 들어오는데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공부해야 알수 있는 것이구요.

덕분에 공부는 되네요^^

또 다른 내용 궁금하시면

500원 내고 물어보세요. 공짜는 없습니다 ㅎㅎㅎ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11. 9. 07:56

<레위기 19장 33-34절 히브리성경 직역>


33절 나그네(외국인-ger)가 너희들의 땅에서 너와 함께 체류할 때, 그들을 억압하지(oppress) 말아라

34절 너희와 함께 체류하는 나그네(ger)를 너희들 가운데서 자국민(원주민)처럼 여기고, 그를 너처럼(yourself) 사랑하라(love) 왜냐면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ger)들 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야웨이다.


וְכִי-יָגוּר אִתְּךָ גֵּר, בְּאַרְצְכֶם--לֹא תוֹנוּ, אֹתוֹ 

 כְּאֶזְרָח מִכֶּם יִהְיֶה לָכֶם הַגֵּר הַגָּר אִתְּכֶם, וְאָהַבְתָּ לוֹ כָּמוֹךָ--כִּי-גֵרִים הֱיִיתֶם, בְּאֶרֶץ מִצְרָיִם:  אֲנִי, יְהוָה אֱלֹהֵיכֶם.



1.

이번 주일 오후예배 설교 본문이다.

주일 오후 예배는 지금 섬기고 있는 제 3세계 외국인 헌신(드림)예배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직역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2.

일단 33절을 말씀하신 근거는 외국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서 

상당한 억압과 차별을 받았던 상황을 전제했다는 것 아닐까?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이다.

명령을 요약하자면 세 가지다.


첫째, 억압하지 말아라

둘째, 자국민처럼 여기고

셋째,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3.

하나님의 높은 차원의 기준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억압하거나 압제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자국민 처럼, 원주민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가신다.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아하브(ahb)라는 동사가 등장한다. 

말그대로 사랑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하라브라는 동사를 보며 나는 한 대 꽝 맞는 느낌이다.


4.

하나님께서 외국인과 나그네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높은 차원의

도덕적인 기준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 요구를 하시는 근거는 너무도 단순하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잖느냐?

그 설움을 당해 봐서 알잖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하나님은 나그네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


5.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구나.

아~ 정말 나는 하나님의 그릇의 크기를 보며 탄복한다.

제 3세계 필리핀, 네팔, 베트남, 중국인들

그들을 외국인 취급하지 말라신다. 너의 형제며 이웃이니 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다.


6.

지금도 이 땅에서 압제당하며 온갖 차별과 무시를 견뎌가며 버티고 있는

제 3세계 형제 자매님들~!!

사랑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형제요 우리 조국의 한 구성원입니다.

부디 이 땅에서 평안히 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9. 2. 06:42

말라기를 묵상하며

말라기가 중요하게 선포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히-야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1.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온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참 두려움의 날이다.

이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선포.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돌보시는 주님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4:2)"

소로 농사를 짓던 우리집 덕에, 어릴적부터 늘 소와 가까이 지냈다.

소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안다.

특히 송아지는 막 태어나자 마자 그 눈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어미소는 막 태어난 아기 소를 막 핥아 준다.

두려움을 없애주려는 어미소의 따뜻한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두려움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날 뛰기 시작한다.

하루는 외양간 문이 열린 틈으로 송아지가 뛰쳐나와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다 찢어 먹어버린 적이 있다.


3.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이 송아지를 보며 참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운 날이 오기 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참 기쁨을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참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4:6)


4. 하나님을 경외하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비결.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날마다 사랑을 다짐하시는 헤세드(사랑, 인애)의 아버지시다.

나녀들에게 그 사랑을 알게 하려고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시고 그리고 메시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열심에 목이 맨다. (염산교회 큐티집'아침'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잃어버린 세대들이여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참 두려워해야할 그 분에게로 돌아오라~

이것이 말라기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