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1. 19. 13:42

*본고는 풀러신학교 목회학 박사 과정 중 신약성서해석이라는 과목의 과제로 본문 해석의 툴을 통해 어떻게 설교의 요지를 이끄는지 이해하는 목적으로 진행되었고,  본 연구는 본인이 직접 작성하였다.

 

 

마태복음 20 1-16 설교준비안

-김경헌-

1)     내용 준비

a)     본문 관찰 내용들 (발견한 내용들을 최대한 기록합니다)

i)      “마치(호모이아)”로 본문을 시작하면서 본문이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대한 비유임을 나타낸다.

ii)     19장 30절과 20장 16절은 같은 문장이 “처음(프로토이)”과 “마지막(에스카토이)”이 도치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사적인 도치로 이해되며 수미상관(inclusio)으로 처음 절과 마지막 절을 비슷한 문구를 두어 문학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프로토이)와 꼴찌(에스카토이)의 반전 또는 뒤집어짐’을 이런 도치를 통해 문학적인 효과를 극대화 했다고 보여진다. 어순이 뒤집히듯 천국에서는 언제든 순서는 뒤집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iii)    아침 일찍 온자들(프로토이)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주목된다. 처음 온자들에 대한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비한다면 저자의 의도는 먼저 온 자들에 더 촛점을 맞춰 말하려고 한 것이다. 비유이기에(이와 같다-호모이아) ‘먼저 온 자(프로토이)’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들을 나타내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본문에 해석에 있어 핵심적인 과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코텍스트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iv)    본문의 앞 장을 먼저 살펴보면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18장 1-5절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지에 관한 주제와 10절에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본문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와 꼴찌, 그리고 큰 자와 작은 자라는 비슷한 맥락이다. 이어지는 19장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나 유다 땅에 이르심을 나타내면서 바리새인들의 방해가 시작됨을 19장 3절에서 기술한다. 먼저 된자, 그리고 큰 자로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을 맞아 들일 것에 있어 하나님 나라를 다시 언급하심으로 바리새인들과 어린이들을 비교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둘 수 있다.

본문의 뒷 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을 언급하면서 세베대의 어머니의 등장과 하늘에서 첫째(프로토이)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언급하신다. 이는 앞에서 등장한 프로토이(첫째, 먼저 된자)라는 모티브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앞 뒷장에서는 주요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과, 큰 자와 작은 자의 대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대조가 여러 번 등장 함을 알 수 있다.

신분의 상승이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는 것, 또는 먼저 된 자들이 뒤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나타내기 위해 본문 주변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이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v)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19장 16절부터 등장하는 부자 청년은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돌아갔다. 자신의 신분과 조건 그리고 행실로 하늘 나라에 들어 간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의 비유를 통해 지금까지의 조건과 선택이 아무 소용 없고 뒤집어 질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바리새인들 그리고 나아가 유대민족 전체가 선민 의식으로 하늘 나라에 가장 먼저 도달한 것처럼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뒤집고 계신다. 계급 상으로, 지위상으로, 권력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앞섰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던  ‘프로토이’들에게 도저히 예수의 주장이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다.

vi)    본문의 중요한 모티브는 포도원 주인의 “계산법”이다. 이 계산법은 세상의 계산법이 아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고, 먼저 온 사람이 더 많이 받는 세상의 계산법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토이’들이 투덜거릴 수 밖에 없다.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나중 온 사람들은 아고라에서 빈둥빈둥(아르고스)거리던 사람이다. 심지어 그들은 먼저 온 자들보다 더 쉽게 일했고(시원한 시간대) 더 적게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가져 갔다. 주인은 먼저 온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지만 빈둥빈둥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다.

vii)   이 계산법에 중요하게 사용된 모티브는 ‘쉼포네오(합의하다, 동의하다)’이다. 합의한 대로 준다는 것이 주인의 계산법이다. 여기서 ‘언약’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과 일꾼들의 관계는 언약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도 언약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먼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 왜냐면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언약 불이행시 합의했던 바 대로 그들을 나중으로 밀어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언약관계로 계산하면 주인의 계산법을 이해할 수 있다.

viii) 콘텍스트 상으로 살펴볼 것은 본문이 포도밭 주인의 은덕과 자선 행위를 기술함으로 당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부유층들이 하류층에게 베풀었던 시혜적인 행동을 부각시키고 있다. 후하다, 선하다는 뜻의 ‘아가또스’를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런 문화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용직 노동자들의 투덜거림은 호혜성의 원칙에 벗어난 행동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들은 무례하게 주인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b)     주요 해석적 포인트들 (위의 발견한 내용들을 몇가지 주요 포인트들로 아우르도록 합니다)

i)      첫번째:  프로토이들의 특권의식 (바리새인, 부자청년, 유대인들)  

그러나 주인의 눈은 포도원에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고라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자주 나가서 누가 있는 지 살폈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다. 후하고 선하신 주인이 과연 먼저 된 프로토이들에게만 후하겠는가? 포도밭에 모인 자들이 먼저 주의 선택을 받은 자로 이해한다면 교회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포도밭에 모인 자들을 두고 교회 바깥으로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수혜자)을 찾아 다니시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ii)     두번째:  주인의 시혜성은 언약을 기반으로 한다. 언약의 신실함에 반할 때 전복은 일어날 수 있다. 그 전복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잘 예시해 준다.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특권층이었던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끝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이미 먼저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지 못할 때 그들의 특권과 먼저됨은 사라질 수 있다. 부자청년의 예를 들어도 그는 언약을 다 수행한 듯하지만 언약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언약을 실행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담을 갖고 떠나간다. 그는 가장 뒷자리로 밀려난 것이다.

iii)    세번째: 주인의 선함(시혜성)에 반하는 프로토이들의 무례함이 부각된다. 그들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주인의 후한 마음을 이해했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의 시혜 행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했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무례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 의식을 경계해야 하는 대목이다. 주인의 후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고라로 나가 빈둥 거리는 자들에게 주인을 소개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c)     다른 자료들을 통한 보충 내용 (위의 발견내용들은 다른 보조자료 없이 성경 텍스트만 가지고 씨름한 결과입니다. 이런 발견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주석이나 다른 자료들을 통해 더 보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을지 적어봅니다)

i)      _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모든 것이 바로잡혀서 이방인이 낮아지고 이스라엘은 높아지라고 믿었다.(IVP, 성경배경주석, 1317쪽)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그들의 기대와 일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그것이 뒤집혀 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ii)     _ 지중해 연안의 부유층은 이따금씩 빈민을 위해 상당한 재물을 증여함으로써 그 자선 행위에 대한 공공의 영예(honor)와 더불어 사회적 신분 상승을 꾀했다. 고대 사회에서 신분이 곧 역할을 결정했으므로, 하루 노동의 대가로 하루분의 삯을 받은 데 대해 불평한 자들은 매우 무례하고 감사가 결핍된 자로 여겨졌을 것이다(성경배경주석,1317쪽). 15절의 악한 눈은 ‘인색한 눈’이라는 당시의 숙어였다. 주인의 너그러움 때문에 일꾼들이 인색한 자가 된다는 공격은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iii)    _ 신분이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극단적인 본보기를 제시하신다. 그가 평범한 죄수 신분으로 나중에 부활을 통해 전세가 뒤집어 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설교 디자인

a)     중심 메시지 포인트:  주인의 눈은 아고라를 향해 있었다.

b)     전체 구성 디자인 (해석 포인트들의 위치 + 삶의 연관성과의 연결등을 염두에 둘 것)

i)      하나님의 눈은 세상을 상징하는 아고라를 향하신다. 이미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교회의 신자들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다니시는 목자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설탕인가 세상의 소금인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눈으로 아고라를 향해 있는가? 우리 주위의 이웃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해 있는가?

ii)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언약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언약적인 신실성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인 신실함으로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고 그를 희생시켰다. 그 예수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언약적인 신실함의 실천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의 이러한 수난과 부활은 기존의 신분과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낮아짐을 이해하고,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후하심을 이해하는 신자들이라면 이제 그들 또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고라를 향해 가야 한다.

iii)    우리의 관심은 온통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받은 삯이 정당하고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시기심 때문이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 때문이다. 내가 얼마를 받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주인이 정말 멋지고 선하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기심(본문에서는 나쁜 눈, 악한 눈으로 표현했다.)을 없애지 않는 한 주인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교회는 이제 교회 밖 아고라로 나아가야 한다. 아고라에서 그분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이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그들이 하늘 나라의 가장 앞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내 소유를 나누면서 기꺼이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앞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부르심이며 먼저 된 자(포로토이)로서 행해야 할 주인과의 언약(약속)의 핵심이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22. 1. 19. 13:22

*본 과제는 필자의 풀러 신학교 목회학 박사 과정의 숙제로서.... 본문, 근접 본문, 콘텍스트, 텍스트 상호간의 관계라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본문의 깊은 해석을 돕기 위한 기초 과정이다. 해석에 있어 중요한 점은 당시 콘텍스트 안에서 문화나 단어 그리고 가치나 개념 등의 이해를 통해 본문을 더 이해하며 당시의 상황에 맞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과정이다. 우선 삭개오 본문을 통해 실습해 보기로 한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해석 과제 (김경헌)

 

1. 본문 (Text)

 

  가. 본문의 형식과 구조

    본문은 네러티브 형식으로 되어 있다. 등장 인물은 예수, 삭개오, 군중(남성복수)이다. 배경이 되는 장소는 여리고다. 본문이 전체 누가복음에서 차지하는 시간상의 위치는 예수의 수난 직전, 예루살렘 입성 직전이다. 본문은 예수를 찾는 삭개오와 삭개오를 찾는 예수의 필요가 만남으로 이어지고 만남의 결과 삭개오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삭개오의 회심과 반응에 대해 예수께서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대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 예수의 여리고 입성 (1절)

   ii 삭개오 묘사- 세리장, 키 (2절)

   iii 예수를 보고 싶어하는 삭개오 (3-4절)

   iv 삭개오를 보고 싶어하는 예수의 초대와 삭개오의 응답 (5-6절)

   v 예수의 삭개오 방문을 못마땅해 하는 군중 (7절)

   vi 삭개오의 회심과 결단 (8절)

   vii 삭개오의 응답에 대한 예수의 반응 (9-10절)

 

    나. 본문의 문학적 장치

    본문에서 삭개오의 변화를 부각 시키기 위해 여러 문학적인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본문은 삭개오라는 인물의 특징을 몇 가지로 묘사한다. 삭개오의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으나 누가는 그가 세리장이었고, 키가 작았으며 부자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리였던 마태는 같은 세리 출신의 삭개오 네러티브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삭개오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특수자료이다. 그것은 연약한 자, 소외된 자 그리고 죄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누가의 특별한 의도를 나타낸다. 세리장은 당시에 판매세 및 관세를 청부 맡고 자기 밑에 세리들을 고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1482쪽). 삭개오는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였고(8절), 그 결과 그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큰 부자로서 헤롯 대왕과의 결탁도 있을 법하다. 그는 유대의 가장 부요한 도시의 가장 상류층에 위치한 기득권자였다. 그러나 누가는 그의 키를 언급함으로 높디 높은 상류 사회의 인물이었으나 실재로는 작디 작은 보잘 것 없는 인간에 불과했던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작은 삭개오의 체격조건은 그를 나무에 올라가게 만들었고, 이는 예수를 만나기 위한 그의 의지와 노력을 부각시키는 행위였다. 

 

  다. 주목할 단어들

     본문의 문학적인 요소로서 누가가 사용한 단어들 중에 자주 사용되어 주목해 볼만한 단어들이 있다.   

 

    먼저 1절에서 7절까지 매절의 첫머리에 ‘카이’의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시간 구조로 본문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자(프루시오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근접본문에서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로 한다. 

   누가는 5절 예수의 말씀에 ‘데이(반드시~해야 한다. must)’라는 단어를 쓰면서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예수의 의도된 일이며 예수의 수난 직전에 이루어야 할 중요하면서도 필연적인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집과 손님을 모시는 것과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음에 죽목해야 한다. 5절에 ‘머물다(메노)’, 6절에 ‘손님으로 맞다(휘포데코마이)’, 7절의 ‘머물다. 손님이 되다. (카타뤼오)’라는 단어는 모두 집안에 손님을 모셔들이는 것과 관련된 동사들이다. 수난 직전의 예수를 집에 모시고, 그가 아끼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결단의 행위가 곧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누가의 신학을 읽을 수 있는 단어들이라 여겨진다. 예수의 9절 말씀 “구원이 이 집에 있다.”라는 말씀은 삭개오의 행위를 지지하여 자신을 위해 환대의 공간을 제공한 그 장소에 구원이 임할 것을 강조하여 환대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지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구원과 관련된 단어들이 등장한다. 9절의 ‘소테리아’, 10절의 ‘소조’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취해야 할 결단과 그 결단의 내용이 어떠해야 함을 볼 수 있다. 

 

2. 근접본문(Co-Text)

 

    본문의 직전과 직후의 내용과 본문은 어떤 연관선상에 있을까? 누가는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를 통해 세리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행위를 강조함으로 세리장인 삭개오와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또한 18-27절에서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청년이 큰 부자(플루시오스)였음을 밝힘으로 본문 2절의 부자(플루시우스)이면서 자신의 재산을 나눈 삭개오와 대조시키고 있다. 

    본문 직전에 등장하는 소경 바디메오(마가복음에서 이름을 밝힘)의 이야기는 ‘보는 행위’의 주제와 본문을 연결시키고 있다. 18장 35절에 바디메오의 이야기는 여리고가 아니라 여리고에 매우 가까운 성읍에서 벌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엥기제인…에리코). 본문에서 보는 행위와 관련되 동사로서 3절에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보기 원했고(에제테이 이데인) 군중들 때문에 볼 수 없었다. 4절에서도 예수를 보기 위해(히나 이데)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예수 또한 삭개오를 보기 위해(아나블레포) 그를 쳐다본다. 

  직후에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선 주님을 소개하며 이 사건과 연이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표현하면서 ‘므나 비유’를 기록한다. 므나는 당시의 화폐단위이며 세리로서 삭개오가 다뤘던 금전의 모금 행위와 연결되는 모티브라고 말할 수 있다. 

 

3. 콘텍스트(Context)

 

   가. 여리고

     먼저 삭개오가 여리고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음을 밝힌다. 여리고는 헤롯의 겨울궁전이 있었고, 경기장과 목욕탕 등이 구비된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국경도시로서 무역하는 이들의 왕래가 잦았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착한 사마리의 비유도 여리고 배경으로 하며 사마리아인이 여리고와 예루살렘을 왕래하며 상업 행위를 하는 중에 벌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삭개오 같은 세리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징수 수익을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리고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여리고는 해발 -200미터의 사막 도시였다. 해발 800미터였던 예루살렘과는 1000미터나 차이 나는 매우 낮은 도시였다. 그 낮은 곳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임하신 것이다. 낮은 곳의 가장 상류층에 있었던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보여진다. 단순한 나무에서 내려오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특권을 내려 놓는 행위이자 겸손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나. 퀴리오스

    헤롯의 겨울 궁이 위치한 여리고의 자신의 집에서 삭개오는 예수를 ‘퀴리오스(8절)’라 칭하고 있다. 누가복음 2장 2절의 유대의 분봉왕인(바실류스, 누가복음 1장 5절) 헤롯 보다 더 큰 지역을 관할했던 구레네에게 ‘퀴리오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본문의 삭개오의 퀴리오스라는 호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다. 세리장

 앞의 문학적 장치에서 전술하였듯이 세리장으로 삭개오를 소개하는 누가의 의도는 그가 여리고의 상류층에 속했던 사람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경기장의 상석에서 경기를 관람했을 것이고, 공중목욕탕을 즐겼을 것이며 로마의 음란한 희극들을 즐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심한 징수와 착취 행위로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7절). 

 

4. 텍스트상호관계(intertext)

 

  가. 달리다(4절-프로테코), 서두르다(5절-스퓨도)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중 4절의 프로테코(달리다)는 본문과 요한복음 20장에 베드로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가는 것을 위해 사용되는 것 외에 본문에서만 사용되는 희귀한 단어이다. 또한 5절의 스퓨도(서두르다)도 누가복음에서 3번, 사도행전에서 2번, 요한 2서에서 한 번 사용된 단어이다. 요한 2서를 제외하면 누가행전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 싶은 것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알 수 있고, 예수 또한 삭개오를 만나서 함께 머물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 잃어버린 것들

    누가복음 15장은 특별히 예수께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15장 2절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를 비웃는 부분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이 말했던 죄인들과 세리들이 잃어버린 자들임을 누가복음 15장은 확실하게 제시한다. 여기에 잇대어 누가복음 19장은 세리들의 대표였던 세리장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임을 다시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같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소조, 소테르)하기 위해 이땅에 오셨음을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전에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다. 참된 회개

    삭개오는 구약의 율법을 이해했던 사람이다. 특별히 출애굽기 22장 1-4절에는 횡령과 강도행위에 대한 배상 규정이 등장한다. 갑절로 갚아주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었지만, 삭개오는 자신이 횡령하거나 강취했을 경우 4배나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삭개오의 결단이 율법의 요구를 넘어선 얼마나 엄청난 결정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삭개오는 누가복음 18장 23절의 큰 부자였던 부자 청년이 율법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지 못했던 것과 대조되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고 말한다. 이는 엄청난 결단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수 또한 이런 삭개오의 결단을 칭찬하시면서 그러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자신의 재산을 나누는 자비와 나눔의 행위가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연결되는 부분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오신 것이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구원의 핵심임을 밝히고 계신다. 

    누가복음 3장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위한 회개가 어떠해야 하고 그 열매가 어떠해야 함을 설파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눅 3:8). 무리, 세리들, 군사들에게 각각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범죄 행위를 돌이키고 행위로서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한다. 세리였던 삭개오는 요한의 권고대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돌이키며 반대급부로 자신의 재산을 나눔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 

 

5. 결론

 

  삭개오는 죄인과 세리로 대표되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경멸했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잃어버린 자 삭개오를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필연적으로 찾아 가신다. 예수가 삭개오를 찾으신 계기 중 하나는 삭개오의 간절함에 있기도 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 달렸고 나무 위에 올랐다. 예수께서는 그런 삭개오의 간절함을 읽으셨다. 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손님으로 환대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와 같이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환대행위와 나눔의 행위가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핵심적인 부분이자 율법의 핵심임을 말하고자 하신 의도이다. 또한 근심하며 예수를 떠난 부자청년과 달리 부자 삭개오는 자신의 절반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눴고, 자신이 강취한 재산을 네 배로 갚겠다고 자신의 회심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낸다. 이는 누가가 구원이 추상적인 어떤 마음의 결단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누가의 신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을 위해 재산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대변해 준다. 삭개오의 회심과 회심의 열매는 예수가 이루고자 하셨던 율법의 핵심이자 구원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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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5/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여러분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면 수학시간에 어떤 숫자가 큰지 비교하라는 문제가 있잖아요.

In the 3rd grader’s math book, there is a question that asks which number is bigger? compare two numbers.

100이 큰가요 1000이 큰가요? 100 큽니다.

Compare 100 and 1000, which one is bigger?

어벤져스에서 헐크가 쎈가요? 아이언맨이 쎈가요? 헐크버스터가 쎈가요? 아이언맨이 쎈가요?

In the Marvel movie, who is stronger? Hulk or Ironman? Iron man or Hulbuster?

누가 힘이 쎄냐는 싸워 봐야 아는 거겠죠?

They have to fight to know who is stronger.

 

 

예수님의 제자들이 갑자기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The disciples came to Jesus and asked.

예수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7-8살 정도 된 홍노아같은 어린 아이 한 명을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Jesus called a little child to him and put the child among them. Then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말씀을 더 하십니다. And then he said something more.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Therefore whoever humbles himself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여러분 정말 기쁘지 않으세요?

Aren’t you happy? Because a child like you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여러분 같은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래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서 목사님보다 더 큰 사람인 거예요.

You are bigger than me in the Kingdom of Heaven.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어린아이니까요. 어린아이가 왜 큰 사람입니까?

Because of why you are a child. Why the child is the greatest?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기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Jesus said “Because child is humble themselves”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자기가 힘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Humble themselves means that they admit they are a powerless person.

다른 말로 하면 힘이 없는 사람이 큰 사람인 거예요.

In other words, a powerless person is a great person.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예요.

The most powerless person is the greatest person in the Kingdom of Heaven.

우리 중에서는 홍노아 친구가 가장 큰 사람이예요. 왜요? 가장 약하니까요.

Noah Hong is the greatest person among us because he is the most powerless person.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을 동화 속 인물로 표현을 했었죠? 예수님이 누구라고 했었죠?

We called Jesus the happy prince.

네 맞아요 예수님은 행복한 왕자예요.

행복한 왕자는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왕들의 미라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The Happy Prince was not interested in the story of the Sphinx of Egypt or the mummies of kings.

가난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비로부터 듣고 싶어 했었죠.

He wanted to hear the stories of the poor and the powerless from swallows.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So do Jesus.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사람은 힘이 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이예요.

The person who is most interested in the kingdom of God is a man who is powerless, poor, and vulnerable.

어린 아이는 부모님이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A young child cannot live his parent’s care.

그만큼 힘이 약한 존재가 어린아이예요. Children are that weak.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해요.

If you want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you must be humble like a child.

어린아이와 같이 가난해져야 해요. You must be poor like a little child.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러워야 해요. You must be mild-hearted like a child.

 

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Let’s read verse 5.

또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Whoever welcomes a little child like this in my name welcome me.”

어린아이를 환영하는 사람은 나를 환영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What is it means that ‘whoever welcomes a little child welcome me.’

예수님께서도 어린 아이와 같이 되셨다는 말이예요.

It means that Jesus became childlike.

예수님이 어린아이라는 말입니다. Jesus was a child. and now he is childlike.

 

예수님은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예요.

Jesus has the most superpower.

어벤저스의 헐크보다 아이언맨 보다 그리고 따노스보다 훨신 힘이 쎈 분이예요.

He is stronger than Hulk, Iron man, and even Thanos.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힘 없이 사람들이 때리는 매를 맞으셨구요,

However, Jesus had been bitten by the Roman soldiers.

사람들이 휘두르는 채찍을 맞으셨구요. He has be whipped by people.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실 때 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않고 그냥 거기서 죽으셨어요.

He didn't come down from the cross when people crucified him, he just died there.

어린 아이처럼 어린 양처럼 힘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죽어가셨어요.

Like a child, like a lamb, he just died like that.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People like children can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하나님의 나라는 파워리스한 모습으로 커가는 겁니다.

The kingdom of God is growing in a powerless manner.

여러분처럼 파워리스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커가는 거예요.

The Kingdom of God is grown by you like you.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이 왜 가장 큰 사람입니까? 왜요?

Why Jesus is the biggest person in the kingdom of God? why?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셨기 때문이예요.

Because Jesus became childlike.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힘 없는 어린 아이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So Jesus told that powerless children are the most valuable.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Now how could I do?

예수님처럼 가장 힘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주어야 해요.

You have to pay attention and give your heart to the most powerless people as Jesus did.

힘있는 사람들처럼 되려고 하지 마세요.

You don’t need to have power.

세상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이 힘이 있습니다.

The man who has much money has power in the world.

세상에서는 큰 집에 사는 사람이 힘이 있습니다.

The man who has a big house has power in the world.

세상에서는 비싼 차를 타는 사람들이 힘이 있습니다.

The man who has expensive cars has power in the world.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힘이 있습니다.

People with high positions have power in the world.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정 반대예요.

But the kingdom of God is the opposite.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힘이 있습니다.

The poor have power in the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차도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힘이 있습니다.

In the kingdom of God, people who have no cars and have nothing like children have power.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People with the lowest position have power in the Kingdom of God.

 

우리도 예수님처럼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I hope we will be interested in the powerless, like Jesus, and help the poor.

여러분 친구들 중에 누가 도움이 필요한지 항상 관심있게 보시고 도와주세요.

Always be interested in and help out who your friends need.

 

<기도>

사랑의 예수님. 감사합니다.

Merciful God, We appreciate your great love.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린이와 같이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환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Help us love and welcome people who are powerless like children as Jesus did.

In Jesus' name we pray. Amen.

 

<마무리 기도>

예수님 날씨가 많이 더워요.

Oh, Jesus It is very hot.

우리 친구들과 가족들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Protect our friends and their family.

공부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해주세요.

Please don't get too stressed out about studying.

버춸 클레스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Please help us enjoy the virtual class.

한 주 동안 잘 지내게 도와주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세요.

Help us to stay well and protect us from every disease.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12. 27. 06:51

<면제, 그 놀랍고 파격적인 사랑>

 

신명기 15장과 16장은 안식일 규정의 각론입니다. 4계명인 안식일 계명이 뭡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남종이나 여종이나 객이나 가축들이라도 7일째 되는 날에는 쉬게 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 규정의 특징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해방했던 것을 기념하여 안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밧은 멈추다, 그만 두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멈춤의 시간이며 그만 두는 시간입니다. 일을 멈추는 것이고 전진을 멈추는 것이며 생산을 멈추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휴게소에서 멈춥니다. 멈추어 쉽니다. 그 쉼을 통해 오히려 더 창조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안식일을 잘못된 관점으로 보면 버리는 시간입니다. 쓸모 없는 무용의 시간인 것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멈추라 하시고 브레이크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간을 버리면서 함께 쉼을 누리라는 겁니다. 함께 쉬어야 할 대상은 가족 구성원 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포함되며 소나 나귀 같은 가축까지 예외 없이 쉼을 주라는 것입니다.

 

15장은 안식일처럼 매년 7년마다 노예들과 땅에게 쉬는 시간을 주라하는 규정입니다. 7년에 한 번 멈춰 서라는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아라는 겁니다. 노예 소유자들이 7년마다 노예를 해방시키고 노예를 풀어줌으로서 이집트 탈출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셨던 구속 활동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 소유주들이 하나님 역할을 대신하여 구원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년에 한 번씩 사회적 해방과 질서재편을 명령함으로써, 가난과 부의 세습을 원천 봉쇄하고 있습니다. 7년에 한 번 해방이 되지 않으면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가 됩니다. 이런 파격적인 법이 있다면 여러분은 순종하시겠습니까? 만원짜리 한 장 빌려주고도 그것을 갚지 말아라고 하기 어려운데 노예 한 명을 7년에 한 번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이 면제년법이 성경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지키기 힘든 법이라 봅니다. 그리고 면제년 법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담고 있는 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히브리 사람인데 왜 노예가 되고 종이 됐을까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벌어 먹을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므로라는 말은 가난은 항상 있게 마련이잖아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거리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근본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땅의 소산물로부터 끊겨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해야 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소산물을 누리는 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경제적 정의와 평등의 원리를 형제의 논리로 풀어가십니다. 가난한 자를 이웃과 형제로 보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원리인 것이지요. 사람이 돈의 많고 적음으로 귀천을 나누지 말라는 엄청난 정의와 평등의 논리가 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 공동체로 바라보시며 언약 공동체의 공동체적이고 연대적인 삶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의 짐을 덜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아들 형제가 있습니다. 큰 아들은 부자이고 둘째 아들은 가난합니다. 큰 아들은 둘째보다 힘이 쌔고 지능도 더 좋습니다. 그 녀석은 모든 장난감과 먹을 것들을 선점하여 독차지 합니다. 둘째는 형의 착취 때문에 항상 손가락을 빱니다. 둘째를 지켜보는 아비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비인 제가 큰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입니다. 나눠주어라. 나눠 먹어라 입니다.  동생을 종처럼 압제하고 두들겨 패지 말고 너그럽게 베풀어 주어라 입니다. 왜냐면 그 둘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제인 노예들이 7년에 한 번 안식을 누리고 풀려나야 할 이유입니다. 매년 7년마다 50년마다 채무와 가난, 땅 없이 사는 불안정을 초래한 시간은 정지되어야 합니다. 그 정지를 통해 새로운 자유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로서 연합과 연대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우리는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집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앙과 경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탐욕을 멈출 때, 더 갖고자 하는 소유욕을 멈추고 나누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은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고 기준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풀어가야 할 정의와 분배의 숙제이지 개인의 운명이 아닌 것이죠. 대한민국이 좀 더 경제적의 정의와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작은 실천일지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로 보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합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월세를 받고 계시는 임대인이 계시다면 임차인의 월세를 내년에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받는 것은 어떨까요? 월세 10만원 올려 받지 않고 면제 해 주는 것이 그 임차인에게는 큰 짐을 더는 것일 수 있습니다. 면제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의 구체적이고도 파격적인 실천일 것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12. 26. 17:06

2014년 12월 26일 새벽설교

본문 : 신명기 13, 14장


여러분 번성해지고 싶으십니까? 잘 살고 싶으신가요? 제가 번성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죽이십시오 그러면 번성해 집니다. 뜬금 없이 죽이라니 뭘 죽이란 말입니까?라고 물어 보시겠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고자 나를 유혹하는 모든 요소들을 다 죽여 없애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욕심과 탐욕이라면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엄청난 명령을 하십니다. 꿈꾸고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너희를 미혹케 하거든 그를 쳐 죽이라 하십니다. 우상숭배하도록 유혹하는 자가 혹시 내 형제 자매나 부모 중에 있다하더라도 가차 없이 죽이라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한 성읍이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지거든 그 성 전체를 진멸해 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헤렘이라는 것인데요 배교가 일어난 도시에 대한 처벌로서 성읍 전체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 전쟁임을 이 본문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13장 끝의 두 절에서 이렇게 악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복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셔서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상숭배하도록 유혹하는 꺼리들을 모두 없애버리라고 죽여버릴 때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최근 홍혜선이라는 전도사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합니다. 12월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설쳐댔습니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은 해외로 나가버렸습니다. 12월이 다 가고 있는데 전쟁 소식은 들려오지 않네요. 저는 이런 작자들을 무당 수준의 사이비 집단으로 봅니다. 예언이랍시고 공포를 조장하는 거짓 술수들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며 말씀하지 않습니다. 13 3절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오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지 검증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는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 선지자의 말에 놀아 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분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나 안하나 자신을 살필 것인지 우리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선지자나 꿈꾸는 자랍시고 설치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고 분별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런 예언의 효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삶의 태도입니다.

 

신명기 14장은 장례와 음식문화 그리고 소득의 거룩한 처분을 통해 구별된 백성이 되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나라는 되게 장례문화가 복잡해 보입니다. 이집트도 장례문화가 복잡했고 가나안의 민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의 장례문화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장례문화라고 할 것 조차 없는 수준이었죠. 예수님께서도 죽으시고 시신을 그냥 무덤에 갖다 놓은 정도잖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서 나온 겁니다. 죽음을 미화하거나 극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썹을 밀거나 털을 밀거나 하는 이방민족들의 장례 풍습을 따라가지 말라 하십니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는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자나 호랑이같이 고기를 먹는 동물들은 사납습니다. 하지만 소나 양같이 채식을 하는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온순하죠. 사람도 부정하고 맹폭한 맹금류와 육식성 짐승고기를 먹는 사람은 맹폭한 맹금류의 잔인한 야수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피를 흥건히 흘리는 날고기를 뜯어 먹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섬뜩하죠?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자도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한 말씀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장례 문화나 음식문화는 종교적인 가치가 우리 삶에 내면화되기 위해 동원되는 가장 일상적이고 초보적인 통로입니다. 이런 일상적이고 초보적인 것들에서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한 소득을 거룩하게 처분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방민족과 구별되어라고 하십니다. 3년마다 십일조를 내라 하십니다. 어떤 목적으로 3년에 한 번 십일조를 내라시나요? 그 돈으로 긴급구제를 위한 사회복지 기금으로 쓰라고 하십니다. 자비와 사회적인 자선의 행위들이 가져오는 신적인 축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돌리는 힘을 투자와 생산 그리고 소비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난한 이웃들에게 쏟아 붇는 자비와 사회적 애휼이 경제번영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해야 사회복지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회복지를 늘릴 때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오늘 번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가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버려라. 다 쳐 내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맘몬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쳐 죽이십시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 등의 일상생활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매우 번성하고 번영하게 하며 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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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12. 26. 17:05

2014년 12월 25일 새벽 설교

본문 : 신명기 12장


성탄의 귀한 새벽 아침을 여시는 여러분의 삶이 복되십니다. 신명기 12장을 통해 성탄 아침 주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를 신명기 법전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신명기 법전은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대한 시행 세칙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이 헌법이고 그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세부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12장부터 26장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 첫번째 장으로 12장은 십계명의 1계명에 대한 시행세칙입니다. 1계명이 뭡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모든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 홀로 우리의 모든 순종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12장 전체의 내용은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올바른 예배란 올바른 대상을 향해야 하고, 올바른 장소에서 드려져야 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드려져야 하고,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순종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배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쉬운 말로 나만 봐~”를 요구하신다는 거죠. 어제 수요예배 설교에 홍지애 전도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시더군요. 동물 조련사가 사자 같은 맹수를 길들일 때 책상을 들고 다리가 사자를 향하게 들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사자는 책상의 네 다리를 동시에 보려다가 집중력을 잃고 무력해져서 조련사의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만보라고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다수의 신들은 무질서하고 가증스럽게 인간의 충성심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펼칩니다. 돈 권력 섹스가 세상의 신들이 입고 있는 대표적 옷입니다. 그런 것들에 눈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 하십니다.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에게만 일편단심 순종을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예배의 장소는 어떤가요? 예배의 장소 또한 인간이 선택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다스리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방식은 어떤가요? 본문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예배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결속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공동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예배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예배당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의 또 다른 방법으로 이방종교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라 하십니다. 가나안 제의의 가장 큰 특징은 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방법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할 것입니다. 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의 이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옛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로의 이행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 여러분은 고민해 보셨나요?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어떻게 크리스쳔이 되었는가?”에서 일본의 다신교 사회에서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것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이 섬기던 마늘신, 달걀신, 활의 신, 그리고 글쓰기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합니다. 우찌 무라 간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기 위하여 모든 다른 신들의 이름들을 도말해 버렸습니다. 아예 그의 사전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지워 버린 겁니다. 우리도 오늘 이 기도시간을 통해 다른 신들의 이름을 우리 삶에서 다 지워 버립시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남겨두고 다른 신들을 지워 버립시다. 돈 섹스 권력 등으로 치장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모든 헛된 신을 다 지우고 우리 하나님께만 일편단심으로 예배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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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12. 12. 04:5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두 가지 제도를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레위인들의 성읍과 땅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도피성에 관한 제도입니다. 이 두 가지 제도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성품을 발견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레위인들의 성읍과 기업에 관한 제도를 봅니다. 레위인들이 영구적인 경작지인 농토를 받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거주지와 목초지를 할당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의 생계는 일반 세속 지파들의 아낌 없는 예물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일반 세속 지파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고 레위인들은 일반 지파가 받은 복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인 것이죠. 이것은 레위족과 나머지 세속 지파들은 상호 의존적으로 번영하도록 예정된 것이지요. 우리 교우들의 관계가 서로 이런 상호 의존적으로 번영하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빌어주는 복으로 니가 잘되고, 니가 잘 되어 나에게 도움을 주고 또 나는 너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뭐 이런 관계인 것이죠.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을 빌어 주십시오. 그 사람이 잘 되도록 말입니다.

 

두번째 법령은 도피성 제도 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뭐냐면요 사적인 보복을 억제하기 위한 법입니다. 도피성제도는 고의가 없이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보호하는 법입니다. 도피성은 일종의 감옥입니다. 비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가게 되는 수감되어 보호되는 감옥인 것이죠. 이 법이 만들어질 당시 문화로는 살인을 당한 가족이나 친족이 살인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친족 피붙이 복수법이라 했습니다. 친족 비붙이를 전문적으로 고엘이라 불렀는데요. 이 고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법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도끼로 나무를 자르다가 그 도끼 자루가 빠져서 친구를 죽였을 때 그 친구의 아들이 친족피붙이 복수법에 의해서 그 살인자를 잡아 죽이지 못하도록 6개의 감옥 중에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고의적인 살인이냐 비고의적인 살인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기관이 하는 것이죠. 오늘 날로 치자면 검찰과 판사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에 의한 사법기관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회중들이 판단했습니다.

 

비 고의적이고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것이 판단될 때 회중들은 그 살인자를 도피성 감옥으로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이 비고의적인 살인자가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는데 대제사장의 죽음입니다. 그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죽지 않는 이상 풀려날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풀려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보석금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면 돈으로 해결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곳의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무는 것이거든요. 제사장의 죽음 없이는 죄가 해결이 안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없이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못하는 원리와 같은 원리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죠. 제사장의 죽음으로만 그 죄인의 죄가 끝이 나듯,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우리 죄가 해결되는 놀라운 원리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피성이 개입되기 전에는 아까 말씀드린 친족 복수법이 있었습니다. 친족복수법은 당사자 해결의 원칙입니다. 사법기관이 필요 없는 겁니다. 당사자 해결의 원칙의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21:23의 동해동량보복의 법칙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해에 대해 똑같은 량으로 갚아주라는 법이죠.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니까 잔인한 법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 동해동량 보복법은 결코 잔인한 법이 아닙니다. 이 동해동량보복의 법칙이 왜 잔인한 법이 아니냐면, 최소보복의 법칙을 어필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성경은 참 잔인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그런데 원래는 초과보복을 할 마음이 있지만 하지 말고 똑같은 양으로 보복하라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당한 것의 배로 갚아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볼팬으로 내 눈을 찔렸다. 그러면 내 눈이 찔린 상태에서 공격을 먼저 당한 사람은 증오심과 복수심이 훨씬 크기 때문에 두 번은 찔러야 그 마음이 풀리거든요. 그런데 한 번만 찌르라니까 보복을 최소한 하라는 것 아닙니까? 이 동해동량보복 법칙은 인도주의적인 보복억제법이이기 때문에 결코 잔인한 법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동해동량보복 법칙도 인도주의적인 법인데 도피성은 한 걸음 더 나아 동해동량보복까지도 행하지 말라고 하니 더욱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복을 억제하고 부지중에 살해한 자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생명존중의 성품이 이 법에 깔려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두 가지 제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레위인들을 위한 거주지와 목초지 제공과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두가지 법에는 모두 하나님의 인도적인 자비가 녹아 있습니다. 사역자들의 생계를 걱정하시며 그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배려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주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복을 빌어주길 원합니다. 또한 원수 갚는 마음과 되갚아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억누르시고 원수를 축복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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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9. 28. 05:52

<창세기 46장 1-5절 / 나 여기있어! 걱정마!> - 염산국제교회(나그네 공동체 주일예배)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새로운 곳을 가기 전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익숙한 것들을 떠나야한다는 것은 큰 두려움입니다. 제가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니다 고등학교를 도시로 갔습니다. 3월에 학교가 시작하는데 3월 한 달 동안 자취방에서 울었습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새로운 환경이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한국 땅을 처음 밟을 때 저와 비슷한 감정을 가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에 강호와 함께 한 중국인이 직장을 얻도록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막 중국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한 사람이었고 안마를 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안마샵에서 일하고 싶어서 서울에 온 것이었습니다. 한국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강호가 너무 큰 역할을 해 주어 그가 목동의 한 샵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거기에 놔두고 우리끼리 오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더군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그의 삶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야곱은 초조하게 아들들이 곡식을 사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들들이 도착했는데 요셉을 만났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야곱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요셉이 그를 이집트로 와서 살기 원한다고 했답니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이민을 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너다섯 명도 아니고 70명이나 한꺼번에 이민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그것도 수십 년 정든 고향 땅을 버리고 가는 것이 쉽겠어요? 야곱은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야곱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 야곱에게 비전(이상)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에게 자손을 주어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 두 가지를 약속하시죠.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새롭게 한국에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니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고 지켜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뭔가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곳 또는 새로운 직장으로 가야할 분이 있는지 모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같이 내려갔다가 같이 다시 돌아와주겠다 약속하십니다.

어린 시절에 화장실이 집 바깥에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에 화장실을 갈 때 항상 누나가 같이 가주었습니다. 캄캄한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칩니다. “누나 거기 있어?” 그러면 누나가 말합니다. “응 있어 걱정마~”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나 여기 있어~ 걱정말고 두려워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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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4. 9. 25. 14:01

<새벽예배 설교문>
출애굽기 21장 1-11절 / 면제년 법, 레디컬한 하나님??

창세기 20장 후반부부터 23장까지의 내용을 일컬어 계약 법전이라고 합니다. 시내산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법전이라 하여 계약 법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계약법전은 십계명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시행세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각 계명에 해당하는 각론으로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조항들이 나열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1-11절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안식일 계명의 각론적인 적용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족인 히브리 노예의 인권과 생존권을 세심하게 배려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법을 ‘면제년 법’이라고도 하는데요. 면제년법은 매우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 소유를 정당하게 하는 법인데 뭐가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법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율법에서 히브리 동족 간에 노예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파격적이라면 노예를 갖지 말게 하라고 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시의 동족인 히브리인을 노예로 쓸 수 있게 합니다. 단 7년에 한 번 그들의 노예 신분을 면제 해주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왜 그 당시에는 노예 제도를 허용하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에는 이 새벽의 몽롱한 상태에서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신적 적응(divine accommod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의 수준에 따라 적응하며 맞춰 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최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최선에 맞추기 힘든 상태입니다. 인간이 그 최선의 상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들의 도덕적인 수준과 문화적인 수준의 발달 정도에 따라 자신의 눈높이를 낮춘다는 거죠. 지금의 문명 단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전쟁으로 남녀 비율이 1대 5정도 됩니다. 여자들이 남아 도는 것이죠. 일부일처제가 되면 다섯 명 중 네 명의 여자는 남편을 못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 수준을 낮추어 제시하는 최선의 단계였던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그 당시에 노예제도를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노예제도 자체의 야만성을 교육시키기에는 인간의 도덕감이 너무 낙후되었고 당시의 모든 문화에서 노예제도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율법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이해가 되시죠. 그렇다면 왜 이 면제년 법이 파격적인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면제년 법의 핵심은 히브리 형제 자매들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었더라도 7년째 되는 날에는 그들을 다시 자유민의 신분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쉽지 노예는 사유재산인데 이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만원짜리 한 장 포기하기 힘든 것이 우리네 욕심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포기하라구요. 그것도 6년만 써먹고 자유민으로 만든다구요? 미쳤습니까? 얼마에 산건데 공짜로 풀어줍니까? 정말 미친 사람 아니고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랍니다. 하나님이 미치신 거지요. 그러기에 이 법은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이 면제년 법은 히브리 백성들의 욕심 때문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에 맞게 다시 율법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나온 법이 레위기 희년법입니다. 7년마다 안되니까 7년을 7번 지난 50년에 한 번씩이라도 노예를 자유민으로 풀어주라는 것이지요. 이 희년법도 너무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제도이기에 지켜지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광종 때 노비 안검법이란 법을 만들었습니다. 노비들에게 자유인의 신분을 허락하기 위해서죠. 원래의 의도는 귀족들을 견재하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에 귀족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합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 성종 때 노비 환천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방면했던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불러들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풀려났던 노비를 다시 노비화 한 것이죠. 노비안검법은 정말 수준 높은 법이었지만 그 법을 시행하기에는 백성의 수준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지요. 또한 귀족들의 욕심은 그들을 그냥 놔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7년마다 노예를 자유민이 되게 했을까요? 노예가 자유민이 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비를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빈부격차와 신분이 세습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버지가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남의 땅에 빌붙어 소작을 하더라도 아들은 자작농으로 자기 땅을 경작하게 만들라는 것이 하나님이 이 면제년 법을 만든 깊은 뜻이며 가장 큰 목적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두번째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자유농민이 모자라면 국방의 기초 단위가 모자라게 됩니다. 노비는 절대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킬 땅이 있는 자유농민이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노비는 지킬 땅이 없으니 전쟁에 나가 봐야 싸울 뜻이 없고 오히려 도망갈 기회만 제공하기에 전쟁에 별 도움이 안됩니다. 노비가 줄고 자유 농민이 많아지면 국방 의무의 단위가 많아지는 겁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땅이 없고 전쟁에 못나가는 노예와 애만 낳는 사람을 프로레탈리야라고 불렀습니다. 국방의 기본 단위도 안되는 하층민들을 프로레탈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면제년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자비와 사랑이 넘치고 더 튼튼한 나라로 서가길 바라셨던 겁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보며 하나님은 이 면제년 법의 정신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우리네 형제와 자매 이웃들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시며 말씀하고 계시다 믿습니다. 빈부 격차가 세습되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가난이 되물림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가난한 형제들의 생존권이 침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자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법들이 만들어져서는 안됩니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스템과 법들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국회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때문에 민생법안들이 통과 되지 못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법들 안에는 특정집단의 경제적 이윤 극대화를 위해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파괴하는 법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법들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 영리화가 우려되는 법입니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위한 주택법도 건축회사들의 이익을 챙겨주는 법이죠. 유치원 초중고 근처에도 관광 호텔을 지을 수 있게하는 관광진흥법은 도덕도 무시한 체 특정집단을 배불려 주기 위한 법입니다. 농업협동조합법 같은 경우에도 세제 등 각종 혜택으로 5조원 이상 혜택을 받고 있으나 공익을 위해 하는 일은 별로 없는 농협이 자기 자본 초과 출자를 가능케 해 리스크를 키우는 법안입니다. 이런 법들은 가난한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법인대도 중점처리 법안이라고 무조건 통과시키라고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 나라가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율법정신을 회복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이웃과 형제들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면제년 법을 통해 드러내시는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살리는 교회와 기독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2. 1. 20:58

지난 주 금요기도회 설교문입니다.
아래 설교영상 링크도 걸어놨는데 10분부터 설교가 시작됩니다.
(앞부분은 성경봉독과 전도보고영상이 있어서요)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제목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휴식같은 친구)


1.

저 어린 시절 “휴식 같은 친구”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김민우가 불렀나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생전에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주 5일제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도 일한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판단을 받으셔야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요즘에는 한류라는 말이 있죠. Korean wave 그러니까 한국 열풍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류(主流)라고 있었습니다. ‘주님~주여~ 주여~ 외치며 예수님을 쫒아 다니는 고정팬들이 있었죠. 예수님도 못지 않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병자들 무리가 있었고, 여인들이 있었고,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예수 예수 외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어디에 나타나신다더라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은 마치 예수님의 경호원이라도 되듯이 그들의 스승을 자랑스러워 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질서잡기에 분주하였습니다. “거기 줄 서세요~ 어이 거기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 예수님 옷을 그렇게 잡아 당기면 안되지~ 벗겨지기라도 하면 어쩔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유일한 휴식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시간을 이용해 기도하셨고 아버지와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쉴 시간이 없이 바쁘셨고 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저희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과 영성훈련 시간을 가질 때 담임목사님께서 각자 책 읽을 시간을 정해서 말해 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모두 몇 시 몇 시 정확한 시간을 말했는데 제 아내는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시간”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유일한 자유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입니다. 엄마들 공감하시죠.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나만의 휴식의 시간. 모두 잠든 후… 그래서 그런 노래도 나왔나 봅니다. 모두 잠든 후에 사랑할거야~

어찌 그 고단함이 엄마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 땅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세대의 사람들은 30대 유부남들이 아닐까 합니다. 직장에서 가장 분주하게 뛰어다닐 나이고 신입사원들과 간부들 중간에 끼어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빛내고 결혼하여 집을 장만할 때 얻게 된 가계대출을 갚느라 허리가 휘어질 정도입니다. 게다가 결혼하고 10년이 안됐기에 자녀 양육에 손이 많이 가는 시기입니다. 직장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가면 자식새끼들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책읽어 달라 무등 태워달라, 말태워 달라, 번개 파워 할 테니 쓰러져달라 별의 별 요구를 다 합니다. 정말 30대 직장남들의 삶은 쉴 새가 없습니다. 물론 저를 꼬집어 얘기를 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니래두요^^ 생각해보니 공생애를 지내신 예수님도 30대 남자셨네요. 그 고단함을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30대로서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시던 주님께 휴식 같은 친구가 있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을까요? 잠시 후에 공개됩니다.

2.

예수님의 엄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했는데 불안한 마음을 쫒을 수가 없었습니다. 약혼남 요셉이라는 청년은 잠잠히 그녀와 혼인서약을 파기하려고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의 슬픔은 더했습니다. 누군가의 지지가 필요했고 좌불안석 불안한 마음에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로 마리아는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먼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엘리사벳 만큼은 그녀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처지였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휴식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이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 6개월 된 아가 요한이 세차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길질은 일종의 시위였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몸은 먼 여행길로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마음은 불안하고 확신이 필요한 마리아를 향한 격한 아우성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그것을 감지했고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마리아~ 당신은 정말 복된 여자군요. 그리고 당신의 뱃속에 자라난 아기 또한 너무나 복된 아기예요. 당신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우리의 주인이 될 거예요. 힘내세요. 제 뱃속에 발길질 하며 뛰노는 아기를 느끼시죠? 이 아기도 당신을 지지하고 있잖아요.” 마리아는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는 6개월 된 아기 요한의 발길질을 심상찮게 봅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향한 지지이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친구 예수를 향한 격한 감격과 흥분이었습니다. 예수께 경배한 최초의 사람을 우리는 베들레헴의 목동들로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의 뱃 속의 아기 요셉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한 최초의 경배자였고 지지자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친구로서 지지자로서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예비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잉태의 순간부터 둘의 우정은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친구 한 명 있으신가요? 예수님께 휴식이 되어준 참 친구 세례 요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오늘 날로 치면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씀을 통해 비전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40장 3~5절과 그의 마음이 감동되어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년 부 수련회 때 회당에서 전도사님이 외치셨던 이사야 40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이 말씀을 들은 소년 요한은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 말씀에 투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비전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 주님이 가실 그 길을 미리 걸어보는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 그는 광야에서 이미 예수님이 사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미리 지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매우 단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4-5)” 낙타털 옷 생각만해도 거칠겠다는 것이 예상되지 않습니까? 큰 소리로 발성을 내기 위해 낙타털 옷 위에 가죽 띠를 찼던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단백질 공급을 위해 고기 대신 메뚜기를 잡아 먹었고 비타민과 당분 섭치를 위해 야생꿀을 따 먹었습니다. 고작 그것 입고, 고작 그것 먹고 살아갔던 겁니다. 너무나 단순한 삶이었죠. 단순했지만 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 또한 간단명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는 일반 평민뿐만 아니라 세리들 심지어 군인들에게까지 회개를 촉구하며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시대를 밝히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지요. 그의 예언의 대상은 군인에게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히 왕에게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헤롯 왕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결혼한 사건이 있은 후 세례요한은 헤롯을 비난하며 꾸짖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4.

오늘 본문의 말씀 11장은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옥에 갇힌 때 있었던 일이라 설명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냐면요. 요한이 하직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때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들려고 자신의 온 삶을 다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고단했습니다. 광야의 삶, 광야의 소리,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리와 늑대, 전갈과 독사의 위협도 있었지만 헤롯과 같은 권력자들의 위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30여년 그렇게 험난한 예언자의 삶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합니다.

2절 3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과 비전으로 똘똘 뭉친 요한의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의심하여 던진 질문이라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인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당신의 길을 예비하려고 분투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한 일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하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자신의 삶의 최후 순간을 준비하면서 요한은 자신이 잘 살아 온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의구심이라기보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의 의미였고 목적이었던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저는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밟고 가시도록 기꺼이 나의 길을 내어 드렸습니다. 주님 당신이 나를 사뿐이 즈려밟고 가길 바랐습니다. 부디 주님이 나의 길을 통해 순탄한 길을 가길 바랐던 것이지요. 나의 사역과 외침을 통해 주님 당신만이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이었던 주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잘 살아온 것입니까? 오실 그이가 정녕 당신이십니까?”

우리 중에 참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때론 바보처럼 느껴지고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충분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때론 18절 말씀처럼 귀신들린 거 아니야? 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제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 아주 어렸을 적에 저희 큰 누나가 교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하자, 예수 귀신에 미쳤다고 누나를 막 나무랐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 잘 믿었고 섬겨며 따랐더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신 들린 거 아니냐? 바보 아니냐 손가락질 당하고, 죽음의 위협까지 느껴하는 삶이라니… 얼마나 그 삶이 지치고 고단했을까요? 여러분 중에도 분명 그런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좁은 길 걸어가고 있는데 삶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마저 느끼며 어느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인 것이지요. 이 무거운 짐은 죄짐이라기 보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십자가였던 것이죠. 

5. 

요한의 말년의 삶은 그랬습니다. 그의 수고의 짐은 극에 달해 있었고, 너무 외로웠고, 고단했으며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느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겁니다. 주님의 최고의 평가입니다. 

“요한 니가 가장 큰 자야~ 너는 나를 위해 니 모든 삶을 다 받쳤잖아. 너는 나를 위해 너의 삶을 소진했다.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고, 나를 부인하고 나만 흥하기를 바랐다는 걸 안다. 너는 반드시 천국에서 큰 기쁨을 누릴거야. 지못미.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는 나에게 휴식 같은 친구로 남아 있구나~ 나 한 번도 말은 안했지만 너 혹시 알고 있니? 너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걸? 이제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려라. 니가 졌던 십자가 이제 내가 지고 가련다. 먼저 아버지집에 가서 참 안식을 누리거라. 내 곧 너를 뒤따라 가 너를 볼 것이다. 참으로 고맙구나 요한!!” 

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기본적으로 세례요한을 향하여 던지는 주님의 메시지라고 판단합니다. 휴식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할만큼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한 죽음 앞에 선 세례요한을 향한 주님의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바로 세례 요한과 같은 이들입니다. 영적거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수고한 예수에 미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영적 거인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쉼의 자리 안식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수고했다고 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위해 분투하며 누적하여 왔던 모든 피로를 덜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삶 가운데 있었던 유일한 ‘휴식 같은 친구였습니다.’ 주님의 삶을 기뻐해줬던 소파보다 더 부드러웠던 쉼터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께 이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이 되어주는 삶 말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니 나를 밟고 올라 서십시오 라고 외치는 삶입니다. 진리를 위해 삶을 드리고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참 위로를 누리십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하며 지지해 주십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다 소진하고 분투하며 달려온 고단한 삶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십니다. 주님이 이제 그들의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11장의 마지막 세 절의 말씀은 꾸준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고단한 영적 거인들을 향해 던지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인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말씀 아닐까요? 내가 너의 휴식 같은 친구이니 나에게로 와서 쉬어라!! 고단한 예언자 요한을 향해 던지신 마지막 위로의 말이 이제 우리 심령에 울려 퍼집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18-20절을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http://youtu.be/cyf28VZUhdQ 

Posted by speramus