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미노제(numinose), 하나님의 실존, 거룩한 낯섦으로의 초대>
1. 요한계시록 설교하기.
오늘 내일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새벽에 설교하고 있다.
느낀 점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2장과 3장은 7교회를 향한 요한의 편지이다.
7교회를 향한 편지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첫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마지막 부분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이 등장한다.
2. 예수그리스도는 무지개인가?
특별히 첫부분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다 다르다.
마치 무지개와 같이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한다.
“오른 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일곱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아닌가!!
3. 누미노제(numinose)
나는 요한의 이 다양한 예수그리스도의 경험이 부럽기만 하다.
예수그리스도는 위치와 앵글에 따라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러한 모습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존 앞에서 꼬끄라 뜨려져 엎드러져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늘여 놓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현존을 경험한 자들이 갖는 신비적인 경외감의 감정을 일컬어
누미노제(numinose)라고 한다.
피조물이라 느끼게 하는 신적인 신비와 압도적인 권위나 분위기가 누미노제이다.
요한이 권면의 맨 앞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 경험에 바탕으로한 묘사를 둔 것은 바로 신적인 경외감(누미노제)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일 게다.
피조물로서 느끼는 신적인 신비로 말미암아 압도되는 분위기를 이끌기 위함이다?
자신이 그랬듯이 말이다.
요한은 교회의 주되신 예수님의 용모를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예수님의 실존, 예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꼬끄라뜨려 질 수 밖에 없다.
그분의 임재 앞에서 참된 경외감이 누미노제가 회복되길 원한다.
4.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경건한 낯섦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편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구약의 진노의 하나님이 마치 십자가에서 그분의 진노를 다 쏟아 내시고난 후
순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냐고 김회권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없는 교회는 타락한 교회요 인간들의 사교장 이상이 아니라고 그러셨다.
밋밋한 신앙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실존적인 경험을 느껴보지 못했거나
느낀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분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이 없기에 거룩한 떨림이나 전율에서 나오는 인격의 깨어짐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하나님과 어떤 의미에서 낯설어지는 것이다.
경외감이란 바로 거룩한 낯섦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접촉은 낯선 전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이면에 거룩한 낯섦의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긴장감이 풀어질 때 신앙은 밋밋해지고 자기 중심적으로 흐르게 된다.
오늘 나는 요한이 경험했던 그 거룩한 경외감에서 온 전율을 느끼기 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과 접촉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