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없다면 우리 일상은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 보셨나요? 습관이 없다면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순간이 결단이라는 것에 봉착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칫솔질은 앞니부터 할지 어금니부터 할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할지 왼손으로 할지, 우유는 냉동실에 둘지 냉장실에 둘지,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행하고 결정하는 습관적인 행동들이 모두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면 우리 삶이 힘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습관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뇌는 우리가 행하는 수 없이 많은 행동들을 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면 뇌가 너무 피곤해 지는 것이죠. 그래서 뇌는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행동 기저핵이라는 뇌의 특정 부분에 저정을 해놓고, 그 상황이 벌어지면 생각하여 결정하는 대신에 저장해 두었던 행동양식을 꺼내서 반응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것이 뇌와 관련된 습관의 비밀이죠.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나 태도 또는 자세가 습관이 되려면 뇌가 생각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만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 것이죠. 테니스 같은 운동을 배우면 코치가 계속 공을 피딩해주면서 한 동작을 무한 반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일정한 동작들은 습관적으로 수행되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란 뜻을 가진 ‘habit’은 원래 유럽의 수도승들이 입었던 복장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라틴말 ‘habitus’에서 유래된 건데 ‘상태, 스타일, 연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수도승들은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통일된 복장을 입게 됩니다. 수도회마다 수도복의 색깔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유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수도복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죠. 베네딕토 수도회는 까만색 해빗을 입기에 ‘블랙 몽크’라 불리웁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갈색이나 잿빗 해빗을 입고 허리에 청빈, 순결, 순종을 의미하는 세 개의 띄를 묶어서 늘어뜨린다고 합니다. 해빗을 입은 수도사들에게 는 개인의 욕망이 드러날 틈이 없습니다. 해빗을 입음으로 그는 자동적으로 수도회의 가치에 헌신하고 하나님께 순명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이죠 이렇게 해빗(habit)은 단순함, 일상성, 익명성, 반복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말은 수도복이 그 수도회의 영성의 색깔을 나타낸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승처럼 해빗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의 습관들은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드러냅니다.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수 없이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빗을 덧입는 길 밖에 없습니다. 몸을 사용한 일상의 반복적인 결단과 실천 밖에 좋은 해빗을 덧입는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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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 필유린”

 공자가 말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論語)에 나온 글귀입니다. 논어는 인간관계를 위한 책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이 지녀야할 도리들을 설파한 공자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한 사회를 발전시키며 지탱시킬 힘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이자 덕목은 인()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랑’인 것이죠. 사랑과 덕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가 한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공자는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의 이런 기본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위의 글귀를 해석해 본다면, 덕()이야 말로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이해입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 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백범 선생은 이 글귀를 토대로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것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건강이 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 마음을 갈고 닦는 내적 수양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수 없이 많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서 우리가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이웃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묶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우리 삶에 숙제처럼 부여되는 것이죠.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거하시는 결과물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갈 5:22-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모두 성품과 인격에 관련된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덕()이라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후의 삶의 목적은 바로 덕을 수련하여 키워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촉진시키는 연결고리가 바로 덕이기 때문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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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예배가 끝나고 본당의 의자를 다 정리해 놓고 차분히 앉아 아이들 노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태윤이, 하준이, 이안이, 올리비아, 클레어, 조은이, 설아, 준수, 유진이가 의자를 치운 본당에서 뛰어 노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논다는 표현이 딱 맞았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뛰어다니는 것이 좋기도 하면서 또래 친구들이랑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기만 해 보였습니다. 친구만 있으면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즐거운 건가 봅니다. 한참 뛰어놀더니 이제 지쳤는지 강단 끄트머리에 일렬 종대로 포개고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이 전선에 일렬로 내려 앉아 재잘대는 참새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나 녀석들이 귀엽던지 추억하고 싶어 사진으로 담아 보았습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신나는 친구들이 가까이에 있는 녀석들이 조금 부럽기도 했습니다. 한자의 친구를 나타내는 글자 중에 붕()자가 있습니다. 달 월()이 두 개로 겹쳐 있는 글자지만 달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갑골문자에서는 조개를 엮어 양 갈래로 엮어 놓은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갑골문자를 쓰던 상나라에서 조개는 화폐로 쓰였고 돈을 양 갈래로 엮어 놓은 것이니 좋은 의미였음에 분명합니다. 조개들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에서 친구를 연상해 낸 것 같습니다. 함께 어울리어 하나가 된 친구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 듯합니다. 

  공자의 논어 첫문장에 친구가 나옵니다.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다음에 나오는 글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과 더불어 친구와 함께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일러주는 문장입니다. 공자가 얼마나 평소에 강조했던 것이면 그의 대표작의 첫 문장에 들어가 있을까요? 지난 월요일 뉴저지에서 친구가 방문했습니다. 사역지를 옮기기 전 한 달 동안 받은 귀한 휴가 동안 저를 만나겠다고 단숨에 날아온 것이었습니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 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몸소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도 한국에서 목회하다 미국 이민교회를 섬긴지 7년이 되어 가는 터라 공감대가 비슷했습니다. 함께 토닥이며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조언도 아끼지 아니하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배우고 익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공자도 분명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책 첫문장에 배움의 기쁨과 우정의 소중함을 가장 먼저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값진 것들이 참 많지만  친구만큼 소중한 것도 드문 듯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말씀했나봅니다. 친구의 소중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나를 친구 삼으신 주님처럼 나도 누군가의 귀한 벗이고자 합니다. 벗들인 여러분과 함께 함이 제겐 큰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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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에 분의 멘토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모두 지금은 살아계시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목회를 배웠고 지금도 저의 목회를 이끌어 주는 힘과 원동력이 그분들에게 받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첫번째 멘토가 되신 분은 실존 인물은 아닙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미제라블(Les Miserables)”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미리엘 주교가 첫번째 멘토입니다. 소설 1권은 목회 지침서라 정도로 미리엘 신부의 사목의 자세는 많은 영감과 감동을 줍니다. 가상의 인물이기에 실재로 그렇게 목회를 이가 있을까 의문을 제기할 있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갈망 안에는 그런 사제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의 넓은 주교관을 이웃하고 있는 병실이 부족한 병원과 바꿔 많은 이들이 치료 받을 있게 자신의 권리를 내려 놓습니다. 민심이 흉융하고 도적들이 들끓던 시절에 집안의 모든 문빗장을 풀어 모든 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는 길을 열어 놓았죠. 덕분에 장발장처럼 허방다리를 짚은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땅이 필요한 이들에게 짧게 나마 쉼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기를 통해 미리엘의 삶에 자극을 받은 장발장을 통해 도시 전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죠. 저는 위고의 상상력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도 미리엘 같은 목회를 하고 싶은 것이죠. 

  대학생때 친구가 자기네 교회에 와서 찬양인도를 해달라고 해서 교회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운명적인 백목사님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백목사님은 독일에서 박사를 받고 돌아오셔서 병든 자들을 돌보는 병원 원목으로 계시다 부름을 받아 교회를 섬기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어린 저를 항상 아껴주셨죠. 주일 저녁의 가한 시간에 저를 항상 목사님 댁의 밥상 머리로 불러주시며 환대해 주셨죠. 소자를 환대하는 겸손의 목회가 무엇인지 백목사님으로부터 생생하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의 전임사역을 시작했던 서울 마포에서 모셨던 김목사님을 잊지 못합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김목사님으로부터 인격적인 목회자상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훌륭한 분들 가까이에서 목회를 배운 것이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목회를 자극하며 영감을 주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인서로 사랑하라 명령을 따르며 목회에 임하셨죠.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만 있다면 무엇이든 있다는 확신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만 있다면 모든 만들 있다. 행복도, 진정한 평화도, 필요한 돈까지도- 피에르 신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우리 함께 만들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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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자賢者의 선물 (The Gift of the Megi)”라는 오 헨리(Oh Henry)의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짐과 델라라는 이름의 젊은 부부가 주인공인 소설이죠. 둘은 어려운 형편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습니다. 수중에 1.85달러 밖에 없었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나 커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죠. 짐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두 가지 물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짐의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 내려오는 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아내 델라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카락 이었습니다. 먼저 델라는 짐이 시곗줄이 없는 귀한 시계를 살짝 부끄러워 수줍게 시간을 보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짐을 위해 시곗줄을 선물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20달러에 팔아 21달러짜리 시곗줄을 사죠. 집에 돌아온 짐은 아내의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가 사온 선물은 아내가 자기의 금발 머리를 가다듬기 위해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고급 빗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선물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은 바보 짓을 한 것입니다. 델라가 먼저 활짝 웃음을 터뜨렸고, 짐은 큰 포옹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며 둘의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헨리는 이 둘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덧붙이며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그의 코멘트는 이렇습니다.

 

  현자(동방박사)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현명한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막 태어난 아기 예수께 선물들을 가져온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성탄절 선물을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에 그들의 선물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두 명의 현명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둘은 각각 서로를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팔았지요. 그러나 내가 이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 두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선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가장 현명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현자(동방박사들)들입니다.”

 

   짐과 델라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도 현명하단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선물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랑을 선물하는 자들이야 말로 현자(Megi)입니다. 성탄에 우리가 서로에게 선사할 선물이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사랑이야 말로 동방박사들이 전달한 황금보다 더 값지고, 유향과 몰약보다 더 향기로우며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치료할 치료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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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이 대봉 한 박스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국 땅에서 흔치 않은 고국의 익숙한 과일에, 아직 연한 주황색의 익지 않은 대봉이지만 벌써 마음이 흐뭇해 집니다. 아들 녀석들은 한국에서 먹어 본 기억이 있는지 떫은 감이 반 투명의 진홍색으로 변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아빠 이제 익었어? 먹어도 돼?”를 남발하지만 지금 먹었다간 떫은 맛에 뱉어낼 게 뻔합니다. 몇 주가 지나자 제법 맛있게 익었습니다. 맛있게 홍시를 먹는 아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기다리길 잘 했지?”  야구 시즌이 끝나고 맞는 겨울을 ‘스토브 리그’라 합니다. 추운 겨울 기간 동안 프로야구 팀들은 선수를 트레이드 하거나 보강하여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막간의 시간을 부르는 말이죠. 요즘 메이저리그 스토브리그가 한창 뜨겁습니다. 오타니라는 일본 야구 선수 때문입니다. 오타니는 100년을 훨씬 넘긴 미국 야구 역사에도 없는 전대미문의 선수로 평가됩니다.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데 둘 다 보통 수준의 실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 시즌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게 되어 그를 영입하려는 팀들의 경쟁이 치열한 것입니다. 모든 야구팬들은 그가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양 자기 팀에 와서 팀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계약 소식을 기다리는 팬들의 간절한 마음이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이라는데 나는 홍시를 익기를 기다리는 아이만큼 간절함이 있나 돌아봅니다.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다 보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주님의 다시 오심과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며 무덤덤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망가졌고 하나님은 원래의 창조의 모습으로 이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겠다는 끝이 있는 이야기를 진행해 가고 계신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시작하신 그 재생(구속, redemption)의 이야기의 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 속에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에 이뤄질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구속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죠. 주님 보시기에 아직 무르익지 않았나 봅니다.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가기까지 주님은 더 기다리시나 봅니다. 아직 이 세상은 떫은 맛이 강해 보입니다. 전쟁과 불평등, 차별에 씁쓸해 하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세상이 좀 더 달달하고 맛깔난 세상이 되길 주님은 기다리시나 봅니다. 우리가 주님의 에이전트로 더 맛깔난 세상을 만들어 가길 기다리시나 봅니다. 대림절 두번째 주, 평화의 촛불이 이제 켜집니다. 평화의 왕으로 임하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는 날 주님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날이 오겠죠? “기다리길 잘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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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nt 라고 불리는 대림절 혹은 대강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교회 전통에 따라 우리는 성탄절이 있는 주일의 앞 네 주를 대림절로 지킵니다. 이번 주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의 예전 색깔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purple)은 왕의 색깔로 알려졌으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성찰하는 것을 돕는 색깔이라 합니다. 대림은 기다릴 대()와 임할 임()이 합쳐진 것이고, 대강은 기다릴 대에 내릴 강()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두 용어는 예수님의 임하심과 이 땅에 내려오심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면에서 같은 뜻이니 자신의 교회 배경에 따라 편한 것을 쓰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Advent 는 기다림의 절기라는 것입니다. 이땅에 친히 임하기 위해 마리아의 뱃속에 아기로 잉태되어 탄생하실 주님의 나심을 기다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대림절을 이중적 기다림의 절기(Double Waiting of the Lord Season)라고 부릅니다. 

  교회 전통에서 대림절 기간에는 촛불을 사용해 주님을 향한 기다림을 표현해 왔습니다. 대림절이 네 주이니 네 개의 촛불이 준비됩니다. 각각의 초 색깔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첫 주 보라, 둘째 주 진보라, 셋째 주 분홍, 넷째 주 흰색이 그것인데 각각의 초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 다른 색깔의 초들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지만 세번째 분홍색의 초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기쁨의 초라 하여 강조를 하기도 합니다. 네 주의 대림절 기간에 따라 순서대로 소망(Hope), 평화(Peace), 기쁨(Joy), 사랑(Love)의 초가 각각 점등됩니다. 네 개의 초가 둥그렇게 둘러싼 중간에 큰 초를 놓고 성탄절 당일에  그 초에 불을 켜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에 놓인 초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올해부터 우리 교회도 대림절 예배가 시작하면서 대림절 촛불을 밝히게 됩니다. 대림절은 어두움과 함께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세상은 깊은 어두움과 고통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만연된 죄와 악이 활개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유일한 빛이시요 소망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기다립니다. 이미 이 땅에 임하셔서 십자가의 구원을 성취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 땅 위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이 긴장감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이 긴장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분별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의 첫주에 소망의 촛불을 켭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지만 우리는 소망의 초를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믿기에 낙심하지 않고 소망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라갈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아기의 몸을 입고 오신 겸손의 예수를 이 대림절에 본받기를 소망해 봅니다. 교만과 탐욕을 내려 놓고 겸손의 왕, 평화의 왕으로 임하실 아기 예수를 간절히 기다리며 닮아가는 대림절이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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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과 주일 우리는 사경회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뉴저지에서 오신 허봉기 목사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 토요일 저녁에 우리는 교회됨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을 통해 1세기 예루살렘에 형성된 ‘다른 세상’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점에서 세상과 달랐고 어떻게 세상에 충격을 주었는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던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달랐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다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통해 제자도의 핵심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죠.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무척이나 추상적인 개념이죠. 목사님께서 “사랑하지 않고도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청 사랑하는데 건너가는 것이 없다면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질문하시기도 하셨죠. 1세기 예루살렘 교회는 식민지 상황에서 주인과 노예가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고, 지갑을 열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눠줌으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행4:33-35).”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표지로서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말씀이고, 그 사랑의 실천으로 가난한 자가 없어졌는데 그것이 세상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특징이었다는 요지의 말씀입니다. 말그대로 교회는 신천지(新天地)였습니다. 

  다하나 교회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예수그리스도를 피와 살을 나누는 형제 자매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나요? “당신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는 믿지 않겠소” 냉소하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나도 당신들의 무리에 끼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다하나교회 성도들 처럼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라는 말을 교회밖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상과 다른 대안적이고 대조적이며 대항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면 좋을텐데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이만 저만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을 이뤄갈 꿈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함께 만들어가 보실래요? 다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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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릴적 바로 옆집이 교회였기 때문이었죠. 제가 태어나기 몇 년 전 부모님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면소재지로 이사를 해 오셨는데 그곳이 하필 교회 옆집이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이야기가 딱 이런 경우죠. 묵을 가까이 하면 자연스레 검어지듯 교회 가까이 있으니 자연스레 신앙에 젖어들어 가게 되었나봐요. 평일에도 교회에 가면 목사님과 사모님은 늘 저희를 환영하며 환대해주셨죠. 당시 사모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시는 도너츠를 비롯한 온갖 신기한 간식꺼리들이 넘쳐나니 교회는 제게 마냥 기쁨의 공간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공과 공부시간에 대답 잘 한다고 칭찬 받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었죠.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인정욕구를 채움받으며 시작된 교회 생활이 청년시절에는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바꼈습니다. 예배가 좋았고 교회를 통해 행해지는 선교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교회는 저의 꿈과 비전을 실현하는 꿈의 공간으로 탈바꿈 했던 듯합니다. 그리고 선교지에서의 시련과 험난한 인생여정을 통과하며 하나님은 새로운 교회에 대한 꿈을 꾸게 하셨지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변화된 저의 교회관 속에서 다하나교회와 연결되게 됐죠. 지난 9주간 “다시 만나는 교회”라는 책을 통해 제가 꿈꾸고 바라는 교회에 대한 그림을 몇 몇 분들과 함께 나눴고, 이번 토요일에 아쉬운 마무리를 했습니다. 

  “나의 삶이 회복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다른 이들을 회복하는 삶으로 쓰임받게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그것이 God for us를 통과하고 God with us를 느끼면서 God through us의 삶으로 쓰임 받는 과정인 것 같아요.”, “쇼핑하듯 큰 교회 위주로 교회 생활을 해 왔었는데, 이제 교회 가족의 일부가 되고 섬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큰 기쁨이예요.”, “저는 저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돌봄과 환영 받기에만 익숙했던 이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고 섬김의 자리에 나아가면서 성장해 가는 것 같아요.” 모든 인용구절의 말씀들은 함께 공부했던 교우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착한 일(to do good things in the world)을 행하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 위에 이뤄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교회인 우리를 통해 이뤄집니다. 우리가 교회이고 매일의 삶이 교회인 그 거룩한 부르심에 우리 모두는 초대받았습니다. 교회인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흩어지며,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목적 때문에 교회를 찾아왔지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꿈에 접속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다시 만나는 교회’이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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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에 눈이 제법 왔습니다. 눈 온 아침 교육국에서 오는 이메일을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도 일어나자 마자 “오늘 학교 간대?”라고 묻더군요. 어릴 적 계산법으론 분명 12월 1일부터 겨울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곳에선 이미 겨울인가 봅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눈 위에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 잊혀져 가는 친구들의 이름을 써보자던 옛 시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옛 시인도 눈오는 날에는 센티해지기는 오늘의 우리와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나 바깥에 놓아 두었던 화분들의 눈을 털고 집안에 옮겨 놓아야겠습니다. 아직 실파가 자라고 있고 고추 열매는 푸르르며 토마토는 붉게 수줍어 하며 익어가고 있는데 그냥 추위에 떨며 죽게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올해는 이곳 저곳에서 조그만 화분들을 얻기도 하고 수납용 플라스틱 박스에 구멍을 뚫어 흙을 채우고 작물들을 심어 보았습니다. 지난 여름, 랄리 목사님께서 토마토 모종을 두 개 주셔서 하나는 조그만 화분에 심고 다른 하나는 큰 플라스틱 컨테이너에 다른 작물들과 함께 심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조그만 화분에 심었던 토마토는 어느 정도 자라더니 성장을 멈췄고, 큰 컨테이너에 심긴 토마토 나무는 작은 화분에 심긴 토마토에게 보란 듯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제한적인 작은 화분의 토마토는 뿌리를 쭉쭉 뻗을 수가 없어 그 스트레스 때문에 성장을 멈춘 듯 합니다. 대신 넓게 자신의 뿌리를 뻗어 갈 수 있었던 컨테이너의 토마토는 자기가 자라고 싶은 만큼 맘껏 커 갈 수 있었나 봅니다. 

  그릇이 넓어야 한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것일까요? 식물도 자신을 받아 주는 넓은 공간에서 맘 껏 크듯이, 사람도 넓은 마음을 가진 이들을 만날 때 쉼을 얻고 커갈 수 있나 봅니다. “해납백천(海納百川)”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다는 온갖 시내를 다 받아 들이니 그 너그러움이 있어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바다는 큰 그릇이어서 온갖 종류의 시내들을 다 품고 포용하나 봅니다. 바다 같이 넓은 마음에 사람들은 모여들며 쉼을 얻고 성장합니다. 부모로서 바다 같아지려고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잘 안될 때 좌절하기 일수 입니다. 나 자신을 향한 실망도 있지만 아비 잘 못 만나 아이들이 넉넉한 사람으로 커가는 것이 제한 될까 미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 너그러움에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 주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한다(민수기 14장 18절).”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시면서, 자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서 어떤 사람도 예수님 안에서 쉼을 누리고 안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마11장 29절). 작은 화분에 심겨 성장을 멈춘 토마토 한 그루를 바라보며, 다른 이들을 나의 좁디 좁은 틀에 가두고 제한하며 너그럽지 못했던 내 마음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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