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 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 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 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의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고 가르치시는
어머니의 두렐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 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정일근의 시,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릴적 둥근 밥상에서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열 두 명의 대가족이 두 개의 둥근 두레밥상에 나눠 앉아 밥을 먹곤 했죠. 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둥글게 둘러 앉아 밥상을 나누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둥근 달이 뜨는 추석인데도 어머니의 밥상에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밥상에 대비해서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으로 묘사합니다. 어머니의 밥상이 누구나 환영해주고 누구나 나눔에 참여하는 평등하고 호의적인 밥상이라면,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라는 뜻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들의 밥상으로 인간미를 잃어버린 약육강식의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밥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글과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어머니의 둥근 밥상이 그리워지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둥근 하나님의 두레밥상이어야 합니다. 이 두레밥상에 모이면 어느 누구 하나 천한 이가 없고 모두가 귀하고 소중해집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 신비한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자기 몸을 뜯어 먹으라 내어 주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몸을 먹습니다. 함께 Communion에 동참하기에 우리는 한 Community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두레밥상에 둥글게 모여 사랑을 나누는 한 식구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한솥밥(communion) 먹는 식구 아이가?” 다하나 밥상공동체에 새식구가 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