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2012. 12. 19. 06:56

<누가 우리를 위하는가?>


기독교인들 중 상당 수가 대통령 후보를 선택할 때

'누가 우리 기독교를 위하는가?'를 고민한다.

어떤 후보가 친기독교 정책들을 펴가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 문자 메시지는 어제 밤 10시에

광주에 있는 대학교때 선교단체의 후배에게 받은 문자메시지다.

'어떤 인물이 되면 기독교 학교의 신앙교육을 ㅂ 후보는 장려하지만

ㅁ 후보는 못하게 한다... 중간생략

다른 것 볼필요없이 ㅁ후보가 대통령되면 기독교 ㅇㅊㅅ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중하고 결탁하여 기독교 억제 정책을 쓸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가?

우리 기독교가 신앙을 지켜가기 힘들어지고 전도하기 힘들어진다고 느끼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가는 위기감을 금할 수 없다.

기독교의 안위와 번영을 보장해주는 당과 후보와 결탁하여

어마어마한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질해 버리지 않는가?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순진하게 '장로'라는 이유로 뽑아주었던

대통령들이 우리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무늬만 기독교인이지 그들이 폈던 정책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많았다.

경쟁을 조장하는 세상을 만들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집없는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물을 뿌려대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조화하고 공생하지 않고

오염시키고 파괴하는데 앞장서지 않았던가?



기독교인으로서

'누가 우리를 위하는가?' 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누가 백성을 위하는가? 누가 국민을 위하는가? 누가 가난한 자를 위하는가?

누가 억눌린 자를 위하는가? 누가 갇힌 자를 위하는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예수님이 누가복음 4장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를 기억한다.

주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주의 은혜의 해를 

(희년 공동체의 기쁨, 즉 희년에 나눔을 통해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기쁨)

전파하는 것" 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한마디로 '십자가' 이다.

십자가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삶이며 인류를 위한 삶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의 이익을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

가난하고, 포로되고, 병들고, 억눌리고, 갇히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씨름하는 자들을 위해 오셨다.


나의 대통령 후보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누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의 궤적과 근접한가?" 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그의 인격과 삶을 결정한다.

그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을 살았냐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예수님과 유사하다면 나는 그를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나의 집단의 이익이 아닌

백성과 국민의 이익과 잘됨을 위한 살아 줄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기독교적이지 않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누가 기독교를 위하는가? 보다

누가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누가 예수님의 삶의 궤적에 가장 근접했는가? 이다.


교회는 정부의 보호를 먹고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고난과 박해를 먹고 성장해 왔다.

로마의 박해 가운데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켰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종교로 인정되면서부터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교회에 적대적인 당과 후보를 무턱대고 찍으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라.

'누가 교회를 위하는가?'가 우선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교회의 지도자인 총회장을 뽑는 선거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돌보고 나라 살림을 책임져 건강한 나라를 만드는 나라의 지도자다.

그러기에 누가 교회를 위하고 기독교를 위하느냐보다

누가 나라를 위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누가 교회의 설탕으로 우리 기독교를 달콤하게 해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상과 백성의 소금으로 반드시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Posted by speramus
일기2012. 12. 15. 00:14

<아이폰 5 사용후기-What makes me to use iPhone?>


지인들 중에 아이폰 5 사용후기를 올리라는 분의 권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쓰는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1. 나는 왜 아이폰을 쓰는가?(the reason that I adhere to iPhone?^^)

제가 처음 애플 제품을 접한 건 2009년 말 아이팟 터치 3세대를 사면서부터 입니다.

아이팟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제 라이프 스타일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리만큼 새로웠습니다.

한 마디로 혁신(renovation)이었죠.

무선공유기만 있으면 어디서든 인터넷이 접속되었죠.

그 당시 일반 폰에서 SK의 네이트나 KT의 쇼같은 것을 통해 인터넷을 접속하는 것은

엄청난 요금과 시간이 소요되는 때였습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접속한다는 개념 자체가 사치스러울 시점에

만난 아이팟은 그야 말로 혁신이었죠.

전화가 아닌데도 문자가 되고, 메일도 확인되고, 연락처도 볼 수 있고

설교, 동영상, 음악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담아서 볼 수도 있고

그야 말로 멀티플레이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팟과 일반 핸드폰을 둘 다 들고 다녀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아이팟을 버리고 아이폰으로 넘어오게 됐죠.


2. 혁신renovation의 실체는 무엇인가?

아이팟 터치를 쓰면서 혁신을 경험했다고 말했는데...

혁신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유비쿼터스(ubiquitous)와 멀티펑셔널한(multifunctional) 기능 때문이였습니다.

유비쿼터스는 라틴어로 Ubiquaque(모장소에서, 사방에서)에서 나온 단어죠.

그 동안 컴퓨터에서 할 수 있었던 기능들을

손안의 작은 핸드폰 안에서 모두 그리고 언제든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마트폰  자체는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의 정보와 자료들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알라딘의 요술 램프의 지니를 만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죠.


3. 왜 하필 아이폰이냐? (what different?)

그런 유비쿼터스와 멀티펑션은 아이폰만 가지고 있는 특성은 아니었죠.

소위 안드로이드 군으로 분류되는 핸드폰에서도 그런 기능들을 모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3년전) 그 퀄러티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 보였습니다.

삼성은 높은 사양의 하드웨어로 승부를 걸었지만

애플의 운영체제(Operating System - OS)를 따라오지 못했죠.

솔직히 지금도 안드로이드는 애플의 OS를 추격해 오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안드로이드의 높은 스펙과 싼 가격의 스마트폰으로 넘어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아이폰의 OS의 편리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플 OS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죠. 


    a) 먼저 보안성입니다. (security and stability reason)

안드로이드 폰을 쓰는 사람들의 핸드폰에 바이러스 제거 프로그램인

V3가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와 버그로 고통당하는 안드로이드 별의 백성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죠.

애플의 폐쇄성은 문제가 되지만 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보안성과 안정성이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b) 다음으로 앱의 퀄러티겠죠. (quality of applications)

같은 앱을 돌리더라도 아이폰은 뭔가 간지가 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안드로이드 앱은 확실히 퀄리티가 떨어졌습니다.

앱의 디자인이나 인터페이스 측면에서도 애플의 앱들은 훨씬 뛰어났죠.


   c) 다음으로 터치감을 들 수 있겠죠.(sensibility of touch)

확실히 아이폰의 터치감은 최고입니다.

다른 폰을 쓸 때에 이게 가장 차이가 많이 나더군요.


   d) 이건 정말 제가 아이폰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인데요. (using iCloud)

바로 아이클라우드(iCloud)입니다. 

아이클라우드도 혁신이란 말을 붙이기가 아깝지 않았죠.

아이폰 뿐만 아니라 아이패드 맥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와 자료들이 연동이 되는 써비스가 바로 아이클라우드인데

애플의 제품을 쓰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중 하나죠.

예를 들면

제가 아이폰에서 찍은 사진이 제 아이패드와 맥캔토시에 자동적으로(automatical)

저장이 돼 있다는 거죠. 

아이폰에 메모를 하나 써도 그것이 그대로 다른 애플 기기에 저장이 되죠.

캘린더의 일정도 마찬가지구요.

핸드폰의 연락처가 날아갈 염려는 이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일이 되어버렸죠.

이 아이클라우드를 잘 활용하면 정말 스마트하게 살 수 있습니다.


  e) 디스플레이와 사진 (retina display & photograph)

     애플의 레티나 디스플레이(Retina Display)는 정말 자연스러운 색상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그 선명함에 놀라죠. 

사진 또한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함께 아이폰을 빛나게 해주는 장점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장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정도 해두죠~!


   f) 인문학과 공학의 그 절묘한 조화? (technique for human)

   인문학은 사람을 위한 학문이며 사람의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사람의 감정과 희노애락에 공감하는 학문입니다.

그 인문학적인 감성과 세밀함이 즉 사람을 위한 기술들이 애플의 기기들에는 녹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애플의 기능들이 차별화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face time(애플 기기간의 무료 영상써비스) 같은 것이죠.

영상통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그것에 대한 요금을 전혀 묻지 않는 애플의 정신, 높이 사줄만합니다.

이런 애플의 인문학과 공학의 조화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4. 그렇다면 iPhone 5만의 장점은 무엇인가? 

주위에서 아이폰 5와 겔노트2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솔직히 겔럭시가 거의 공짜폰으로 헐값에 팔리면서

넘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죠. 

사람들은 자신이 편하고 익숙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그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싸게 나온 겔3나 겔노트로 넘어가지 않고 아이폰을 고수할까요?

이걸 궁금해 하고 이 후기를 통해 자신의 폰을 무얼로 바꿀지 힌트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조언하는 것은 그냥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는 폰으로 가라는 겁니다.

넓은 화면이 좋으면 겔노트로 가는 것이고,

텔레비젼 보기를 원하면 겔3로 가는 것이고,

펜이 꽂아져 있어 쓰는 걸로 메모를 하는 것을 원하면 겔노트로 가는 것입니다.

아이폰은 왜 그렇게 화면이 좁냐 펜이 안달려있고 DMB가 안되느냐?

이렇게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자~ 이 글의 알맹이 입니다~ 사용후기랄까요? ㅎ

아이폰 5만의 장점은 뭘까요?

사람들이 가장 큰 단점이라고 말하는 작은 화면 그것이 가장 큰 장점 아닐까 합니다.

핸드폰은 자고로 무거우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전화쓰려고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집전화를 들고 다니지 뭐하러 전화기를 휴대하고 다니나요?

5의 장점은 작고 얇고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움켜 잡기 편하다는 것입니다.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쥐기 편한 것이 5의 장점이라는 거죠.

이건 무슨 거지같은 멘트냐구요? ㅎㅎ

어차피 동영상 차이나 봤자 크기가 1인치 차이지만 아이패드나 컴터에 비하면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화면의 크기는 그닥 중요한 조건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작은게 좋다는 것이죠.


그다음 장점은 바로 속도입니다.

LTE 속도를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솔직히 와이파이보다 빠르더군요.

와이파이를 켤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폰 4s와 확실히 차이가 난다. 동영상이나 사진을 문자나 카톡으로 보내보세요.

그러면 그 속도차이가 2~3배는 나 보입니다.

겔럭시와 비교를 안해봐서 언급은 못하겠습니다만

이 속도라면 결코 뒤지지 않을 거 같네요.


다른 아이폰과 비교해서 5가 갖는 특징은 뭘가요?

세로로 길어진 화면덕에 더 많은 앱을 배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기존에 4줄이었던 것이 5줄로 한 화면에 더 많은 앱들을 배치할 수 있게 됐습니다.

폴더 안에도 12개가 멕시멈이었지만 이제 16개까지 앱을 넣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밧데리가 생각보다 빨리 단다는 것이죠.

속도가 LTE니 만큼 밧데리속도도 엘티이로 단다고 할까? ㅎ

하지만 사무실이나 차 안에 항상 충전기가 있으니 이것도 별 문제 없어 보입니다.


5. 결론 및 평가

아이폰의 장점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아이폰의 단점도 많습니다. (검색해 보세요^^)

단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아이폰의 스펙이나 하드웨어에 끌려서 이 폰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그 기능과 OS의 장점, 그리고 다른 애플 기기들과의 호환과 연동의 편리함 때문에 아이폰을 씁니다.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굳이 아이폰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가장 안정적이고 사용자 중심의 OS는 아이폰의 OS 임을

자부합니다.

또한 아이폰의 혁신은 멈추지 않을 것을 기대하기에 

아이폰을 당분간은 계속 쓰려고 합니다.



ps.

이 글을 읽고 댓글에 애플빠라고 쓰려고 하시는 그대^^

그렇게 써도 괜찮아요~ 

사실이니까^^

Posted by speramus
일기2012. 12. 12. 06:59

 

단감으로 곶감을 만들지는 않는다.

단감으로 홍시를 만들지 않는다.

곶감과 홍시의 단 맛은 단감의 단맛과는 그 맛의 깊이에서 차이가 있다.

떫은 감을 먹는 사람은 없다.

떫은 감은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처절한 자기변혁(?)을 시도한다.

부드러운 홍시든 쭈글 쭈글 말라버린 곶감이든,

딱딱하고 떫은 자기 전 존재를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과감한 자기 변혁이며 피 말리는 자기 성찰과 연단의 결과이다.

딱딱한 상태 그대로 있으면 감은 결코 떫은 맛을 버릴 수 없다.

자기 몸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만든 대가로 그의 삶에 단맛이 보상되어진다.

찬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은 떫은 감의 자기 변혁에 있어 필수조건이다.

찬 바람이 불어지면 떫은 감은 자연스레 주홍빛으로 성숙되어진다.

말려지든 진홍색의 홍시로 변하든 따스한 햇살은 그의 온전한 변화를 돕는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내 안에 있는 떫은 맛 때문에 나 자신이 너무 싫어 질 때가 많았다.

특히 결혼하고 나의 떫은 맛은 종종 아내를 울상이 되게 만들었다.

이 떫은 맛을 어찌하리~

난 떫은 감으로 태어났으니 내가 싫으면 뱉으라 말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떫은 맛 투성이지만 나의 존재의 부르심 자체는 타자에게 단맛을 흘러 보내는 것이다.( 12:1~3)

나는 하나님의 신성한 단맛에 참여하는 자로 변화되어갈 부름이 있다. (벧후 1:4)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의 떫은 맛을 담고 있는 딱딱함과 싸워야 한다.

딱딱함을 제하고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터득할 때

나는 스위트한 존재로 변혁되어 갈 것이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자기변혁 없이는 이뤄질 수 없음을 떫은 감을 묵상하며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나의 딱딱한 내면과 직면(confrontation)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프뉴마)이시며 하나님의 바람이신 성령님의 터치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한 여름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따사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온전히 나를 내어 맡긴다.

성령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떫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변혁시킬 수 있는 필수조건인 것이다.

나의 딱딱함은 오늘도 그분의 따사로운 사랑으로 부드러워지고 있다~

나는 그분의 유연함과 포용을 통해 그분의 달디단 성품을 본받고 그 성품에 참여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나의 선생이신 곶감 하나를 입에 물고 한 참을 생각해 본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2. 11. 30. 23:28

1. 선교 그 참을 수 없는 즐거움.
오늘 담임목사님과 내년에 있을 선교훈련과 파송선교사님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심장이 심하게 요동하는 것을 감지했다.
선교라는 말만 들으면 왜 심장은 터보엔진을 달고 뛰는 걸까?

2. 성서와 선교의 상관관계?!!!

나의 삶은 성경에서 동력을 얻어 선교를 향해 발사된 로켓과 같다.
그것은 나로호와는 전혀 다르다.
전혀 지체함 없이 날아간다.
발사대는 교회이며 그 엔진의 연료는 사랑이며
엄청난 열을 뿜어대며 목적지인 열방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심장이 내 삶에 공명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3. 아들 이름도 선교로???
솔직히 둘째 이름을 선교(宣交)라고 짓고 싶다.
첫째는 말씀을 전하라는 의미에서 선율(宣律)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사귐(交)을 전하라는 의미에서 선교(宣敎)의 동음이의어인
선교로 하고 싶은데... 아내가 허락해 줄지 미지수다.
어쨌든 선교는 나의 삶의 목적이며 이유이다.
나뿐만 아니라 교회의 그것이기도 하다.

4. 선교에 있어 가장 큰 아킬레스 건, E 녀석!!
그런데 선교만 생각하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나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영어다.
선교와 영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
하지만 나는 영어를 완전정복하지 못했다.
영어는 나의 아킬레스 건이다.
난 이 영어란 녀석을 그냥 말 없이 고이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사뿐이 즈려 밟고 가지 않으련다.
널 뽀개고 말 것이다.
너를 잘게 잘게 뽀개고 쟈근쟈근 씹어 소화하지 않으면
내 성이 차지 않는다.
난 소통을 위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으련다.
넌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5. 30대가 저물기 전에...
영어 뽀개기 1단계 작전으로
이 책 한 권을 샀습니다.
Understanding and Using English Grammar
유명한 책이라는데... 우리 나라의 Man to man 정도 되나보죠?
한 번도 영문법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해 보지 않은 저는
이제 이 책을 통해 영문법을 마스터 해보려 합니다.
저의 작은 몸부림은 계속됩니다.
40줄을 바라보지만 영어, 이녀석만은 제가 뽀개보려 합니다.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선교를 위한 나의 바벨탑 무너뜨리기 프로젝트는 무빙중이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11. 26. 07:24

<인생의 2/3는 광야다??!!>


1. 모세의 삶, 광야 종합선물세트.

어제 예배를 드리며 문득 

모세의 삶의 2/3가 광야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40세까지는 좋았다.

40~80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1차 광야기였다.

80~120세는 온갖 종류의 광야 종합선물세트의 2차 광야기였다.


2. 광야는 삶이었다.

모세에게 있어 광야는 일상이었으며 삶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의 전반기에 경험했던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전에 이미 광야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광야의 삶의 신학을 세웠을 것이다.



3. 원망과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두 가지 반응.

광야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불평과 원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3일만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반응하셨다.

삶과 직결되는 생계형 불평에 대해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셨다.

예를들면 물이 없다고 부르짖으면 반석에서 물이나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을 주셨다.

하지만 욕심에서 나오는 탐욕적 원망과 불평은 징계로 응수하셨다.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로 대표되는 고기 욕심의 말로를 우리는 안다.


4. 온유함이 어떤 사람보다 뛰어났던 비결.

원망과 불평의 장소 광야의 가장 큰 기능은 훈련의 장소라는 것이다.

광야는 믿음의 삶들을 훈련하며 연단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모세는 40년의 미디안 광야삶을 통해 왕궁의 때를 벗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거듭남의 경험을 했다.

광야가 그를 그렇게 훈련시킨 것이다.

광야를 한 번도 깊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

훈련은 원망과 불평의 때를 다 벗기게 한다.

모세는 광야 훈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5. 축제의 광야.

광야는 사람을 단순하게(simple) 만든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광야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람은 단순해진다.

하늘만 쳐다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광야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광야에서 매일 매일 축제가 벌어진다.

아침마다 만나를 주으며 하나님의 공급을 묵상하며 찬양한다.

신발은 헤어지지 않고 옷은 찢어지지 않는다.(신명기 8장)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의 연속이 광야에서 펼쳐진다.

그러기에 광야는 더이상 죽음의 장소가 아닌 축제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6. 광야를 통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와 그림의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그 노래의 후렴 가사가 

"주는 네 광야를 통해 주가 하나님이심을 들어내시리"이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인생의 2/3는 광야다.

오늘도 묵묵히 광야의 삶 가운데 하나님만 붙들며 걷기 원한다.

온유함이 모세보다 더 승해지기를 소망하며...

광야를 묵묵히 맞이한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2. 11. 20. 16:17

<'새 노래(New song)'의 의미>


찬양팀 자매로부터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새노래로 찬양하라"에서 새노래의 원어적 뜻이 그냥 New song 인가요?

라는 질문이었다.

원어를 물어보는 이 당돌함에 일단 박수 ㅎㅎ

이런 질문이 들어와야 나같은 사람은 공부를 한다.


1. 사전적인 의미

시편 33:3절을 펴고 원어 성경을 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히브리 성경과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 둘 다를 편다.

히브리 말로는 쉬르 하다쉬(שִׁיר חָדָשׁ) 라는 용어군요.

하다쉬를 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New(48회), New Thing(4회) Fresh(53회) 사용" 되었군요.(BDB사전)

70인 성경에는  Kainos 라는 형용사가 쓰였는데

"새로운, 사용되어지지 않은, 이상한, 주목할만한" 요정도의 뜻이 있는 단어군요.(Bauer사전)

즉 새로운 노래라는 것은 

예전에 사용되어지지 않은 노래, 신선한 노래, 새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 되어짐을 알 수 있겠죠.


2. 새 노래란 어떤 의미인가?

그렇다면 말 그대로 '새 노래'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시편의 기자가 의미하는 새 노래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새로운 가사의 노래

 2) 새로운 가락(멜로디)의 노래

 3)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부르는 노래

 4) 새로운 내용과 주제로 부르는 노래


이 중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4개의 복합적인 뜻을 내포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네 가지 뜻 중에 4번의 뜻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래라는 것이 가락이 있어야(2번의 뜻) 하긴 하지만

가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락이 담아내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기에

새 노래의 주제와 내용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됨됨이를 찬양하는 것이지요.


3.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노래하라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되어집니다.

이 때 쓰인 단어도 하다쉬이죠.

하나님은 날마다 새롭게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다른 색깔로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의 진실하심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그 진실하심도 날마다 새롭게 우리 삶가운데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제와 내용 또한 날마다 새로울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노래하는 것은 모짜르트가 아닌 이상 어렵지만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자신이 오늘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성실하심에 대해

새로운 내용으로 노래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4. 오늘 새롭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본성을 노래하라

그러기에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것은

오늘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을 높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집니다.

즉 내가 노래하는 내용되신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됨됨이가

내 노래의 새로운 주제여야 된다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5. 추신

저에게 원어로 무슨 뜻이냐? 이런 질문 가끔 들어오는데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공부해야 알수 있는 것이구요.

덕분에 공부는 되네요^^

또 다른 내용 궁금하시면

500원 내고 물어보세요. 공짜는 없습니다 ㅎㅎㅎ

Posted by speramus
일기2012. 11. 20. 10:53

 

1.     탈모가 진행되는 청년 한밤 중에 나를 찾아오다.

    어제 밤에 탈모로 고민하는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는 느낌이랄까요?

간절함과 절박함이 그의 대화에 묻어져 나오더군요.

그 청년은 키도 180이 넘어 호리호리하고 외모적으로 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탈모가 진행되자 멘붕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자신감도 떨어지게 되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 인간의 삶에 있어 머리털은 이리도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죠.

항암 치료를 받고 계시는 여집사님께서도 자신의 탈모된 모습을 보이기 싫으셔서

급구 병원심방을 거절하십니다.

머리털 하나에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2.     인간의 자존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형제님과 대화에서 그가 인정하더군요. “저는 외모지상주의에 빠졌었고, 외모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정말 솔직한 대답입니다.

좋은 외모를 갖고 있으면 좋은 외모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

정말 그럴싸한 명제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외모나 비줠을 갖춘 사람을 흠모하며 부러워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과감히 자신의 얼굴에 칼을 대기로 마음 먹기도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기쁨을 성형외과에서 누리고 있는 현실이랄까요?

자신의 자존감과 가치를 외모에서 찾기에 그러는 것이겠지요.

그 형제도 외모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 왔고, 스타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머리카락의 유실은 자신의 존재감의 유실로 이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스트레스 때문에 요즘 잠이 안 온다고까지 했습니다.

과연 인간의 가치와 자존감은 외모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3.     외모지상주의로부터의 과감한 이별

    저는 외모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아내를 얻으신 분들을 주위에서 종종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또한 그런 류의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급구 부인합니다.

아니 나같이 매력있는 사람이 매력있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저를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봅니다.

그런 류(?)의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정말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고 자존감이 높은 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한 매력에 자신이 도취돼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활기로 가득 차 보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외모와 전혀 상관 없이 말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그 형제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로부터 과감한 이별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외모가 딸리니까 예쁜 여자를 만나기 힘들다는 말은 마귀가 주는 말이라 했습니다.

이미 그 말에는 외모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외모가 예쁜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라는 판단은 외모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데서 오는 결론입니다.

매력과 아름다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미 결혼한 입장에서 얼굴 예쁜 여자와 살래? 아니면 마음이 예쁜 여자와 살래?”라고 묻는 다면 저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결혼에서 살아보니 외모가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극히 적더군요.

그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갈등상황을 여유롭게 받아들이고 헤쳐갈 수 있느냐?

상대의 연약함을 얼마나 용납하고 인정할 수 있느냐의 정도, 즉 내면의 성숙이 중요하더라구요.

그러기에 젊은 청년들에게 제안 합니다.

외모지상주의와의 과감한 이별을 통보하십시오.

 

4.     약점과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명이다.

    저는 머리털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대머리인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약점으로 생각해 본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에 찾아온 청년 같은 사람들에게 저는 좋은 롤 모델인가 봅니다.

목사님은 정말 자신이 넘쳐 보이고, 매력이 넘쳐요라는 말을 합니다.

머리털이 없는데도 이렇게 멋지게 살 수 있는가?

그 약점을 극복하고, 아픔을 극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종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아픔은 그와 동종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사명으로 승화되며 치환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약점 그것을 극복하시고 이겨낸다면

오히려 그 약점이 여러분의 매력의 한 포인트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5.     약한데서 발휘되는 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데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 합니다.” (고후 12 9)

여러분의 약점, 약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리털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 부족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걸요.

오늘도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물 수 있게 만드는 나의 약점들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2. 11. 15. 15:19

지난 9월에 중국 대학생 친구 한 명이 우리 나그네 공동체에 처음 왔다.
예수님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서강대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지난 번 힐링캠프에도 함께 했다.

이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신부님이 언제 시간돼면 우리 같이 언어교환을 해요"

교회에 다닌적 없으니 나를 "신부님"이라 부른다!
나에게 신부님같은 포스가 느껴져서일수도...ㅎㅎ
스님이라 안불러줘서 감사하다.
그래도 신부님이란 호칭을 처음 듣는 거라 기분이 묘하긴 하다^^

오늘 이 친구와 또 다른 중국 친구와 언어교환하러 만나기로 했는데...
로만칼라 와이셔츠를 입고 가야하나?? ㅎㅎ
은근 고민스럽다ㅎㅎㅎ

그리고 10년전 중국 감숙성 란주에서
중국 대학생들과 열심히 만나서 전도도하고 이야기 나누던 때가 새록새록 생각난다.
그 때로 되돌아 가는 거 같아 기분이 좋다.
언어교환이라~ 
서서히 숨을 거둬 가고 있는 나의 중국어에 생기를 불어 넣을 때가 되었구나^^

쥰뻬이 하올러마?? ^^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2. 11. 13. 09:4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1. 캄캄한 밤길을 걸어 보셨나요?

빛이 없는 깜깜한 밤 길을 걸어 보셨습니까? 

저는 초딩 중딩 시절에 학교에 다녀오면 항상 밭으로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러 갔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시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시골 길에는 전등도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늘 정말 깜깜한 밤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치는 사당이 있었어요. 

거기를 지나칠 때는 어린 마음에 정말 무서웠죠. 

뭔가가 막 튀어 나올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고성방가를 내며 빛의 속도로 뛰기 시작합니다. 


2. 보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두렵지 않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 화장실에 가다 어두운 방을 걸어보기라도 했을 겁니다. 

어두우면 사람이 본능적으로 두려워 집니다. 

무엇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뭐에 부딪힐까 알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내 눈에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빛이 비춰지면 보이게 되고 무엇이 있는 지 알게 되죠. 

알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즉 빛은 두려움을 제거하고 참 자유함 가운데로 우릴 인도하죠.


3. 초막절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님은 7장에 이어서 초막절이라는 행사 중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를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되새기는 절기이죠. 

첫째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죠. 

둘째 모세가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영광가운데서 율법을 계시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계시 (revelation)을 기념하는 것이죠. 

하나님 시온산에서 영광가운데  어두운 인간의 세상을 비추실

율법을 주셨으며, 그 계시를 받고 모세는 내려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기념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성전 뜰에 불을 켭니다.

불기둥과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성전의 뜰에 불을 켜서 비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이 켜져 있는 성전 뜰에서 지금 이 설교를 하고 계신 겁니다.


4. 나는 세상의 빛이다. (Ego sum Lux mundi)

예수님은 담대하게 선포하시죠.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는 너희를 불기둥으로 너희의 캄캄한 인생길을 인도할 수 있는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모세가 율법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나는 빛이 되어 너희로 보게 할 것며(계시) 

너희가 보게 될 때 그 때 너희는 영적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어둔 세상을 비춰주기 전에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빛되신 예수님 어둠을 비추실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코 멸망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영광의 구름 기둥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것이지요.


빛되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모든 두려움 벗고, 참 자유를 맛보실 겁니다.

빛되신 주님은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결코 멸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비추소서~ 주님~ 내 어둔 영혼을 ...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2. 11. 11. 18:51

  1. 1. YIC 그 생소한 이름

    제가 염산교회에 처음 왔을 때, YIC YIC 그러길래 저게 뭐지? 궁금했었습니다. 생소한 이름 YIC, 여러분의 표정도 보아하니 듣도 보도 못했다는 표정이군요^^ Yumsan International Church 의 약자라고 하네요. 염산 국제교회가 YIC더군요. 염산국제교회라는 이름으로 중국, 필리핀, 베트남, 네팔 등의 외국인들이 공동체를 이뤄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모여서 예배하는지는 좀있다 영상을 통해 나누도록 하구요. 오늘 말씀은 이 YIC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숙제를 던져주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한국에는 텃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텃세란 말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말합니다. 한국은 예부터 단일민족 국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좋게 작용하면 좋지만 다른 민족들 입장에서는 되게 배타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기 쉬웠습니다. 텃세가 심한 민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제 3세계 사람들의 한국에서의 차별과 그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제가 10년 전에 시골에서 서울 구경하러 올라와서 명동성당을 보고 싶어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동성당 앞에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과 폭력을 금해달라는 시위현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천막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운동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권적인 행위의 근절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인 이슈가 됐었고, 많은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코미디 프로에서도 폭력적인 한국 사장님들을 비꼬기 위한 캐릭터들도 등장했었죠.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기억 나십니까? 여러분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제가 재연을 해 드려 보겠습니다.


하루는 사장님 갑자기 막 때렸어요
왜 때리냐고 했더니 생일방이라며 계속 막 때렸어요
전 너무 아파서 그만하라고 했더니
사장님 작은 마음의 표시니 거절하지 말라며 계속 막 생일방을 줬어요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월급 올려달라 하면 생일방 줍니다
몸 아파서 일 못하겠다 하면 생일방 줍니다
저 1년에 생일 한번 있어요
왜 자꾸 사장님 매일 생일빵 줍니까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그 당시의 우리 사회를 비꼬는 풍자 코미디극 이였죠. 10 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외국인 그것도 제 3세계 외국엔들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변했을까요? 크게 변한 거 같지 않습니다. 지난 달에도 우리 YIC 형제 한 명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사장님이 자신이 1년 가까이 일한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불법 채류자이기 때문에 신고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거랍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저랑 신대원을 같이 다니던 윙풍남이라는 베트남에서 유학온 전도사가 한 명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기숙사 저의 옆 방에서 살았는데 정말 시끄러웠어요. 전화통을 계속 붙들고 통화하는 소리 때문이었죠. 맨날 전화로 베트남 말로 상담전화를 받는데, 한국 사장님들이 일 시켜 놓고 돈을 안주는 베트남 동료들의 전화라는 거였습니다. 그 친구도 늘 사장님 나빠요를 입에 달고 살았죠. 

한국 남편에게 국제 결혼 온 여자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남편과 시댁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느 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염리동도 도심 속의 다문화 동네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제 3세계 외국인들이 염리동으로 모여 들고 있는 것이죠. 이 외국인들이 아파트촌으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나마 시내 중심에 염리동 같은 동네가 있어서 이분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거죠. 어느 새 우리 가운데로 가까이 오게 된 이방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하고 있나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1. 2.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

여러분 텃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 가운데서도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문제였나 봅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억압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만 탈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 12장 38절에는 잡족과 동물들도 그들과 함께 탈출했다고 말합니다. 잡족이란 섞여있는 군중이란 뜻인데요 한 마디로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외국인들도 그들 사이에 섞여서 이집트를 탈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외국인을 상당히 억압했었나 봅니다. 적어도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다른 외국인들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할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아예 율법 조항으로 못박아 놓은 것이지요. 


우리 개역 성경에는 거류민이라고 나와 있는 데요,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이 거류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게르’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꼭 알아 두어야 할 단어 중 하나입니다. 게르는 히브리어로 나그네, 거류민, 이방인이란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게르였다라고 합니다. 나그네였다는 것이죠.


33절과 3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외국인들에 대해 3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 외국인들을 억압하지 말아라~ 노동착취를 하지 말고, 과도한 의무를 부여하여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자국민처럼여겨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대하라는 겁니다. 조금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조금 파격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외국인들, 특별히 신앙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그들을 외국인들로 여기지 말고 자국민, 원주민들로 여기고 대하라는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명령은요 한 술 더 뜨십니다. 그 외국인들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저는 이 사랑하라는 히브리 동사 아하브 동사가 쓰여진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하브라는 동사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성지 답사 갔다 오신 분들이 사해의 진흙으로 만든 아하바라는 비누를 사가지고 오셨던데 아하바라는 뜻이 바로 사랑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사용됐던 단어가 바로 아하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쓰인 사랑하다라는 뜻의 아하브가 지금 나그네 게르들을 대상으로 쓰인겁니다. 게르를 사랑해라.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그릇의 크기에 저는 탄복합니다. 게르를 압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너희 국민으로 받아들여~ 아니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해 주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윷놀이 할 때 윷을 담아 던지는 작은 종지 그릇만한 스케일인데 하나님은 아예 큰 저장 탱크와도 같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말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는 겁니다. 저만 충격을 받은 것 같군요.


여러분들은 여기 참석하신 YIC 의 형제 자매님들이 외국인들로 보이십니까? 우리 나라사람으로 여겨지십니까? 솔직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이들을 외국인으로 보았지 우리 나라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게르들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를 보십시오. 이집트 땅에 있을 때 너희도 게르였기 때문이다. 너희도 나그네였기 때문이야. 너희가 나그네로서 당한 그 설움을 알잖아~ 이 사람들이 당할 아픔을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게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도 게르였다. 옆에 사람에게 고백해 주세요. 당신도 게르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염리동 토박이다. 적어도 우리 조상때부터 100년 이상 염리동에서 살았다. 라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모두 여기에 굴러온 돌들이 아니십니까? 나그네의 설움을 아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염리동에서 나그네의 설움을 당하고 있는 우리 외국인 형제 자매들의 사정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페러다임을 바꿉시다. 이분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우리 조국의 국민이며, 우리 형제요 자매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염산국제교회 YIC는 우리 염산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게르인 우리 외국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손짓이며 몸부림인 것이지요. 그래서 YIC는 이제 그냥 주일에 저 구석에서 따로 모이는 외국인 모임 수준이 아니라 우리 아들 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공동체, 게르 공동체인 YIC는 정말 염산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며 프라이드입니다. 게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귀한 도구가 바로 YIC입니다. 단순한 영어 이니셜인 YIC라는 이름 대신 나그네 예배, 나그네 커뮤니티, 게르 커뮤니티, 이런 의미 있는 말로 이 모임의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요?


YIC에 오시는 70%의 사람들이 불신자들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대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들 중에 YIC 예배 오기 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중국 한족들은 전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한족 3명 조선족 교포 1명이 세례까지 받았잖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늘에서는 지금 잔치가 벌어진 것이지요. 이 분들이 주일 한 번 YIC를 통해 신앙이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막노동을 통해 돈 벌러 온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한국인 남편 만나서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 온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 나그네 공동체 YIC는 정말 귀한 모임입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한 번도 예수님을 믿어 보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네 명의 초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분들이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히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 YIC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주십시오. 우리는 봄 가을에 힐링캠프라는 이름으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재정과 기도로 후원해 주시면 저희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예배 후의 한글교실,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해서 나누는 친교모임도 있고 함께 큐티를 하는 큐티 모임등 다양한 소그룹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YIC는 더 이상 염산에서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그네였으니….나그네된 우리의 외국인 형제 자매들을 더욱 사랑합시다. 이것이 염산교회를 향한 YIC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