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4. 12. 27. 06:51

<면제, 그 놀랍고 파격적인 사랑>

 

신명기 15장과 16장은 안식일 규정의 각론입니다. 4계명인 안식일 계명이 뭡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남종이나 여종이나 객이나 가축들이라도 7일째 되는 날에는 쉬게 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 규정의 특징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해방했던 것을 기념하여 안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밧은 멈추다, 그만 두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멈춤의 시간이며 그만 두는 시간입니다. 일을 멈추는 것이고 전진을 멈추는 것이며 생산을 멈추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휴게소에서 멈춥니다. 멈추어 쉽니다. 그 쉼을 통해 오히려 더 창조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안식일을 잘못된 관점으로 보면 버리는 시간입니다. 쓸모 없는 무용의 시간인 것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멈추라 하시고 브레이크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간을 버리면서 함께 쉼을 누리라는 겁니다. 함께 쉬어야 할 대상은 가족 구성원 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포함되며 소나 나귀 같은 가축까지 예외 없이 쉼을 주라는 것입니다.

 

15장은 안식일처럼 매년 7년마다 노예들과 땅에게 쉬는 시간을 주라하는 규정입니다. 7년에 한 번 멈춰 서라는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아라는 겁니다. 노예 소유자들이 7년마다 노예를 해방시키고 노예를 풀어줌으로서 이집트 탈출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셨던 구속 활동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 소유주들이 하나님 역할을 대신하여 구원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년에 한 번씩 사회적 해방과 질서재편을 명령함으로써, 가난과 부의 세습을 원천 봉쇄하고 있습니다. 7년에 한 번 해방이 되지 않으면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가 됩니다. 이런 파격적인 법이 있다면 여러분은 순종하시겠습니까? 만원짜리 한 장 빌려주고도 그것을 갚지 말아라고 하기 어려운데 노예 한 명을 7년에 한 번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이 면제년법이 성경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지키기 힘든 법이라 봅니다. 그리고 면제년 법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담고 있는 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히브리 사람인데 왜 노예가 되고 종이 됐을까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벌어 먹을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므로라는 말은 가난은 항상 있게 마련이잖아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거리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근본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땅의 소산물로부터 끊겨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해야 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소산물을 누리는 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경제적 정의와 평등의 원리를 형제의 논리로 풀어가십니다. 가난한 자를 이웃과 형제로 보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원리인 것이지요. 사람이 돈의 많고 적음으로 귀천을 나누지 말라는 엄청난 정의와 평등의 논리가 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 공동체로 바라보시며 언약 공동체의 공동체적이고 연대적인 삶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의 짐을 덜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아들 형제가 있습니다. 큰 아들은 부자이고 둘째 아들은 가난합니다. 큰 아들은 둘째보다 힘이 쌔고 지능도 더 좋습니다. 그 녀석은 모든 장난감과 먹을 것들을 선점하여 독차지 합니다. 둘째는 형의 착취 때문에 항상 손가락을 빱니다. 둘째를 지켜보는 아비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비인 제가 큰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입니다. 나눠주어라. 나눠 먹어라 입니다.  동생을 종처럼 압제하고 두들겨 패지 말고 너그럽게 베풀어 주어라 입니다. 왜냐면 그 둘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제인 노예들이 7년에 한 번 안식을 누리고 풀려나야 할 이유입니다. 매년 7년마다 50년마다 채무와 가난, 땅 없이 사는 불안정을 초래한 시간은 정지되어야 합니다. 그 정지를 통해 새로운 자유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로서 연합과 연대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우리는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집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앙과 경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탐욕을 멈출 때, 더 갖고자 하는 소유욕을 멈추고 나누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은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고 기준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풀어가야 할 정의와 분배의 숙제이지 개인의 운명이 아닌 것이죠. 대한민국이 좀 더 경제적의 정의와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작은 실천일지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로 보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합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월세를 받고 계시는 임대인이 계시다면 임차인의 월세를 내년에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받는 것은 어떨까요? 월세 10만원 올려 받지 않고 면제 해 주는 것이 그 임차인에게는 큰 짐을 더는 것일 수 있습니다. 면제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의 구체적이고도 파격적인 실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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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12. 26. 17:06

2014년 12월 26일 새벽설교

본문 : 신명기 13, 14장


여러분 번성해지고 싶으십니까? 잘 살고 싶으신가요? 제가 번성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죽이십시오 그러면 번성해 집니다. 뜬금 없이 죽이라니 뭘 죽이란 말입니까?라고 물어 보시겠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고자 나를 유혹하는 모든 요소들을 다 죽여 없애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욕심과 탐욕이라면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엄청난 명령을 하십니다. 꿈꾸고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너희를 미혹케 하거든 그를 쳐 죽이라 하십니다. 우상숭배하도록 유혹하는 자가 혹시 내 형제 자매나 부모 중에 있다하더라도 가차 없이 죽이라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한 성읍이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지거든 그 성 전체를 진멸해 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헤렘이라는 것인데요 배교가 일어난 도시에 대한 처벌로서 성읍 전체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 전쟁임을 이 본문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13장 끝의 두 절에서 이렇게 악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복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셔서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상숭배하도록 유혹하는 꺼리들을 모두 없애버리라고 죽여버릴 때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최근 홍혜선이라는 전도사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합니다. 12월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설쳐댔습니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은 해외로 나가버렸습니다. 12월이 다 가고 있는데 전쟁 소식은 들려오지 않네요. 저는 이런 작자들을 무당 수준의 사이비 집단으로 봅니다. 예언이랍시고 공포를 조장하는 거짓 술수들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며 말씀하지 않습니다. 13 3절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오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지 검증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는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 선지자의 말에 놀아 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분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나 안하나 자신을 살필 것인지 우리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선지자나 꿈꾸는 자랍시고 설치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고 분별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런 예언의 효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삶의 태도입니다.

 

신명기 14장은 장례와 음식문화 그리고 소득의 거룩한 처분을 통해 구별된 백성이 되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나라는 되게 장례문화가 복잡해 보입니다. 이집트도 장례문화가 복잡했고 가나안의 민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의 장례문화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장례문화라고 할 것 조차 없는 수준이었죠. 예수님께서도 죽으시고 시신을 그냥 무덤에 갖다 놓은 정도잖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서 나온 겁니다. 죽음을 미화하거나 극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썹을 밀거나 털을 밀거나 하는 이방민족들의 장례 풍습을 따라가지 말라 하십니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는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자나 호랑이같이 고기를 먹는 동물들은 사납습니다. 하지만 소나 양같이 채식을 하는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온순하죠. 사람도 부정하고 맹폭한 맹금류와 육식성 짐승고기를 먹는 사람은 맹폭한 맹금류의 잔인한 야수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피를 흥건히 흘리는 날고기를 뜯어 먹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섬뜩하죠?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자도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한 말씀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장례 문화나 음식문화는 종교적인 가치가 우리 삶에 내면화되기 위해 동원되는 가장 일상적이고 초보적인 통로입니다. 이런 일상적이고 초보적인 것들에서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한 소득을 거룩하게 처분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방민족과 구별되어라고 하십니다. 3년마다 십일조를 내라 하십니다. 어떤 목적으로 3년에 한 번 십일조를 내라시나요? 그 돈으로 긴급구제를 위한 사회복지 기금으로 쓰라고 하십니다. 자비와 사회적인 자선의 행위들이 가져오는 신적인 축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돌리는 힘을 투자와 생산 그리고 소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난한 이웃들에게 쏟아 붇는 자비와 사회적 애휼이 경제번영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해야 사회복지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회복지를 늘릴 때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오늘 번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가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버려라. 다 쳐 내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맘몬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쳐 죽이십시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 등의 일상생활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매우 번성하고 번영하게 하며 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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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12. 26. 17:05

2014년 12월 25일 새벽 설교

본문 : 신명기 12장


성탄의 귀한 새벽 아침을 여시는 여러분의 삶이 복되십니다. 신명기 12장을 통해 성탄 아침 주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를 신명기 법전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신명기 법전은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대한 시행 세칙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이 헌법이고 그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세부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12장부터 26장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 첫번째 장으로 12장은 십계명의 1계명에 대한 시행세칙입니다. 1계명이 뭡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모든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 홀로 우리의 모든 순종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12장 전체의 내용은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올바른 예배란 올바른 대상을 향해야 하고, 올바른 장소에서 드려져야 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드려져야 하고,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순종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배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쉬운 말로 나만 봐~”를 요구하신다는 거죠. 어제 수요예배 설교에 홍지애 전도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시더군요. 동물 조련사가 사자 같은 맹수를 길들일 때 책상을 들고 다리가 사자를 향하게 들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사자는 책상의 네 다리를 동시에 보려다가 집중력을 잃고 무력해져서 조련사의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만보라고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다수의 신들은 무질서하고 가증스럽게 인간의 충성심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펼칩니다. 돈 권력 섹스가 세상의 신들이 입고 있는 대표적 옷입니다. 그런 것들에 눈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 하십니다.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에게만 일편단심 순종을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예배의 장소는 어떤가요? 예배의 장소 또한 인간이 선택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다스리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방식은 어떤가요? 본문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예배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결속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공동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예배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예배당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의 또 다른 방법으로 이방종교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라 하십니다. 가나안 제의의 가장 큰 특징은 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방법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할 것입니다. 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의 이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옛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로의 이행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 여러분은 고민해 보셨나요?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어떻게 크리스쳔이 되었는가?”에서 일본의 다신교 사회에서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것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이 섬기던 마늘신, 달걀신, 활의 신, 그리고 글쓰기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합니다. 우찌 무라 간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기 위하여 모든 다른 신들의 이름들을 도말해 버렸습니다. 아예 그의 사전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지워 버린 겁니다. 우리도 오늘 이 기도시간을 통해 다른 신들의 이름을 우리 삶에서 다 지워 버립시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남겨두고 다른 신들을 지워 버립시다. 돈 섹스 권력 등으로 치장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모든 헛된 신을 다 지우고 우리 하나님께만 일편단심으로 예배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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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12. 12. 04:5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두 가지 제도를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레위인들의 성읍과 땅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도피성에 관한 제도입니다. 이 두 가지 제도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성품을 발견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레위인들의 성읍과 기업에 관한 제도를 봅니다. 레위인들이 영구적인 경작지인 농토를 받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거주지와 목초지를 할당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의 생계는 일반 세속 지파들의 아낌 없는 예물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일반 세속 지파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고 레위인들은 일반 지파가 받은 복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인 것이죠. 이것은 레위족과 나머지 세속 지파들은 상호 의존적으로 번영하도록 예정된 것이지요. 우리 교우들의 관계가 서로 이런 상호 의존적으로 번영하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빌어주는 복으로 니가 잘되고, 니가 잘 되어 나에게 도움을 주고 또 나는 너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뭐 이런 관계인 것이죠.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을 빌어 주십시오. 그 사람이 잘 되도록 말입니다.

 

두번째 법령은 도피성 제도 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뭐냐면요 사적인 보복을 억제하기 위한 법입니다. 도피성제도는 고의가 없이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보호하는 법입니다. 도피성은 일종의 감옥입니다. 비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가게 되는 수감되어 보호되는 감옥인 것이죠. 이 법이 만들어질 당시 문화로는 살인을 당한 가족이나 친족이 살인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친족 피붙이 복수법이라 했습니다. 친족 비붙이를 전문적으로 고엘이라 불렀는데요. 이 고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법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도끼로 나무를 자르다가 그 도끼 자루가 빠져서 친구를 죽였을 때 그 친구의 아들이 친족피붙이 복수법에 의해서 그 살인자를 잡아 죽이지 못하도록 6개의 감옥 중에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고의적인 살인이냐 비고의적인 살인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기관이 하는 것이죠. 오늘 날로 치자면 검찰과 판사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에 의한 사법기관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회중들이 판단했습니다.

 

비 고의적이고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것이 판단될 때 회중들은 그 살인자를 도피성 감옥으로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이 비고의적인 살인자가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는데 대제사장의 죽음입니다. 그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죽지 않는 이상 풀려날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풀려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보석금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면 돈으로 해결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곳의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무는 것이거든요. 제사장의 죽음 없이는 죄가 해결이 안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없이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못하는 원리와 같은 원리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죠. 제사장의 죽음으로만 그 죄인의 죄가 끝이 나듯,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우리 죄가 해결되는 놀라운 원리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피성이 개입되기 전에는 아까 말씀드린 친족 복수법이 있었습니다. 친족복수법은 당사자 해결의 원칙입니다. 사법기관이 필요 없는 겁니다. 당사자 해결의 원칙의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21:23의 동해동량보복의 법칙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해에 대해 똑같은 량으로 갚아주라는 법이죠.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니까 잔인한 법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 동해동량 보복법은 결코 잔인한 법이 아닙니다. 이 동해동량보복의 법칙이 왜 잔인한 법이 아니냐면, 최소보복의 법칙을 어필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성경은 참 잔인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그런데 원래는 초과보복을 할 마음이 있지만 하지 말고 똑같은 양으로 보복하라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당한 것의 배로 갚아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볼팬으로 내 눈을 찔렸다. 그러면 내 눈이 찔린 상태에서 공격을 먼저 당한 사람은 증오심과 복수심이 훨씬 크기 때문에 두 번은 찔러야 그 마음이 풀리거든요. 그런데 한 번만 찌르라니까 보복을 최소한 하라는 것 아닙니까? 이 동해동량보복 법칙은 인도주의적인 보복억제법이이기 때문에 결코 잔인한 법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동해동량보복 법칙도 인도주의적인 법인데 도피성은 한 걸음 더 나아 동해동량보복까지도 행하지 말라고 하니 더욱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복을 억제하고 부지중에 살해한 자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생명존중의 성품이 이 법에 깔려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두 가지 제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레위인들을 위한 거주지와 목초지 제공과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두가지 법에는 모두 하나님의 인도적인 자비가 녹아 있습니다. 사역자들의 생계를 걱정하시며 그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배려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주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복을 빌어주길 원합니다. 또한 원수 갚는 마음과 되갚아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억누르시고 원수를 축복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12. 9. 14:52

<또봇이 소중하니, 또봇을 사주는 아빠가 소중하니?>

'진주'라는 책을 아들에게 읽어주었다.
비버 한 마리가 진주 조개를 발견했다가, 조개를 안은 채 꿈을 꾸게된다.
꿈 속에서 진주를 차고 나타난 비버를 시샘한 숲 속 친구들의 진주 쟁탈전이 시작된다.
결국 진주 하나로 숲 속은 난장판이 되고 친구들의 우정은 망가지고 만다.
꿈에서 깬 비버는 어렵사리 얻게된 진주 조개를 물 속으로 던져버리고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맞이 한다.

"선율아 비버에게 진주가 소중할까 친구가 더 소중할까?"
"친구가 더 소중해."
"그럼 선율이는 또봇이 소중해 아빠가 소중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봇!"
"그럼 또봇이 소중할까 또봇을 사주는 아빠가 소중할까?"
뭔가를 깨달았는지 녀석은 망설이더니 대답한다.
"아빠~"

우린 너무나 자주 소중한 것에 집중하느라 소중한 분을 놓친다.
소중한 것들을 늘 풍성히 공급해주시는 소중한 분, 하늘 아버지.
재물과 하나님 중 누가 더 소중한지 우리는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것을 증명해 내지 못한다.
소중한 것을 좇다 소중한 분을 놓치는 주객전도, 이것이 나의 일상이다.

Posted by speramus
부~~자富者 되세요~!!
돈 부자 말구요.
그대가 참 부자(富者)가 되고 싶다면 세속에는 가난한 사람(pauper saeculo)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fides)의 부자,
자비(misericordia)의 부자,
단순함(simplicitas)의 부자,
지혜(sapientis)의 부자,
슬기(scientia)의 부자가
하나님이 보시는 참 부자 올시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일기2014. 11. 22. 16:08

<강한 약, 약한 약>

철학이 약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풀어쓰자면, 진리가 인간의 내면의 깊은 병과 운명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궁극적인 치료약이 될 수 있는가 정도일 것이다.

보에티우스(AD. 475- 525)는 이미 멸망한 서로마 출신으로 동로마의 집정관의 지위에까지 올라선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교회의 수위권 논쟁에 휩싸여 모함을 받게 되고 결국 억울하게 투옥되어 처형당하게 된다.

사형 선고를 언도받고 죽음 앞에 놓인 보에티우스는 절망에 휩싸인 채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국가의 집정관의 위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그였지만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죄목으로 재판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한 분노로 자기 상실에 빠져 있는 보에티우스가 이를 극복하고자 선택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철학'이었다.

그는 철학을 도피처로 삼아 철학의 여신과의 대화를 통해 불행해 보이는 자신의 운명에 맞서 인간이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삶의 실천적인 지혜를 엮어내 <철학의 위안>라는 책을 완성해 낸다.

철학이 혼란에 빠져 있는 보에티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당분간 좀 약한 약을 너에게 쓰기로 한다. 이는 너에게 엄습한 불안과 동요로 비뚫게 굳어진 너의 마음이 더 강한 약을 받을 수 있도록 부드러워지게 하기 위해서다."

보에티우스는 죽음 앞에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환자였다.
그의 병은 삶을 직관하고, 삶의 참모습을 발견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 발견과 직결되어 있는, 철학적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철학적 병'이었다.

철학은 무엇일까?
철학은 삶에 대해 묻는 것이다.
철학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철학은 삶의 참모습과 진정한 의미를 발경하기 위한 몸부림이기에 모든 인간은 철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의 여신은 '철학'을 '강한 약'이라 말하며 굳어진 마음이 강한 약을 받을 수 있도록 약한 약을 처방해 준다.
약한 약은 '감정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약'이다.
상한 감정과 억눌린 감정의 치료가 있은 후에 궁극적인 약이며 강한 약인 '철학'을 투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풀어보면,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이고 증상이며, 내면의 깊은 곳에는 이성이 뿌리를 내려 작동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치유 없이 궁극적인 치유, 영적인 치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말로 감정적인 치유는 표면적인 치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치료는 '강한 약'을 통해서이다. 
나는 이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 나오는 강한 약과 약한 약의 개념을 우리 교회 현실에 적용해 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며 나아갈 바에 대해 고민해 본다.

대학생 시절 'DTS'를 받은 적이 있다.
디티에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코스가 '치유(healing)'이다.
내가 지금 판단하기에 그 것들은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치유의 단계였던 것 같다.
그 치유의 과정 이후에 진리를 집어 넣는 코스들이 있다.
세계관이나 제자도같은 강의들이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약한 약을 통한 내면의 치료 이후에 강한 약을 통한 궁극적인 인생의 의미 발견과 진리 발견을 돕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 (굳이 해석하자면...^^)

교회는 '약한 약'으로만 성도들을 치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설교와 교회 활동들이 감정의 치료와 감정의 처리에 관한 것을 돕는 것들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찬양이 전부가 아니다. 딱딱한 말씀을 먹어야 한다. 진리를 먹어야 한다.
교회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약한 약으로 치료했다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였다면 한 발짝 더 나아가 강한 약으로 그의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교인들이 겪는 대부분의 병은 철학적인 병이라 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처럼 운명 앞에서 죽음 앞에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환자들마냥 갈바를 모른 채 방황하는 교인들이 부지기수다.
그들의 병은 삶을 직관하고, 삶의 참모습을 발견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 발견과 직결되어 있는, '철학적 병'이다.
교회는 그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
상처에 약만 발라 줄 것이 아니라 근육을 만들어 뛰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구약학을 전공했지만 이제 강한약을 전공할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심어주고 자라게하며 달리게 하는 그런 강한 약 말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Posted by speramus
묵상2014. 10. 31. 16:17

<담임목사님께서 교역자 회의때 나누신 목사의 자세>

어제 있었던 노회 목사안수식 후일담으로 목사님의 목회관을 두서 없이 읊으신 것을 정리해 보았다. 
새겨 볼 말이 참 많다!!

1.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니다.
목사는 직책이나 직임이나 신분이 아니다. 
목사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기에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들의 종으로 휘둘리지 말아라.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어떤 사역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이다.

2. 목회자끼리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람으로 도와라.
서로를 목사로 존중하라.
(제발) 선후배 따지지 말아라. 
회사문화처럼 위계질서 따지지 마라.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람으로 서로를 도와라.

3. 줄서지 말아라.
선후배 따지면서 줄서고 그 연줄로 옮겨다니고 그런 거 하지 마라.
난 동창회 동문회 이런 거 참석 안한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4. 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말라.
콩 한 줌을 받더라도 팥 한 줌으로 갚지 못하면 말로라도 감사를 표현하라.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고 안주면 서운한 마음만 갖게 된다.
임택진 목사님께 배운 것이다.
교인들의 애경사 등의 개인적인 인사는 하지 않는다.
그래야 교인도 부담이 없고 자기도 안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자기 자녀들은 교회 직분자로도 세우지 않는다.
교인들이 목사 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목회자 자녀가 끼면 그런 것도 못하잖는가?

5. 목회자의 최고의 서비스는 기도이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의 표현은 기도이다.

6. 사모님들에게 잘해라.
사모들은 평생 평신도다. 집사 권사로도 불리지 못한다.
잘 해드려라.
자기 아내에게는 사모라고 부르지 말아라. 아내라 불러라.
님짜를 붙이지 않을 꺼면서 왜 사모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모님에게 잘해라!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9. 28. 05:52

<창세기 46장 1-5절 / 나 여기있어! 걱정마!> - 염산국제교회(나그네 공동체 주일예배)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새로운 곳을 가기 전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익숙한 것들을 떠나야한다는 것은 큰 두려움입니다. 제가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니다 고등학교를 도시로 갔습니다. 3월에 학교가 시작하는데 3월 한 달 동안 자취방에서 울었습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새로운 환경이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한국 땅을 처음 밟을 때 저와 비슷한 감정을 가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에 강호와 함께 한 중국인이 직장을 얻도록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막 중국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한 사람이었고 안마를 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안마샵에서 일하고 싶어서 서울에 온 것이었습니다. 한국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강호가 너무 큰 역할을 해 주어 그가 목동의 한 샵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거기에 놔두고 우리끼리 오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더군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그의 삶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야곱은 초조하게 아들들이 곡식을 사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들들이 도착했는데 요셉을 만났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야곱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요셉이 그를 이집트로 와서 살기 원한다고 했답니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이민을 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너다섯 명도 아니고 70명이나 한꺼번에 이민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그것도 수십 년 정든 고향 땅을 버리고 가는 것이 쉽겠어요? 야곱은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야곱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 야곱에게 비전(이상)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에게 자손을 주어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 두 가지를 약속하시죠.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새롭게 한국에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니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고 지켜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뭔가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곳 또는 새로운 직장으로 가야할 분이 있는지 모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같이 내려갔다가 같이 다시 돌아와주겠다 약속하십니다.

어린 시절에 화장실이 집 바깥에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에 화장실을 갈 때 항상 누나가 같이 가주었습니다. 캄캄한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칩니다. “누나 거기 있어?” 그러면 누나가 말합니다. “응 있어 걱정마~”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나 여기 있어~ 걱정말고 두려워 하지마!!!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9. 25. 14:01

<새벽예배 설교문>
출애굽기 21장 1-11절 / 면제년 법, 레디컬한 하나님??

창세기 20장 후반부부터 23장까지의 내용을 일컬어 계약 법전이라고 합니다. 시내산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법전이라 하여 계약 법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계약법전은 십계명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시행세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각 계명에 해당하는 각론으로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조항들이 나열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1-11절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안식일 계명의 각론적인 적용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족인 히브리 노예의 인권과 생존권을 세심하게 배려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법을 ‘면제년 법’이라고도 하는데요. 면제년법은 매우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 소유를 정당하게 하는 법인데 뭐가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율법에서 히브리 동족 간에 노예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파격적이라면 노예를 갖지 말게 하라고 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시의 동족인 히브리인을 노예로 쓸 수 있게 합니다. 단 7년에 한 번 그들의 노예 신분을 면제 해주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왜 그 당시에는 노예 제도를 허용하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에는 이 새벽의 몽롱한 상태에서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신적 적응(divine accommod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의 수준에 따라 적응하며 맞춰 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최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최선에 맞추기 힘든 상태입니다. 인간이 그 최선의 상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들의 도덕적인 수준과 문화적인 수준의 발달 정도에 따라 자신의 눈높이를 낮춘다는 거죠. 지금의 문명 단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전쟁으로 남녀 비율이 1대 5정도 됩니다. 여자들이 남아 도는 것이죠. 일부일처제가 되면 다섯 명 중 네 명의 여자는 남편을 못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 수준을 낮추어 제시하는 최선의 단계였던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그 당시에 노예제도를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노예제도 자체의 야만성을 교육시키기에는 인간의 도덕감이 너무 낙후되었고 당시의 모든 문화에서 노예제도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율법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이해가 되시죠. 그렇다면 왜 이 면제년 법이 파격적인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면제년 법의 핵심은 히브리 형제 자매들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었더라도 7년째 되는 날에는 그들을 다시 자유민의 신분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쉽지 노예는 사유재산인데 이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만원짜리 한 장 포기하기 힘든 것이 우리네 욕심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포기하라구요. 그것도 6년만 써먹고 자유민으로 만든다구요? 미쳤습니까? 얼마에 산건데 공짜로 풀어줍니까? 정말 미친 사람 아니고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랍니다. 하나님이 미치신 거지요. 그러기에 이 법은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이 면제년 법은 히브리 백성들의 욕심 때문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에 맞게 다시 율법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나온 법이 레위기 희년법입니다. 7년마다 안되니까 7년을 7번 지난 50년에 한 번씩이라도 노예를 자유민으로 풀어주라는 것이지요. 이 희년법도 너무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제도이기에 지켜지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광종 때 노비 안검법이란 법을 만들었습니다. 노비들에게 자유인의 신분을 허락하기 위해서죠. 원래의 의도는 귀족들을 견재하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에 귀족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합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 성종 때 노비 환천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방면했던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불러들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풀려났던 노비를 다시 노비화 한 것이죠. 노비안검법은 정말 수준 높은 법이었지만 그 법을 시행하기에는 백성의 수준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지요. 또한 귀족들의 욕심은 그들을 그냥 놔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7년마다 노예를 자유민이 되게 했을까요? 노예가 자유민이 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비를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빈부격차와 신분이 세습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버지가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남의 땅에 빌붙어 소작을 하더라도 아들은 자작농으로 자기 땅을 경작하게 만들라는 것이 하나님이 이 면제년 법을 만든 깊은 뜻이며 가장 큰 목적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두번째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자유농민이 모자라면 국방의 기초 단위가 모자라게 됩니다. 노비는 절대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킬 땅이 있는 자유농민이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노비는 지킬 땅이 없으니 전쟁에 나가 봐야 싸울 뜻이 없고 오히려 도망갈 기회만 제공하기에 전쟁에 별 도움이 안됩니다. 노비가 줄고 자유 농민이 많아지면 국방 의무의 단위가 많아지는 겁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땅이 없고 전쟁에 못나가는 노예와 애만 낳는 사람을 프로레탈리야라고 불렀습니다. 국방의 기본 단위도 안되는 하층민들을 프로레탈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면제년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자비와 사랑이 넘치고 더 튼튼한 나라로 서가길 바라셨던 겁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보며 하나님은 이 면제년 법의 정신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우리네 형제와 자매 이웃들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시며 말씀하고 계시다 믿습니다. 빈부 격차가 세습되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가난이 되물림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가난한 형제들의 생존권이 침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자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법들이 만들어져서는 안됩니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스템과 법들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국회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때문에 민생법안들이 통과 되지 못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법들 안에는 특정집단의 경제적 이윤 극대화를 위해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파괴하는 법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법들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 영리화가 우려되는 법입니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위한 주택법도 건축회사들의 이익을 챙겨주는 법이죠. 유치원 초중고 근처에도 관광 호텔을 지을 수 있게하는 관광진흥법은 도덕도 무시한 체 특정집단을 배불려 주기 위한 법입니다. 농업협동조합법 같은 경우에도 세제 등 각종 혜택으로 5조원 이상 혜택을 받고 있으나 공익을 위해 하는 일은 별로 없는 농협이 자기 자본 초과 출자를 가능케 해 리스크를 키우는 법안입니다. 이런 법들은 가난한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법인대도 중점처리 법안이라고 무조건 통과시키라고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 나라가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율법정신을 회복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이웃과 형제들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면제년 법을 통해 드러내시는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살리는 교회와 기독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