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3. 12. 25. 11:13
‪#‎묵상문자‬
<누가복음 2장 1-14절>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한 명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이고 다른 한 분은 평화의 왕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추구한 평화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사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평화를 추구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며 발생되는 평화를 추구했죠.

로마의 황제는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본적지로 돌아가 호적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온 세계는 로마의 힘에 눌려 있었기에 가이사의 명령은 세계 만민이 복종해야할 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의 아낙네였던 마라아에게 까지 그 명령은 미치게 됩니다.
로마황제의 말은 질서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로마제국이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 백성들을 침묵시키고 이뤄낸 평화를 로마식 평화라 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이런 로마의 평화는 다른 사람을 억누른 결과로 얻는 평화이고 폭력으로 이뤄낸 평화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폭압적인 상황 가운데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목동들은 로마황제가 주는 평화와 전혀 다른 평화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와 기쁨의 소식을 맨 먼저 전해 들은 사람들은 폭력과 억압의 삶 맨 가장 자리에 놓여진 사람들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목동은 사회의 부랑자들이나 무지렁이들에게 남겨진 천하고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가장 자리 변두리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참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맨 먼저 전해졌습니다.
고달픈 순례의 인생길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정상인들의 사회에서 따돌림받은 비천한 목동을 선택하여 첫 성탄의 기쁜 소식을 맡깁니다.
정상인들의 경우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고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왜냐면 그 아기는 너무 연약하고 무력해 보이기에 그들을 구해줄 메시야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강보에 싸여 있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가 바로 온 세상의 주요, 그리스도요, 구세주라는 목동들의 믿음은 우리가 가져야할 성탄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가이사의 평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이 주는 평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라고 하지요. 폭력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강요당하는 평화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부인하여 주는 평화입니다. 가장이 자기의 혈기를 부인하면 가정의 평화를 선물로 줍니다.
사장님이 혈기를 죽이고 자기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회사의 가장 말단 직원까지 평화를 누립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기 사람 챙기기를 버리고 공공선에 투신하면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 즉 가이사의 평화가 아닌 어린 아기들 안에 발견되는 자기 비움의 평화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인생의 가장 고단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먼저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대와 나 그 평화를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참 평화를 전하십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평화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더 밝게 만들었음 좋겠습니다.

성탄 아침에 참 평화 샬롬을 전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기쁜 소식을 맡은 자요 여러분의 목자인 김경헌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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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