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2012. 12. 19. 06:56

<누가 우리를 위하는가?>


기독교인들 중 상당 수가 대통령 후보를 선택할 때

'누가 우리 기독교를 위하는가?'를 고민한다.

어떤 후보가 친기독교 정책들을 펴가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 문자 메시지는 어제 밤 10시에

광주에 있는 대학교때 선교단체의 후배에게 받은 문자메시지다.

'어떤 인물이 되면 기독교 학교의 신앙교육을 ㅂ 후보는 장려하지만

ㅁ 후보는 못하게 한다... 중간생략

다른 것 볼필요없이 ㅁ후보가 대통령되면 기독교 ㅇㅊㅅ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중하고 결탁하여 기독교 억제 정책을 쓸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가?

우리 기독교가 신앙을 지켜가기 힘들어지고 전도하기 힘들어진다고 느끼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가는 위기감을 금할 수 없다.

기독교의 안위와 번영을 보장해주는 당과 후보와 결탁하여

어마어마한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질해 버리지 않는가?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순진하게 '장로'라는 이유로 뽑아주었던

대통령들이 우리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무늬만 기독교인이지 그들이 폈던 정책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많았다.

경쟁을 조장하는 세상을 만들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집없는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물을 뿌려대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조화하고 공생하지 않고

오염시키고 파괴하는데 앞장서지 않았던가?



기독교인으로서

'누가 우리를 위하는가?' 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누가 백성을 위하는가? 누가 국민을 위하는가? 누가 가난한 자를 위하는가?

누가 억눌린 자를 위하는가? 누가 갇힌 자를 위하는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예수님이 누가복음 4장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를 기억한다.

주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주의 은혜의 해를 

(희년 공동체의 기쁨, 즉 희년에 나눔을 통해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기쁨)

전파하는 것" 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한마디로 '십자가' 이다.

십자가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삶이며 인류를 위한 삶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의 이익을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

가난하고, 포로되고, 병들고, 억눌리고, 갇히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씨름하는 자들을 위해 오셨다.


나의 대통령 후보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누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의 궤적과 근접한가?" 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그의 인격과 삶을 결정한다.

그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을 살았냐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예수님과 유사하다면 나는 그를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나의 집단의 이익이 아닌

백성과 국민의 이익과 잘됨을 위한 살아 줄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기독교적이지 않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누가 기독교를 위하는가? 보다

누가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누가 예수님의 삶의 궤적에 가장 근접했는가? 이다.


교회는 정부의 보호를 먹고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고난과 박해를 먹고 성장해 왔다.

로마의 박해 가운데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켰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종교로 인정되면서부터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교회에 적대적인 당과 후보를 무턱대고 찍으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라.

'누가 교회를 위하는가?'가 우선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교회의 지도자인 총회장을 뽑는 선거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돌보고 나라 살림을 책임져 건강한 나라를 만드는 나라의 지도자다.

그러기에 누가 교회를 위하고 기독교를 위하느냐보다

누가 나라를 위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누가 교회의 설탕으로 우리 기독교를 달콤하게 해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상과 백성의 소금으로 반드시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