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내가 있는 이곳에 왜 위치해 있나를 알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이민자들의 삶과 그들의 자녀들의 삶에있어 정체성이란 호흡과 같은 것인 듯합니다. 왜냐면 주변의 주류 사회의 문화와 조건들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익숙한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정체성이 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회나 이민자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주변화(marginalized)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지는 이민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이죠.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읽어 보면 ‘노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이 소설 자체가 재일 조선인들(在日朝鮮人, 자이니치 조센진)에 대한 이야기죠.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마주한 신분적 한계와 차별은 소설의 주요 주제입니다. TV 드라마 ‘파친코’에서는 부각된 인물이 아니지만 소설에서 ‘노아’라는 인물은 매우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노아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수재 청년으로서 조선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합니다. 조선인으로 자신이 당하는 차별을 받아들이면서도 신분상승의 높은 벽에 괴로워합니다. 게다가 자신을 키워주셨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던 야쿠자 조직의 한 남자가 실제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노아는 그 버거운 진실을 감내하지 못하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 버리죠. 16년 동안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살아온 노아에게 엄마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겨누고 생을 마감합니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숨기고 일본인으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삶을 흔들어 놓은 것은 그의 정체성의 뿌리였습니다.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 소설은 우리에게말해 주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민 세대들이 겪는 차별과 냉대 그리고 이질감 가운데 바른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노아는 조선인이라는 뿌리로부터 억지로 뽑혀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한계를 인식하고 끝내 뿌리가 뽑힌 채 시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정체성이 바르게 서 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세상 주류 사회와 성경의 가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표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와 내 가정을 미국 땅에 보내셨고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확실한 목적의식과 정체성이 우리 삶을 이끌어 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뿌리둘 땅을 알고 깊게 뿌리내린 나무만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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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어느 날에 소설 ‘하얼빈’을 읽었습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접했던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오래전부터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자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서른두 살의 젊은나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에게 빚진 마음에서 소설을 쓸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무직이었고 포수였으며 젊은 청년이었다는 것에 모티브를 삼고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일주일 전부터의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돋보입니다. 한 젊은이가 처자식을 뒤로하고 연해주행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던 그비장함을 마주하며 제 자신이 참으로 초라해졌습니다. 높은 뜻에 자신의모든 것을 걸고 투신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기만 했습니다. 그의 거사는 무모하기만 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본적도 없었습니다. 신문 스크렙으로 얻은 이토의 사진 한 장을 들고 그는 하얼빈행 열차를 탄 것이었습니다. 하얼빈 역에 당도한 이토 일행 가운데 누가 이토인지 안중근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군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이토를보고 그의 타겟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뜻을 굽힐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준비한 물맷돌 다섯개처럼 그의 탄창에는 일곱 발의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고 세 발이 정확히 이토의 급소를 관통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부활절 전날 그는 형장의 이슬로사라집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을 보니 10월 26일이더군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날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기념일이 10월 31일이니 얼추 비슷한 날에 안중근은 거사를시행했습니다. 안중근과 마틴 루터의 삶이 다른 결이긴 하지만 어두운 시대 상황을 의롭고 올곧게 돌파하고 타개해 보려는 노력에 있어 두 사람의시작점은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시대의 부조리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그 부조리에 불편해하고 어색해 하며 거슬러 개혁하려는 시도에서 둘은닮아있어 보입니다. 그 둘의 의로운 행동은 불씨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동기부여를 주었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발점이 되어 스위스의 즈빙글리, 프랑스의 쟝 깔뱅, 스코트랜드의 존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거대하고 왜곡된 종교 집단에 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안중근 또한 실의에빠진 조선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겨주었고 많은 젊은이들로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하였죠. 우리는 지금 어떤 결심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하는 걸까요? 어두운 시대를 탓하지않고, 내 안에 거짓되고 헛된 욕망을 분별하여 떨쳐내고, 진리를 실천하고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개혁을 만들어 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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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브레드 이발소”라는 만화를 즐겨 봅니다. 이 만화에서 에피소드가 끝나면 “디저트 이야기”라는 것을 짧게 보여주는데, 우리가 즐겨 먹는 디저트들의 유래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소개합니다. 이번 주에는 치즈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기원전 6000년 경 아라비아에 카나나라는 우유를 파는 상인이 살았었죠. 그는 양의 젖을 짜서 가죽 주머니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하루는 양의 젖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이웃 나라에 팔 요량으로 먼 길을 떠났죠. 그는 사막을 지나며 모래 폭풍도 만나기도 하고, 전갈에게 쫓겨 도망치기도 하고, 사막의 뜨거운 햇살에 갈증을 느끼며 겨우 이웃 나라에 도착했답니다. 그런데 우유를 팔기 위해 가죽부대를 열었더니 우유는 안 나오고 웬 딱딱한 덩어리만 나와 무척 당황했죠. 그런데 이웃 나라 사람들은 고소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나는 이 마른 우윳덩어리에 호기심을 느꼈고 우유보다 더 많은 돈을 쳐주었죠. 카나나는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돌아 올 수 있었죠. 사막의 높은 기온과 흔들림이 가죽 부대 안의 우유의 지방질을 굳게 만들고 발효되게 만들어 치즈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지만 그 시련으로 말미암아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세옹지마라는 사자성어처럼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섣부른 실망이나 자만은 지혜롭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자, 모두 절망했지만 장소와 국경을 초월한 랜선의 세계가 열렸죠. 물론 온라인의 만남이 대면을 대체할 수 없지만 온라인을 통한 만남들은 우리의 시간과 번거로움들을 많이 덜어주었죠. 우리의 삶을 제한되게 만드는 여러 시험과 한계들을 통해 우리들은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결과물들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오 히려 제한적인 상황과 한계들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것들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헨델의 곡으로 알려진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첫 소절은 “도시라솔 파미레도”의 단순한 계이름의 조합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제약 안에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헨델은 만들어 냅니다. 누에고치는 자신을 옭아매는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 명주실을 몸에서 뿜어 내어 비단의 재료를 만들어 냅니다. 때론 우리 삶을 흔들고 답답하게 만드는 고난과 제약들을 통해 하 나님은 우리의 삶에 창조적인 열매들을 맺히게 하실 것을 기대하면 좋겠 습니다. 지금 너무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시련을 감사함으로 잘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흔들림과 시련을 통해 우리 인생은 치즈보다 더 고소하고 맛깔난 인생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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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지난 주에 가을의 정취를 깊이 느꼈다는 말이 무색하게 로체스터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이곳 미네소타의 겨울의 혹독함을 10월 중순의 첫눈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봅니다. 집에 설치돼 있는 파이어 플레이스(fire place)를 처음으로 켜보았습니다. 따스함이 좋았습니다. 파이어 플레이스의 가스불을 보고 있노라니 에너지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세계의 현실이 자연스레 겹쳐 보이더군요.

그야말로 세계는 에너지 전쟁터가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들의 연합체인 OPEC과 그외의 산유국들이 함께하는 OPEC PLUS는 원유 생산과 판매를 줄이겠다고 나오자 기름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발트해를 통해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에 어떤 인위적인 타격이 가해져 가스가 유출되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는 부인하지만 러시아가 유럽의 기간시설을 고의로 훼손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수작이 아닌지 유럽 국가들은 의심합니다. 겨울철을 앞두고 유럽의 국가들은 에너지 문제 때문에 긴장하며 그 공포는 더욱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 지구 반대편 어느 곳에서 벌어진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대혼란 가운데 처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문명이 나아갈 바와 지향해야 할 바를 알려줘야 할 책임이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 대주교는 설교를 통해 러시아의 청년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병역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은 남을 위한 죽음이기에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를 방불케 합니다. 권력과 욕망에 사로잡힌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을 때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종교가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전락될 때인류문명은 표류할 수 밖에 없고 혼돈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내 자아(ego)의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때 화해와 사랑, 자비와 긍휼, 나눔과 연대가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나치의 권력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독일의 교회 지도자들은 1935년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선언>이라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후의 세대에서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라고 불렀습니다. 욕망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지구촌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며 따라가야 할까요? 우리의 참되고 진실한 고백을 통해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른 길로 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터가 되어버린 세상과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안에 주님의 평화가 온전하게 임하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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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미네소타에 와서 가을의 정취를 오랜만에 느껴봅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 매우 잘 어울리는 계절인 듯합니다. 노랗고 붉은 단풍이 참으로 오랜만이고 반갑기까지 합니다. 나무는계절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아서 이파리에 보내주던 영양분과 수분을 멈추게 하여 단풍을 만들고 이파리를 떨군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때를 알고 버릴 줄 아는 나무가 부럽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둘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도종환 시인의 “다시피는 꽃”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시인은 깨끗히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음을 노래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찬란한 부활의 봄을 맞는 비결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열매와 이파리를 버리는 것이라는 걸 나무는 아나 봅니다. 비움이 없이 채움이 있을 수 없고, 버림이 없이 살림도 없다는 것을 왜 나만 잘 모르는 걸까요?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던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신 우리 주님은 찬란한 부활로 다시 그 생명을 보상 받으셨죠. 떨어지는 낙엽 앞에서 겸손히 주님을 느껴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워내야할지돌아보게 됩니다. 가을 단풍처럼 화려하진 않더라도 내게 있는 귀한 것을 돌려드려야겠습니다. 가을 열매처럼 맛깔스럽진 않더라도 내 삶에 맺은 작은 열매들을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더 갖기 위해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며 나누는 삶이여야겠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서리가 내린 걸 보니 겨울이 오나봅니다. 내년 봄날까지 다들 강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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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한 목장 모임에 참석했는데 나눔 도중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있는데 양식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이 던져졌다.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거리 이야기들이 많은지 주기도문의 양식의 의미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간다. 실제적으로 많은 필요들을 느낀다. 그 모든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 밥이자 빵이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날마다 우리 실존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인정을 의미한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육신적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배고픈 이들을 동정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오병이어 기적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며 배고픈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배고픈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에서 나오는 기도이기도 하다.

 

셋째, 일용한을 '충분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분한 양식을 구하되, 넘치거나 과하게 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자족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수세기 전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기도에서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빵 같은 기본적인 것이 전부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놀란 바 있다.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가축 떼도 비단 옷도 아니다. 높은 지위도 기념비도 조상(彫像)도 아니다. 다만 빵이 전부다. "라고 했다.

 

넷째, 나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란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빵은 공동체적 산물이다. 빵은 혼자 힘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Iowa의 농부들, Twin City의 제빵업자들, Rochester의 배달 트럭 운전사들, 빵은 이들 모두의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는 빵이 공동체적 산물임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빵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성 바실(St. Basil the Great)은 한 설교에서, "나의 소유물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했다. 특히,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들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들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들은 헐벗은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금고와 계좌에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는 설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고 육체를 가지고 삶을 영위해 가야 한다. 또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하고 실행해 옮겨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그러기에 육체를 대표하며 육체를 상징하는 양식을 향한 태도와 양식에 대한 자세가 우리의 신앙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렇게 많은 먹거리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나눌 것인지에 대해 지대하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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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큰 아이와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녀석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자 사뭇 놀랐다. “아빠 난 정말 어렸을 때 세상이 천국인 줄 알았어.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됐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 근데 내가 커보니까(지가 얼마나 컸다고^^) 세상이 그때랑은 달라 보여. 난 걱정하는 것도 많아졌고 욕심도 많아졌고 두려워 하는 것도 많아진 것 같아. 세상이 천국 같지는 않아.” 이렇게 인생을 깨달아 가며 철이 드는가 보다 하며 웃어 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녀석도 이제 어린이의 옷을 벗어가고 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막내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지러지게 웃을 때가 많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과 상상력을 접할 때 나는 놀란다. 가끔 아이들과 개그콘서트를 본다. 한번은 한 개그맨이 어떤 드라마에서 조선의 왕이 한 말을 가지고 페러디를 한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그걸 보더니 한 글자만 바꿔서 자기만의 페러디를 즉석해서 만들어 낸다. “지ㄹ하고 살빠졌네”. 엥? 이건 뭐지? 근데 생각해보니 너무 웃기다. 야 이런 다이어트 방법이 있으면 정말 최고겠는걸. 하하하.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존재들인가 보다. 큰 아이의 말처럼 그들은 아마도 천국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랬나? 예수님도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들어가는 거라고.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봄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읽으며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어린이 독서지도사인 저자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것들과 에피소들을 소개한 에세이인데 우리가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와 그들의 순수한 상상력에 감동하며 읽었다. 한편으로 내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딱딱해져 버렸는지 그들의 말랑함이 나를 자극하는 시간이었다. 교회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 어떠해야 할까? 교회 학교, 이 명칭부터 너무 딱딱하다. 그 말랑한 녀석들에게 딱딱한 교리 교육으로 정형화되고 틀에 짜여진 신앙인을 찍어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이야기는 말랑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그들을 가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상상력이라는 연료를 가지고 비상하게 한다. 우리도 한 달에 한 번은 이 아이들과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 예배때마다 우리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국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들로 빚어져 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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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 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 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 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의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고 가르치시는 

어머니의 두렐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 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정일근의 시,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릴적 둥근 밥상에서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열 두 명의 대가족이 두 개의 둥근 두레밥상에 나눠 앉아 밥을 먹곤 했죠. 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둥글게 둘러 앉아 밥상을 나누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둥근 달이 뜨는 추석인데도 어머니의 밥상에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밥상에 대비해서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으로 묘사합니다. 어머니의 밥상이 누구나 환영해주고 누구나 나눔에 참여하는 평등하고 호의적인 밥상이라면,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라는 뜻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들의 밥상으로 인간미를 잃어버린 약육강식의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밥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글과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어머니의 둥근 밥상이 그리워지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둥근 하나님의 두레밥상이어야 합니다. 이 두레밥상에 모이면 어느 누구 하나 천한 이가 없고 모두가 귀하고 소중해집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 신비한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자기 몸을 뜯어 먹으라 내어 주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몸을 먹습니다. 함께 Communion에 동참하기에 우리는 한 Community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두레밥상에 둥글게 모여 사랑을 나누는 한 식구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한솥밥(communion) 먹는 식구 아이가?” 다하나 밥상공동체에 새식구가 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0. 31. 16:17

<담임목사님께서 교역자 회의때 나누신 목사의 자세>

어제 있었던 노회 목사안수식 후일담으로 목사님의 목회관을 두서 없이 읊으신 것을 정리해 보았다. 
새겨 볼 말이 참 많다!!

1.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니다.
목사는 직책이나 직임이나 신분이 아니다. 
목사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기에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들의 종으로 휘둘리지 말아라.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어떤 사역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이다.

2. 목회자끼리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람으로 도와라.
서로를 목사로 존중하라.
(제발) 선후배 따지지 말아라. 
회사문화처럼 위계질서 따지지 마라.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람으로 서로를 도와라.

3. 줄서지 말아라.
선후배 따지면서 줄서고 그 연줄로 옮겨다니고 그런 거 하지 마라.
난 동창회 동문회 이런 거 참석 안한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4. 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말라.
콩 한 줌을 받더라도 팥 한 줌으로 갚지 못하면 말로라도 감사를 표현하라.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고 안주면 서운한 마음만 갖게 된다.
임택진 목사님께 배운 것이다.
교인들의 애경사 등의 개인적인 인사는 하지 않는다.
그래야 교인도 부담이 없고 자기도 안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자기 자녀들은 교회 직분자로도 세우지 않는다.
교인들이 목사 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목회자 자녀가 끼면 그런 것도 못하잖는가?

5. 목회자의 최고의 서비스는 기도이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의 표현은 기도이다.

6. 사모님들에게 잘해라.
사모들은 평생 평신도다. 집사 권사로도 불리지 못한다.
잘 해드려라.
자기 아내에게는 사모라고 부르지 말아라. 아내라 불러라.
님짜를 붙이지 않을 꺼면서 왜 사모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모님에게 잘해라!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