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7장 묵상 -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
기근 때문에 피신하는 인생, 풍요를 좇음도 아니요 잠시 환난을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야하는 인생의 초라함이란…
야곱은 그렇게 이집트를 향해 떠난 달구지에 몸을 싣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기근 때문에 애굽이나 그랄로 이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신데 야곱의 애굽이주는 허락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상황과 상관 없는 기계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상황에 적합한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안식일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도 고치고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궈 먹은 제자들을 변호하시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율법의 해석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갖는 하나님을 향한 오해와 잘못된 이미지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덥수룩게 수염을 길고 팔짱을 끼시고 무서운 눈으로 지켜보는 완고한 감독관이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매우 유연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한가지 메뉴얼대로 대하시지 않고 각 사람에게 맞는 맞춤형 메뉴얼을 따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긴 노정 끝에 요셉이 이집트의 고센 땅에 도착했고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 극적으로 해후합니다.
요셉은 형들 중 5명을 선발하여 아버지와 함께 파라오를 알현합니다.
파라오가 처음 질문한 것은 ‘너희 생업이 뭐냐?’였습니다.
요셉을 생각한 배려 깊은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기근의 때에 어떻게 먹고 살게 해 줄 것인가 고민하는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에서 이집트 땅에서 살아가는 야곱과 아들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들은또 그(바로)에게 말하였다. “소인들은 여기에 잠시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소 떼가 풀을 뜯을 풀밭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들이 고센 땅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표준 새번역, 4절)”
잠시 머무르려고에 밑줄을 쫙 긋고 별표를 쳐야겠죠?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거류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거류하다고 번역된 단어는 ‘구르’에서 나그네라는 말인 ‘게르’가 나왔습니다.
지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을 ‘나그네’인 ‘게르’의 정체성으로 이 땅에서 살 것이라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구절 인상 깊은 고백은 파라오 앞에서 자신의 삶의 긴 여정을 술회하는 야곱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게르) 길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
야곱의 삶은 말 그대로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의 몸을 맡긴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런 고백은 우리네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고백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야곱의 인생가 별반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그네 인생이며,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삶 아닌가요?
비록 이 땅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곳 저곳에 머무는 삶일지라도 야곱의 인생의 나침반, 영혼의 나침반만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종을 직감하고 아들 요셉을 불러 마지막 당부를 하며 맹세를 받아 냅니다.
자신을 고향이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의 초라한 최후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죽을 권리도 나그네에게는 없었나 봅니다.
단지 그가 소망하는 것은 고향 땅,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네 인생의 나침반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마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록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갈지라도 영적인 나침반은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는대로 우리를 맡기며 걸어가는 삶 살기 원합니다.
이렇게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 되어질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