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작품들2012. 9. 15. 21:11

이번 주 암투병을 하시던 한 여자 집사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셨죠.

저는 그분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숨을 거두시는 그분을 지켜보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읽어 드리며 임종을 맞게 도와 드렸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평안히 잠이 들어 가시더군요. 그래서 죽음을 잠이 든다고 표현하나 봅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닫힌 문을 열고 저 피안의 세상,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구요.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죽음을 묵상한 글 중에 헨리나우웬의 글만큼 인싸이트를 주는 글도 없을 겁니다.

그의 글을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 대화는 엄마의 자궁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란성 쌍둥이들의 대화입니다.



[죽음 가장 큰 선물], 홍성사, 40-42쪽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여긴 어두워도 따뜻하지,
또 우리를 먹여주고 살려주는 탯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딴 일을 할 필요도 없다구"

여동생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캄캄한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거야,
어딘가 다른 곳 말이야. 마음껏 움직일 수있고
환한 빛이 비치는 곳이 반드시 있을거야"

그렇지만 
여동생은 쌍둥이 오빠를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재빠르게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엄마라구?" 
그는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구 
어떤 놈이 그런 생각을 자꾸 불어 넣는거야?
내가 말했잖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왜 늘 그 이상을 바라는거야? 
이 곳도 알고보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야
우리에게 필요한 게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만족하도록 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잠시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자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고 
쌍둥이 오빠만이 유일한 이야기 상대였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쪼여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땐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음... 내 생각엔 이 꽉 쪼이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되지 않아?"

 

바보 같은 말에 질려 버린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오빠는 동생이 자기를 제발 내버려 두기만을 바랐습니다.


< Life after Birth - A Parable >

In "Our Greatest Gift," Henri Nouwen tells a parable of faith and hope. He imagines twins–a brother and a sister–talking to each other in their mother's womb:

 

The sister said to the brother, "I believe there is life after birth." Her brother protested vehemently, "No, no, this is all there is.

This is a dark and cozy place, and we have nothing else to do but to cling to the cord that feeds us." 

The little girl insisted, "There must be something more than this dark place. There must be something else, a place with light where there is freedom to move." Still, she could not convince her twin brother.

After some silence, the sister said hesitantly, "I have something else to say, and I'm afraid you won't believe that, either, but I think there is a mother." 

Her brother became furious. "A mother!" he shouted. "What are you talking about? I have never seen a mother, and neither have you. Who put that idea in your head? As I told you, this place is all we have. Why do you always want more? This is not such a bad place, after all. We have all we need, so let's be content."

The sister was quite overwhelmed by her brother's response and for a while didn't dare say anything more. But she couldn't let go of her thoughts, and since she had only her twin brother to speak to, she finally said, "Don't you feel these squeezes every once in a while? They're quite unpleasant and sometimes even painful." 

"Yes," he answered. "What's special about that?" 

"Well," the sister said, "I think that these squeezes are there to get us ready for another place, much more beautiful than this, where we will see our mother face-to-face. Don't you think that's exciting?"

 

The brother didn't answer. He was fed up with the foolish talk of his sister and felt that the best thing would be simply to ignore her and hope that she would leave him alone.

 

- Henri Nouwen, Our Greatest Gift: A Meditation on Dying and Caring (Harper: SanFrancisco, 1994), . 19-20. -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2. 7. 10. 07:17

도종환 <다시 피는 꽃>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둘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저를 갈게 한 강물의 소리 알아듣고

물밑 가장 낮은 곳으로 말없이 돌아가는 물고기

제가 뿌리내렸던 대지의 목소리 귀담아듣고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내주는 꽃과 나무

깨끗이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2. 7. 10. 07:16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해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2. 7. 10. 07:14

도종환 <봉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단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Posted by speramus
2012. 2. 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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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작품들2011. 12. 24. 13:49
어제 녹화 예약 해 두고 잔 <울지마 톤즈>가 잘 못되어
35분 밖에 녹화되지 않았습니다.
35분 동안 영화의 끝 부분을 보는 내내 울었습니다.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걸으신 분.
전쟁으로 폐허된 수단의 어린 영혼들의 친구로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가 주신 고 이태석 신부님의 아름다운 향기가 저를 흠뻑 젖게 하는군요.

말과 허울 뿐인 선교사였던 제 삶에 공명되는 바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사역자로 목사로 살아가는 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광주의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돈보스코 회의 신부님들이 오버랩 됐습니다.
그 때의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수단에서 성 돈보스코의 사랑을 본 받아 
헌신 하셨을 이태석 신부님의 진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총자루를 녹여 트럼펫과 트롬본으로 바꾼 브라스밴드 사역은
참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영혼을 녹이는 사역, 나중에 한 번 해보고 싶은 사역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이사야 2:4절 중)"
전쟁의 참혹한 땅에 음악이 흐르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다 가신 고인의 귀한 사랑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 눈물을 잃어 버린 아이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친구요 꽃이었던 이태석 신부를 향한
눈물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본격적인 전임 사역을 앞 두고 
저 또한 다짐합니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고, 
아직도 피어내지 못한 꽃망울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역자 되겠노라구요...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그런 사역자가 되겠노라구요... 
Hope for the flowers!!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1. 12. 12. 22:49


여호와께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  (이사야 3장 14~15)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의 음식이 되는 건가? 지배층들의 음식.
가난한 사람들이 지배층의 음식이 되는거죠.
실제로 반성만찬이 일어난 거예요.
이 세계는 anti sacramentalism이야. 원래 성만찬은 뭐예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음식이 되어주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 몸을 인간의 음식으로 주는 게 뭐예요? 이게 성만찬이죠. 그 다음에 인간의 몸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건 몰렉 제사죠.
이교도 제사의 특징은 뭐냐면, 이교도 제사는 인간의 몸을 신의 음료로 드리는 것이야.
그런데 신의 몸과 신의 피가 인간의 음료가 되는 거, 이 거대한 전치.
이교도 종교와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이게, 종교의 완전한 전복, 이게 바로 성만찬이거든.
하나님께서 인간의 음식이 되는 것이 성만찬이란 말야.
그런데 이 세계는 반성만찬적이죠.
부자가 가난한 사람 얼굴을 맷돌질하니까.
순두부처럼 맷돌질하는거야 이렇게. 두부 만들려고.
그러니까 뭐냐면 이 세계의 구조가 너무 악한 건데, 시간 강사에게 시간당 3만원 주고 정교수가 월급 많이 받는 것도 결국 반성만찬적입니다.
현대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것도 반성만찬적이야.
이 세계의 구조 전체가.
부자는 세금을 낼 때 어떤 속죄와 대속의 의미가 있어요.
자기 죄를 대속, 속죄하는 의미가 있어 실제로 그 안에는.
거기에 축재의 과정에 정의롭지 못한 과정이 있어요 실제로.
왜 똑같은 노동을 하는데 시간 강사는 150만원 받고, 정교수는 300만원 받습니까? 물론 여기서 절대적인 자격이 있냐? 그건 아니거든.
예를 들어 시간 강사가 강의 평가 60점인데 정교수 90점 맞는다 그건 아니거든.
똑같다고 대개 박사과정들은. 오히려 젊은 사람이 더 강의를 잘하지 늙은 사람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금을 내는 과정이나 이럴 때, 이 체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불의한 재산이라는 말을 썼어 예수님이.
재산은 기본적으로 불의한 거야.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재산은 기본적으로 불의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재산 전부에 대해서 불의한 재산이라는 말을 썼어.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재산으로 친구를 사라. 이게 예수님께서 말한 현명한 자에 대한 거거든.
그래서 얼굴에 맷돌질한다. 이거 참 너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다 실제로. 어떻게 이걸 극복할 수 있을까얼굴에 맷돌질 하는걸.

-김회권 교수님 수업시간에....-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1. 10. 8. 07:07

구약 성경은 진노의 엄정성과 심판의 엄정성 보다 불합리한 은총의 무궁함이 더 크다고 이야기 합니다. 왜 불합리한가? 계산으로 보면 불합리합니다. 진노는 잠깐이요 인애는 영원하다. 이것은 비대칭적 동등성이다.
 
죄는 삼 사대까지, 인애는 천 대까지. 진노가 오기는 오는데, 천천히 오는 것입니다.
 
진노가 더딥니다. 진노 오기 전에 벌써 회개하기 때문에 진노는 더 천천히 옵니다.
‘이놈아 매가지고 간다’ 했는데, 매 가지고 간다고 하니깐 숙제 다 해놓습니다.
진노가 갔더니 이미 은총의 효력으로 인간이 바뀌어 있습니다. 진노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진노가 너무 늦게 작동합니다.
 
진노가 더디다는 말은 진노는 오작동하지는 않지만, 진노는 항상 있지만, 은총의 신속한 작동과 민첩하고 우선적인 역사함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를 극복한다는 말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1. 9. 6. 17:18


짧지만 메시지가 강한 동영상이네요. 

설교시간에 써먹으면 참 좋겠죠?? ㅎㅎ 
Posted by speramus
좋은 글과 작품들2011. 7. 7. 13:28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결코, 단 한순간도 인간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앞에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이 주체입니다. 말씀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

목사들도 말씀 앞에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목사의 선포에서 놀라운 감동이 일어난다면, 이는 전적으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선포자의 능력이 아닙니다. 목사든 전도사든, 모든 선포자들은 말씀 앞에서 겸손해 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설교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내가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동건,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대한기독교서회, 56-57쪽>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돼야한다는 말에 큰 공감이 간다.
설교자가 재단을 하여 설교자의 느낌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학의 등장으로 말씀은 객체가 되고 해석의 주체인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말씀을 재단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는 정말로 위험한 발상이다.
말씀은 해석의 객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말씀앞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나의 교만을 본다.
나는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은근히 좋아했고, 그 말을 들으려고 노력한다.
결코 말씀이 주체가 되어 말씀앞에 서지 않는 태도이다.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게 해야 한다. 말씀의 능력 앞에 콘트롤 되어야 한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굴복시키도록 나를 말씀의 권위에 내어드려야 한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