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3. 8. 22. 06:59
스가랴 4장 묵상

스가랴 4 장에는 스가랴의 다섯번째 환상이 등장합니다. 다섯 번째 환상은 금 촛대와 두 감람나무에 관한 내용입니다. 계속 타오르는 일곱 등잔을 가진 촛대는 양옆에 자라나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직접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금촛대는 성전이며, 두 감람나무는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를 나타냅니다. 이 환상으로 하나님은 성전재건을 비롯해 전반적인 삶의 어려움에 처한 당신의 백성을 격려하십니다.

6,7절말씀입니다.
6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 권력으로도 힘으로도 되지 않고 나의 영으로만 될 수 있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7큰 산아, 너는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따름이다. ′ 좋다, 좋다!′ 환호하는 가운데 그는 머릿돌을 빼내리라.' "

늘 우리 앞에 닥친 산적한 문제들은 큰 산처럼 다가옵니다.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산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겐 성전 재건이 그러했죠~ 하지만 하나님은 금촛대를 향해 흘러가는 올리브나무의 기름 환상을 보여 주시며 불가능이란 없다고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조건인 힘과 권력 그리고 재력으로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금촛대를 향해 흘러가는 올리브기름, 그것은 두 지도자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로 상징된 두 지도자 그들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으로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앞에 큰 산은 평지와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올리브나무로 부르십니다.
시편 52편 8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나님의 자애에 의지하네"
하나님의 자애(헤세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며, 그 앞에 큰 산은 평지에 불과하다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것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중, 이말씀을 대하며 큰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푸른 올리브나무로 큰 산 앞에서 독야청청하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신으로 큰 산을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에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인 나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할 것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8. 15. 06:27

<기쁘지 아니한가? - 스바냐 3장 17절 >

"너의 하나님 야웨께서 너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는 능력자(유력자)이며, 그가 구원하신다.
그는 흐뭇함으로 너를 즐거워하신다.
그는 (너를 향한) 당신의 사랑 안에서 평온을 유지하신다.
그는 흥얼거리며 너를 기뻐하신다. (스바냐 3장 17절 히브리성경 사역私譯)"

1. 하나님은 나의 한가운데에 이미 와 계시며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능력자, 전능자이십니다. (mighty to save)
능력자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기뽀르'입니다.
룻과 나오미의 가문의 기업을 무를 능력이 있었던 '보아스'에게 사용됐던 호칭이죠(룻기 2:1)
나의 모든 빚을 탕감해줄 수 있는 능력자이시죠.
3.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즐거워하시며, 나 때문에 행복해 하십니다. "너때문이야, 너때문이야~ 기쁨은 너때문이야~(우루사 광고송에 맞춰^^)
4.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행복에 겨워 그것을 잠잠히, 고요히 음미하십니다. 마치 에스프레소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담은 채 그 향과 맛을 내내 음미하듯이요. 그러면서 그 사랑 안에서 쉼을 누리시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5. 그 분은 이제 그 사랑에겨워 흥얼거리기까지 하시며 기쁨을 표현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 하나님을 나도 기뻐하고, 그런 하나님때문에 나도 행복하여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8. 13. 15:45

<창세기 2장을 통해 본 가정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과 상호보완성>


창세기 2장은 '가정'이라는 기관에 대한 대헌장(Magna Carta)와 같은 장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 가장 먼저 만드신 기관이 다름 아닌 '가정'이다.

너무나 중요한 기관임에 틀림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이성(異性)을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이성 동반자를 일컬어 '돕는 배필'이라 명명한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만들되 그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말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종속관계(subordinate relationship)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동등성(equality)과 보완성(supplementation)을 의미한다.

돕는 배필은 "맞은 편에 있는 짝"이라는 뜻이다. 

돕는 배필의 역할은 남자에 대한 일방적인 순종이 아니라 

‘맞은 편 관점’의 의견을 갖고 상대를 돕는(보완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의 다름에서 나오는 이질적인 사고가 가정을 풍성하게 

남자와 여자가 함께 감당해야했던 사역을 풍성하고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장 27-28절에서는 인류를 만드신 목적을 기술하신다.

이 목적을 이루고 발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서로 보충하고 도와주어 task를 완성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남자만의 부르심과 비전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남자와 여자)'에게 동시에 복을 주셨고, 

'그들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결코 남자가 우위에 있는 사명이나 부르심이 아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도 창세기 1장 27-28절의 목적 그것이다.

이를 위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도와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돕고 보완해 주어야 했다.

예를 들면 남자는 힘을 쓰는 일, 여자는 세밀하고 섬세한 일 이었으리라.


여기에서 나의 결혼생활과 우리 가정을 향한 부르심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나의 부르심'에 맞추라고 강요를 했었다.

그러나 어느 계기로 그것을 깨뜨렸다.

비전이란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전을 재 수정했고, 가정의 목적을 재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고수했던, 중국 선교를 내려 놓았다.

아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가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나의 부르심을 설정하며

비전을 재 수정해 갔다.

아내들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비전과 부르심을 완전히 없애라는 강요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특히 목회자의 사모는 이러이러해야해 라는 교회의 일반적인 통념이

목회자의 아내들에게 강요된다.

이것은 거의 폭력 수준이다. 폭력이다.

목회자의 아내도 그들 나름의 부르심이 있다. 존중되어야 한다.

 그 부르심을 제도화와 통념에 의해 도난당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도난당한 것과 같다.

물론 나의 아내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가고 있다.

자랑스럽다. 

늘 나를 살핀다. 나의 비전을 강요하여 내 아내의 그것을 훼손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하셨고,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기구이다.

그 통치를 남녀에게 각각 맡기셨고, 함께 도와가길 원하셨다.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우리 가정에서도 아직 맞춰가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남녀의 기능면에서의 업무분장이다.

통념상 남자는 돈을 벌고 힘쓰는 일을 하고, 여자는 가사업무를 한다.

현대의 문화에서도 이러한 기능적 업무분담이 호소력이 있고 유효한가?

여기서도 어느 정도의 가부장적인 폭력성이 존재한다.

당신은 여자이니까 무조건 아침밥을 차려라. 

당신은 남자이니까 운전하고 짐을 들고 이벤트를 해라~ 등이겠지?

이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원칙이 바로

남녀의 대등성과 상호보완성의 원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그림으로 가이드라인으로서 이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가이드 라인을 창세기 2장에서 '돕는 베필'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다고 믿는다.


이 글을 쓰고 남성들의 뭇매를 맞을지 (그래 니 혼자 잘났다?^^) 약간 겁이 나긴 하지만 성경이 말해주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긴 글을 적어본다.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의 원칙이 존중되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사회에 매개된다고 믿는다. 

가정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필요에 의해 결합한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통치를 대신할 중요한 목적기관인 것이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7. 13. 06:44

하나님은 말씀으로 확인시키신다.

어제 아침 아내와 비전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제 저녁 금요기도회 말씀을 통해 바로 확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하심에 깜짝 놀란다.

설교들으며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종익 목사님의 설교 메모한 내용을 나눠본다.


본문: 출애굽기 4장 18~31

제목 : 비전을 위한 여정

설교자 : 김종익 목사님


1. 비전 여행은 작별 여행이다. 

비전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작별이 있다. 

예)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작별을 잘 못하니 축복 있는 비전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하루끼  에세이에 나온 내용, 여행가서 버릴 옷을 가져 가서 하나씩 버린다. 

짐도 가벼워지고 뭔가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더라.

작별이 돼야 여행이 된다. 

인생은 끝없는 달리기 경주와도 같다.

짐을 줄여야 달릴 수 있다.

욕심도 걱정도 반으로 줄여야 비전을 향하여 달릴 수 있다. 


2. 비전여행은 말씀을 따르는 길이다. 

여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일단 간다. 

여행을 못가는 사람들은 뭔가 약점이 극복된 후 떠나려 한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망설인다. 

하지만 그걸 극복하면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성경의 인문들은 모두 약점 투성이였다.

예)모세는 비전이 꺽였던 사람이었고 입이 어눌했다.

다윗은 10계명의 5-10계명까지 범함

아브라함은 아내를 버림

이들이 어떻게 비전을 성취하게 하는가??

말씀을 따랐을 뿐인데 채워주시고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앞세워 놓은 것이 말씀이다. 

말씀대로만 순종하는 길이 비전여행이다. 

"하나님 끝까지 갑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무엇이라 했던가??'에 집중하라.


3. 비전 여행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에 있다. 

모세는 부르심의 자리에 가는 여정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성경의 난해 부분이다. 할례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상징이다. 

중대한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은 할례를 명령하실 때가 있었다. 

'성별한 개인이 되어라. '는 의미이다. 

자식들이 할례를 안 받아서 포피를 베었다. 

이것은 비전과 상관없는 삶, 믿음과 상관 없는 삶을 산 것을 의미한다.

비전을 위해 쓸만한 사람으로 서지 못한 것은 오염된 것이다. 

아멘 하고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더러워 진 것이다. 

신앙인으로 먼저 세우시기 원하신다.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선한 일애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보다 그것을 청산했느냐가 문제다. 

정결하길 원하신다. 

할례 받으란 것이다. 

비전은 사라지고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인가? 

때로는 가족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가족과 함께 이루길 바라실 수도 있다. 

모리아 산의 시험은 아브라함만의 시험뿐만 아니라 이삭의 시험이기도 했다. 

비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성취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성취의 여부를 따지면 모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고, 평탄한 삶을 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모세는 비전을 위해 산 사람이다. 

성공 실패가 비전의 판단기준이 아니다. 순종이다. 

순종이 목표다. 순종이 비전의 목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에서 느낀 점>

1. 비전을 위해서 떠나야 한다.

가족과도 이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부분은 비전을 위해 떠나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부분이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장인 장모님, 모두 우리가 떠나는 것을 반기지 않으신다.

그러나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2. 비전을 위해 가족이 함께 시험을 당할 수도 있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 가족은 아브라함 혼자 받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낸 사라, 이삭 모두가 시험을 받고 있었다.

가족 전체가 이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한다.


3. 비전의 목표는 성취가 아니라 순종이다.

이 부분은 정말 주옥같지 않은가? 성취가 아니라 순종이다. 

그 비전을 이뤘는가? 성공과 실패로 판단하는데, 어리석은 것이다.

비전의 성공여부는 순종에 있다.

주님 말씀하시면 따라가는 것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지 못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6. 24. 08:00

<다니엘 3장 묵상>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7)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로히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8)


1.강력한 이방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다니엘 3장의 주제다. 이방 왕이 다스리고, 우상이 판치는 이방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다니엘 3장은 우리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다니엘서의 문학적인 장르는 묵시 문학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묵시 문학은 신약의 계시록과 구약의 다니엘서 두 권이다.

묵시문학은 예언서와는 다른 장르로 구분된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이방 족속들의 통치와 박해의 한 가운데서 시달림을 당하는 독자들에게 믿음을 고취시키고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다.

그 메시지는 묵시(apocalyptic)로 이뤄져 있다. 

묵시란 박해와 핍박의 상황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임할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암호적인 문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글이다.

암호적이고 암시적이란 말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박해 당시 666 하면 짐승의 숫자로 특정인을 가리킨다라는 것을 모든 성도들은 알았을 것이다. 

다니엘서도 마찬기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박해상황 가운데 놓여져 있다.

그들은 다니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나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 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겠구나' 생각하며 믿음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세 친구의 믿음은 느부갓네살이라는 당대의 강력한 통치자 앞에서도 꺽이지 않았다.


2. 일거 삼득 - 세 친구의 위대함

세 친구의 믿음의 행위는 실로 위대하다. 

그들은 목숨을 내 놓았다.

그들은 이방 세계에서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담보로 세 가지를 동시에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지켰고,

둘째는 하나님도 높였으며,

셋째는 자신들도 높아졌다.

이 메카니즘은 강력한 이방 사상이 지배하는 오늘 날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팔아 먹고 자기 안위와 편안함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은 그것마저 놓칠 위험이 크다.

하지만 목숨을 내 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져버리지 않는 신앙에 투신한 자들은

세가지 모두를 얻을 수 있다.

나도 지키며 하나님도 높아지며 결국 나 자신도 높아지는 것이다.

세 친구는 고수 중에 고수다.

정말 고수는 자신이 직접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상대로 하여 나를 높이게 한다.

정말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상대가 나를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올 찬송이 28절에는 이방 왕을 통해 고백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3. 자기를 믿는 자를 끝까지 지키는 하나님

다니엘 3장은 출애굽의 또 다른 단면을 볼 수 있다.

박해 받는 자신의 백성을 물 가운데로 이끌어 건지셨던 하나님이

이제 박해 받는 자신의 백성을 불가운데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43장 2절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43장 2절)

이 이사야 말씀도 바벨론의 포로상황을 그 컨텍스트로 하고 있으니 일맥상통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4. 결론

어떤 핍박과 한계상황에 봉착했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는 박해를 먹고 자라왔다.

다니엘 3장은 믿음의 선진인 다니엘의 세 친구가 이방 세계 가운데서 어떤 자세로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 말해준다.

목숨을 내 놓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높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강력한 이방 가치관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길 바란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6. 8. 08:32
선교팀 21명의 집사님들 중에 10분이 배탈이 나서 설사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생각보다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 밤 라오스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못드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꿋꿋이 먹었습니다.
한 집사님께서 우스갯소리로 "목사님 양들은 이렇게 쓰러져 가고 있는데 밥이 넘어 갑니까?"
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라도 잘 먹고 힘을 내어 잘 이끌어야죠" 라고 말씀드렸지만
마음이 짠했습니다.

아침에 에스겔 35장을 묵상하는데
에돔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정말 힘든 시기에(멸망의 시기)
그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그 땅을 노력하고 과롭혔다는 겁니다.
팀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는 인야의 마음이 내게
부족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여 팀원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김경호, 김소진, 이정순, 윤용철, 명수연, 송유현, 황태성, 이종구
이 분들의 복통이 속히 나아 주의 일 잘 감당하기 기도 부탁드립니다.

함께 묵상한 말씀 시편 84편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이 얼마나 복된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84:1)"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그 갈급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84:5)"
비록 상황은 배탈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으로 도저히 성전을 향해 올라갈 기력이 없지만
마음에서부터 순례의 길을 떠나 주님의 집에 이르겠다고 작정한 그 마음이 복되다고 합니다.
힘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로 우리 팀이 이 난관을 잘 극복했으면 합니다.
외국애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만큼 간절히 찾는 것이 있드니
그것은 와이파이의 임재입니다.
내 사람들과 내 나라와 소통한 번 해보겠다고 간절히 찾는 것이지요.
이거다 싶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여 쇠약해질 정도로 찾는 것이지요.
안테나 빵빵한 하나님의 임재, 그 임재를 사모하는 자의 삶이 복되며
새로운 힘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 라오스 비엔티엔의 메콩 강변에서...-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5. 30. 06:36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쳐져 있었던 텐트, 그날 밤 그 텐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요?보아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텐트에 들어가 골아떨어지는 것을 룻은 멀리서 숨어서 지켜 봅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보아스의 텐트로 잠입(?)해 들어가죠. 한 밤 중에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아스는 깜짝 놀라 일어나 소리칩니다. "넌 누구냐?"


룻은 자신의 형편을 보아스에게 정확하게 알립니다.제가 좀 무례하게 당신의 침실에 들어온 것을 이해하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이 우리 시어머니 나오미의 가정의 잃어버린 밭을 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가정의 대를 잇게 해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런 말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은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인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애로구나보아스는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파산한 가문을 세워 주기 위한 한 여인의 간절한 노력을 본 것입니다


보아스는 계속 말을 이어 갑니다. “내가 너의 말대로 하겠다. 그러나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아침까지 여기 조용히 숨어 있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 조용히 가거라여기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격적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룻을 사랑했지만, 딸과 같은 룻의 젊은 나이 때문에 절제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러울 룻을 위로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인애이죠.

 

보아스의 인애는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친족을 위해 밭을 사주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임감을 필요로하는 인애의 행위였습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친족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죠. 헌신과 희생이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보아스의 인애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애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인애입니다. 엄청난 값의 죄의 빚을 진 우리를 위해 친히 죄값을 치르시고 팔려 갔던 우리의 기업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셨던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인애와 사랑을 연상케 합니다. 


보아스와 같은 인격의 향기가 흐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커피향보다 진하고 장미향보다 더 부드러운 인격의 향기를 날리고 싶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5. 23. 18:40

오늘은 바깥 날씨는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군요.

새벽설교가 연속 3일이 있어서 긴장이 되는군요.

새벽설교가 긴장되는 이유는 못일어날까하는 조바심이기도 하지만

여유 없는 중에 대충 준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이리라~

릴렉스~



룻기 2장은 갑자기 보아스라는 인물이 생뚱 맞게 등장하며 시작됩니다.

룻기의 저자는 보아스의 등장과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우연히 되어진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연이 있을까?

룻이 보아스로부터 호의와 인애(헤세드)를 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뒤에서 증명됩니다.

2장 11절 말씀에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룻이 시모에게 보인 호의와 인애가 이미 보아스를 비롯한 베들레헴 사람들을 감동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룻의 종교적인 개종과 시어머니에 대한 조건 없는 친절이 결국 부메랑 처럼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지요.

룻은 이 일로 큰 위로를 받게 됐다고 보아스에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베푸는 호의와 인애는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조건 없이 베푸는 친절과 헤세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극하게 되고

결국 나에게 놀라운 은혜로 되갚아 지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다른 사람의 호의와 자비에 의존하는 인생일지라도 친절과 인애를 베푸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서로에게 친절과 호의와 인애로 대하는 우리 모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가 우리 공동체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5. 18. 20:24

<'룻기(Ruth)' 가 이런 책이었구나~!!>


룻기를 묵상하며 룻기 공부를 조금하다 

알게된 몇 가지를 함께 나눠 봅니다^^


1. 히브리어 성경 배치로 본 룻기.


한글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의 배치는 다릅니다.

한글 성경은 기본적으로 70인역(헬라어로된 구약성경)과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의 순서를 따릅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인 맛소라 성경에서 룻기는

사사기 다음이 아니라, 잠언서와 아가서 사이에 배치돼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역사서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시가서)쪽에 배치된 것이죠.

유대인들은 5대절기에 낭독하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성문서 중에서도 요 다섯개의 성경을 따로 모아서 

'성문서 오축(五丑-Five Megillot)'이라 부르죠.

아가서는 유월절에

룻기는 오순절에

예레미야 애가는 아브월 9일 (솔로몬 성전 파괴일)

전도서는 장막절에

에스더는 부림절에 읽혔던 책이죠.


룻기가 잠언서와 아가서 사이에 배치돼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죠.

잠언서 마지막 장 31장에는 "지혜로운 여인"(31:10-31)이 소개되죠.

그 지혜로운 여인의 표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책이 룻기인 것이죠.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앞에 배치된 것은 

아가서의 남녀 사랑의 주제를 예비적으로 펼치는 책으로 이해됩니다.


2. 오순절(맥추절)에 읽혀진 책 룻기.


룻기는 왜 오순절에 읽혀 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 룻기의 배경이 보리추수기여서 일것으로 보입니다.

맥추절은 가난한 친족과 이웃을 돌보는 절기로서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인정과 친절이 강조된 절기입니다.

룻기는 인애(헤세드)를 보여주신 하나님과 인애를 베푸는 사람들(나오미, 보아스, 룻)의 이야기입니다.

가난과 기근으로 시달리던 친족과 이웃이었던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의 인애와 친절로 말미암아 풍요로운 삶을 살게된 이야기인 것이지요.


룻기의 중심무대인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근의 땅을 먹여 살리는 떡집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다윗과 그의 후손 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열방을 먹이는 이야기로 발전하는 드라마의 시작이 룻기란 것이지요.


룻기를 통해 돌봄과 사랑, 우정, 다른 사람에 대한 비상한 배려와 책임감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만나

상실과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치유된다는 이야기이다.


때마침 내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강림주일인 오순절에 우리는 룻기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각박한 경쟁과 각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룻기는 서로의 인애와 자비를 통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도 우리 삶에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의 목적이기도 하며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샬롬을 전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3. 5. 15. 09:58

 <룻기 1장 아침 묵상>


룻기 1장에는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품을 떠난 이와

신앙을 찾아 하나님 품에 안긴 이의 이야기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등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원수의 땅, 모압으로 이주하는 나오미의 가족.

그에 비해 모국인 모압의 신을 버리고 시모의 하나님과 시모를 죽을 때까지 따르겠다는

룻의 신앙 결단이 돋보이는 장이죠.


1.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남는 것이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핵심은 신앙교육이란 걸 느낍니다.

나오미는 불순종하여 모압으로 이주하지만

그 땅에서 만난 며느리들에게 신앙교육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1장 16절의 룻의 고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죠.

나오미의 신앙의 삶을 통해 룻은 직간접적으로 신앙이 침투가 되었고

결국 그 신앙으로 나오미를 선택하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지요.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하면 늙어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2. 인애(헤세드)가 넘치는 하나님, 헤세드(인애)가 넘치는 사람들.

룻기의 큰 주제입니다.

헤세드를 베푸신 하나님과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하나님은 이국의 타향살이에서 모든 것을 잃고 상실감과 박탈감에 괴로워하는 나오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인애를 베푸십니다.

바로 그이 자부 룻은 하나님의 확실한 인애이죠.

룻이 보여준 헤세드를 통해 나오미의 메마른 삶의 잔에 인애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죠.

룻의 인애와 친절로 한 사람의 삶이 회복되어집니다.

나의 인애(헤세드)를 통해 누군가가 삶의 의미를 되찾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헤세드는 나로부터 흘러 다른 사람의 삶으로 적셔들어가야 합니다.


3. 적용

*고뇌하며 괴로워하는 자와 함께 시간 보내주기, 밥사주기 (손드세요?^^)

* 가족들에게 헤세드로 버물어진 쉬니발렌 과자처럼 다가가기 (나를 부수고 깨뜨려 인애의 달콤함을 맛보소서^^)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