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월 말의 예상치 못한 눈과 추위에 적잖이 당황하셨을텐데, 그 이후 온화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햇빛이 비추는 날엔 늦가을인지 봄인지 착각할 정도로 그 따스함이 고맙기만 합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추운 겨울을 맞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감사합니다. 봄은 우리를 포함한 뭇 생명들에게 큰 희망입니다. 아무리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고 차가운 날들이 계속 된대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김 없이 봄은 온다는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봄 이야기를 꺼내니 어색할 수 있지만 봄이란 말이 주는 따스함이 너무 좋아 그렇습니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 현종이 다스리던 시절 송경(宋璟)이라는 재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빼어난 인품에서 흘러나오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과 근검절약하는 삶의 태도는 백성들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지어준 것이 “다리가 있는 따뜻한 봄볕”이라는 뜻의 유각양춘(有脚陽春)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별명이구나 싶습니다. 그가 있는 곳마다 봄이고,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봄을 만난듯 살아나는 것이니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나요. 저같은 장삼이사들이야 호()같은 것이 있기 만무하지만 혹시나 짓는다면 봄볕이라는 뜻의 ‘양춘(陽春)’이라고 지으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모두 봄날과 같은 삶이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에 죽어 있던 뭇 생명들이 깨어나고 고개를 드는 것을 우리는 매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봄날같은 삶이셨습니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대접 받지 못하던 고개숙인 자들이 고개를 들게 되었죠. 사람들의 냉대에 변두리로 밀려났던 외로운 인생들이 그분이 내미시는 따스한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마다 꽃피게 되고 푸르르게 되었죠. 예수님은 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계신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도 예수님과 같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봄이였으면 좋겠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봄볕에 얼음 녹듯 마음이 녹아지고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인지를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만 지나가면 찬바람 쌩쌩불고 얼어붙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걸어다니는 봄볕으로의 삶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나의 인격이 되도록 부단히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해 가는 지난한 여정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과 같이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의 신성을 우리 육신에 덧입히는 역순의 과정이지요.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모두가 그분처럼 봄볕과 같은 인생으로 살 수 있음을 직접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작은 몸짓들 속에 따스함이 묻어 나오길 소망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곳이 우리 때문에 봄날이요 천국이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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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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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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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말에 가족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다 참석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많은 고민들을 나눴습니다. 근대 이전에 교회는 항상 세상의 중심에 있었고 그에 따라 교회의 존재 목적은 조직을 유지하고 교구를 관리하며 교구를 확장하는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후기 사회인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더이상 교회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교회가 주변부로 밀려나자 교회는 잊고 있었던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세속화 된 세상 속으로 보내진 존재라는 깨달음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생존하느냐 마느냐의 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선교라는 잃어버린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죠.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몸이니 천년만년 유지될 거라는 착각 속에 지낼 때가 많습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은 술집으로 변하든지 다른 종교의 예배당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 목적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다하나교회는 설립된 지 5년이 된 신생교회입니다. 다하나교회가 로체스터라는 이 도시 안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한인교회가 없이도 미국교회를 잘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오고 있었는데 왜 한인교회를 세우고 한인들을 이곳에 불러 모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이 교회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었을까요? 이미 있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이 필요하고 목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주객이 바뀐 격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을 먼저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로체스터라는 작은 타운에 있는 한인과 한인 이세들을 향한 부르심에 우리는 헌신하여 모였습니다. 아무래도 한인은 한인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문화적 장벽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 캠프에서 우리는 선교적, 사도적, 성육신적 교회의 비전을 함께 나눴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선교입니다. 선교하면 해외선교부터 생각하는데 그보다 훨씬 큰 개념입니다. 선교란 보내졌다(mission의 어원인 라틴어 mittere는 보내졌다는 뜻)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구속하시기 위한 모든 노력과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일상과 이웃들 속에서 그분의 선교를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보다 앞서가시며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분별하고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사명을 가지고 모입니다. 교회는 흩어짐을 전제로한 모임이죠. 선교가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앞으로 나눌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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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아픕니다. 로체스터라는 도시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유입이 되어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떤 이들은 떠나 갑니다. 떠나 가는 이들도 서운하겠지만 떠나 보내고 남아 있는 이들의 아픔은 오래 남는 같습니다. 계속 떠나 보내야 했던 기억들이 쌓이다 보니 이별의 아쉬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이별을 맞이 하게 되어 아픈 것이겠죠. 이번 여름에 로체스터와 다하나교회를 떠나는 교우의 가정이 적잖습니다. 다하나교회같은 이민 교회에서 정들었던 교우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정들었던 형제 자매들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어쩌면 떠나 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지도 모릅니다. 이별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움과 아픔이 크겠지만 파송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기쁨으로 보낼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사역을 하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자의식이 가득했죠. 보내는 행위를 선교(mission)라고 칭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다하나 교회를 떠나가는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남아 있는 교우들로부터 파송을 받고 떠나가는 선교사 가정이라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이들이 이제 곳곳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사로 살아간다면 떠나보내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룻기 1장을 묵상하며 떠나보내는 것도 사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 , 오르바 라는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여인들은 보금자리를 찾아 정든 곳을 떠나가야 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입니다.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모압에 남기로 하고 맏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모압을 떠나 유다로 가게 됩니다. 오르바의 관점으로 보면 홀로 남아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르바의 결정을 탓하거나 비아냥 거리지 않습니다. 오르바의 결정 또한 아름답습니다. 나오미와 룻도 오르바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그녀의 안식을 빌어줍니다. 오르바는 룻과 나오미의 진심 어린 축복을 받으며 마음 편히 그들을 보낼 있었을 것이고, 그녀 또한 자신의 어미 집에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됐을 겁니다. 떠나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닐곱 가정이 꺼번에 교회를 떠나게 되니 걱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룻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축복과 공감이 전제된 이별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우리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위기일 있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곳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주의 교회의 아름다운 향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펼쳐질 다하나교회의 이야기의 쳅터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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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절과 절기가 되면 생각나는 책이나 문학작품들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읽어줘야 합니다. 7월이 되면 웬지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떠오릅니다. 가을이 시작되고 찬바람이 불면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절기와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하는 성경 말씀이 있었다고 하죠. 유대인들은 그들의 5대절기에 각각 절기에 맞는 성문서(시가서) 책들을 낭독하였습니다. 성문서 중에서도 다섯 개의 성경을 따로 모아서성문서 오축(五丑, Five Megilot)’ 불렀습니다. 다섯 개의 두루마리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에는 아가서, 오순절에는 룻기, 솔로몬 성전 파괴일인 아브월 구일에는 예레미야 애가, 장막절에는 전도서,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자 오순절을 기념하는 주일이니 룻기를 낭독해야겠군요. 먼저 룻기가 어떤 책이고 룻기를 오순절에 읽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면 룻기 낭독이 흥미로워지겠죠?

 한글 성경은 구약성경의 헬라어버전인 ‘70인경(Septuaginta)’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의 순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는 구약성경의 순서를 시간 순서로 배치하려고 하다보니 히브리 성경과 순서가 달라지게 겁니다. 히브리 성경에 룻기는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31장에는지혜로운 여인 소개 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현숙한 여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란 히브리말에쉐트 하일인데 능력있는 여인이란 뜻입니다. 가솔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돌보는 그런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죠.  그리고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사이에 룻기가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기가 현숙한 여인의 표상으로 룻을 소개하고 있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는 면에서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죠. 룻은 실제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부양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남성들이 즐비한 타작마당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룻이야말로 현숙한 여인의 표상이 있습니다. 룻기를 오순절에 읽는 이유는 룻기의 배경이 오순절에 이뤄지는 밀의 추수시기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인정과 친절이 강조되는 절기입니다. 룻기야 말로 절기와 매우 어울리는 책입니다. 룻기는 인애(헤세드) 보여주신 하나님과 인애를 베푸는 사람들(, 나오미, 보아스) 이야기입니다. 룻기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돌봄과 사랑, 우정, 다른 사람에 대한 비상한 배려와 책임감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만나 상실과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치유된다는 복음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성령강림절에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인애와 이웃 사랑의 가치를 느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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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좋아하세요?  많은 분들이 드라마를 즐깁니다. 드라마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허구이지만 우리 삶에서 그리고 우리 이웃들의 속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연기자가 연기하고 그것을 영상을 통해 전달합니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이라는 일반적인 문학장치를 사용하여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현실에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하며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하면서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이야기는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살아가는  이민자의 이야기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민자로 살아가는 미국은 오랫동안 그들의 배경이 되어온 기독교를 바탕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야기야말로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가장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드라마다라는 책을 가지고 지난 8 동안 함께 공부를 왔고 어제 종강했습니다. 책은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과 움직이는 방향성에 대해 이해했습니다. 성경이야말로 세상의 보편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아우르는 세상 전체에 대한 이야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성경을 파편적으로 이해했던 것을 탈피해,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분명하게 일러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성경을 이야기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드라마라는 틀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드라마는창조-타락-구속-새창조라는 플랏을 가지고 있으며 6(acts)으로 구성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속하실 위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고 그의 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수가 보낸 성령과 교회를 통해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갑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행 중인 이야기와 결말 사이에 놓인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혀 허구가 아닌 실재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이야기 속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의 무대(stages) 되는 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안에 이미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함께 배우이자 주인공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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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이라는 나무는 매우 볼품 없는 나무입니다. 한국의 학교나 관공서의 울타리로 주로 심겨진 나무가 회양목입니다. 회양목이 볼품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크게 자란다고 해도 나무의 직경이 뼘을 넘기지 못하고 키도 짤막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회양목이 정도의 직경으로 자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10? 50? 아닙니다. 5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양목에게는 느림보라는 별명이 붙어 있나 봅니다. 하지만 회양목은 더디게 자란 만큼 단단함과 내구성은 다른 나무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어떤 나무보다 단단한 회양목은 예부터 도장을 사용된 나무여서 도장나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회양목 입장에서 볼품 없다는 자기에 대한 평이 못내 불만스럽기만 합니다. 자기보다 단단한 나무도 없기 때문이죠. 하늘 높이 자라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좋아 보일지 몰라도 단단함음 보잘 없는 회양목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런 나무들은 성장하고 꽃피우는데 모든 것을 소진한 나머지 내실을 다질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양목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합니다. 그래서 그의 성장은 백년이 걸리고 더딘 것이지요. 더딘 성장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기 그지 없는 회양목의 가치는 단연 나무중에 으뜸입니다.

 회양목을 떠올리며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화려함을 좇아 가는 사람이나 교회는 내실을 다질 여력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양적 성장에 집중하다보면 내실을 다질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속도와 겉모습의 화려함에 결코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설정하고 방향을 향해 묵묵히 흔들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회양목의 더딘 성장에 비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딘 이유는 인격의 성장속도에 맞추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내면이 성장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도 성장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회복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인격의 형성은 부단한 내면의 살핌과 성찰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머무르며 성찰하고, 성찰한 것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실천에 대해 성찰하는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지난한 훈련을 통해 인격은 만들어져 갑니다. 이런 인격형성과 인간성의 회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과는 더더욱 거리가 멉니다. 매일매일의 사랑의 실천과 성찰이 켜켜이 쌓여야 단단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만들어질 있습니다. 단단함은 어떤 시련과 환란이 와도 꺽이지 않는 내적인 힘을 제공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교회의 성숙은 회양목과 같아야합니다.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고 성장이 더디다고 불평 말아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단단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형성되어진 인격의 가치란 어떤 것과도 바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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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살림을 중곡동에 마련했었습니다. 주일 어느날 아차산역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가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고구맛순을 다듬으시며 바구니에 쌓아 팔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고구맛순을 다듬던 기억에 고구맛순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께서 다듬어 놓신 고구맛순을 다 사들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즐겨 해주시던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고구맛순 반찬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손맛이 그리워 요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후로 몇 번 나물을 다듬어 파시는 할머니들만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사드리곤 했죠. 저는 나물 반찬과 특정한 음식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소환해 내곤 했습니다. 아이들을 세 명이나 키우며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는 하지만 아직 어머니의 내공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는 자기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만큼 값없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려 온 것이겠지요. 5월이 되고 고무맛순이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시절이 되니 어머니 품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형제들이 고향집에 내려갈 때에만 영상통화를 통해 어머니의 얼굴을 뵙게 되지만, 화면 너머의 어머니의 주름이 더욱 깊어만 보입니다.

 

어머니의 주름을 보며 저 주름 고랑 중 하나는 내 몫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 품을 떠나 형제들과 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유학을 하게된 저는 주말이 되면 의례적으로 시골 집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입시준비와 대학생활로 바쁜 형 누나들 대신 늘상 저는 쌀과 반찬들을 공수해 나르는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주일 오후 다섯 시에 광주로 떠나는 버스에 올라타기 전, 의례껏 저는 어머니와 실갱이를 하곤 했습니다. 실갱이의 이유는 왜 이렇게 반찬을 무겁게 많이 쌌느냐, 쌀은 왜 이렇게 많이 담았느냐 뭐 그런 거였죠. 버스에 오를 때도 의례껏 “다시는 내가 내려오나 봐라.”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버스에 자리 잡고 앉자 마자 후회가 밀려오며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어머니에게 나도 손을 흔들며 답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어머니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이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지체장애 1급이었던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님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두 다리와 오른 팔이 마비된 딸을 위해 두 시간 마다 한번씩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고 합니다. 암투병을 하시던 장영희 교수가 죽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엄마 미안해. 먼저 떠나게 돼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도 속도 썩혔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죠. 어머 니만큼 향기롭고 다정하며 성스런 이름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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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떤 일이나 대상에 놀라거나 감격해 본 적 있으신가요? 몹시 놀라며 감격하는 것을 ‘경탄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최근에 경탄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새생명이 탄생을 보며 우리는 신비해 하며 경탄합니다. 이번 주에 태윤이의 동생이 태어났는데, 사진을 보며 저는 경탄했습니다. 생명이란 우리에게 신비감을 줍니다. 생명은 죽음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반대의 감각을 우리에게 줍니다. 생명, 그것은 신비이자 감격이며 환희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감각이 바로 경탄인 듯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온 우리에게 파릇파릇 돋아나는 들풀과 들꽃들은 놀라움과 감격을 선사합니다. 앙상했던 겨울 나무들에 푸른 싹눈이 돋아난 걸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연두색 물감으로 저 나무 위에 색칠을 한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에는 색깔이 있는 듯 합니다. 생명 있는 존재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통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의 실력을 뽐냅니다. 수련화는 노란 색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제비꽃은 보라색으로 자신의 삶을 경축합니다. 생명(生命)이란 ‘살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명을 살아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명(命)이란 목숨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목적과 사명을 뜻하기도 합니다. 꽃과 나무를 아우르는 자연계는 자신의 삶의 명을 각기 다른 색깔로 표현합니다. 노란색 꽃을 피우라는 창조주의 명을 받들어 개나리는 노란 꽃으로 창조주를 노래하고, 연분홍 꽃을 피우라는 그분의 명을 받을어 벛꽃은 연분홍 꽃으로 자신의 삶을 노래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색깔의 명을 부여 받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피조물들의 생명의 잔치 속에서 창조주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피조물들의 형형 색색의 생명을 찬찬히 바라볼 때 우리 삶에 경탄의 감각은 살아나게 됩니다. 경탄의 감각이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무기력과 불평을 내어쫓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경탄할 때 우리의 삶이 신비로 가득한 하나님의 섭리 한가운데 놓여져 있는 감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보잘 것없는 풀꽃이지만, 찬찬히 바라볼 때, 오랫 동안 바라볼 때, 풀꽃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의 생(生)도 나처럼 무척 아름답구나, 너의 생(生) 또한 나처럼 귀하구나!” 하나님이 살라고 명하신 피조물들을 찬찬히 바라볼 때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명 속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연결되게 되니 이 보다 쉬운 기도가 없습니다. 이 보다 쉬운 찬양의 방법이 없습니다. 피조물들의 생명 잔치 속에서 가만히 머무르며 우리는 경탄의 감각을 되살려야 합니다. 자연속에 깊숙이 머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생명에 감격하며 명을 살아낼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때에야 내 삶(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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