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24. 08:03

 함석헌 선생이 쓴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詩)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22. 09:50

<"죄와 벌"에서 나사로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

지난 월요일 한 달마다 있는 '김응교선생님 인문학교실'에 다녀왔습니다.
12월과 1월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강독했습니다.
사흘 앞두고 교수님과 페이스북 친구 맺었다는 죄로 교수님의 발표 제의를 받았습니다.
주제는 "죄와 벌" 소설에서 "나소로의 이야기를 왜 소냐가 읽었을까?"였습니다.
살인자였던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라는 매춘부에게 와서 자신의 만행을 낱낱이 고할 때, 갑작스레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본문을 읽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바로 그 나사로 이야기 말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지요? 그냥 발표하면 횡설수설할까봐 발제 페이퍼를 만들어 갔습니다.
같이간 형님이 그냥 두기 아깝다고 페북에 공유해달래서 이렇게 올립니다.
참고로 1번 이유는 장종혁 형제의 페이스북 포스팅 내용을 인용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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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성에 의한 구원의 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안에 자신의 발작의 통제되지 않는 기폭제를 설치하는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으로 소설 안에 비쳐진 것일 수도 있다. 원전의 냉각수가 고장나듯 불현듯 주인공은 발작을 일으킨다.
제어능력이 없는 기폭제를 설치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인류에게, 이 시대에 필요한 힘은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의 남성적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은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망치고 헝클어놓았다.
이 남성적 엔트로피에 의해 헝클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죄와 벌』에서도 ‘소냐’라는 여성을 통해 ‘라스콜니코프‘라는 그 기폭제를 끌어안아 버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해지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도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나서 그를 향하여 날아올 정죄의 화살을 예상했는데 소냐는 그 모든 발작을 스펀지처럼 다 빨아드려 버린다.
그럼으로 그의 발작은 잠잠해졌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안식까지 누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구원은 여성성의 용서와 용납에서 오는 것 같다.
주인공의 발작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의해 그것이 용납되어짐으로 구원은 외부로부터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무덤을 열어젖히고 감긴 천을 풀어 놓을 대행자 소냐.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사로 이야기(네러티브)를 이 소설에 끌어 온 이유를 먼저 짚고 싶다.
나사로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이며 지은이는 왜 나사로 이야기를 중요한 모티브로 끌어 왔는가?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의 줄거리와 주제를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다가오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심을 알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3킬로 남짓 떨어진 동네다.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여 예수님은 베다니를 들르신 것이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는 예수님과 친분이 깊은 관계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3절), 친구(11절)로 소개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어 장사된지 이미 4일째였다. 무덤의 돌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시체는 천으로 두텁게 둘러 있었다.
슬피 우는 누이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신다(ego eimi - 나는 ~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25-26절)”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좀처럼 보여주시지 않던 눈물까지 보이신다.
예수님은 먼저 동굴로 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 명령하신다.
그런 후 큰 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때 어두컴컴한 무덤에서 손발은 천으로 감겨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는 죽었던 나사로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고 하시며 그를 옭아매고 있던 천을 풀어해치라 명하셨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곧 이루게 될 죽음의 극복, 즉 부활이 상징적으로 선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로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로 시선을 이끌어 간다. 요컨대 나사로의 부활은 곧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부활을 선취하며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왜 그의 소설에 끌어 왔을까? 그것은 에필로그의 끝부분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은 죽었던 자, 갇힌 자, 묶였던 자의 재기(再起, resurrection)이며 대전환을 상징하는 성서의 대표적 사건이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지은이는 죄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삶의 의미를 잃고 쓰러진 청년 라스꼴니코프의 삶의 부활과 대전환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죄에 대한 죄값, 즉 죄의 벌은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로마서 6장 23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청년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의 모형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면 이 나사로의 부활을 왜 소냐가 읽었는가?
소냐를 예수님의 대행자(agent)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셨고 무덤문을 열고 살아난 나사로를 칭칭 두르고 있던 천을 벗겨주었던 대행자가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예수님의 대행자로 라스콜니코프의 부활사건을 도왔던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세상과 단절된 자신이 파놓은 무덤에 갇힌 자였다. 그의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의 전 존재를 죄의 결과인 혼돈과 광기 그리고 정신적인 방황과 분열이 옭아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 대신에 무장해제 시키는 역할을 소냐가 감당했다고 본다. 소냐는 혼자 씨름하고 있던 죄의 문제를 예기치 않은 고해성사를 통해 빛 가운데로 드러나게 해주었고, 라스콜니코프가 타인을 향해 품고 있던 의심과 두려움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죄의 올가미를 풀어해칠 수 있게 도왔던 것이다.

3. 용납받은 치유자 (A forgiven healer) 소냐.
다음으로 소냐가 나사로 본문을 읽었던 이유를 소냐 또한 죄로부터 용납을 받은 경험이 있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맛본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비록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생계형 매춘이었다지만 소냐는 매춘부였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서를 통해 죄의 용서를 깨달았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된 경험을 가진 자이다.
그녀가 죄의 문제를 씨름해 보았기에 그 죄의 강력한 핵주먹에 나가 떨어진 라스꼴니코프를 누구보다 이해하며 도와줄 수 있었다고 본다.
소냐는 용납받은 치유자(a forgotten healer)로 라스콜니코프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길라잡이였던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aeler를 살짝 변형함)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이라 표현하고 싶다.
진짜 치유자는 예수님이라면 소냐는 그 예수님에게까지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고 안내해주며 보호해주는 몽학선생(가정교사)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실재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라는 인도자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되고 참 치유와 구원을 경험한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4. 1. 17. 23:24
죄와 벌 완독.
긴 호흡으로 읽어내야하는 명작 중에 명작.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벌래)같은 존재들은 죽여도 상관 없다 생각하는 한 20대 청년.
평소 이처럼 여기던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우연찮게 현장에 있게된 노파의 순진무구한 이복 여동생까지 죽이며 예기치 않은 죄의 덫에 걸려든 청년.
그를 죄의 형벌에서 건지기 위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나긴 기다림과 사랑. 특별히 소냐라는 생계형 생존형 매춘부 소녀의 애뜻한 사랑에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이야기.
시쳇말로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일종의 추리심리소설이다. 그러나 추리 이상의 그 무언가를 이 소설에서 읽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힘이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한 여인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힘에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인용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를 훌쩍 들어올려 그녀의 발 밑으로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끌어 안았다. 첫순간 그녀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질려버렸다. 그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벌벌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 다 창백하고 여위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원천이되어 주었다.
....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
그의 베개 밑에는 복음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집어들었다. 이 책은 그녀의 것으로 그에게 나자로의 부활 부분을 읽어준 바로 그 책이었다. (죄와 벌 하권 498쪽, 민음사)"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
그의 베개밑에 복음서가 놓여 있었다.
캬~ 너무나 황홀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다니 도스또예프스키는 참으로 위대한 작가로구나!!
아직도 심장이 발렁발렁한다.
좀처럼 잠을 이루기 힘들 것 같은 감동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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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12. 21. 10:27

2010년 12월 종암교회 성탄 발표회 때 사회를 맡았었죠.

그 때 했던 멘트를 공유합니다. 혹시나 필요하신 분들 참고하세요^^

경헌- 안녕하세요. 2010 종암교회 교회학교 성탄 발표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사회자를 서로 소개하겠습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종암교회 교회학교의 마스코트 김수연 전도사님입니다.

수연- 과찬이십니다. 감사하구요. 저와 함께 사회를 맡게 되실 이분은, 자칭 자체발광 아몰레드 전도사라 부르는 종암교회 남자 전도사님 손가락 안에 드는 외모와 영성을 겸비하신 김경헌 전도사님이십니다.

경헌 수연 전도사님 정말 짖꿎군요!! ㅎㅎ 이제 성탄발표회의 문을 활짝 열어 볼까요?

수연 저희가 오프닝 멘트를 , 여러분께서는 박수와 함성으로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준비되셨나요?

경헌&수연 이제 2010 종암교회 교회학교 성탄발표회를 시작합니다.

경헌 번째 무대를 빛내줄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종암교회에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등장해서 팬플룻 붐을 일으키신                있습니다. 누군지 아세요?

수연 박성숙 선생님 아닌가요?

경헌 맞긴 맞는데요. 이분은 그냥 박성숙이라 불리는 좋아하지 않죠. 예를 갖추어 숙사마라 불러주세요.

수연 - 숙사마 밑에서 하드트레이닝으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종암교회의 자랑 어린이 팬플룻 공연을 감상하시겠습니다.

경헌 뜨거운 박수로 맞아 주세요.

수연 정말 하늘의 천사들도 감동하여 떨어지게 만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경헌 수연전도사님은 올해 음악회 가보신적 있나요? (대답하기도 전에) 없으셨다구요. 음악회를 혼자 가서 즐기는 별난 취미니까요 그쵸? ^^

수연 경헌전도사님 정말 짖꿎군요. 내년엔 반드시 남자친구 팔짱기고 음악회 갈거예요.

경헌 여러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요구되는 대목이죠? ^^

       바쁜 일상 때문에 음악회 못보내고 일년을 마무리하시는 분들을 위해 우리 유치부 친구들이 특별히 준비했다죠?

수연 유치부 이시준외 15명의 리듬합주와 김주은외 10명이 준비한 캉캉을 다같이 감상하겠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경헌 전도사님 친구들 혹시 러시아에서 친구들인가요?

수연 정말 잘하죠?

경헌 완벽하고 퍼펙트한 연기였습니다.

       분위기를 전환하는 차원에서 넌센스 퀴즈 문제 나갑니다.

       전도사님께서 문제를 주시죠.

수연 애국가 1절에 군인의 이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군인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이보우 하사입니다. 하나님 이보우 하사!!

경헌 역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김수연 전도사님이라 대단하시네요.

이런 김수연 전도사님의 부서니 기대해봐도 되겠죠?

수연 귀여운 우리 유년부 친구들의 무대죠?

경헌 권영서외 11명이 꾸미는 무대입니다. 크리스마스 윙윙 박수로 맞아 주세요.

경헌 전도사님 저런 귀염둥이 아가 명은 있어야 삶이 든든하던데….

수연 전도사님 이제 그만….. 소개시켜 주시던지요.

경헌 내년에는 하나님이 전도사님에게 정말 소중한 선물을 준비해 두셨을 거예요.

       이번 순서는 이번 성탄 발표회의 꽃입니다. 뭔지 아세요?

수연 뮤지컬아닌가요?

경헌 맞습니다. 종암교회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렇게 끼가 많은 친구들이었나 생각하실만큼 확실한 무대입니다.

       제목이 뭔가요?

수연 크리스마스 기차예요.

경헌 크리스마스 기차라….. 설마 산타크로스가 눈썰매 대신 기차를 타고 선물을 갖고 오는 아니겠죠?

수연 전도 정말 기마 코막히네요 그쵸~~ 당신하고 기차 마음이 없어요. (여기서 빵터져야 되는데 ,.)

경헌 크리스마스 기차를 연출하시고 연습시켜주신 선생님이 있죠? 누구시죠?

수연 저희 유년부의 박세찬 선생님이 준비해 주셨어요.

경헌 박세찬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드리면서요, 우리 친구들 뜨거운 박수로 맞겠습니다.   박지민외 15 명이 준비한 뮤지컬 크리스마스 기차입니다.

수연 성탄절을 맞는 우리에게 예수님께 드릴 진정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너무나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경헌 종암교회 유초소 친구들이 정도로 끼가 많을 지는 정말 몰랐네요. 다시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수연 다음은 마지막 순서죠?

경헌 근데 다들 별로 아쉬워 하지 않으시는 같아요. (~~~~ 아쉬움 유도)

       여러분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문제 하나 나갑니다. 맞추시는 분에게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전도사님이 문제 내주시죠.

수연 아니 이번에는 전도사님이 준비하신 문제를 주시죠.

경헌 사자로 끓인 국을 다섯 자로 줄이면 뭐가 될까요?

       동물의 왕국입니다.

경헌 끼에서는 둘째가면 서러운 친구들이 있죠.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의 화려한 춤무대가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저를 닮아서 그런지 춤을 추더라구요.

수연 ~~~ 전도사님 말로만 하시지 말고 직접 보여주시죠.

경헌 보여줘야 압니까? 그냥 넘어 가죠. 우리 친구들이 대신 보여줄 겁니다.

       중고등부 친구들을 박수로 맞아주시죠.

경헌 이제 우리 예수님의 생일파티 시간입니다. 우리 맘을 다하여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드리면 좋겠어요.

수연 유아부 친구들이 앞으로 생일케익을 운반해 주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11. 24. 19:26

모짜르트 바쑨 콘체르토를 들으며 

김회권 교수님의 <청년 설교3>을 읽는데 

공교롭게 클레식 음악에 관한 부분을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네요.

딱 이거다 싶어 아래에 인용합니다. 특히 청년들이 주목하여 볼 부분입니다.


"특히 저녁 산책이나 아침 산책 다음에 매일 클래식 음악을 40분씩 듣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클래식 음악을 한 시간씩 조용히 듣고 즐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눈을 감고 음악의 선율을 따라 정신을 유영시키면 고결한 상상력이 자랍니다. 

한 악장에 15분 정도 걸리는 음악 세 악장을 듣는 데 40-50분이 걸립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동안은 우리의 야생마 같은 생각도 침묵과 경청 모드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집중되고 초점 잡힌 수동적 수용 모드가 이런 음악을 들으면 잘 형성됩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서 요청되는 수동적 수용 모드가 기도할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물론 훌륭한 음악 감상이 주는 영혼 고양적인 감정의 방출은 그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만 말이 없는 기악곡을 오랫동안 듣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단 대중가요보다 클래식 기악곡을 듣고 즐기는 데는 추상적 사고가 요청됩니다. 

추상적 사고를 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추상적 사고가 발달한 범게르만족들 사이에 클래식 음악이 발전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은 논리학과 수학과 철학을 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요? 아무 메시지가 없는 음악을 계속 듣고 즐기는 것은 추상적 사고로 단련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15분짜리 기악곡 3악장 음악을 매일 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도 훈련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그런 음악 듣는 것을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부 다 영어 단어 외우기나 미적분 푸는 데 처년의 가장 고귀한 순간이 탕진되고 있지 않습니까? "


김회권, <청년설교 3>, 20쪽 인용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8. 7. 21:40
주변 3강에 끼인 한반도의 현실에서 바라본 대화록 공개

1. 일본
6.25 전쟁은 일본에게 2차대전 패배 복구의 호재였고,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전쟁 이후 남한의 군사국화는 일본을 상대적으로 경제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북한의 핵문제와 위협은 일본 우익정치인들의 인기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며, 평화헌법 폐지와 재무장 추진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2. 중국
6.25참전에 엄청난 사상자를 감수했기에 북한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북한은 완충역할을 해준다. 북한 문제는 중국의 외교적 협상력을 높여주고, 미국이 중국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최근 남북관계 경색으로 경제 협력이 약화되믄 상황에서 중국의 공세적 북한투장와 자원확보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자신들의 공산주의 개혁모델로 생존하기를 바란다.

3. 미국
북한핵문제는 미국에게 필요악이다. 해결을 원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위협으로 존재하기에 누리는 반사이익이 많다. 북한을 핑계로 아시아에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고, 일본과 남한에 무기를 팔아먹어 누리는 수익이 천문학적으로 쏠쏠하다.

결론적으로 주변 3강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 최대한 분단상황을 통해 잇속을 챙기려 한다. 남북간의 상호협력이 중요한 열쇠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남북간의 상호협력을 논의한 두 정상들(노무현, 김정일)의 회담 대화록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게임에서 자신의 전략과 패를 다 꺼내 보이는 것과 같은, 제 정신이라 보기 어려운 결정이다. 당파적 이익을 위해 국익을 팔아먹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복음과 상황 8월호, 이인엽의 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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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7. 24. 10:28

<악의 기원 어떻게 볼 것인가?>

김회권 교수님의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강독의 일부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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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악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악은 피조물 본성의 타락이 아니라 의지의 우발적 타락, 

즉 선의 결핍을 주장한다. 

이것은 일원론적 선절대주의다. 

이렇게 말하면 악이 피조물에게서 기원했다고 인정하게 되고 

피조물을 신적존재로 인정하게 되어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선의 현저한 우위성을 강조하는 면은 칼 바르트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악은 분명히 실재하는 우주적 기원을 가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악의 갈등양상을 인정하는 준이원론적 신학인 유대교신학의 도움을 받게 된다. 

유대교 신학은 악의 우주적 기원을 인정하며 

악과 선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면서 선의 비대칭적 우위를 주장한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악을 1 대 0.999로 설정함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서 악을 제압하며 통제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사야45: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의하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비적극적으로 악을 만드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전능성 안에서 악을 통제하시며 

피조물의 악에 대해 스스로 무한 책임을 지셔서 악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부분에서 교수님은 한 예를 드신다.

"내 아들이 노트북을 망가뜨렸을 때, 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니가 이렇게 실수할 것까지 예상하고 너를 낳았단다'

아들이 노트북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내가 책임을 집니다.

아들 니가 고장냈으니 니가 고쳐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악과 타락에 대해 본인이 무한 책임지시기로 하신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무한 책임의 모습이다.

자신이 직접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다.


악에 대해서 스스로 무한 책임을 지면서 악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악에 대해서 싸우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유대교신학이고 본회퍼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악의 문제와 맞딱뜨린다.

악의 문제 때문에 절망하며 하나님을 의심할 때도 있고 원망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죽은 것 같고 패배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신다.

악을 종국에는 제압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다. 

악을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스스로 무한 책임지시고 처리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이것을 신본적 낙관주의라 한다.

하나님이 결국에 악을 제압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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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본성의 타락이 아닌 의지의 타락에 의한 악의 우발성의 교리보다,

유대교 신학과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학이 옳아 보인다.

악의 파괴성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악의 문제와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실 것이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7. 10. 07:31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믿음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한 영혼과 한 민족을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나는 이 책을 통해 듣는다.

그리고 한 없이 힐링 받으며 울었다.

내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블랙마운틴의 노년 선교사들을 통해 배운다.


1. 책과의 만남

같은 믿음의 길을 가는 형제, 김도영 형제의 소개로 이 책을 만났다.

책을 소개하며 "힐링 받게 될 거야"라고 일러주었다.

"과연??"이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열었다.

그러나 답은 과연 힐링이더라는 것이다.

홍대입구역에 있는 IVP 서점에서 이 책을 찾았을 때 없어서 아직 많이 보급이 안된 책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신촌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 책을 찾았다.


2. 한국 선교사들의 이삼대 선교사들의 이야기

이 책은 한국에 오신 선교사들의 후손들의 선교이야기다.

시기로 따지면 일제 강점의 말기부터 6.25 동란 이후의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지금은 은퇴하여 미국의 선교사 은퇴 마을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블랙마운틴'에 모여사는 선교사들과의 인터뷰이다.

물론 그 외의 지역에 사는 선교사들과의 만남과 대화도 다수 있다.

지은이는 선배가 우연히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한국말을 하는 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선배가 만난 사람은 한국 선교사였고, 은퇴한 선교사들이 모여사는 블랙마운틴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지은이는 그 선교사들이 돌아가시기 전, 그 아버지 선교사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직접 미국으로 건너갈 프로젝트를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


3. 부르심과 순종에 대해 생각하다.

열 명 가까운 선교사들과 그 부부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등장한다.

한 결같은 그들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겸손히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추대받고 칭송받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그들이 한 것이라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주의 일에 뛰어든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선교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부르심의 자리에 있는 삶,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곳, 그 위치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4. 선교사 가문 만들기?!!

20대 때, 중국 감숙성에서 단기 선교로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선교를 하는 것보다 우리 자녀들이 훨씬 더 역동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선교사 가문만들기를 꿈꿨었다.

내 자녀들이 2세 선교사로 훌륭한 사역들을 감당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 좋은 롤 모델을 이 책을 통해 보게 된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기 힘들고, 선교사의 자녀가 선교사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 부모가 어떤 삶의 본을 보였을지, 이삼대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5.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며 복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어떤이에게 복음은 축소가 되고, 어떤이를 통해 복음은 왜곡된다.

하지만 이 노년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복음을 따르는 자가 마땅이 보여야할 반응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이다.


6. 소감

요즘 큰 진로를 생각하며 길라잡이 책들을 원했다.

최근에 읽은 '공부하는 삶'이 그런 책이었다.

평생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 책을 통해 깨닫고 또 개닫는다.

책을 덮으며 한참을 울었다.

이름 없이 살아갈 길, 사랑하며 살아갈 길, 내 앞에 놓여진 그 길을 먼저 걸어간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리라.

책의 마지막에 있는 글귀

"지금도 이름 없는 선교사로 전 세계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많은 선교사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를

읽으며 한 없이 울었다.

도영의 권면처럼 참 많은 힐링과 감사를 준  책이다.

여름선교 시즌인데, 선교지에 갈 때, 꼭 이 책 한 권씩 들고 가서 선교사님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

선교사님들에게도 큰 힐링이 되는 책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3. 3. 27. 07:29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 라틴어 직역>

사순절 기간을 맞아 좋은 성가 곡 가사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원래 라틴어 가사인데 
우리말 가사는 그 원래 뜻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것 같아
제가 직접 한 번 직역해 보았습니다.
한군데 약간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figuris terminum)이 있었는데
라틴어 고수들이 좀 보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 라틴어 직역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천사들의 빵이 사람들의 빵이 되었다.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하늘에 속한 빵이 형상들에게 끝을 보여줍니다. 
(하늘의 빵이 형태로 보여질 수 있는 한계, 즉 형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궁극점을 나타낸다는 표현인데... 쉽게 말해 성육신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표현입니다.)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오~ 신비로운 일이여, 주님을 먹는구나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종이...
가난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종이...


2. 의역

천상의 양식이 사람들의 양식이 되었네~
하늘의 양식이 형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끝을 보여주셨네(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네)~
오 신비롭지 아니한가?
가난하고, 빈궁하며 겸손한 종이 주님을 먹는구나~
가난하고, 빈궁하며 겸손한 종이 주님을 먹는구나~

3. 묵상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성만찬(Eucharist)이지요.
이방종교는 신이 인간을 먹지만
기독교의 신은 인간에게 먹힘을 당합니다.
피조물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신,
그는 육신을 입고 그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자기 내어줌의 궁극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신비롭고 경이롭지 않습니까?
주님을 먹는구나, 주님을 먹는구나!! (manducat dominum)
그 놀라운 자기 내어주심과 희생을 찬양합니다~
끝으로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성으로 곡을 감상해 보시죠~~

http://youtu.be/rHKQYFgkcB8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2. 10. 12. 07:38

우리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잘 살고, 성공하고, 탑이 되어야하고, 머리가 되어야 한다구요.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그런 높아짐이 아니더군요.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극한의 겸비이며 신적인 겸손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4-5)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낮아질 대로 낮아지셨으며

비참할대로 비참해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올리십니다.(요한복음 17장)

"아버지 내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오니 나의 순종을 붙들어 주옵소서"

영광은 극한의 겸비와 극한의 순종에서 나옴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답시고 더 높은 자리, 더 빛나는 영예, 더 풍요로운 삶을 바라며 고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 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심과 허영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삶,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 것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내 삶의 순종과 낮아짐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나는 쇄하여야겠고 아버지는 흥하셔야겠습니다.

할렐루야~


(위의 내용은 저의 깨달음이라기 보다 가르침을 통한 배움이었습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