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 목장 모임에 참석했는데 나눔 도중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있는데 양식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이 던져졌다.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거리 이야기들이 많은지 주기도문의 양식의 의미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간다. 실제적으로 많은 필요들을 느낀다. 그 모든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 밥이자 빵이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날마다 우리 실존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인정을 의미한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육신적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배고픈 이들을 동정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오병이어 기적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며 배고픈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배고픈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에서 나오는 기도이기도 하다.
셋째, 일용한을 '충분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분한 양식을 구하되, 넘치거나 과하게 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자족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수세기 전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기도에서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빵 같은 기본적인 것이 전부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놀란 바 있다.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가축 떼도 비단 옷도 아니다. 높은 지위도 기념비도 조상(彫像)도 아니다. 다만 빵이 전부다. "라고 했다.
넷째, 나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란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빵은 공동체적 산물이다. 빵은 혼자 힘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Iowa의 농부들, Twin City의 제빵업자들, Rochester의 배달 트럭 운전사들, 빵은 이들 모두의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는 빵이 공동체적 산물임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빵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성 바실(St. Basil the Great)은 한 설교에서, "나의 소유물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했다. 특히,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들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들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들은 헐벗은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금고와 계좌에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는 설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고 육체를 가지고 삶을 영위해 가야 한다. 또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하고 실행해 옮겨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그러기에 육체를 대표하며 육체를 상징하는 양식을 향한 태도와 양식에 대한 자세가 우리의 신앙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렇게 많은 먹거리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나눌 것인지에 대해 지대하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