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제, 그 놀랍고 파격적인 사랑>
신명기 15장과 16장은 안식일 규정의 각론입니다.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이 뭡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남종이나 여종이나 객이나 가축들이라도 7일째 되는 날에는 쉬게 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 규정의 특징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해방했던 것을 기념하여 안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밧은 멈추다, 그만 두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멈춤의 시간이며 그만 두는 시간입니다. 일을 멈추는 것이고 전진을 멈추는 것이며 생산을 멈추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휴게소에서 멈춥니다. 멈추어 쉽니다. 그 쉼을 통해 오히려 더 창조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안식일을 잘못된 관점으로 보면 버리는 시간입니다. 쓸모 없는 무용의 시간인 것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멈추라 하시고 브레이크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간을 버리면서 함께 쉼을 누리라는 겁니다. 함께 쉬어야 할 대상은 가족 구성원 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포함되며 소나 나귀 같은 가축까지 예외 없이 쉼을 주라는 것입니다.
15장은 안식일처럼 매년 7년마다 노예들과 땅에게 쉬는 시간을 주라하는 규정입니다. 7년에 한 번 멈춰 서라는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아라는 겁니다. 노예 소유자들이 7년마다 노예를 해방시키고 노예를 풀어줌으로서 이집트 탈출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셨던 구속 활동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 소유주들이 하나님 역할을 대신하여 구원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년에 한 번씩 사회적 해방과 질서재편을 명령함으로써, 가난과 부의 세습을 원천 봉쇄하고 있습니다. 7년에 한 번 해방이 되지 않으면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가 됩니다. 이런 파격적인 법이 있다면 여러분은 순종하시겠습니까? 만원짜리 한 장 빌려주고도 그것을 갚지 말아라고 하기 어려운데 노예 한 명을 7년에 한 번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이 면제년법이 성경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지키기 힘든 법이라 봅니다. 그리고 면제년 법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담고 있는 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히브리 사람인데 왜 노예가 되고 종이 됐을까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벌어 먹을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므로”라는 말은 “가난은 항상 있게 마련이잖아” 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거리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근본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땅의 소산물로부터 끊겨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해야 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소산물을 누리는 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경제적 정의와 평등의 원리를 형제의 논리로 풀어가십니다. 가난한 자를 이웃과 형제로 보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원리인 것이지요. 사람이 돈의 많고 적음으로 귀천을 나누지 말라는 엄청난 정의와 평등의 논리가 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 공동체로 바라보시며 언약 공동체의 공동체적이고 연대적인 삶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의 짐을 덜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아들 형제가 있습니다. 큰 아들은 부자이고 둘째 아들은 가난합니다. 큰 아들은 둘째보다 힘이 쌔고 지능도 더 좋습니다. 그 녀석은 모든 장난감과 먹을 것들을 선점하여 독차지 합니다. 둘째는 형의 착취 때문에 항상 손가락을 빱니다. 둘째를 지켜보는 아비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비인 제가 큰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입니다. 나눠주어라. 나눠 먹어라 입니다. 동생을 종처럼 압제하고 두들겨 패지 말고 너그럽게 베풀어 주어라 입니다. 왜냐면 그 둘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제인 노예들이 7년에 한 번 안식을 누리고 풀려나야 할 이유입니다. 매년 7년마다 50년마다 채무와 가난, 땅 없이 사는 불안정을 초래한 시간은 정지되어야 합니다. 그 정지를 통해 새로운 자유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로서 연합과 연대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우리는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집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앙과 경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탐욕을 멈출 때, 더 갖고자 하는 소유욕을 멈추고 나누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은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고 기준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풀어가야 할 정의와 분배의 숙제이지 개인의 운명이 아닌 것이죠. 대한민국이 좀 더 경제적의 정의와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작은 실천일지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로 보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합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월세를 받고 계시는 임대인이 계시다면 임차인의 월세를 내년에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받는 것은 어떨까요? 월세 10만원 올려 받지 않고 면제 해 주는 것이 그 임차인에게는 큰 짐을 더는 것일 수 있습니다. 면제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의 구체적이고도 파격적인 실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