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2. 7. 20. 07:27

<은혜로 사는 삶>


집의 대문을 열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로 마당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은 공터가 있다.

거기에 올 봄에 푸성귀들을 심었다.

화분에 심긴 채소들이라 하루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마르기 십상이다.

실재로 물조절을 잘 못하여 오이가 세 개의 열매를 우리에게 안기고

말라 비틀어졌고, 토마토 한 그루도 요절했다.

아침마다 물 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이가 죽은 이유를 누구는 아침에 물을 줘서란다. 저녁에 줘야한단다.)

선율이에게 좋은 교육 효과도 있었지만 바쁜 아침 시간에

물 주는 것은 어렵진 않았지만 귀찮은 일이었다.


100년 만에 찾아온 가뭄이기에 집 앞 동산에 물대는 일은

하루 일과 중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장마 기간이 다가왔다.

은혜의 단비라는 걸 작게 나마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다.

가뭄에 너무나 팍팍하게 물주며 겨우 겨우 살던 삶에서 자유해진다.

그냥 하늘이 내려 주시는 비에 작물들을 내어 맡기면 되니 

참으로 자유로우며 은혜롭지 아니한가?


아하~ 이것이 은혜로구나.

내가 발버둥치며 잘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팍팍하고 메말라가는 삶.

그 삶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은혜다.

은혜로 사는 삶은 하늘에서 내려주신 하나님의 귀한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면 되는 삶이다.

은혜로 살아가는 삶의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은혜라고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메카니즘이라 하긴 그렇지만... 은혜는 은혜를 구하고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어진다.

가뭄 기간 동안 간절히 기다렸던 그 비를 향한 열망을 잊지 못한다.

은혜를 향한 목마름, 그 목마름이 내 삶을 은혜로 이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주님을 찾을 때라 하지 않았던가?

찾고 찾는 자에게 은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이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 후 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며

더욱 싱싱하고 풍성하게 열매 맺어 있는 푸성귀들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를 묵상한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내 삶이 아버지의 은혜로 더 풍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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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2. 6. 7. 10:58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는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기심을 심는 사람은 잡초를 거둘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 심고, 그것을 키우는 일을 하나님의 영에게 맡기는 사람은 참된 삶, 곧 영생이라는 알곡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 선을 행하되 지치지 마십시오.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으면 때가 되어 좋은 알곡을 거둘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 갈라디아서 6장 7-9)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삶의 결정 기준을 자신의 욕심에 기반을 두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에 맡기는 사람이다.

전자의 사람은 욕심이 모티브가 되어 성령을 뽑아버리고 이기심을 뿌린다.

이런 사람들에게 열매는 없다. 잡초만 무성할 뿐...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욕심이라는 잡초를 제거한 사람은

좋은 알곡을 거두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육체의 소욕인가? 성령의 소욕인가?

잡초로 무성할 것인가? 열매로 무성할 것인가?


그리고 혹시나 성령을 따라 선을 뿌리고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여

낙심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지치지 마십시오. 그 선을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Kairos)가 무르익으면 열매도 무르익는 법입니다.

용기를 내시고 힘을 내십시오.

함께 열매를 거둘 그 날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2. 27. 07:4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딤전 4:13)

사역의 기본은 권면(exhortation/paraklesis)과 가르침(teaching/didaskalia)임을 요즘 많이 느낀다.
그런데 이 권면과 가르침의 전제 조건이 바로 읽기(Reading)이다.
읽기란 기본적으로 성경읽기를 의미한 것이었을 것이다.
성경읽기를 통해 얻어진 깨달음이 없는 권면과 가르침은 그 무게는 솜털처럼 가볍고 그 깊이는 세숫대야만큼의 깊이에도 이르지 못한다.

우리 장인 어르신이 그런 충고를 해준적 있다. "자네 심방할 때 했던 본문 또하고 재탕해먹지 말아!"라고...
심방하는 가정과 개인에 맞는 시기적절한 말씀을 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읽기이다.

난 목회에 있어 읽기의 중요성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란 것을 사역의 경륜이 싸이면 쌓일수록 깨닫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사역자에게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니 읽는 것을 사역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읽기가 없는 사역은 사상누각이요 기초없는 사역에 빠지기 쉽다.

바울은 읽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인 것 같다. 사역의 핵심은 권면과 가르침인데, 그 권면과 가르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읽기라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읽기가 천성적으로 약한 사람이었고 환경적으로 읽기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는 내 사역에 있어 커다란 아킬레스 건이다. 나는 인정한다. 더 부단히 읽기에 열정을 쏟지 않는 이상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권면과 가르침의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베드로의 말도 이러한 바울의 의견을 거드는 듯 하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사역의 콘텐츠, 권면의 내용물, 가르침의 건더기들은 모두 말씀으로부터 오며 읽기로 부터 온다.

읽기와 권면과 가르침에 힘쓰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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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2. 2. 16. 06:40
<기도란....>

기도를 전화에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기도는 119전화이다.
급한 일, 내가 건짐이 필요할 때 부르짖는 그런 전화.
하지만 119 전화는 일샐에 단 한 번도 걸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전화에 기능이 수없이 많이 첨가 됐다지만
전화의 가장 큰 기능은 소통이다.
연예 필수품은 영화티켓도 아니고 꽃다발도 아니고 향수도 아니다.
바로 전화다.
연예시절 1시간의 통화는 기본이다. 2~3시간이 기본일 수도...
개인적인 경험으로 봐도 전화는 우리 부부를 참 가깝게 해주었던 수단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이다.
기도는 부르짖음이나 '소원을 말해봐'가 핵심이 아니라
사귐이 갑인 것이다. 
당신의 전화는 119번호로 고정해 놓고 계속 재다이얼만 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친말함의 단계로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나오는 음악땜에 기도에 집중 못하고 
잠시 기도에 대한 소회를 그적거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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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2. 1. 18. 07:16
<천국은 삶이다>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마 3:8-11, 메시지성경)"

세례 요한의 선포 중 일부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고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란 겉 가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서 대조되는 두 삶을 제시한다.
바로 옛 삶과 천국의 삶이다.

삶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천국은 죽음과 함께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참 회개와 함께 시작되며 열리는 삶이다.
천국을 멀리 있다 생각하지 말라.
천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그곳에 말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참 회개의 사람이 살아내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단절을 거부한다.
이 땅에서 삶이 선이듯이... 
하나님 나라의 삶도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연결되는 삶의 연속인 것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삶으로 천국의 삶을 구현할 것인가?
오늘이 당신의 삶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이기를 축복합니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마 3:12, 메시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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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11. 18. 06:30
<요한계시록에 대한 불편한 진실>

성경에서 요한계시록 처럼 
읽기 꺼려지고 오해가 많고 해석이 다양한 책도 없다.
계시록을 보는 우리의 불편한 진실은 대충 이렇다.

1. 맨 마지막 책이기에 종말론에 있어서는 가장 권위있다?
이것이 계시록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일단 계시록은 무조건 종말론이란 공식을 갖다 댄다.
종말이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벌어지는 일이다.
책의 배치로 그 무게를 가늠하는 것은 유치하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맨 먼저 나오기에 가장 중요한 책이란 말인가?

2. 다른 성경의 계시와 예언을 삼켜 버리려는가?
계시록 외에도 종말이나 계시적인 책들이 있다.
계시록으로 모든 예언과 계시와 묵시를 다 싸잡아 버리려는(wrap up) 위험하다.

3.계시록은 미래에 관한 시나리오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다?
계시록을 마치 미래에 반드시 그렇게 일어날 사건들을 묘사한 책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계시, 정확히 말해서 묵시를 오해한 것이다.
묵시란 박해와 핍박의 상황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임할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암호적인 문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글이다.
암호적이란 말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그 로마의 박해 당시 666 하면 짐승의 숫자로 특정인을 가리킨다라는 것을 아마도 성도들은 알았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스냅사진의 한 장면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계시록을 사진체의 사실주의로 읽지 말라!

4. 교리로 끌어 내기엔 위험한 책이 아닌가?
 3번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계시록은 함축적이고 시적이면서 간단한 문체(Simple sentence)로 기록되었기에 이 책으로부터 교리를 끌어 내는 것은 위험하다.
이 또한 묵시라는 특정한 장르 때문이기도 하다.

5. 재림 예수께 모든 악의 처리를 맡겨 버리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세상의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끝이 난다.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자는 식의 태도 안에는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재림은 반드시 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 가현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고 맛보지 못하면서
종말에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책임회피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의(법적인 정의)와 정의(신적인 친절)과 사랑의 가치가 다스리는 나라다. 가현적인 나라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가 다스려지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이를 위해 악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악의 문제를 처리하고 공평과 정의 사랑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이요 의무인 것이다.
재림 예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는 정말 나쁜 짓이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개인의 영혼 구원에 구원의 포커스가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뤄가는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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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11. 9. 21:42
<롬 8:28 직역>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선을 향하여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목적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인간편에서는 그 목적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때론 절망에 부닥치기도 하죠.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원대로 되지 않을 때 점검해야 하는 것은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이끌림 받고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가?
이 두가지 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all-헬 panta) 선을 향하여 함께 작용합니다. (Work together)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선을 향하여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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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10. 25. 19:44
농업을 경제적 단위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농민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면에서 무능한 정부였다.

MB 정권이야 말할 것도 없이 경제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악한 정부다. 농민들의 절망은 모두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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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9. 7. 09:48

그러므로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는 우리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은혜를 펼치시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힘겨운 시기는 장차 다가올 복된 시기, 우리를 위해 마련된 성대한 잔체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늘 이자리에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지고 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메시지성경 고후 4:16-18)  



 These hard times are small potatoes compared to the coming good times, the lavish celebration prepared for us.

원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에게 다가올 호화로운 우리를 위한 잔치에 비하면 현재의 어려운 시기는 작은 감자에 불과합니다. 

지금 작은 감자를 먹으며 연명하는 듯해 보이지만 곧 호화로운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잘 견뎌 이기라는 말 일 것이다.

유진의 문학적 상상력이 놀랍다.

영원한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질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단위라죠? ㅎㅎ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실 놀라운 잔치를 기대하며 힘들 내세요!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9. 3. 07:39
묵상하는 사람을 일컬어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안 자라는 듯 하지만 어느 새 보면 자라 있다.

콩나물 시루에 물 붓기도 마찬가지다.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지만 어느 새 콩나물은 자라 있다.

묵상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은혜가 쩔어서 감격 스럽지만 대부분은 그냥 맹숭맹숭 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말씀을 향한 신뢰와 위탁이 이뤄지고

그 말씀은 어느 새 내 마음 밭에 떨어져 있다.

그 씨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것이다.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한 번의 설교로 소극적인 은혜를 얻어 먹는 것보다

힘들고 더딜지라도 말씀 앞에서 씨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몸부림인 묵상이 훨씬 양질의 영양분을 우리에게 공급하리라 믿는다.

또한 말씀이신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것에 큰 매력이 있다.

오늘도 콩나물에 물을 부으셨습니까??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묵상을 통한 우리 모두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