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2014. 6. 15. 13:18

<친정아버지 목회>

 

2년 전부터 교구사역을 시작하며 어르신(노인)사역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청년과 청소년들과만 어울리다 어른들을 섬겨야 하니 낯설기 그지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메시지의 변화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비전과 미래를 언급했던 설교의 내용은 어른들에게는 개발의 편자인듯 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뻘, 이모 뻘 되시는 분들의 목자로 지도자로 섬겨야하는 입장이 어색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저분들의 한숨과 저 어르신들의 주름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회의감마저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분은 상주 지역의 천석꾼은 아니어도 오백석꾼의 아들 정도는 될만큼 꾀나 부잣집에서 자라오신 분이셨습니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그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올 정도로 탄탄한 집안이었고 잘 배우신 덕망있으신 분이시죠.

그런데 이 어르신이 10년 전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하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서울에 있던 한옥집을 처분하고 염리동의 단 칸방으로 옮겨 오시면서부터 교회를 다니시기 시작했고 염산교회 교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 어르신은 묵상문자를 보내드리면 늘 답장을 하시며 감사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가르침에 너무 감사하며 계속 배움에 정진하겠습니다.”하시면서 겸손을 표현하십니다. 실제로 문자를 바탕으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신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많은 고통과 시련을 목사님의 참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OOO 올림

 

나이를 불문하고 말씀을 향한 갈망이 성도들에게는 있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나이와 상관 없이 양무리들은 의지할 대상을 찾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분은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절뚝거리시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분이십니다. 작년부터 무릎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작년 가을에 수술을 하기로 하셨었는데 재정부담과 두려움 때문에 수술을 못하셨더군요.

봄 대심방 때 수술하라고 격려해드리면서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에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셔서 병실을 찾아 갔습니다.

같이 간 심방대원들에게 수술을 결단하게 된 배경을 말씀하시면서

목사님이 심방 중에 기도를 해주시는데 힘이 불끈 솟아 올랐어요. 그래서 든든한 마음이 들었고 수술을 결정하게 됐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덧붙여 이런 말씀까지 하시는 겁니다.
수술 후에 목사님이 병실로 들어오시는데 친정아버지 보듯이 반가운 거예요.”

친정아버지를 보는 느낌이란 어떤 걸까? 평생 느낄 수 없는 감정이지만 적잖은 충격이 되었습니다.

어르신 마음이 얼마나 쇠약해지시고 위로가 필요하셨으면 자기 손주뻘 되는 목사를 보며 친정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하시겠는가?

 

이 두 사건을 지난 주에 겪으면서 어르신 목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비록 어르신들이 인생 경험과 연륜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시지만 그들의 마음 또한 기댈 곳이 필요하며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오히려 친정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1983년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오형제중 가장 맞이었던 큰 누나를 서울로 시집을 보내신 부모님은  처음으로 시집간 큰 딸에게서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시던 아버지는 진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 아버지도 우는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친정아버지의 마음이었던 듯 합니다.

먼 곳에 시집보내시며 미안한 마음과 딸의 시집살이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는 마음아니겠습니까?

남자는 강하나 친정아버지는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저의 목회도 어르신을 만나든 젊은이를 만나든 친정아버지 목회가 되리라 다짐해 봅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