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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28 넌 정말 잘하고 있어!
- 2011.05.28 도종환 - 모두가 장미일 필요는 없다.
- 2011.05.25 인생은 파노라마다.
- 2011.05.23 聖職에 대해 생각하다!
- 2011.05.23 위대한 친구 예수님
- 2011.05.23 Until you find the lost one
- 2011.05.19 논문을 쓴다는 건....
- 2011.05.11 I need you more. 주님이 필요해요!
- 2011.05.08 Best 로 인도하시는 주님
장미꽃은 누가 뭐래도 아름답다. 붉고 매끄러운 장미의 살결, 은은하게 적셔 오는 달디단 향기, 겉꽃잎과 속꽃잎이 서로 겹치면서 만들어 내는 매혹적인 자태. 장미는 가장 많이 사랑받는 꽃이면서도 제 스스로 지키는 기품이 있다.
그러나 모든 꽃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모든 꽃이 장미처럼 되려고 애를 쓰거나 장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내 빛깔과 향기와 내 모습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나는 장미로 태어나지 않고 코스모스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가녀린 내 꽃대에 어울리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장점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욕심부리지 않는 순한 내 빛깔을 개성으로 삼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남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 모습, 내 연한 심성을 기다리며 찾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장미는 해마다 수없이 많은 꽃을 피우는데 나는 몇 해가 지나야 겨우 한 번 꽃을 피울까말까 하는 난초로 태어났을까 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미처럼 화사한 꽃을 지니지 못하지만 장미처럼 쉽게 지고 마는 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장미처럼 나를 지킬 가시 같은 것도 지니지 못했지만 연약하게 휘어지는 잎과 그 잎의 담백한 빛깔로 나를 지키지 않는가. 화려함은 없어도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 더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지 않는가.
나는 도시의 사무실 세련된 탁자 위에 찬탄의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장미가 아니라 어느 산골 초라한 집 뜨락에서 봉숭아가 되어 비바람을 맞으며 피어 있을까 하고 자학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미처럼 붉고 짙으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빛깔을 갖고 태어나지 못하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붉은빛이나 연보랏빛의 촌스러운 얼굴빛을 갖고 태어났을까 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다.
봉숭아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빛깔을 자기 몸 속에 함께 지니고 싶어 내 꽃잎을 자기 손가락에 붉게 물들여 지니려 하지 않는가. 자기 손가락을 내 빛깔로 물들여 놓고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만큼 장미는 사랑받고 있을까. 장미의 빛깔은 아름다우나 바라보기에 좋은 아름다움이지 봉숭아처럼 꽃과 내가 하나 되도록 품어 주는 아름다움은 아니지 않는가.
장미는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시기심도 생기고 그가 장미처럼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은근히 질투심도 생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본문: 마태복음 11: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 두 여인의 죽음
1997년 8월 말 그리고 9월 초에 세상의 주목을 받던 두 여인이 6일 차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여인의 장례식은 모두 전 세계로 생중계가 되었죠. 한 여인은 35살의 꽃다운 여인였고, 다른 여인은 86세의 쭈굴탱이 할머니였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35살의 미모의 여인은 바로 영국의 윌리엄 왕자의 왕세비였던 다이애나 였구요. 86세의 할머니는 가난한 하고, 배고프고, 벌거 벗고 집없는 사람들의 친구이자 엄마였던 마더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다이애나는 윌리엄 왕자와 이혼 후 여러 남자들과의 복잡한 관계로 구설수로 오르다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죠. 그의 외모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많았을 줄 모르나 그의 삶을 흠모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여인을 뽑으라 하면 아마 세 손 가락 안에 들 여인이죠. 그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소감으로 한 말입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그녀는 바로 고아와 과부들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위대한 친구를 잃은 슬픔에 세계는 함께 울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녀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부하고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별명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대적자들에게 불리웠던 예수님의 별명은 무엇이었을까요? 힌트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합니다. 정답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 주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하나가 더 있죠. “세리와 죄인들의 칭구” 여러분 그 고귀하고 순결하신 이미지의 예수님의 별명을 한 번 봐보십시오. “먹기를 탐하는 사람” “식탐”이죠. 헐 예수님이 식탐?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주정뱅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친하게 지낸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데 그들하고 뭐하면서 놀아야겠어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그들의 관심을 끌어 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어주고 즐겨주어야 했던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서였죠.
마더 테레사도 다이애나 같은 화려한 삶, 품격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청빈한 삶을 선택했었쬬.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죠. 예수님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셨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신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 지렁이 아니 바나나가 된 거 보다 훨씬 어마어마 한 거라구요.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죄인된 인간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죠.
예수님이 이 시대의 고등학교로 오신다면 누구의 친구가 되실까요? 여러분들이 손가락질 하는 양아들, 날날이, 밥맛들, 일진, 왕따 뭐 이런 애들에게 가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 뭔가 모자란 사람들의 친구, 병든 사람들의 친구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 중에 나는 문제가 너무 많은 사람이야, 나는 죄가 가득하고 생각도 너무 지저분해.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실수 투성이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런 친구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의 친구 목록 1순위 후보로 올라 있으십니다.
세리와 죄인들 처럼 문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친구로 다가가 주셨어요. 오늘 이 시대에도 주님은 마찬 가지입니다. 문제많은 나, 문제많은 여러분을 위해 친히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위대한 이유죠. 아무 매력이 없고, 함께 하기에 부담스럽기까지 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친히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죠. 이제 예수님이 내민 손을 잡아 보시겠습니까? 예수님 보다 위대한 친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위대한 친구 예수님을 여러분의 친구로 모실 때 삶의 참 기쁨과 만족이 있을 거예요!
제목 - 잃어 버린 자를 찾을 때까지
1. 잃어 버린 것.
저는 뭔가를 깜빡 깜빡 잘 잃어 버립니다. 우산은 로스템 1순위 항목입니다. 로스템이 뭐냐구요? Lost와 item 의 합성어입니다. 물론 제가 만들었습니다. 우산을 항상 버스에 놓고 내리고 버스를 따라가 보지만 헛탕입니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애들이 있는 집에서는 놀이 공원 한 번쯤은 갑니다. 놀이 공원 가면 꼭 나오는 방송이 있죠. “아무개 아이의 보호자께서는 보호소로 와주십시오. 아이가 부모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애타게 찾고 있는 쪽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죠. 길 잃은 아이들은 그렇게 애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정작 애타고 절박하고 하늘이 까매지는 쪽은 그들을 잃어 버린 부모님이죠. 놀이 동산에서 부모나 동행을 잃어 버린 아이들은 의외로 여유가 있습니다. 이탈될 때부터 그들은 여유가 있었어요. 앞에 가는 아이 풍선이 좋아 보여 그냥 좇아 가다 길을 잃어 버리고 뭐 이런 식이죠. 저희 아내도 어린 시절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부모님을 잃고서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다죠. 길을 잃어 버렸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았대요. 보호소에서 느긋하게 엄마아빠를 기다렸다더군요. 2003년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중국으로 의료선교를 갔었어요. 기차역에서 내려 숙소로 이동하여 인원 파악을 하는데 고등학생 한 명과 초등학생 한 명이 사라진 거예요. 난리가 났습니다. 이리 저리 한 참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호텔 로비에서 이 친구들을 발견했어요. 제가 발견했는데 완전 여유로운 거예요. “너네 여기서 뭐하고 있니?”라니까. “한국 집에 전화할려고 호텔 직원한테 물어보고 있었어요” “너네 지금 미아거든, 이렇게 여유로우면 안되거든, 다들 걱정하고 난리가 났거든” 제가 서두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잃어 버린 자보다 잃은 자가의 마음이 더 조급하고 애타고 아프다는 겁니다.
2. 양을 잃어 버린 목자의 마음.
본문을 봐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죠. 본문의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은 99마리의 양도 아니고 잃어버린 1마리의 양도 아니고 잃은 양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목자가 아닌가 합니다. 솔직히 길을 잃은 양은 자신이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어딘가에서 유유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석양이 짙어지면서 밤이 다가오고 있는 들녘의 목자의 마음은 조급해 집니다. 동료 목동에게 99마리를 맡긴 후 그는 왔던 길을 돌아가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언제쯤 돌아올까요?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번 10시 2번 11시 3번 12시 4번 찾을찾을 때 돌아오지 않는다. 정답은 몇 번 입니까? 그래요 “찾을 때까지” 이 목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편 이쪽에서 99마리의 양을 몰고 가던 목동들은 저 멀리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습니다. “찾았다~~~” “내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구~~” “야호~~” 목소리는 점점 커져 저 멀리서 양을 메고 뛰어 오는 목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양을 들쳐 메고 오고 있는 목자의 모습이 여러분 그려지시나요?
여기서 질문 하나 나갑니다. 목자는 왜 양을 들쳐 메고 오고 있을까요? 또 보기를 드릴까요? 1번 양이 지쳐서 탈진되었기 때문에 2번 양을 찾은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3번 둘 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3번입니다. 양이 지쳐서 탈진 됐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시는 분 있을지 모르지만 탈선한 양은 분명 문제가 있는 양이었을 거예요. 혼자 헤매다 가시에 찢기고 낭떨어지에 구를 수도 있구요…. 매우 처량한 상태로 전락했을 게 분명합니다. 지칠대로 지친 양은 걸을 힘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기에 목자는 그 양을 들어 메고 갈 수 밖에 없었고, 설령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목자는 양을 찾은 기쁨에 둘러 메고 왔을 거예요.
3. 두 가지 길이 있다.
성경 책 말고,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디다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열두 사도의 가르침의 1장 1절 첫 구절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 “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죽음의 길 아니면 생명의 길 두 가지 뿐입니다.
여기 계시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생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에 의해 닦아진 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죠.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며,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생명에 이르는 길인 것이죠. 하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며 파멸로 이르는 길이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왜 그렇게 애타게 그 양을 찾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 양은 지금 죽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생명의 길로 옮겨 오고자 목자는 그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헤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여유있게 살아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4. 이상한 계산 법
본문을 읽으면서 이상한 계산 법에 우리는 놀라죠? 99마리를 버려두고 1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계산 법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99마리를 있다고 기뻐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1마리를 다시 찾았다고 난리 법석을 피우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셀러브레이션을 합니다. 이 계산법이 우린 참 익숙하지 않죠? 이것은 자신의 소중한 사랑을 다시 찾아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계산 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남산 케이블카를 타 보셨나요? 충무로 쪽에서 남산을 올라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있습니다. 남자친구들 필수 데이트 코스니 잘 들어 노세요.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데이트하러 하루는 남산 케이블 카를 타러 갔어요. 줄을 섰는데 타는 줄이 저에게서 끝나서 사모님은 제 다음 케이블 카를 타고 와야 했어요. 지금 가상 현실인거 아시죠? 실제 였으면 이러면 안되겠죠 형제님들 함께 케이블카를 타야지. 어쨌든, 저는 먼저 무사히 도착했어요. 그런데 건물 1층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밑으로 내려갈 수 없고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와야 구출이 되는 겁니다.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는데 다행히 저희 아내가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고 구출을 받았어요.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화재가 나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도감과 기쁨이 있겠죠. 아~~ 위험에서 구출됐구나. 살아 있구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구나.
훌륭한 예가 됐을지 모르지만 바로 1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샘법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 위험에서 안전으로 옮겨진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그 기쁨은 어떤 것으로도 상쇄되어지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샘법입니다. 잃지 않은 99마리보다 잃어버렸다 찾은 한 마리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아십니까? 한 명의 영혼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생명의 길이 아닌 길 가운데서 헤매는 여러분의 친구들이 아른 거리시나요? 주님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주님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합시다. 한 명이 주님께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잃은 양을 되찾은 기쁨으로 천국은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길 잃은 양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그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선생님이십니다. 이 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며 응원하고 계시는 줄 아십니까? 선생님들 그쵸? 이 선생님들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우리 잃은 양들, 로스트램즈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볼 때, 기뻐 뛰실거예요. 여러분들이 선생님들의 막춤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잃은 양들을 선생님께 데려와보세요. 선생님들 잃은 양들이 돌아오면 막춤 추시는 거죠? 스승의 날에 다름 아닌 잃은 양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단연코요!!
여러분 반 친구중에 출석부에 올라가 있지만 고등부 올라온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은 친구도 있어요. 그 친구들을 여러분이 들쳐 메고 오시면 어떨까요? 그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질거예요. 레알 큰 잔치입니다. 잃은 양이 아니라도 여러분의 베프 절친에게 예수님 이야기 한 번도 꺼네 보았다면 이번에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교회에 나가보자고 해보세요.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해 여러분이 사연을 적어 보내주세요. 여러분의 사연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알차게 할 뿐만 아니라 초대되어온 친구에게도 큰 감동을 줄거예요.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 함께 기도하며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 보아요^^
아니 유행가를 듣다가도 그 가사가 나의 삶에 공명이 될 때, 울 때도 있는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들었던 찬양으로,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가사가 정말 공감이 가고 내 삶의 자리에 너무나 어울린다.
I Need You More
I need You more, more than yesterday
I need You Lord, more than words can say
I need You more, than ever before
I need You Lord
I need You Lord
More than the air I breathe
More than the song I sing
More than the next heartbeat
More than anything
And Lord, as time goes by,
I will be by your side
Cause I never want to go back to my old life.
요즘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아 너무 답답하다.
목사안수
학업
논문
진로
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있다.
삶이 절박해지니 주님을 찾게 되는 비열함에 고개를 떨구면서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사 중에
숨쉬는 공기보다
다음 심장 박동보다 주님이 필요해요. 이 부분, 최고다.
나는 주님 곁에 항상 붙어 있을래요. 왜냐면 나는 예전 내 삶으로 돌아가기 싫기 때문이죠.
와~~ 정말 쉬우면서도 공감이 가는 가사다.
내 삶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 어느때 보다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