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2장 묵상-급할수록 먹고 가라??!!>
유월절의 유래를 읽을 수 있는 본문입니다.
유월절은 새 해의 첫 달에 행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담고 있는 의미있는 행사가 바로 유월절이라는 것이지요.
‘유월'이란 '넘어가다(pass over)’라는 의미입니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며 '돌파해(pass through)’ 가던 죽음의 영이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 생존하게 됨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일회성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유월절 행사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식사’에 있습니다.
유월절에 먹는 식사는 세 가지가 준비되어집니다.
먼저 문설주와 인방에 바를 피를 다 쏟아 낸 어린양을 불에 구운 양고기입니다.
희생제물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집트의 노예살이의 쓰라린 시간들을 기억하게 만들 쓴 나물입니다.
그리고 채 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들어진 무교병, 즉 발효되지 않은 떡입니다.
발효되기 위해서는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지만 발효될 겨를도 기다리지 못한 채 구어낸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그만큼 급하고 긴박한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지요.
이 세 음식을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서서 먹어야 합니다.
상상하면 참 우스꽝스런 장면이지 않나요?
준비된 음식들도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이고 그 음식을 먹는 이들의 자세나 옷차림도 일상적이거나 정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이는 ‘신속한 탈출’을 예기한 식사라 그렇습니다.
이러한 식사가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 명절로 매해의 첫달에 기념되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민족이 추석에 송편을 먹고 설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이러한 식사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는 인원수의 산정은 기본적으로 가족단위이고 그 가족 안에서 그 양을 다 소화하지 못할 때는 이웃의 가정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식사 규정’이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던 어린양을 그냥 버리지 않고 함께 식탁의 공동체로 모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를 생각해 봅니다.
먼 길을 떠나야하는 신속한 탈출 앞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기로서 영양을 보충하고 나물로서 각종 영양소들을 섭취하게 하는 배려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식사’, 그리고 ‘식탁’이란 말이 참 정겹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여유를 느껴봅니다.
또한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가족과의 나눔, 이웃과의 나눔을 주지시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 많은 여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정신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가족들끼리 둘러 앉아서 식사할 시간이 없다고 푸념들입니다.
가히 ‘식탁’을 잃어버린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바빠서 함께 식사할 30분의 시간도 못 만드는 것일까요?
어딜 그렇게 바쁘게 탈출하려고, 분초를 다투는 목숨의 위협 앞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긴박한 식사들을 해가며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목숨을 위협하는 신속한 탈출 앞에서도 가족끼리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식탁의 공동체를 가지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여유를 되새겨 봐야겠습니다.
얼마전 담임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끝장인 21장을 설교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며 찾아간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용납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아침 식탁을 준비해 놓셨죠.
‘식탁’은 다시 시작하자는 몸짓이었고 용납의 제스쳐였다는 거죠.
우리도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위해 함께 숟가락 한 번 들어줄 수 있는 여유, 식탁을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갖자라 하셨지요.
그러면서 사도행전 29장을 살자고들 말하는데, 우리는 요한복음 22장의 삶을 새롭게 써갑시다라고 하시더군요.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실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는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요한복음 22장의 삶을 새롭게 써가자는 그 제안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긴급하고도 신속한 탈출 앞에서도 식탁을 나눌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오늘 유월절 본문에서 제가 깨닫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점심은 어떤 이와 함께 식탁을 나눠야할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부디 우리네 가정에 ‘식탁’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식탁이 사라진 세태가 회복되어 가정마다 식탁을 바탕으로한 공동체가 회복되고, 어떤 정치인이 말했던 것처럼 ‘저녁이 있는 삶’이 회복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