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2011. 4. 18. 15:39
<사도행전 20:22-24>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나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제 고등부 교사 선생님들과 함께 메시지 성경읽기 시간에 읽었던 본문 말씀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그의 앞길을 인도함을 받은 바울을 봅니다.

나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는 비결은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것 뿐입니다.

사로잡히다는 헬라어 동사 deomai 는 "묶다. 달라붙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동태로 쓰여 있다.

성령님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 성령님께 달라 붙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령님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가야할 것을 수 차례 얘기 하신 것 같다.

여러 고을에서 그에게 일러주셨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 거기서 바울이 핍박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주예수께 받은 사명(diakonos-직무, 섬김, 사역, 써비스)의 소중함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는 과정을 경주(race)로 비유한다.

사명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읽으며 나의 심장 또한 뛴다.

나는 예루살렘에 대해 몇 해 전부터 기도해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올해 들어 하나님께서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공부만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나를 부르신다는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선교사로 그 땅을 밟고 싶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나의 그런 생각들을 지지해 주신다는 확신이 든다.

아전인수 격의 해석이라면 하나님이 고쳐주시리라 기도한다.

계속해서 말씀으로 나의 달려갈 길을 인도해주시길 주님께 기도한다.

오늘도 나는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되도록, 그분께 붙어 있기를 위해 노력하리라!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4. 15. 08:24
<신명기 18:22> 히브리성경 직역

예언자가 야웨의 이름으로 말을 하였지만 그 일이 되어지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으면 야웨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예언자가 추측하여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참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표지는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는 예언자가 말한 그 일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일러주고 있다.

목사나 전도사가 설교한 내용, 조언한 내용이 양무리들의 삶가운데 일어나지 않거나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라면 그는 참 목자, 참 선지자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추측대로 임의로 말하는 것을 절대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대로 대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거야! 아마 그렇게 될걸' 이런 식의 전달 또한 문제가 된다

참 선지자는 확신 가운데 전해야 한다.

"~입니다. ~게 됩니다. 확신하십시오" 강한 어조와 확신 가운데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들은 일어나야 한다.

아니 그 말씀이 하나님 입으로부터 온 말씀이라면 일어나는 게 상식이다.

요컨대 참 선지자는 자신의 추측이 아닌 하나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들은 내용을 확신가운데 전하는 것이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4. 14. 09:07

<신명기 18:1~2> 히브리 성경 직역
1. 레위의 제사장들과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받을 재산이나 소유가 없습니다. 야웨께 불살라 바친 제물과 그분의 상속재산을 먹고 살 것입니다.
2.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상속재산이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신대로 야웨께서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모세는 레위인들의 소유규정을 말하면서 딱 잘라 말합니다.
"레위인들에게 재산과 소유의 축적은 있을 수 없다.
야웨께서만이 너희의 소유이며, 야웨께 드려진 제사의 제물을 먹고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목사로서 살아가기를 준비하는 저의 삶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뭔가를 가지려고 바둥거리지 마라! 너의 재산은 나잖니? 너는 내가 주는 것만 먹고 살거야.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거라. 너는 나로 인해 충분히 배부르고 만족한 삶을 살거야! 나만 바라거라"
아멘~~

감사하게 하나님께서는 목사 안수를 준비하는 저에게 매일 말씀을 주시는군요.
지금 말씀하시는 이 말씀들을 저의 평생에 지키며 살아가야하겠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겠습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물건을 갖기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다.
주신대로 받고 주신대로 먹고, 주신대로 누리며 살겠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부요함에 처했을 때나 빈곤함에 처했을 때나 만족하며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요즘은 우리 가정이 참 빈곤한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월초에 이미 통장잔고는 거의 바닥이 났었죠.
목사는 재물없이 살아야 하는데,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는 많은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 하네요^^

아무튼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의 재산이며, 저의 소유임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저의 평생에 계속 되기를 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4. 13. 22:51


신명기 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오늘 아침 묵상했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이런 자격을 갖춘 자를 세우라는 모세의 명령이 담겨있는 구절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서(토라)를 등사하여 기록하고 거기에 나와 있는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동안 복사한 율법서를 왕이 읽고 지키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보니 왕이 직접 제사장 앞에서 말씀을 등사하여 쓰는 내용이었다. 왕이 제사장 앞에서 율법의 말씀을 그대로 배낀다?
조금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말씀 한 장쓰는 것도 버겁다. 그런데 많은 량의 토라를 옮겨 적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쉽지 않은 일을 왕은 직접해야한다.
오늘같이 좋은 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왕은 어렵게 정성들여 쓰면서 거기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양피지에 쓰고 있지만 자신의 마음에 그 말씀을 세기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를 나에게 말씀하신다.

1.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가 되라!
  목사에게 있어 말씀은 핵심적인 가치이다.
목사는 말씀을 늘 가까이에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평생') 두어야 하고
말씀을 해석해야 하며, 해석한 말씀을 공동체에 나누어야 한다.
말씀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누구나 이것을 이론적으로는 안다. 하지만 진정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자는 많지 않다.
말씀을 읽는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할 뿐더러, 말씀을 진실된 마음으로 실천하는 목회자도 부족하다.
하나님은 말씀을 중하게 여기고 그것에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는 사역자를 찾으신다.
나도 그런 목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말씀을 새기고 연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말씀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캐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노력과 노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왕이 힘들여 말씀을 등사한 것처럼
목사 또한 힘들게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들게 준비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냥 생각나는 영감으로 말씀을 전하는 어리석은 목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많은 고뇌와 연구를 통해 깊이 있는 말씀을 양 떼들에게 전해야 한다.


주님은 목사안수를 앞 둔 나에게 두번째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다.
말씀의 종이 되라고....
Posted by speramus
묵상2011. 4. 7. 20:39

목사 안수를 준비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이다.

출애굽기 28:36~38

  1. 너는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 새기는 법으로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2. 패를 청색 으로 위에 매되 전면 있게 하라
  3. 패를 아론 이마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 관련된 죄책 담당하게 하라 패가 아론 이마 있으므로 성물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러 규례를 주시면서 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주신다.

창세기 28장은 제사장이 입는 옷에 대해 언급한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됨됨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넓게 해석하자면 옷은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과 됨됨이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특별히 제사장의 옷 중에서 머리에 쓰는 관에 두르게 하는 글귀를 제작하게 한다.

그 글귀는 "야웨께 성결"이라는 글귀다. 그 글귀는 세긴 패는 이마에 두게 하여 제사장에게 있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두게 하였다.

이는 제사장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결 즉 구별됨과 거룩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이리라.

아예 그 글귀를 패에 새겨서 붙이게 함으로 각인 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읽혀진다.

 

 

목사는 다름 아닌 제사장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예배를 진행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공동체의 목자이다.

이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표지는 성결이다. 거룩인 것이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세대에서 성직자들에게 요구되어진 것은 바로 구별된 삶이었다.

하나님 또한 목사에게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목사안수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결이다.

이 것은 목사 안수 평생에 나의 이마에 매고 따라가야할 숙제이다.

야웨께 성결, 이 간단한 글귀를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내 평생에 이 것을 기억하고 되내어야 하리라.

"야웨께 성결, Sanctum Domino, hwhyl vdq

Posted by speramus
묵상2010. 12. 11. 14:48

1.     콘티짜기란?

콘티를 짠다는 것은 소설이나 희극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요소가 있다. 극작가는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한다. 주제와 메시지가 나오면 그것에 맞게 이야기의 틀을 구성한다. 이것을 플랏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기---결 의 구성을 취하는 것이 희극이나 소설의 특징이다. 콘티를 짜는 것도 마찬가지다. 콘티 또한 주제와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많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지 말라.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면 족하다. 주제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플롯을 구상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소설도 그렇지만 이야기의 비약이 있을 때, 독자는 힘들어 한다. 찬양도 마찬가지다. 흐름을 심하게 깨뜨리거나 방해하는 콘티는 예배에 오히려 방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콘티와 흐름

콘티에 있어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흐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   주제

흐름이 원할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주제의 비약을 피해야 한다. 회개의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선교에 관한 노래가 이어진다면 주제의 흐름상 어색한 것이다. 물론 이 주제의 흐름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무시될 수 있다. 회개의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다 씻었으니 기뻐하자는 흐름으로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   (Key)

노래의 배열을 정할 때는 기본적으로 같은 키나 비슷한 키를 배열하는 것이 흐름에 있어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G(사장조)의 노래를 부르다가 그 다음 곡을 D키로 부르려고 하면 흐름이 방해 받을 수 있다. 주제를 더욱 부각 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키를 사용해야 한다면 앞의 노래를 완전히 마친 후 새롭게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   비트 및 리듬

그 다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비트와 리듬이다. 빠른 곡의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느려지고 또 다시 빨라진다면 찬양의 흐름에 있어 상당히 방해 받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예상 할 수 있다. 빠른 곡들 중에도 리듬이 다른 곡들이 있다. 될 수 있으면 같은 리듬의 곡들을 배열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   찬양과 경배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우리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높이는 것이고, 경배는 하나님 그분 자체를 높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다. 콘티의 배열에 있어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송을 배열해 주는 것이 좋다. 경배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찬양에 관련된 곡을 하는 것은 흐름과 예배의 진행에 있어 어색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엎드려 절하세라는 곡을 통해 하나님을 실컫 경배했는데. 그 다음 곡이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라는 곡이 나온다면 어색한 것이다.

 

3.     콘티짜기의 실제

가.   직접 예배하면서 콘티를 짜라

콘티는 머리로 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예배를 드려 보면서 그 다음 곡으로 무엇이 적당할 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직접 예배하면서 은혜 받은 곡 만이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절대 머리로 콘티를 짜지 말라.

나.   너무 많은 곡을 하려고 하지 말라.

찬양은 메시를 갖고 있다. 메시지는 단순할수록 좋다. 초보 인도자들이 빠지는 오류중에 하나는 너무 많은 곡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곡을 빠뜨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설교에서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먹을 수 없듯이 너무 많은 곡을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다.   성령의 도우심은 필수다.

모든 것이 완벽할지라도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역사하심이 없는 콘티는 울리는 꽹가리 일뿐이다. 콘티를 짰다면 반드시 그 콘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이 이 콘티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Posted by speramus
묵상2010. 5. 15. 00:05
누가복음 17: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오늘 말씀에서는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예수님께 구할 때는 언제고, 자신이 구한 것을 들어준 후에는 예수님은 잊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이걸 잘 설명해주는 속담이 바로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오늘 말씀을 따라 도식화를 해 보겠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은 모두 간절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예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깨끗케 해달라구요.'
그냥 민둥민둥 서서 구했을까요? 엎드렸겠죠?
그런 후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낫게 해주시지도 않고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보이라 하십니다.
그 문둥병자들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낫는다는 믿음이죠.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누구도 댓구를 달지 않고 문둥병 걸린 그 상태로 뒤돌아 제사장에게 향한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병은 도중에 나아 버립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반응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거죠.
기도 (엎드림) ---- 믿음 ---- 돌아와 반응(다시 엎드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만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나은이는 기도 후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거기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자신이 기도한 것을 믿음으로 얻게 됐다면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둥병 걸린 자가 처음 낫게 해달라고 엎드려 기도한 자리로 다시 나아가 또 다시 엎드렸던 것 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엎드림은 구함의 엎드림이 아니라.... 예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엎드림이며 자신을 낮추는 엎드림입니다.
Response 즉 반응하는 것이죠.

신앙은 구하고 받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고 받은 후 반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하고 믿고 받은 후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엎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 글을 쓰고 보니 너무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ㅠㅠ


Posted by speramus
묵상2010. 4. 29. 08:37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역대하 18장 13절)


아합과 여호사밧은 동맹을 맺고 아람 정벌의 맹약을 맺는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뭔가 찜찜한 게 있었는지

400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이 전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400명 모두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정하신 싸움이니 올라가 승리를 취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안했는지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에게 최종확인을 받고자 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늘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던 선지자이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확인하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가야는 한 나라의 왕에게 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예언자라면 선지자라면, 오늘날로 말해서 설교자라면 이 미가야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말해야 한다. 

비록 그가 왕일지라도 대통령일지라도 상관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것이 예언자이며설교자이다.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목사 개인의 뜻, 자기의 생각, 교훈을 전하기 일색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 말하는 것, 그것이 예언자의 영성이다.

주님 오늘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바대로, 말씀하신 바 대로 전하게 하소서.

그 말씀이 쓴 말씀이든 단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곤고한 자들이 도움을 얻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0. 4. 28. 14:28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12:51-52, 56-57)

예수님께서는 이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상태였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받으실 세례가 아직 더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 세례가 이루어지기까지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고 고백하신다.
무엇때문에 답답해 하시는 걸까?

예수님은 날씨는 분간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절(메시지성경)은 분간을 못하는 사람에 대해
답답해 하신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을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자라 말씀하신다.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는 옳은 것이고 진리인데, 그 것을 분별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답답해 하셨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의 세례는 옳은 것, 진리를 따라가는 길의 종착점에 있는 고난의 세례였다.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옳은 것을 분간하실 수 있었다.
비록 그 옳은 것을 선택함으로 화평이 깨어지고, 분쟁이 발생하고, 가시밭길을 걷게 되더라도....
주님은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셨고 선택하셨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옳은 것을 선택할 것인가? 편하고 평화로운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분명 다르다.
옳은 것을 선택할 경우 화평이 깨질 수 있고, 분쟁이 올 수도 있으며 치열한 싸움가운데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해서는 안된다.

주님 오늘도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옳은 것, 즉 진리를 따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그것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묵상2010. 4. 5. 22:15
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며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어 잠깐....

살아 있을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시신이라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고등부 친구들을 생각할 때, 저는 그런 마음이 정말 부족했습니다.

한 번 나오고 안나오는 친구들....

학원 때문에 몇 달 째 쉬고 있는 친구들...

아무 연락도 없이 소식이 두절된 고등부 친구들.....

이들이 보고싶어 집니다.

이들을 양으로 붙여 주셨는데.... 나는 그들을 찾고 찾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찾아 헤매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찾지 않는 나는 정말 나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고 했는데....

잃어 버린 우리 친구들을 더 간절히 찾고 찾고 또 찾아 나서야 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