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작품들2011. 9. 6. 17:18


짧지만 메시지가 강한 동영상이네요. 

설교시간에 써먹으면 참 좋겠죠?? ㅎㅎ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9. 3. 07:39
묵상하는 사람을 일컬어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안 자라는 듯 하지만 어느 새 보면 자라 있다.

콩나물 시루에 물 붓기도 마찬가지다.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지만 어느 새 콩나물은 자라 있다.

묵상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은혜가 쩔어서 감격 스럽지만 대부분은 그냥 맹숭맹숭 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말씀을 향한 신뢰와 위탁이 이뤄지고

그 말씀은 어느 새 내 마음 밭에 떨어져 있다.

그 씨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것이다.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한 번의 설교로 소극적인 은혜를 얻어 먹는 것보다

힘들고 더딜지라도 말씀 앞에서 씨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몸부림인 묵상이 훨씬 양질의 영양분을 우리에게 공급하리라 믿는다.

또한 말씀이신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것에 큰 매력이 있다.

오늘도 콩나물에 물을 부으셨습니까??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묵상을 통한 우리 모두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8. 31. 20:20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최윤배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은 열정적인 수업으로 유명했다. 수업도 그렇고 설교도 그렇고 열정을 쏟아 부으신다.
그분이 수업중에 하신 말이 있다. "여러분이 사역자라면 교회에서 양복 한 벌 정도는 얻어 입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분의 의도는 얻어 입는 삶이 사역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성도들의 삶에 감동을 주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사역자가 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나도 양복 한 벌 얻어 입을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역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사역하는 종암교회에서 양복 한 벌 얻어 입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4년이 되도록 그런 일은 없었다. ㅎㅎ
그런데 오늘 오후에 여집사님 한 분이 오시더니 "가을에 양복 한 번 해드리고 싶은데 신체 사이즈좀 알려주세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냥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작은 바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잊지 않고 들어주셨다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양복 한 벌 이지만 하나님의 기억 속에 머물고,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받는다는 생각에 맘이 참으로 행복해진다.
아~~ 나는 행복한 사역자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Moment Idea2011. 8. 22. 07:14
오늘부터 묵상한 본문의 핵심 구절을 고전어로 외운다.

고전어를 안 쓰니 다 까먹기 시작한다.

신약은 헬라어로 구약은 히브리어로, 거기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하루에 한 구절씩만 외우자.

암송과 암기를 안했더니 머리가 굳어 가는 것 같다.

잃었던 외국어 감각을 다시 끓어 올리자.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8. 21. 23:21
정말 오랜 만에 개콘으로 쉬는 시간을 보낸다.

오늘 아내가 같은 교회 전도사님들과 차 마시고 오겠다기에

그냥 푹 쉬고 이야기 많이 하다 오라했다.

다행이 선율이는 9시 15분에 잠들었다.

아내가 MBC 반짝반짝 보느라 개콘을 못봤었는데 정말 오랜 만에

애 재우고 개콘 보며 많이 웃었다.


개콘 프로그램이 많이 바꼈구나.

그 중에 재밌고 인상적인건

"감사합니다"와 "애교남" 이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새 남자의 긍정적 고백이 코미디지만 참 공감되어 다가온다.

또한 일명 애교남 "애매한 것을 교정해주는 남자"란다.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할지 애매할 때,

그들이 제시한 것이 5개월 이상일 땐, 임산부 이하일땐 할머니라고 확실히 정의 내린다 ㅋㅋㅋ


이런 거 설교시간에 써먹으면 애들 되게 좋아하겠다.^^

감사합니다. 애교남. 이거 설교할 때 한 번 해봐야 겠다!



개콘을 보며 늘 느끼는 거지만 제네들은 저런 아이디어 생각하느라 얼마나 머리 짜매고 짜맸을까 라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 정신이겠지.

나도 설교 하나 만들기 위해 저 정도 노력은 들여야 하는 거 아닐까??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8. 12. 06:42


  1.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2.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3.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4.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5.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최근에 사역자로서 나의 사역의 방향을 어떻게 결정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주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여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사도행전 19장을 읽으며 바울의 사역이 내 삶에 공명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기술하고 있다.

위의 말씀을 보면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첫째,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포함된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며 가르쳤다.

넷째, 능력전도 (Power encounter)를 행했다.




사도행전의 메인 스트림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다.

그의 관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르침은 이론에서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됨으로 마귀가 떠나가고 병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가르침을 통해 미티스트리를 통해 믿기로 작정한 자들에게는 세례가 베풀어졌다.





20살에 내가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말씀은

로마서 15:18~20의 말씀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결국 이 말씀을 통해 개척선교(frontier mission)을 내 삶의 큰 방향으로 잡았다.

선교사로 나아갈 제 2의 전환기를 맞으며 내 삶의 role model 이 되는 바울의 선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선교 사역은 그의 사역의 핵심이 잘 녹아진 곳이다.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선교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마태복음 28:19~20 절의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지상 명령(至上命令)과도 일맥상통한 본문의 말씀에 큰 도전을 받는다.

결국 나의 선교와 사역의 방향은 세례, 가르침, 하나님 나라, 능력 행함에 촛점이 맞춰 진행되어 질 것이다. 아니 진행 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더 준비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철저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8. 7. 17:14
영혼들은 진리를 갈망한다!
사제에게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길 간절히 원한다!
사제가 그 어느 것보다 말씀에 열정을 쏟아 부어야할 이유다!
난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헐떡거리는 영혼들을 만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난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기에 그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참 진리를 갈망합니다!

요즘 나의 설교를 듣고 은혜가 된다 좋아졌다는 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때마다 격려 받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 이렇게 부족한 말씀에도 은혜 받는 영혼들을 보며, 영혼들이 생각보다 심히 갈망하며 참 진리에 목말라 있다는 생각을 한다.

더 겸손히 말씀 앞에 머물며, 말씀을 연구해야할 대목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8. 4. 09:30
아침에 머리를 말리며 문득 거울을 보는데 머리가 많이 빠진 걸 느꼈다.

머리털 한 오라기 한 오라기가 귀한데 너무 소중히 다루지 않은 거 같다.

내게 가장 귀한 물건(?)이 있다면 머리털이겠지 아마? ㅎㅎ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안된다는데

이 참새보다 내가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내 머리털을 세시는 주님이사랬는데, 그러면 내 머리털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 아닌가?

주님은 나의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나 또한 귀하게 여기는 머리털보다 주님을 더 소중히 생각해야겠다.

그냥 아침 거울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 본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8. 2. 22:36
월요일 어제 드디어 이사를 했습니다.

광진구 중곡동에서 양천구 신정동으로 왔습니다.

어제는 비올 확률 90%였는데 주님이 어여삐 여기셔서 비가 멈추고

은혜가운데 무사히 이사를 마쳤네요. 감사드립니다.



이사를 하고 느낀점은 역시 구관이 명관이다.

그 전 살던 집이 좁고 열악하긴 했지만 그래도 주위에 편리한 것들이 많아

살기엔 좋았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교통이 이곳은 너무 안 좋아요.

가장 가까운 전철역에 가려면 버스로 15분 이상 가야하니까요.

주위에 편의시설도 아무것도 없네요.

인간이 간사해져서 좋은 집 편안한 집 주셨는데 이런 불평을 늘여 놓고 있네요.

아무튼 이곳은 저녁에는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

산 바람이 집안까지 들어오는 서울 속의 산골 마을이랍니다.

좋은 점은 집이 넓다는 겁니다.

거실도 매우 넓고 (아니 황량하죠^^)

아가가 살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네요.

새 보금 자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1. 7. 28. 18:41
얼마전 아는 형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다.

"부목사나 전도사는 담임목사님보다 설교를 잘하면 안되. 더 잘 나도 안되고, 더 튀어도 안되!! 그러면 모가지 나간다!!"

씁쓸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또 다른 친구는 목사고시 면접에서 그런 말을 들었단다.

"자네 교회의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 네 교회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면접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 없었다.

"아니야 담임목사가 교회의 주인이야.

모든 것은 담임목사에게 맞춰져야해!"

나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목사는 어딜가나 대우를 받으려고 한다.

교인들이 높여주지 않거나 존중해 주지 않는다 싶으면 심한 불쾌감을 나타낸다.

상석에 길들여져 있으며 접대에 길들여져 있다.

부목들은 담임목사를 하나님 떠 받드시듯 한다.

이보다 더한 하이어라키(hierarchy)는 없다.

평행적인 관계, 수평적인 대우란 교회에서 찾아 보기 어렵다.

나는 최근에 이러한 교회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목사는 은사와 기능에서 성도들과 구별될 뿐이다.

목사는 성도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도 동일하게 죄인이며 겸손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가 필요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에서 목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아니 신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은 늘 낮은 자리를 지향했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을 것을 탐하는 자라 손가락질을 당했던 분이다.

목사가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개혁되지 않는다.

목사가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면 교회는 소망이 없다.

목사가 낮아지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한다.





나는 철저한 죄인으로서의 목사다.

나는 어떤 성도보다 더 높거나 더 고귀하거나 더 월등하지 않다.

난 단지 그들과 동일한 형제이며,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기능인일 뿐이다.

난 목사로서 단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기능을 받은 사람이다.

결코 형제 위에서 군림하거나 다스리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양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나의 것을 포기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갓 목사가 된 자로서 평생 이 자세에서 이탈하지 않으리라 작정한다.

내가 이러한 태도에서 이탈하는 즉시, 마치 사울처럼 기름부으심은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고 허울 좋은 위치에 있는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나는 목사다. 牧師, 양을 치고(牧) 가르치는(師) 스승이다. 

이 초심 변치 않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