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1. 6. 22. 15:45
"그러니 그 "누룩"을 제거하십시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한결같고 순수해야지, 나쁜 성분 때문에 부풀려져서는 안됩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납작한 빵, 곧 단순하고 참되고 꾸밈없는 빵으로 유월절에 참여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5:6-8절 / 메시지 성경)

우리 삶에 첨가 되지 말아야할 거시 바로 누룩이다. 누룩은 우리의 참된 정체성, 순수한 우리됨을 왜곡시켜 놓는다.
단순하고(simple), 참되고(genuine), 꾸밈이 없는 삶(unpretentious)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이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뭔가 첨가물이 들어갈 때, 그 사람의 삶은 뻥튀기 되어진다.
마치 누룩을 너어 부풀어진 빵처럼.
나쁜 성분 때문에 우리의 삶이 부풀려져서는 안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부풀려 지기를 바란다.
자신이 가진것, 자신의 됨됨이, 자신의 본질보다 부풀리게 보여지기를 바란다.
유월절에 먹어지는 빵은 부풀려진 빵이 아닌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빵이다.
예수님의 삶이 누룩없는 삶이셨다.
그분은 단순하셨고, 참되셨고, 꾸밈이 없으셨다.

내 속에서 누룩은 제거 되어져야 한다. 누룩은 매우 적은 양이더라도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적은 누룩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도 내 속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누룩을 경계하며 단순하고 참되고 꾸밈없는 존재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부풀려지지 않아도 좋다. 납작한들 어떠하겠는가? 그 납작한 빵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빵이며, 볼품 없는 빵을 통해 예수님의 맛이 전해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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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6. 21. 07:52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신 33장 1절)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초회의 기업이라다. (신 33장 4절)

모세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랬다.

이들은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한다.

1절 말씀의 죽기 전에 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라는 뜻에 가깝다.

죽음 앞에서 "나 떨고있니?"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다른 이를 축복할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신앙이지 않을까?

죽음 앞에서 보여지는 그 사람의 태도가 곧 그 사람의 신앙이지 않을까?

죽음 앞의 축복함이라는 것이 오늘 아침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



4절에는 모세가 율법을 명령하였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재산이라고 말한다.

율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토라"이다.

토라는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르침, 교훈, 율법, 법, 법률 등등이다.

여기서는 율법이란 번역보다 '가르침'이 훨씬 좋을 것 같다.

신명기는 모세의 하룻동안의 설교이며 율법의 재해석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내가 명령한 이 가르침이 너희의 재산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르침이 재산이 되는 인생이 얼마나 값진가?

재물이나 물질이 아닌 가르침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모세의 삶도 멋질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아 재산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인생 또한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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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6. 20. 07:21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 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 32:52) "

모세에게도 가나안은 분명 약속의 땅이었지만, 그는 바라볼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 약속의 땅인데도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 그의 애절함이 전해 온다. 


목사안수, 선교사 파송, 학위 마무리, 이사 등등의 일들이 분명 약속된 것이고 바로 눈 앞에 있는데 마무리 되어지지 않고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답답할 때 이 말씀을 읽는다. 약속된 땅 앞에서 그 땅을 바라만 보지 않고 밟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예루살렘에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부터 열리지 않는구나. 그 땅을 밝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내 속에서 일어난다.
주님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은혜가 제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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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11. 6. 15. 11:04
오늘 기도하며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타고 가는 배는 다시스로 가는 배인가?'

이번 주 월요일은 두 번이나 연기된 세 번째로 다가온 목사안수 예정일이었다.
그동안 두 번이 연기된 이유는 목사 안수에 장로가 참여해서 안수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재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툼이 심화되어 세 번째 파행이라는 믿기지 않은 일이 현실화됐다.
점점 갈등의 골은 깊어 지는 것 같다.
이러다 이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마저 일기 시작했다.

문제는 노회원들에게 있을지 모르나 더 근본적인 원인이 다른 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놓고 매우 슬퍼하고 계신다는 마음이 전해진다.
비단 우리 노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와 장로가 동역할 대상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신다!!!


거기다 한 가지 더 드는 생각이 바로 내가 요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니느웨로 가는 배에 올라탄 요나의 배는 큰 풍랑을 만나 전복위기를 맞는다.  사람들은 살아보기 위해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모든 수단을 다 펴보지만 소용 없었다.
문제는 배 밑바닥에서 자고 있는 요나였다.
요나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엇기에 그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에 쳐했던 것이다.
혹시 나 때문에? 라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나는 지금 혹시 다시스가 아닌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탄 것은 아닐까?
내가 탄 배는 다시스로 가는 배인가?
내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느껴진다. 
혹시나 내 마음에 잘 못 품은 생각이나 방향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려움을 겨꼬 있는 건 아닌지 살펴 보아야겠다.
부디 내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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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11. 6. 14. 07:22
우공이산 [愚公移山]: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

원래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열자(列子)》 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형(太形) ·왕옥(王屋) 두 산은 둘레가 700리나 되는데 원래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있었다. 북산(北山)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에 가까운데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흙을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지수(智戒)가 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하고 대답하였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산을 허무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될까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중국 언어연수를 갔을 때,
교과서에 나왔던 이야기다.
중국인들의 근본정신이라고 중국인 선생님이 일러주신 것이 기억난다.
우리 속담에는 띠끌모아 태산 뭐 이런 격이나 될까?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뭐 이런 뉘앙스겠지?

요즘 논문을 쓰며 집중하지 못하여 진도가 안나가는 걸 보며 무척 답답하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식 쓴 것이 쌓여져 가는 것을 볼 때, 작은 성취감을 느낀다.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와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한 걸음 나는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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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011. 6. 8. 21:04
스맛폰이 생긴 후, 난 주로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일기를 쓴다.
(불투스 키보드 필수아이탬)

옛 어르신들이 처가집과 화장실과 교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교회가는 길이 멀면 그 가는 길에 여러 창조적인 일들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면을 성찰할 수 있다.


시편의 120-137편은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부른 노래였다. 성전이 가까이 있었으면 결코 이런 시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는 길에 순례자의 마음으로 여러 생각들도 하고 기도도 하고 쓰기도 한다.

그 중 쓰는 것은 단연 창조적인 사고와 반추를 위한 필수 과정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지만 ... 그게 아닐 수도 있다.
10리를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순례자의 마음이 이 예배자의 마음에 충만하게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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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11. 6. 1. 21:26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

이 말은 시작할 때의 태도를 의미하는 듯하다.
시작할 때의 태도가 올바르면, 벌써 반은 성공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5월을 보내며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5, 26, 27....초스피드로 지나가는 시간들!
6월의 첫 날, 달력의 1자를 보며, 오늘 내가 산 태도와 자세가 6월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오늘 6월의 시작은 벌써 6월의 반을 결정해버린 것이다.

달력에 그려진 숫자 1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발견하며... 아쉬움 없는 6월을 보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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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11. 6. 1. 20:27
얼마전 애니어 그램 검사를 했다.
7번 유형에 6번 날개를 주로 사용한다고 검사가 나왔다.
7번유형의 약점 중 하나는 본질적인 기쁨을 즐기기 보다 얕은 본능적인 즐거움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무거운 문제들을 회피해 버리고 천박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과 본질적인 즐거움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하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7번 유형이 이 깊고도 깊은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
그 문제들을 통해 성장하며 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단을 들으며 나는 복음을 듣는 듯했다.
나의 연약함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진단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위가 산만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며 금방실증을 느끼며 천박한 기쁨들을 누리려 했다.
전화 통화, 게임, 공상, 빈둥빈둥을 통해 기쁨을 누리려 했다.
인내하며 나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노력하고 뜻을 이루려는 몸부림은 너무나 부족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쳐 복종하며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더 인내하며 참 만족과 참 기쁨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첫 숙제로 논문이 나의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이 논문을 통해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 한 단계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실 주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내 앞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며 묵묵히 인내의 길을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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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11. 6. 1. 18:44
4년동안 종암교회 사역을 서서히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자기 반성을 하는 시간을 조금씩 갖고 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집중하기이다. 여러가지에 집중할 때, 여러가지를 다 놓칠 수 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며 한 가지를 마무리 짓고 매듭을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일례로 사역과 공부를 같이 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들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공부면 공부, 사역이면 사역에 집중하면 좋을 거 같다.

공부도 사역도 둘 다 이룬 것 없이 어정쩡한 것 같아 무척 아쉽다.

다른 예로 준전임을 하면서 고등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쉬운 점이다.

교육전도사 시절 고등부 사역만 하면 됐고, 더 많은 에너지를 고등부에 쏟았다. 하지만 준전임이 되면서 업무량이 많아지고 나의 관심과 집중은 분산되었다.

고등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수적인 감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대목은 두고 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요즘 들어서는 논문만 써야되는 상황인데 가정과 교회와 논문 세가지가 얽혀서 상당히 복잡하다.

여러 가지를 잘 하려고 하는 욕심은 금물이다. 하나에 집중해야 여럿을 이룰 수 있는 것 같다.

집중하기, 집중하기, 계속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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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1. 6. 1. 14:06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자신이 왜 불행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자신이 왜 불행할까에 대해서 생각도 안해보고 불행하면 진짜 불행한겁니다! 내가 왜 불행한지 알고 불행해야하지 않겠어요? 전도사님이 고등부 전도사를 맡지 않았다면 고등학교를 회상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고등부를 맡다 보니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많이 떠 올리곤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어두웠고, 가장 행복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몰랐던 것이었어요. 아무도 저에게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고 너는 정말 특별하고 멋져.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집에서도 그랬고, 교회에서도 그랬고 학교는 더더욱 그랬죠.  어딜 가나 비교와 경쟁이 있을 뿐이었죠. 비교는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사람을 한 없이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리죠.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거예요. 토끼는 토끼끼리 경주해야지 거북이와 왜 경주를 하는 겁니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너무나 유니크하고 가치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큰 비교 항목은 뭡니까? 성적이죠. 특히 이 잣대는 선생님들이 잘 꺼내드시죠. 성적 나쁜 놈들은 개패듯이 맞았습니다. 가치 없는 쓰레기 취급 당하죠. 2때 담임샘, 지난 번 시험과 비교해서 점수가 떨어지면 그날 복도에 일렬로 엎드려 받쳐였습니다. 아직도 복도에 길게 늘어 섰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은 도미노인 줄 알고 일렬로 엎드려 받쳐 있는 우리를 발로 차시죠.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우리는 암암리에 성적이 정말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사람의 가치가 거기서 나온다고 세뇌를 받습니다. 성적 좋은 놈들 죄송합니다 감히 놈이라는 호칭을 붙였어요. 걔네들은 정말 가치 있고 필요한 존재들로 취급받습니다. 

 

두 번째 큰 비교항목은 아마 외모일겁니다. 특별히 남자 친구들은 주일마다 전도사님의 수려한 외모를 보면서 좌절하리라 생각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외모 또한 서로가 비교할 꺼리가 못됩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윤아, 누구 뭐 이런 애들이랑 비교를 합니까? 박지선, 신봉선, 오나미 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행복해지 잖아. 농담이구요. 일단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비교하다라는 영어 단어는 Compare 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comparo에서 왔습니다. 원래는 짝지어주다, 대등하게 하다라는 뜻이예요. 원래는 대등하게 하려고 그 옆에 놓았고, 짝지어 주기 위해 옆에 놓았고, 친구가 되라고 옆에 놓았는데 인간의 습성상 비교가 자연스럽게 일어난거죠. 그래서 비교하다로 뜻으로 발전한거죠. Comparo의 끝의 O를 빼면 Compar가 되는데 친구라는 뜻이 됩니다. 재밌죠? 비교하다라는 말에서 o를 뺐더니 친구가 되버린겁니다. O가 뭘까요? Others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사람과 나를 견주는 것을 빼버리니 그가 나에게 친구가 되버리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를 진흙으로 비유하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들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맞게 그릇을 빚습니다. 이사야 45:9절에 보면 이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대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라고 말하고 있어요.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말입니다! 생각하기를 우리가 서로 서로 비교하는 것이 이런 격일 것 같아요. 나의 외모를 보고 비교하는 것은 나를 만드신 분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만드신 거죠?” “이것이 최선입니까?”라고 묻는 격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책을 좋아하고, 사색을 좋아하게 만드셨고, 어떤 사람은 놀기를 좋아하게 만드셨어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노는 것을 잘 개발해 보세요. 분명 여러분이 쓰임 받을 곳이 있을 겁니다. 각자 각자가 다른 용도와 다른 기능으로 만들어 졌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마스터 피쓰 즉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겁니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그것이 대생이 됐든 정물화가 됐든 추상화가 됐든 피카소의 작품이 되어 무한한 가치가 생겨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가치는 성적이나 외모에서 나오지 않아요. 속지 마세요. 우리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손가락질 하고 놀린대도,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치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있어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는 거 압니다. 여자 친구들 중에 영향력 있는 친구 한 명이 야 쩨 저런 얘야 놀지마이 한 마디 하면 그 때부터 여러분은 왕 따 되는 거잖아요. 친구가 여러분에게 야 너 못생겼어이러면 여러분은 못생긴 사람이 되버리잖아요. 속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치는 친구의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한 고등학생 어머니가 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터놓으시더군요. 딸이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사이, 모든 친구들이 자신의 딸에게 험담하면서 딸이 그동안 친구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 꼬발리며 이간질을 했나봐요. 수학여행 후 친구들 열 명 정도가 이 친구를 둘러싸고 니가 어떻게 나한테 글런 말을 할 수 있어하면서 이 친구를 몰아 세웠고. 이 따님은 그 이후에 학교를 못나가겠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여자 여러분 왜 그러는 겁니까?  친구들의 말에 자신의 인생이 좌지 우지 되는 고등학생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나봐요. 여러분 우리들의 가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결코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종환모두가 장미일 필요는 없다라는 글을 이제 읽어 드리겠습니다.

장미꽃은 누가 뭐래도 아름답다. 붉고 매끄러운 장미의 살결, 은은하게 적셔 오는 달디단 향기, 겉꽃잎과 속꽃잎이 서로 겹치면서 만들어 내는 매혹적인 자태. 장미는 가장 많이 사랑받는 꽃이면서도 제 스스로 지키는 기품이 있다.

그러나 모든 꽃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모든 꽃이 장미처럼 되려고 애를 쓰거나 장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내 빛깔과 향기와 내 모습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나는 장미로 태어나지 않고 코스모스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가녀린 내 꽃대에 어울리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장점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욕심부리지 않는 순한 내 빛깔을 개성으로 삼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남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 모습, 내 연한 심성을 기다리며 찾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장미는 해마다 수없이 많은 꽃을 피우는데 나는 몇 해가 지나야 겨우 한 번 꽃을 피울까말까 하는 난초로 태어났을까 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미처럼 화사한 꽃을 지니지 못하지만 장미처럼 쉽게 지고 마는 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장미처럼 나를 지킬 가시 같은 것도 지니지 못했지만 연약하게 휘어지는 잎과 그 잎의 담백한 빛깔로 나를 지키지 않는가. 화려함은 없어도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 더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지 않는가.

나는 도시의 사무실 세련된 탁자 위에 찬탄의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장미가 아니라 어느 산골 초라한 집 뜨락에서 봉숭아가 되어 비바람을 맞으며 피어 있을까 하고 자학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미처럼 붉고 짙으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빛깔을 갖고 태어나지 못하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붉은빛이나 연보랏빛의 촌스러운 얼굴빛을 갖고 태어났을까 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다.

봉숭아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빛깔을 자기 몸 속에 함께 지니고 싶어 내 꽃잎을 자기 손가락에 붉게 물들여 지니려 하지 않는가. 자기 손가락을 내 빛깔로 물들여 놓고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만큼 장미는 사랑받고 있을까. 장미의 빛깔은 아름다우나 바라보기에 좋은 아름다움이지 봉숭아처럼 꽃과 내가 하나 되도록 품어 주는 아름다움은 아니지 않는가.

장미는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시기심도 생기고 그가 장미처럼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은근히 질투심도 생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흔하디 흔한 말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정말 가치있는 사람이야우리 옆에 있는 친구에게 고백해 줍시다. “넌 정말 가치있는 사람이야” “너의 가치는 성적이나 외모에 있지 않아!”라고 얘기해주세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너무나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진흙 같은 우리를 세상의 최고의 작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죠.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