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4. 9. 15. 07:44

<창세기 43장 묵상 - 빨래판 >

삶은 쇠수세미처럼 너무나 거친데, 삶은 빨래판 처럼 너무나 굴곡진데 거기서 만들어지는 인격은 어찌 이리 부드럽고 매끈할 수 있을까?

아~ 삶과 인격은 그렇게도 다른 모양새를 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인간다움이 물씬 풍겨나오는 본문입니다.
가족을 그리워 하며 가족을 향한 애정과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요셉의 모습이 참 인간답습니다.
유일한 동복 동생인 베냐민을 보자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한 사람 요셉의 모습입니다.
20년 넘는 삶의 질곡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요셉의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생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기준으로 인간다움이란 눈물 흘릴 줄 아는 것입니다.
내 아픔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이는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세월호가 정치적인 이야기로 흐르는 것이 참 가슴 아픕니다.

어쩌다 자식 잃은 아비와 함께 우는 사람들이 종북세력이라 치부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까?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려주며 함께 잊지 않겠다고 금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정치적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약속했잖나요? 잊지 않겠다고... 우는 자와 함께 울겠다고...

저는 정치적인 노선과 상관 없이 여전히 울고 있고 해결되지 않는 자식들의 죽음의 의혹을 풀어 달라고 읍소하는 유가족들과 함께 우는 것이 참 인간적인 자세라 생각합니다.


청소년 시기의 요셉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건방지게 자신의 꿈을 형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까지 말하며 뻐기던 아이였습니다.
안하무인이었죠.
그런 그가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면면엔 친절이 베어 있습니다.
그의 따뜻한 환대는 형들을 당황케 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는 요셉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와 접대가 너무나 이상하고 어색한 상황이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그들을 다시 이집트로 보내며 했던 축복의 말을 기억했을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14절)"
여기에 사용된 은혜라는 단어가 '라하밈'이라는 단어입니다.
'동정(compassion)자비, 긍휼, 불쌍히 여김' 등의 뜻으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요셉의 삶에는 바로 이 은혜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친절했고, 자비가 넘쳤으며, 인애와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울줄 알았고, 함께 울어줄 줄 아는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통과했던 삶은 너무나 거친데 그의 인격은 어찌 이리 고매하며 부드러울 수 있을까요?
빨래판이 거칠 수록 빨래의 때가 더 잘빠지는 원리일까요?
숯돌이 거칠수록 뭉툭한 칼이 더 깍이고 다듬어지는 원리일까요?
거칠고 질곡이 있는 인생을 통과하며 요셉의 인격은 너무나 많이 다듬어져 있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군대 시절에 정말 많이 깍이고 담금질 되고 두들겨지면서 다듬어져 갔던 시기였습니다.
참 거칠고 메말랐던 광야와 같은 시기였지만 제 삶에 많은 연단과 인격의 훈련을 받은 시기였습니다.
우정을 배웠고 사랑을 배웠던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저는 사역자가 되면서부터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 있으면서 그러한 거친 삶의 현장에서 동떨어져 온실 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억지로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거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광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도전이 되는 아침입니다.
그 거칠고 메마른 삶의 열매가 쓴 열매가 아닌 달디단 은혜의 열매로 맺혀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빨래판 위에서 내 인격의 더러운 땟국물이 쪽쪽 빨려 나오고, 피존보다 더 진한 아름다운 인격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길 소망해 봅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